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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조직] 태국 국내보안작전사령부
Internal Security Operations Command : ISOC
(사진) ISOC의 로고(부대마크). 태국어 로고(좌)와 영문 로고(우). |
'국내보안작전사령부'(Internal Security Operations Command: ISOC, [태] 껑안누워이깐 락사쾀만콘파이나이[กองอำนวยการรักษาความมั่นคงภายใน]: [약호] กอ.รมน.) 국내 치안을 전담하는 태국의 군사조직(군 부대)이다. ISOC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좌익 세력을 진압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러한 작전 과정에서 사회 운동가들과 민간인들에 대한 수많은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최근의 ISOC는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에 대한 암살기도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사진: News Chaopraya) 태국 남부에서 작전중인 ISOC 소속 특수부대의 모습.
'2006년 쿠테타'를 통해 탁신 총리가 실각한 이후, 군사정권은 ISOC에 대해 '국가 반부패 위원회'(National Counter Corruption Committee: NCCC), '[법무부 산하] 특수수사국'(Department of Special Investigation: DSI), '자금세탁 방지국'(Anti-Money Laundering Office) 등 다양한 정부 당국들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정부 내의 정부"로 변모시켰다. 군사정권은 또한 ISOC에 대해 각 지방별 '1땀본 1품목'(OTOP)(역주1) 사업 생산품의 판촉활동 지원 임무도 맡겼다.(주1)
군사정권은 2007년 6월에 <국가보안법> 초안을 승인했는데, 이 법률은 ISOC가 국가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위협들"을 일괄해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ISOC의 재편은 '미국 국토안보부'(U.S.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DHS)(역주2)를 모델로 한 것으로서, ISOC에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그 사령관으로 하여금 총리의 사전 승인없이도 조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수단들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주2) 하지만 ISOC는 외형적인 편제상으로는 '총리실'(Office of the Prime Minister: 내각관방)의 감독을 받는 산하 기구로 되어 있다.
2007년 6월 당시엔, 왕립 태국육군'(RTA) 사령관이자 2006년 9월 19일 쿠테타의 외형적 지도자였던 손티 분냐랏끌린(Sonthi Boonyaratglin) 대장이 ISOC 사령관을 겸직했다.
(역주1) 2001~2006년 사이 탁신 친나왓 총리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으로서, "1개 면(땀본) 단위마다 1가지의 특산물"(One Tambon One Product: OTOP)을 생산해낸다는 취지를 가진 농촌경제 부흥사업이다.
(주1) Bangkok Post, "CNS advises extended term for AEC", 2007-2-14.
(주2) Bangkok Post, "Cabinet approves security bill", 2007-6-20.
(역주2) 미국의 '국토안보부'(DHS)는 '911사태' 이후에 신설된 부처로서, 미 본토 내의 군사 안보와 대-테러 작전, 그리고 자연재난 대응과 인재(人災)에 의한 사고 등을 총괄하는 안보 당국이다. '국토안보부'의 설치로 인해 미국 '국방부'(DoD, 펜타곤)는 해외에서의 군사 작전만 전담하는 것으로 규정되며, '국토안보부'는 그 활동의 성격 상 민, 관, 군을 포괄하는 활동과 인적 자원을 활용한다. |
1. ISOC의 전신 : 공산반군 토벌작전 사령부 (CSOC)
'공산반군 토벌작전 사령부'(Communist Suppression Operations command: CSOC)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66년에 창설됐고, 전국적인 공산주의자 진압작전을 그 목적으로 했다.(주3)(주4)
1971년 11월 17일 군부독재자였던 타넘 낏띠카쫀(Thanom Kittikachorn)과 쁘라팟 짜루사티얀(Prapas Charusathian, ประภาส จารุเสถียร)이 쿠테타를 일으킨 후, 쁘라팟이 내무부장관과 경찰청장, 그리고 CSOC 사령관을 겸직했다.
CSOC는 1970년대에 좌익 세력과 전투를 벌이면서 여러 차례 만행사건을 저지르는 데 연루되기도 했다. 그러한 만행 중에는 태국 남부 지역의 정치 운동가들을 끓는 기름을 담은 드럼통에 집어넣어 죽인 사건도 포함된다.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티라윳 분미(Thirayut Boonmee, ธีรยุทธ บุญมี)(역주3)는 태국 북동부 지방에 위치한 반 나사이(Ban Na Sai) 마을의 파괴활동이 CSOC의 소행이라는 증거들을 제시하기도 했다.(주5) 하지만 당시 군부는 '태국 공산당'(CPT)이 이 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타넘과 쁘라팟의 정권이 붕괴한 후, CSOC는 ISOC로 재편됐다.
(주3) Lee, Terrence C., "The Causes of Military Insubordination: Explaining Military Organizational Behavior in Thailand", Paper presented at the 46th Annual Meeting of the 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in Honolulu, Hawaii, March 2005. [원문보기]
(주4) Murray, Charles, "The domino that didn't fall", The Atlantic, November 1984. Vol.254, p.34(8).
(역주3) 티라윳 분미는 1973년 당시 '쭐라롱꼰 대학' 학생으로, 학생운동 단체인 '태국 민족학생센터'(National Student Center of Thailand: NSCT) 의장을 맡고 있었다. 이 단체는 타넘과 쁘라팟의 군사독재에 저항할 목적으로 결성됐지만, 그 첫번째 활동은 열흘 동안 펼쳐진 일본제품 불매 및 일본 투자 거부운동이었다. 1973년 10월 6일, 티라윳은 다른 12명의 학생들과 함께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전단을 부린 혐의로 체포됐다. 곧이어 이들이 살해됐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고, 10월13일에는 '민주기념탑' 주변에 40만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날 오후 티라윳을 비롯한 13명의 학생들이 석방됐고, 푸미폰 국왕은 1년 이내에 새로운 헌법안을 기초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후 티라윳은 CSOC의 반 나사이 마을 파괴 실상을 폭로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76년 10월 6일, '탐마삿 대학'의 학살사건이 발생한 후, 티라윳은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정글로 들어가 '태국 공산당'의 반군에 합류했다. 그 기간 중 그는 군주제에 대한 반대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1980년대의 화합정책을 통해 '태국 공산당'이 자진 해산하자, 티라윳도 방콕으로 돌아왔고, 사회주의 신념을 포기하면서 태국의 지성계로 복귀했다. 그는 현재 '탐마삿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있고, 1997년에는 태국에서 가장 지적 영향력을 지닌 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5) Anderson, Benedict. "Murder and Progress in Modern Siam". |
2. 1970년대의 작전들
ISOC는 좌익세력 척결을 목표으로, 도시와 농촌에서 선전전 및 폭력을 동반하는 작전을 펼쳤다.(주6) 1973년, ISOC는 태국 북부지방에 거주하는 산안부족들에 대해 공습(폭격) 작전을 개시했다. 장차 총리가 될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은 당시 ISOC의 고위 간부로 있었다.
1980년대 초 태국 공산당이 붕괴하면서 ISOC의 역할은 감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SOC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끅릿 쁘라못(Kukrit Pramoj) 총리가 ISOC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세뇌당했다고 주장하자, 1987년 4월 1일에 200명 이상의 육군 수색대원들이 총리 공관을 공격하기도 했다.(주7)
3. 탁신 친나왓 암살 음모
2006년 8월 말경에 ISOC 부사령관이었던 판롭 삔마니(Pallop Pinmanee) 장군의 운전수인 타왓차이 끌린짜나(Thawatchai Klinchana) 대위가 탁신 총리 관저 주변에서 운전하던 차량 안에서 67 킬로그램의 폭발물이 발견됐다. 판롭 부사령관은 그 직후 보직해임됐다. 판롭 장군은 "내가 만일 그 일의 배후라면, 실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관련설을 모두 부인했다.(주8)(주9)
수도권 광역경찰청장인 위롯 짠타랑시(Wiroj Jantharangsee) 경찰 중장은 차량에서 발견된 폭탄이 조립된 채로 리모콘 장치까지 갖춘 상태였다면서, 만일 폭발했을 경우 반경 1 km 이내가 날아갔을 것이라고 말했다.(주10)
(주8) The Nation, 'If I was behind it, PM would be dead', 2006-8-25.
(주9) The Nation, "Army officer arrested in alleged car bomb attempt is Pallop's driver: police", 2006-8-25.
(주10) The Nation, 'Bomb plot to kill Thaksin foiled', questions linger, 2006-8-25. |
4. 2006년 쿠테타 이후의 ISOC
탁신은 2006년 9월의 쿠테타로 실각하기 직전, ISOC에 대한 주요한 재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쿠테타가 성공하자, 군사정권 지도부는 탁신 암살시도 폭탄사건 미수 용의자들인 3명의 장교들을 석방했다.(주11)
군사정부 지도자인 손티 분냐랏끌린 육군사령관은 스스로 ISOC 사령관을 겸직했다. 그 이전까지 ISOC는 총리의 직속기관이었다. 이후 ISOC는 미국 국토안보부를 모델로 하여 재편됐고, "정부 속의 정부" 기능을 했다. ISOC는 '국가 반부패 위원회'(National Counter Corruption Committee: NCCC), '[법무부 산하] 특수수사국'(Department of Special Investigation: DSI), '자금세탁 방지국'(Anti-Money Laundering Office) 등 다양한 정부 당국들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폭넓게 부여받았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ISOC는 기존의 당국들을 조종하는 '그림자 인형극'(낭 딸룽)의 조종자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답변하지 않고 오직 그 지도자에게만 응답한다는 비판을 받았다.(주12)
ISOC는 '태국 남부 무슬림 반군 관련 폭력사태'로부터 해당 지역에서는 소수민족에 속하는 불교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짜뚜캄 람마텝'(Jatukham Rammathep)이란 '호신용 부적'을 발행해서 배포하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유명한 부적이 그것의 소지자를 폭력에서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고, 그 덕분에 이 부적은 대량으로 팔려나갔다. 이 부적 판매 계획을 입안한 사람은 ISOC의 얄라(Yala) 도 지역 부지휘관이었던 마낫 콩판(Manas Khongpan) 대령이었다.(주13)
당시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과도총리의 내각은 ISOC 요원들에게 8,430만 바트의 "상여금"을 지급했다. ISOC는 원래 2003년에 이 상여금 지급을 요청했지만, 탁신 정부 하에서는 이 요청이 기각당한 바 있다.(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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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 중앙정보부랑 딱 매치가 되네요. ㅠㅠ
그렇죠... 초창기에는
공비토벌대 + 중앙정보부 를 합친 성격인데....
요즘의 한국 상황으로 보면
기무사 + 국정원(국내 파트만) + 수방사 규모의 군단급 정규 전투부대를 위한 지휘부...
이걸 다 합쳐야만 가능한 수준으로 보이네요..
여기를 장악하지 못하면
군부를 장악할 수 없는 구조로 보이는데...
역사상으로 보면
태국 군부가 언제나 이 조직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죠,..
그러니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과 별도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권력기관인 셈이네요..
조직문화 역시 좀 저질인듯 한데..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공안조직 유사한,,, 그런거네요..
인권탄압으로 악명이 높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