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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반 코이[Lê Văn Khôi] 0 ~ 1834
레 반 코이(Lê Văn Khôi)는 응웬(Nguyễn) 왕조 민망 황제 재위 기간에 피엔 안(Phiên An-현 호찌민시)에서 레 반 코이(Lê Văn Khôi) 난을 일으킨 장본인 이다. 레 반 코이(Lê Văn Khôi)는 까오 방 지방의 토호로 원래 성씨는 베(Bế)씨였으나 응웬(Nguyễn)씨로 또한 레 반 주엣(Lê Văn Duyệt)이 피엔 안(Phiên An) 총진으로 있을 때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레(Lê)씨로 바뀌어 레 반 코이(Lê Văn Khôi)가 되었다. 황제와의 알력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던 1832년 레 반 주엣(Lê Văn Duyệt)이 사망하고 자신은 옥에 갇히게 되자 외부의 관군과 연락 옥을 부수고 탈출 지아 딘(Gia Dịnh)성을 탈취하고 총독 응웬 반 꿰(Nguyễn Văn Quế)와 부장 바익 쑤원(Bạch Xuân)을 처형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1832년 6월). 난를 일으키고 자신을 평남대원수(Bình Nam Đại Nguyên Soái)로 칭하였으며 2년 가까이 지속된 난은 내부 배반자로 인하여 소강 상태로 유지되다 레 반 코이(Lê Văn Khôi)가 병을 얻어 죽자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이 난은1835년 7월 평정되었으나, 1831명이 이 난에 연루되어 잡혀 죽었으며 모두 한 곳에 매장하여 사람들은 이 무덤을 마 응위(Mả Mgụy)라고 부르며 현 호찌민시 서쪽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부이 꽝 찌에우[Bùi Quang Chiêu] 1873 ~ 1945
부이 꽝 찌에우(Bùi Quang Chiêu)는 사이공에서 공부후 프랑스로가서 영농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쩌우 독(Châu Đốc), 떤 쩌우(Tân Châu)에서 양잠 및 농정국에서 근무하였다. 그후 정치 활동을 시작 인도차이나 입헌당을 창당하였는데, 이는 베트남 남부 자본가 지주 계급 중심의 당이었다. 프랑스 식민 정부에 협력하고 독립 및 혁명 운동을 탄압에 앞장선 죄목으로 인민들에 의해 1945년 9월 29일 호찌민시 쩌 뎀(Chợ Đệm)에서 처형되었다.
주이 떤[Duy Tân] 1900 ~ 1945
주이 떤(Duy Tân)은 응웬(Nguyễn) 왕조 11대 임금이다. 본명은 응웬 푹 빈 산(Nguyễn Phúc Vĩnh San)으로 1900.9.19일에 출생하였다. 10대 임금인 타인 타이(Thành Thái)의 8번째 자식으로 왕위에 올라 연호를 주이 떤(Duy Tân)이라 하니 모두 주이 떤(Duy Tân)이라 부른다. 부왕이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프랑스로 교육차 모셔가니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주위의 애국 지사들의 노력에 의하여 점점 국권을 빼앗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에, 비밀리에 쩐 까오 번(Trần Cao Vân), 타이 피엔(Thái Phiên)등과 연락 1916년 독립운동을 주도케하였으나, 독립의거는 실패하고 1916년 5월 6일 주이 떤(Duy Tân) 임금은 붙잡혀 1916년 11월 3일 까지 동남아프리카 Réunion 섬에 유배된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1936-1945)중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키 위하여 연합국군대에 입대하였으나, 1945년 12월 26일 북부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사고로 45세의 일기로 서거한 비운의 왕이다. 1987년 4월 2일에서야 유골을 Réunion 섬에서 모셔다 후에(Huế) 부친의 능 옆에 안장하였다. 왕으로 대프랑스 독립운동을 주도한 분이다.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 1860 ~ 1887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빈 딘(Bình Định)에서 1885-1887년에 일어난 근왕 운동의 선봉장이었다. 아바지 마이 쑤언 띤(Mai Xuân Tín)은 까오 방(Cao Bằng)성의 관리였으나 일찍 사망하여 어머니를 따라 빈 딘(Bình Định)성, 빈 탄(Bình Thành)면, 푸 락(Phú Lạc) 마을에서 살았다. 성장하면서 뚜 레 중(Tú Lê Dung) 학교에 들어가 문무를 익혔다. 1885년 황도 후에(Huế)가 프랑스 군에 넘어가고 함 응이(Hàm Nghi)황제가 축출되자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은 의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빈 딘(Bình Định)성에는 다오 조안 딕(Đào Doãn Địch)이 대프랑스 항쟁의 군권을 잡고 있었는 데, 중병이 들어 죽자,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이 원수의 자리에 올라 군을 지휘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프랑스 군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남으로 부터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저항이 완강하여 피아간에 출혈이 심하였다. 이에 토벌군의 대장 쩐 바 록(Trần Bá Lộc)은 간계로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을 잡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와 고향의 유력 주민을 함께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은 어머니와 이웃 사람들의 고초를 생각하여 쩐 바 록(Trần Bá Lộc) 앞에 자진하여 출두하여 체포되었고, 빈 딘(Bình Định)으로 끌려와 1887년 4월 보름에 사형을 당하니, 그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쩐 바 록[Trần Bá Lộc] 1839 ~ 1899
쩐 바 록(Trần Bá Lộc)은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 경영을 진행할 당시 프랑스의 앞잡이로 베트남의 우국 지사, 의병들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고 주모자를 색출 처형한 대표적인 반역자이다. 특히 탑 므어이, 빈 롱, 사 덱, 짜 빈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탄압하여 프랑스로 부터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868년에는 독 푸 스(Đốc Phu Sư)라는 군의 높은 지위에 까지 승진하였다. 1883년에는 군을 이끌로 빈 투언, 카인 호아 지방의 의병을 격파하여, 빈 투언-카인 호아 총독을 역임하였다. 중부에서 의병장 마이 쑤언 트엉(Mai Xuân Thưởng), 남부에서는 투 콰 후언(Thủ Khoa Huân)을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후에 조정, 심지어 캄보디아로 부터도 많은 상금을 받고 영화를 누리었다. 아들 쩐 바 토(Trần Bá Thọ) 역시 아버지를 따라 민족을 배신하고 프랑스 편에 서서 미 토, 띠엔 지앙 지방의 우국 지시를 색출 체포하여 희생시킨 매국노이다. 쩐 바 록(Trần Bá Lộc)은 1899.10.26일 사망하였는 데, 그가 죽자 원한에 사무친 국민들이 그의 대저택을 불살라 버렸다.
당 득 시에우[Đặng Đức Siêu] 1751 ~ 1810
당 득 시에우(Đặng Đức Siêu)는 응웬(Nguyễn) 왕조 태조인 지아 롱 황제 때의 명신이다.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응웬(Nguyễn)가의 10대 영주 응웬 푹 투언(Nguyễn Phúc Thuận)에 발탁되어 푸 쑤언(Phú Xuân) 한림원에서 근무하였다. 찐(Trịnh) 영주와 떠이 선(Tây Sơn)조에서도 관리로 초빙하였으나 다 거절하였고, 응웬(Nguyễn)왕조 태조인 지아 롱 황제가 나라를 세우기 전, 통일 위업을 이루고자 활동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남으로 내려가 그를 도운 개국 공신이다. 지아 롱 황제가 즉위후 예부 상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1810년 59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1852년 뜨 득(Tự Đức)황제 때 공신 사당에 위패를 모셨다. 당 득 시에우(Đặng Đức Siêu)의 부인은 응웬 티 응으(Nguyễn Thị Ngữ)는 유명한 열녀이다.
팜 반 응이[Phạm Văn Nghị] 1805 ~ 1880
팜 반 응이(Phạm Văn Nghị)는 남 딘(Nam Định)성, 땀 당(Tam Đăng)마을에서 양력 1805년 12월 24일 출생한 애국 지사이다. 그래서 땀 당 팜 반 응이(Tam Đăng Phạm Văn Nghị)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1826년 초시에, 1837년에 진사에, 18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근무하게 된다. 1846년 병을 얻어 귀향하여 학문을 가르치면서 소일하게 되는데, 1857년에는 남 딘(Nam Định) 독학(Đốc học-督學)을 맡는다. 1858년 프랑스군이 다낭(Đà Nẵng)을 침공하자 다낭에서 의병을 모집 프랑스군과 접전을 벌인다. 프랑스군이 다낭(Đà Nẵng)을 철수하자 다시 남 딘(Nam Định)으로 귀향하여 독학(Đốc học-督學)을 맡지만 늘 의병 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1873년 음력 12월 10일과 음력12월 27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프랑스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소망대로 프랑스를 몰아내지는 못하였지만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칠순 잔치에는 많은 조정의 인사들이 축하해 주었다 한다. 1880년 음력 12월 12일 7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현재 고향 땀 당(Tam Đăng)마을에는 그의 사당이 있다.
응웬 티 란[Nguyễn Thị Lan] 0 ~ 1963
응웬 티 란(Nguyễn Thị Lan)은 응웬(Nguyễn)왕조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 Bảo Đại)황제의 정비로, 남 프엉(Nam Phương) 황후라고 부른다. 본명은 응웬 흐우 티 란(Nguyễn Hữu Thị Lan)으로 Mariette Jeanne Nguyễn Hữu Hào와 동일인이다. 응웬 흐우 하오(Nguyễn Hữu Hào)의 딸이자 19세기 사이공 최고 갑부중의 한 사람인 레 팟 닷(Lê Phát Đạt)의 외손녀로 쩌 런(Chợ Lớn)에서 태어 났다. 1932년 바오 다이(Bảo Đại)가 귀국하여 권력을 잡자, 프랑스 식민 정부는 두 사람을 결혼시켜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고 1934년 3월 24일 황도 후에(Huế)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고 응웬 티 란(Nguyễn Thị Lan)은 황후 칙령을 받는데, 당시 이러한 조치는 매우 예외적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 식민 정부는 "4 不" 규정이 있었는데, "4 不" 이란 응웬(Nguyễn) 조정은 제상을 임명하지 못하고, 과거에서 장원 급제자는 뽑지 않으며, 동궁에 태자를 세우지 않으며, 또한 황후를 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 프엉(Nam Phương) 황후는 천주교를 오랜동안 믿어온 신자로 이러한 "4 不"을 개혁하고야 결혼하겠다는 강력한 주장을 하여 프랑스 식민 당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응웬 티 란(Nguyễn Thị Lan)은 바오 다이(Bảo Đại)와 결국 혼인을 하게 되었는 데, 이는 당시 정치 상황과 베트남 국민들의 정서상에 부합하는 변혁이었다. 바오 다이(Bảo Đại)황제는 경박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인 반면, 남 프엉(Nam Phương) 황후는 정치적인 야망도 있고 머리도 총명하였으며 주도 면밀하고 침착한 분으로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1945년 8월 혁명 성공후 바오 다이(Bảo Đại) 황제는 퇴위되었으나 그대로 황도 후에Huế)에 살다가 1949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다 1963년 9월 15일 운명한 비운의 황후이다.
까오 닷[Cao Đạt] 0 ~ 1941
까오 닷(Cao Đạt)은 응웬(Nguyễn) 왕조 함 응이(Hàm Nghi) 왕 시대에 프랑스 식민 통치에 항거한 근왕 운동의 전사이다. 처음에는 판 딘 풍(Phan Đình Phùng) 의병장 휘하에서 전력을 다하여 까오 탕(Cao Thắng)형제와 어깨를 겨루며 용감 무쌍히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하여 의병군이 무력화 되자 프랑스 식민 당국에 항복하고, 오히려 국민과 조국에 배반 행위를 함으로써 국민들로 부터 많은 비난을 받은 인물이다.
어우 즈엉 런[Âu Dương Lân] 0 ~ 1875
어우 즈엉 런(Âu Dương Lân)은 열렬한 항불 독립 투사로 출생년도는 미상이다. 그는 투 콰 훤(Thủ Khoa Huân)과 나란히 프랑스 군대에 매우 위협적인 활동을 하였다. 프랑스의 앞잡이 매국노 쩐 바 록(Trần Bá Lộc)은 어우 즈엉 런(Âu Dương Lân)을 탄압하면서 한편으로는 회유를 누차 시도하였지만 그의 애국심을 꺽을 수는 없었다. 결국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미 토(Mĩ Thọ)강가에서 참수당하였다. 묘는 미 토(Mĩ Thọ)에 있으며, 3층 석물로 높게 조성되어 있다. 호찌민시 8군에는 그를 기리는 도로가 있다.
부이 흐우 응이어[Bùi Hữu Nghĩa] 1807 ~ 1872
부이 흐우 응이어(Bùi Hữu Nghĩa)는 응웬 왕조 초기의 시인이다. 아버지는 부이 흐우 비(Bùi Hữu Vi)로 고기잡는 어부였다. 어려서 비엔 호아(Biên Hòa)로 가서 호장 응웬 반 리(nguiyên Văn Lí) 집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나중에 응웬 반 리(nguiyên Văn Lí) 의 사위가 되었다. 1835년 28세의 나이로 지아 딘(Gia Định)성 지방시에 합격하여 비엔 호아(Biên Hòa)성, 프윽 롱(Phước Long)현 현청에 초도 발령받았다. 그 뒤 짜 빈(Trà Vinh)으로 전보되었는 데, 성격이 강직하여 짜 빈(Trà Vinh)의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상급 관리들과 늘 충돌이 있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되었다. 다행히 부인 응웬 티 똔(Nguyễn Thị Tồn)이 배편으로 황도에 가서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풀려났으나 쩌우 독(Châu Đốc)으로 좌천되었다. 부인은 오는 도중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얼마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며 시를 지으며 고결하게 살아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재덕을 칭송하였다. 그는 많은 시작품을 남겼으며 대프랑스 항쟁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많다. 호찌민시 5군에는 그를 기리는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당 티 뉴[Đặng Thị Nhu] 0 ~ 1909
당 티 뉴(Đặng Thị Nhu)는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 본명은 쯔엉 반 탐(Trương Văn Thám-의 셋째 부인이다. 출생 연도는 미상이며, 사람들은 바 바 껀(Bà Ba Cẩn)으로 불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옌테(Yên Thế)지방에서 살았다. 그래서 옌테(Yên Thế)지방을 무대로 활발한 대 프랑스 무력 항쟁 의병 활동을 벌이던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 장군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당 티 뉴(Đặng Thị Nhu)는 지략이 있어 남편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의 대프랑스 의병 활동을 적극 도왔다. 1909년 2월 1일 딸 호앙 티 테(Hoàng Thị Thế)와 함께 프랑스 군에 포로가 되어 남미로 추방되어 가는 길에 호송병의 허술한 감시를 틈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베트남 구국 열사로 베트남 여성의 귀감이 되는 분이다. 그녀의 남편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은 하이 흥(Hải Hưng) 출생으로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 야욕을 강화하면서 부터 대 프랑스 항쟁 운동을 주도한 베트남의 우국 독립 투사이다. 1889년에는 옌테(Yên Thế) 지방에 대 프랑스 항전 기지를 설치하여 무력 항쟁 운동을 전개 프랑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옌테 지방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은 용병술이 뛰어나고 지략이 출중하여 세력이 강성하였으며, 프랑스는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에게 마을 22개를 주고 그 지역은 절대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면서 회유하려 하였지만 순응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군사력 양성에 주력하다가 1905년 부터는 공개적으로 대 프랑스 무력 항쟁을 재개하였다. 동시에 다른 항쟁 세력과 연계하여 무력 투쟁으로 일관한 의병장이다. 1913년 3월 18일 불행하게도 중국인 친구 르엉 땀 끼(Lương Tam Ký)의 암계에 걸려 취침중에 암살되었으니, 이 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데 탐[Đế Thám] 1858 ~ 1913
데 탐(Đế Thám)은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본명은 쯔엉 반 탐(Trương Văn Thám)-의 별명이다. 출생으로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 야욕을 강화하면서 부터 대 프랑스 항쟁 운동을 주도한 베트남의 우국 독립 투사이다. 1889년에는 옌테(Yên Thế) 지방에 대 프랑스 항전 기지를 설치 무력 항쟁 운동을 전개 프랑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옌테 지방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은 용병술이 뛰어나고 지략이 출중하여 세력이 강성하였으며, 프랑스는 호앙 호아 탐(Hoàng Hoa Thám)에게 마을 22개를 주고 그 지역은 절대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면서 회유하려 하였지만, 순응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군사력 양성에 주력하다가 1905년 부터는 공개적으로 대 프랑스 무력 항쟁을 재개하였다. 동시에 다른 항쟁 세력과 연계하여 무력 투쟁으로 일관한 의병장이다. 1913년 3월 18일 불행하게도 중국인 친구 르엉 땀 끼(Lương Tam Ký)의 암계에 걸려 취침중에 암살되었으니, 이 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 1890 ~ 1917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하 동(Hà Đông-현 하노이) 출신으로 애국 열사이다. 다른 이름은 르엉 럽 냠(Lương Lập Nham)으로 우국지사 르엉 반 깐(Lương Văn Can)의 아들이다. 그는 1905년 일본으로 가서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를 만났으며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동생 르엉 응이 카인(Lương Nghị Khanh), 친구 응웬 디엔(Nguyễn Điển) 및 응웬 특 까인(Nguyễn Thức Canh)과 함께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일본 유학생 4명중의 한 사람이다. 1915년 12월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프랑스군에 인도되었고, 프랑스 군에 의해 본국으로 이송되었다. 본국 송환 후 재판에서 종신형을 언도 받아 타이 응웬(Thái Nguyên)감옥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하는 중에도 프랑스 군에 근무하는 베트남 병사 찐 닷(Trịnh Đạt)- 즉,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으로 도이 껀(Đội Cấn)으로 불림-의 도움을 받아 수형자들에게 애국 사상를 고취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1917년 8월 31일 밤 도이 껀(Đội Cấn)의 지휘하에 300명이 의거를 일으키는 데,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이 의거의 고문 겸 부사령관으로 선출된다. 일단 의거의 성공으로 타이 응웬(Thái Nguyên)省을 7일간 장악하게 되지만, 하노이 주재 프랑스 군대의 급파로 의병군들은 정글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으로 걷을 수가 없었던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의병들의 원할한 퇴각을 돕기 위하여 자살을 하니 이때가 1917년 2월초 였다. 27세의 나이로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열사로 타이 응웬 의거를 주도한 인물이다.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 0 ~ 1918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은 빈 푸(Vinh Phú)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미상이다.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은 1917년 8월 타이 응웬(Thái Nguyên)의거를 주도한 수령으로 대 프랑스 항전 영웅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찐 반 닷(Trịnh Văn Đạt)으로 적군인 프랑스 군대의 도이(Đội-하사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이 껀(Đội Cấn)이라고 부른다. 부인은 우국 지사 풍 반 뉴언(Phùng Văn Nhuận)의 딸이다. 그는 애국 애민 정신이 투철하였고, 혁명을 일으키고자 당시 타이 응웬(Thái Nguyên) 감옥에 수감중인 열사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과 연락하며 일제 봉기를 주도하였다. 1917년 8월 30일 밤, 타이 응웬(Thái Nguyên) 감옥을 습격 죄수들을 선동하여 의거에 동참게하고,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으로 하여금 지휘케하였다. 물론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도이 껀(Đội Cấn)의 비호하에 수감중에도 죄수들을 대상으로 혁명 투쟁 정신을 전파하였다. 이날로 부터 9월 5일까지 의병들이 타이 응웬(Thái Nguyên)省을 장악하였으나, 무장 봉기 소식을 접한 프랑스 식민 당국은 하노이로부터 군대를 급파하고 진압에 나서자 의병군들은 급파된 프랑스 군대에 밀려 정글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몸을 다친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을 대동하여 함께 퇴각하려 하였으나,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의병군의 신속하고도 무사 퇴각을 위해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에게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아 죽여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1917년 9월 5일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은 눈물을 머금고 총을 쏘아 혁명 동지인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열사를 먼저 세상을 따나게 하였다. 그 이후 무사 퇴각한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은 1917년 말까지 계속하여 의병을 규합 프랑스 군에 무력 항쟁을 하였으나, 1918년 1월 5일 파오(Pháo)산 기지가 포위되었고 11월 10일까지 저항하다가 자신의 배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이때까지 옆에 남은 전우는 겨우 4명에 불과하였다. 타이 응웬(Thái Nguyên)의거에서 찐 반 껀(Trịnh Văn Cấn)열사와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열사의 장렬한 희생 정신은 베트남 항불 독립 투쟁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타이 피엔[Thái Phiên] 1882 ~ 1916
타이 피엔(Thái Phiên)은 1916년 응웬 왕조의 11대 왕 주이 떤(Duy Tân)이 대프랑스 항불 의거의 주도자이다. 타이 주이 떤(Thái Duy Tân)과 레 티 리(Lê Thị Lí)의 외아들로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그 후 서학(西學)을 공부하였다. 공부를 마친후 다낭(Đà Nẵng)에서 개인사업을 하였는 데, 1903년에는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와 함께 주이 떤(Duy tân)운동과 동주(Dông Du)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중부 지방에서 세금 납부 반대 운동 주동자들이 테러를 당하자 타이 피엔(Thái Phiên)은 대프랑스 투쟁에 적극 참여 1913-1914년에는 레 응(Lê Ngung), 쩐 까오 번(Trần Cao Vân)과 연락 꽝 남(Quảng Nam), 꽝 응아이(Quảng Ngãi), 빈 딘(Bình Định)....등 여러 곳에 베트남광복회를 설립하였다. 그 뒤로 타이 피엔(Thái Phiên)은 쩐 까오 번(Trần Cao Vân)과 함께 후에(Huế)왕도에서 대프랑스 항쟁 봉기를 준비하기로 하고 주이 떤(Duy Tân)왕을 접촉하기 결심을 한다. 마침 1916년 초, 주이 떤(Duy Tân)왕의 시종 경호원과 운전수의 도움으로 왕을 알현하고 프랑스 식민 정부를 전복하는 계획에 적극적인 찬성과 밀약한 내용을 지킬 것을 약속받는다. 의거는 1916년 5월 3일 봉기하였는 데, 추진 위원들은 타이 피엔(Thái Phiên), 쩐 까오 번(Trần Cao Vân), 판 타인 따이(Phan Thành Tài), 레 응(Lê Ngung), 응웬 수이(Nguyễn Sụy)...이었다. 애석하게도 의거는 실패로 끝이 났는 데, 이들이 후에(Huế)성을 벗어나자 마자 주이 떤(Duy Tân)왕, 타이 피엔(Thái Phiên), 쩐 까오 번(Trần Cao Vân)이 프랑스 군대에 체포되었다. 1916년 5월 17일 타이 피엔(Thái Phiên), 쩐 까오 번(Trần Cao Vân)과 그의 동지들은 후에(Huế) 근방의 안화(An Hòa) 처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는 눈물로 이들의 희생을 시로 읊었다.
타이 반 룽[Thái Văn Lung] 1916 ~ 1946
타이 반 룽(Thái Văn Lung)은 혁명 열사로 유명한 변호사이다. 그는 본래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예수교를 믿었고 프랑스에 건너가 법과 대학과 정치과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국적이 프랑스인 관계로 프랑스 군에 입대하여 제 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중 준위로 참전하였다. 귀국하여서는 프랑스 식민 정부로써는 프랑스의 앞잡이로 부려먹기에 안성맞춤인 인재였으나, 본인은 일찍부터 혁명 대열에 앞장서기로 다짐하였다. 1945년 3월 마이 반 보(Mai Văn Bộ), 팜 응옥 타익(Phạm Ngọc Thạch), 응웬 반 투(Nguiyễn Văn Thủ) 동지와 함께 사이곤(Sài Gòn), 쩌 런(Chợ Lớn)의 청년 전위대 조직 구축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5년 9월 23일 남부 지역 대프랑스 항전이 시작되자 바로 다음 날 프랑스 식민 정부에 체포되어 극히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 이름, 직위등을 토설하지 않았다. 얼마후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1946년 초에는 집을 나가 대프랑스 항전 단체 위원으로 참가하였고, 동지들은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역량을 감안 투득(Thủ Đức)지역 항전군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적의 수중에 잡히자 끝까지 결코 항복하지 않았고 부인도 역시 체포되어 독방에 수감되었다. 자신은 이미 희생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지만, 후회는 없다. 나의 임무를 완수하여 만족한다. 만약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 석방된다면 나의 전우들에게 전해 주시오:최후 승리의 날까지 우리의 목적을 완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1946년 7월 2일 옥중에서 참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는 프랑스에 협력하여 영화를 누릴 수도 있는 처지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형극의 길을 선택 조국을 위해 희생 당한 혁명 열사이다.
뚜 쓰엉[Tú Xương] 1869 ~ 1907
뚜 쓰엉(Tú Xương)은 본명이 쩐 떼 쓰엉(Trần Tế Xương)으로 근대 베트남 문학사에 최고로 유명한 시인이다. 나중에 이름을 까오 쓰엉(Cao Xương)이라 개명하였고, 호는 비 타인(Vị Thành), 뜨 틴(Tử Thịnh)이다. 시와 학문에 매우 뛰어나 23세에 과거에 1차 합격후 최종 합격은 하지 못하였으나 시에 관한한 독보적인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늘 풍류를 즐기며 시작에 몰두함에 가세는 점점 기울어 부인이 자녀 양육과 남편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07년 1월 29일(음력 섣달 보름), 타향인 미 록(Mỹ Lộc)현, 데 뜨(Đệ Tứ)마을 제사에 참석하였다가 사당에서 사망하니 그의 나이 37세 였다. 그의 작품은 7언율시, 오언율시, 시부등 다양한 작품이 베트남 문학사에 찬연히 빛난다.
르엉 반 깐[Lương Văn Can] 1854 ~ 1927
르엉 반 깐(Lương Văn Can)은 응웬(Nguyễn)조 시대의 우국 지사이다. 세 아들 르엉 쭉 담(Lương Trúc Đàm), 르엉 응이 카인(Lương Nghị Khanh),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 모두를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 지사 집안이다. 아들 가운데 르엉 응옥 꾸엔(Lương Ngọc Quyến)은 1917년 타이 응웬 의거의 지도자였다. 르엉 반 깐(Lương Văn Can)은 20세가 된던 해인 1874년에 과거 초도 시험에 합격한후 하노이에서 후학들에게 글 공부를 가르쳤다. 1908년에는 동지들을 규합 동경의숙(Đông Kinh nghĩa thục)을 설립 유신(Duy tan)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많은 애국 지사와 열정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에, 프랑스 식민 당국은 백색 테러에 당황하여 모든 각급 학교의 문을 폐쇄하라는 조치를 내림과 동시에 요주의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르엉 반 깐(Lương Văn Can)도 여러번 소환 당해 심문을 받았으나 구속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여 풀려나곤 하였다. 1914년 발생한 하노이 호텔에 수류탄 투척 사건에 100여명이 연루되었는 데, 르엉 반 깐(Lương Văn Can)도 이중에 포함 재판에서 10년 유배형을 언도 받아 캄보디아에 유배되었다. 약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감형되어 1921년 11월 25일 하노이로 귀향하였다. 하노이에 돌아와 학교(Trường Ôn Như)를 열어 공부를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7년 6월 13일 노환으로 사망하니 향년 73세였다. 세 아들을 모두 국가에 바친 애국 지사로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레 꽝 딘[Lê Quang Định] 1759 ~ 1813
레 꽝 딘(Lê Quang Định)은 응웬 왕조 초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다. 그래서 형과 함께 일자리를 구하러 지아 딘(Gia Định)으로 내려와 살았는 데, 원래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해 한 욋과 의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공부를 하였고 그 의사의 딸과 결혼도 하였다. 그는 당시의 엘리트인 보 쯔엉 또안(Võ Trường Toản)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찐 호아이 득(Trịnh Hoài Đức), 응오 년 띤(Ngô Nhân Tịnh)과 함께 당시 "지아딘 3총사"로 불릴만큼 친한 우정을 나누었다. "지아딘 3총사"의 시집은 당시 현사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고 1788년 응웬 아인(Nguyễn Ánh)이 지아 딘(Gia Định)을 재 점령후 과거를 열자 레 꽝 딘(Lê Quang Định)은 찐 호아이 득(Trịnh Hoài Đức)과 함께 합격 한림원 학사로 진출하였다. 응웬 아인(Nguyễn Ánh)이 1802년 왕위에 오르자 레 꽝 딘(Lê Quang Định)은 정사로 발탁되어 중국에 다녀왔고 귀국후에는 호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 재주가 탁월하였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시집으로는 지아 딘 땀 지아 티 떱(Gia Định Tam Gia Thị Tập)이 있다. 1813년 5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보 쯔엉 또안[Võ Trường Toản] 0 ~ 1792
보 쯔엉 또안(Võ Trường Toản)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청나라로 부터 위험을 피해 베트남으로 이주하여 트어 티엔(Thừa Thiên)에 정착하였다가 지아 딘(Gia Định)으로 내려 왔다. 총명하고 학문을 즐겨 박식하였고 성품이 고결하였다. 국가의 정치적 혼란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제자 육성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레 꽝 딘(Lê Quang Đức), 응오 년 띤(Ngô Nhân Tịnh), 찐 호아이 득(Trịnh Hoài Đức)등 지아 롱 황제 시대의 많은 명신들이 그의 문하생이었다. 지아 롱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즉, 통일전 영주로 있을 때 보 쯔엉 또안(Võ Trường Toản)의 명성을 듣고 관직을 주려고 불었으나 일관되게 고사하였고 대신 답례로 대신 국가 통합을 위한"응웬 브엉(Nguyễn Vương-阮王) 10조"를 바쳤다. 이를 기화로 응웬 아인(Nguyễn Ánh-지아 롱 황제의 이름)는 그를 불러 여러 정치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도 하였다. 1792년 6월 9일 보 쯔엉 또안(Võ Trường Toản)이 사망하자 응웬 아인(Nguyễn Ánh)은 매우 슬퍼하였으며, 서거후 지아 딘에 매장하였으나, 1865년(뜨 득 황제 18년)에 동남부 지역 3개 성이 프랑스에 할양되자, 즉시 벤 째(Bến Tre)성 바오 타인(Bảo Thạnh)마을로 개장하였다. 그는 현실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귀화한 조국 베트남의 발전에 기여한 선각자이다.
응웬 럼[Nguyễn Lâm] 1844 ~ 1873
응웬 럼(Nguyễn Lâm)은 응웬 반 럼(Nguyễn Văn Lâm)으로 불리기도 하며 조정의 대신 응웬 찌 푸엉(Nguyễn Tri Phương)의 둘째 아들로 동 쑤언(Đồng Xuân)공주-4대 뜨득 황제의 여동생-의 남편이다. 조정에서 신임받는 대신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좋아하고 부지런하며 겸양지덕이 있고 부친 처럼 공부를 잘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864년 뜨득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1872년 부친이 총통군무대신으로 있을 때 아버지를 돕고 조국을 위하여 자원하여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 1873년 말 응웬 찌 푸엉(Nguyễn Tri Phương)은 북부 베트남을 유린하고 있는 프랑스 군 대위 Garnier가 지휘하는 부대와 맞서 하노이 성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자 응웬 럼(Nguyễn Lâm)은 아버지 응웬 찌 푸엉(Nguyễn Tri Phương)을 따라 출전하여 맹렬한 전투를 치른다. 부마 응웬 럼(Nguyễn Lâm)은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뜨 득 황제는 "충성을 위해 나를 죽게하고, 효를 위해 부마 응웬 럼(Nguyễn Lâm) 처럼 죽게 하라. 장하도다!, 슬프도다!"라고 말했다. 사후 병부 사시랑으로 추증되었고 그의 충성과 효심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충의 사당과 효도 사당 2 곳에 각각 봉안되었다.
응웬 큐이엔[Nguyễn Kyuyến] 1835 ~ 1909
응웬 큐이엔(Nguyễn Kyuyến)은 시인으로 호는 꿰선(Quế Sơn)이며 이름은 탕(Thắng) 또는 땃 탕(Tất Thắng)이었었다. 후 레(Lê)조 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응웬 레(Nguyễn Lê)의 4대 손이다. 1871년 3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는 데, 향시, 회시, 정시 모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이엔 도(Yên Đỗ)마을 출신이라하여 당대의 사람들은 땀 응웬 이엔 도(Tam Nguyên Yên Đỗ)- 이엔 도(Yên Đỗ)마을 출신으로 세번 장원하였다는 뜻- 으로 불렀다.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로 일하였으나 1883년 프랑스와 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늘 애국심과 청렴성을 잃지 않았고 프랑스와도 결코 결탁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아들 응웬 호안(Nguyễn Hoan)을 대신 관직에 내보내었다.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고, 청렴하게 살다가 1909년 7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응오 년 띤[Ngô Nhân Tịnh] 0 ~ 1816
응오 년 띤(Ngô Nhân Tịnh)은 조상이 중국 꽝동 지방 사람으로 지아 딘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지아 롱 황제 시대의 명신이다. 찐 호아이 득(Trịnh Hoài Đức), 레 꽝 딘(Lê Quang Định)과 함께 보 쯔엉 또안(Võ Trường Toản)의 문하생으로 "지아 딘의 삼총사 시인"으로 불리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지아 롱 황제로 즉위 전부터 응웬 아인(Nguyễn Ánh)을 도왔으며 1798년에는 병부에서 일하였고 1802년 응웬 아인(Nguyễn Ánh)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사신으로 찐 호아이 득(Trịnh Hoài Đức)과 호앙 응옥 우원(Hoàng Ngọc Uẩn)을 따라 부사로 청나라를 두 번 다녀 왔다. 1807년에는 정사로 선임되어 캄보디아를 다녀 왔다. 1811년에 응에 안(Nghệ An) 히엡 쩐(Hiệp Trấn)으로, 1812년에는 지아 딘 총진 레 반 주엣을 보좌하여 히엡 똥 쩐 푸 따 (Hiệp tổng trấn phụ tá)로 근무하였다. 1816년 사망하였고 찐 호아이 득(Trịnh Hoài Đức), 레 꽝 딘(Lê Quang Định)과 함께 쓴 시집 "지아 딘 땀 티 떱(Gia Định tam thị tập)"이 있다.
응웬 쑤언 온[Nguyễn Xuân Ôn] 1830 ~ 1889
응웬 쑤언 온(Nguyễn Xuân Ôn)은 응웬(Nguyễn) 왕조의 우국 지사로 호는 응옥 드엉(Ngọc Đường), 르엉 지앙(Lương Giang)이다. 집이 몹시 빈한하였고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1864년 향시에 합격하였고, 1867년에는 2차 시험에, 1871년에 41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꽝 빈, 빈 딘 성에 부임하여 근무하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는 어사대에 근무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곧아 관리들의 부정 부패 척결에 앞장섰고, 대 프랑스 항쟁에 몸을 바쳐 1883-1885년에는 향리로 돌아와 의병을 모집 거사 준비를 하였다. 응에 띤(Nghệ Tĩnh) 전 지역에서 발생한 의병의 봉기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1887년 7월 25일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빈(Vinh)형무소로 이감되어 3년 가까이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기백을 잃지 않았고 석방되어서는 후에(Huế)에 안치되었다가 1889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작으로 옥당시문집(Ngọc Đường Thi Văn Tập), 옥당문집(Ngọc Đường Văn Tập)이 전한다.
응웬 칵 뉴[Nguyễn Khắc Nhu] 1881 ~ 1930
응웬 칵 뉴(Nguyễn Khắc Nhu)는 베트남 국민당의 핵심 인물로 쓰 뉴(Xứ Nhu)라고 불리는 근대 시대의 애국 열사이다. 유학자 집안의 자손으로 어려서 부터 유학을 공부하였고 1912년 박 닌(Bắc Ninh)성에서 1등을 하여 더우 쓰 뉴(Đầu Xứ Nhu) 약칭하여 쓰 뉴(Xứ Nhu)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그러나 수차 향시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하여 그 이후로 향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으로 도망을 가서 구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서는 1912년 박 닌(Bắc Ninh)성 여러 지역 소재 프랑스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베트남국민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입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 교활한 프랑스 관리 Bazin의 암살 임무를 부여받고 수행 준비를 하다가 음모가 탄로되어 응웬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동지와 함께 도망쳐 그 이후 비밀 활동을 개시 하였다. 이에 궐석 재판에서 10년 금고형에 쳐해졌다. 1930년에는 럼 타오(Lâm Thao), 흥 호아(Hưng Hóa), 비엣 찌(Việt Trì)지역의 의거를 주도하였으나 각 지역의 무장 단체들 간의 연락 부족으로 일시에 궐기하지 못하게 됨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프랑스 식민군에게 탄압의 명분을 주어 무자비한 검문 검색과 체포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응웬 칵 뉴(Nguyễn Khắc Nhu)는 총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도피중 수류탄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생명을 잃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식민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감옥으로 이송 중 강물에 뛰어들어 또 한 번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이 번 역시 실패하여 결국 흥 호아(Hưng Hóa) 감옥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감옥에서 머리를 감옥 벽에 부딪쳐 3번째의 자결 시도 끝에 성공 1930년 2월 11일 결국 자결하고 말았으니 그 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응웬 칵 뉴(Nguyễn Khắc Nhu)는 온 몸으로 프랑스 식민 지배에 대항한 열혈 애국 지사이다.
딘 꽁 짱[Đinh Công Tráng] 1842 ~ 1887
딘 꽁 짱(Đinh Công Tráng)은 대프랑스 항쟁기 근왕 운동의 전사이다. 당시 바 딘(Ba Đình) 전투지구를 프랑스와 맞서 약 3년간이나(1885년 4월-1887년 1월 20일)사수하였고 프랑스의 Metzinger와 Doddo 두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퇴각시켰으나, 1887년 프랑스의 Brissand 대령이 76명의 장교와 3,530명의 정예군으로 공격해오자 딘 꽁 짱(Đinh Công Tráng)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응 에(Nghệ An)으로 탈출하였다. 퇴각하는 동안 프랑스 군의 총에 맞아 1887년 10월 5일 밤 까(Cả)강 둑 마을 쭝 이엔(Trung Yên)에서 사망하였다. 프랑스 Mason 장군 마져도 딘 꽁 짱(Đinh Công Tráng)은 강직하고 규율이 엄격함과 동시에 인내심이 강하고 자신을 알고 주도 면밀한 사람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은 베트남의 애국 열사이다.
리 반 픅[Lý Văn Phức] 1785 ~ 1849
리 반 픅(Lý Văn Phức)은 지아 롱 황제 시대의 명신으로 1819년 향시에 합격하여 34세에 한림원 편수(編修-Biên Tu)를 시작으로 예부 상서 비서관, 형리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얼마 후 해직되어 싱가폴, 광동 및 루손(필리핀)에 파견되었다가 귀국 후에는 병부에서 6품에 해당하는 주사(主事) 발령받았다. 1831년 청나라 선박이 베트남 영해를 침범하였을 때 이를 해결하고자 복건 성에 단장으로 파견되었는 데, 영사관에 "越南夷使館" 이란 팻말을 보고 말하기를 "베트남은 오랑캐가 아니니 나는 이 곳에 들어 가지 않겠다"라고 버티어 청나라는 결국 이러한 팻말을 없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越南國使館公館"으로 바꾸어 달았다. 1847년 예부의 꽝 록 뜨 카인(Quang Lộc Tư Khanh)으로 승진되었다가 1849년 6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는 데, 그가 남긴 문학 작품들은 베트남 문학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타이 반 룽[Thái Văn Lung] 1916 ~ 1946
타이 반 룽(Thái Văn Lung)은 율사이자 혁명 열사로 현 호찌민시 투득(Thủ Đức)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자로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법대와 정치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기에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 당시에는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여 준위로 복무하였다. 귀국하여서는 당시 프랑스 유학을 한 멋쟁이이자 인텔리에 속한 그는 편안한 생활을 할수 있음에도 불구 혁명 대열에 참여키로 결심하고 마이 반 보(Mai Văn Bộ), 팜 응옥 타익(Phạm Ngọc Thạch), 응웬 반 투(Nguyễn Văn Thủ) 등과 보위대에 입대하여 사이공 청년 전선 조직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1945년 9월 23일 남부지역에서 대 프랑스 항전이 발발하자 이에 연루되어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동지 팜 응옥 투언(Phạm Ngọc Thuận)과 함께 체포되어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직책, 이름등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후 탈출하여 1946년 지역 항전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이의 인물됨을 알게 된 주위의 동지들은 그를 투득 지역 항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얼마후 프랑스 식민 당국에 다시금 체포되었고 부인도 체포되어 독방에 구금되었으나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는 부인에게 "내 이제 죽어도 후회는 없다. 내 임무를 완수하여 기쁠 뿐이다. 당신이 만약 살아서 석방된다면전우들에게 최후의 승리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전하라"고 말하였다. 1946년 7월 2일 결국 그는 옥에서 참살당하니 그의 나이 불과 30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