반야심경 강의 8.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공한 가운데는 지혜도 없으며 지혜를 실천함으로써 주어지는
공덕의 얻음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원래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해설) 이 부분을 다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도 없으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실천으로 주어지는
육바라밀의 공덕의 얻음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원래 공이므로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베품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베품의 뿌리는 행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실하게 느끼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적수선사를 있게 한 적수선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자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에서도
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적수선사의 스승이 어린 적수에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물통에 물을 채워 놓으라고 하였다.
어린 적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물을 길어 물통에 갖다 부었다.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여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길어온 양동이의 물이 반쯤 남았다.
적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남은 물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법당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부처가 되겠다고 먹물 옷 입고 수행하는 녀석이
그렇게 행위를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하느냐?
살생하지 말라하는 뜻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생명을 살려라 하는 뜻이다.
그래. 지금 너의 행동을 한번 살펴보아라.
남아 있는 물을 바닥에 쏟음으로서 너는 물을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덥고 가문 날 그 물을 저기 있는 나무에 주었다면
너는 물도 살리고 나무도 살렸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수행하실 때 바른 말 한 귀 절을 듣기 위하여
몸을 던지기도 했다.
부처님의 전생 호명이란 이름으로 히말라야산에서 홀로 정진하며
수행하고 있는데 제석천왕이 나찰로 변하여
부처님의 수행력을 시험하였다. 나찰은 수행자의 반대편
나무 위에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아서(諸行無常)
끝없이 났다가 없어지나니(是生滅法)
이 소리를 듣고 수행자의 가슴은 환희로움으로 가득차 버렸다.
누가 이 법을 말하는가?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험상 굳게 생긴 나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수행자는 나찰에게 게송의 나머지 반을 마저 읊어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나찰은 몸을 던져 보시한다면 나머지 반을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게송의 뒷 부분을 읊었다.
나고 없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生滅滅已)
진리의 바다 고요하여 즐거우리라.(寂滅爲樂)
수행자는 이 소리를 듣고 조용히 합장하며 자신의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지자 그 곳에서 깨달음의 꽃이 피어났다.
베품은 입으로 하는 예배가 아니다.
베품은 말과 마음과 행동이 하나 된 자기 봉사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베품에는 내가 없으며,
베품을 받는 상대도 없으며, 베풀어지는 물질이나 정신도 없다.
이 때는 베품이 이미 베품이 아니다. 그러므로 베품이 공하다는 것이다.
진지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라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결과에 대해 집착하는 바가 없이
순수한 동기와 올바른 수단을 취하는 것이 바른 베품인 것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동물이나 고기와 같은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도 살생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던져버리고
도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살생이듯이
궁극적이고 진정한 베품은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려
자신에 대한 베품이 행해질 때 진정한 베품이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베품(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이 이루어질 때 육바라밀의 실천과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주어지는 공덕도 공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보시라 하며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빛의 경계를 떠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저절로 보시가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을 잘 지키는 것을 지계라 이름하며
귀의 도적을 막으면 소리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므로
스스로 구속 속에 있으나 구속에서 자유로운 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인욕이라 이름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향기로운 좋은 냄새와 악취가 나는 나쁜 냄새에 균등하여
자유롭게 길들여지므로 저절로 인욕이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을 정진이라 하며
혀의 도적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읊고 강설하되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저절로 정진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을 선정이라 이름하며
몸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모든 애욕에 초연하여 요동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므로 항상 선정 속에 머물게 된다.
생명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을 지혜라 이름하며
뜻의 도적을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생각이 깨어 있어
행하는 모든 행위가 법에 맞으며, 모든 공덕을 즐겨 닦으므로
지혜의 빛이 항상 밝게 빛날 뿐이다.
이 여섯 가지 중에서 단 한가지의 실천이 부족하더라도
“지혜의 완성”으로 성취되는 깨달음과는 십 만 리나 멀어짐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