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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장 역사의 출발
제2장 역사의 중심
제3장 기독교 역사와 인류 역사의 관계
제4장 기독교역사와 하나님의 종들
제5장 기독교역사와 사단의 활동
제6장 기독역사와 성령의 사역
제7장 시대적 기독교의 특성들
제8장 기독교의 비진리적 역사
제1부 인류 사조思潮 역사
제1장 이스라엘역사와 히브리니즘
1.이스라엘민족 역사
2. 히브리니즘Hebraism
제2장 그리스역사와 헬라니즘Hellenism
1. 그리스 역사
2. 헬라니즘Hellanism
제3장 로마제국역사와 라틴니즘-로마니즘Latinism-Romaism
1. 로마제국의 역사
2. 로마니즘(Romaism, 라틴니즘)
제4장 오리엔트니즘
제5장 기독교와 4대사조의 관계
1. 히브리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1) 성경의 확립
2. 헬라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1) 헬라니즘의 인본주의적 특성
(2) 헬라니즘의 학문적 특성과 예술적 특성
(3) 헬라니즘의 묵시적 특성
(4) 헬라니즘의 변증적 특성
3. 라틴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4. 오리엔트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5. 로마에서 연합되어진 4대사조
(1) 기독교문화의 형성
(2)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제2부 기독교 설립 역사
제1장 기독교의 출발
1. 역사 학자들의 개념
2. 성경의 증거
제2장 교회 설립의 목적
제3장 최초의 교회
1. 교회의 수장
2. 교회의 권위
3. 교회의 권세
4. 교회의 상태
5. 교회의 사명
6. 교회의 확장
7. 행위언약과 에덴교회의 실패
8. 에덴교회의 실재
(1) 히브리민족의 실재
제3부 구약 기독교 역사
제1장 가정교회, 부족교회
1. 노아 교회
(1)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포
(2)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인 교회
1) 용서와 사랑
2)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
3) 신앙의 원리
(3) 하나님의 홍수심판
1) 홍수심판의 시기
2) 홍수심판에 대한 역사적 전승들
① 이집트의 전승
② 인도의 전승
③ 중국의 전승
④ 그리스의 전승
⑤ 영국의 전승
⑥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승
⑦ 바빌로니아의 전승
⑧ 설형 문자토판
3) 노아 방주교회의 규모
4) 홍수심판의 범위
2. 아브라함 교회
(1) 하나님의 은혜언약
(2) 메시아 언약
(3) 사명의 회복
(4) 교회 확장의 언약
3. 야곱 교회
제2장 민족교회
1. 애굽 교회
(1) 일반역사의 준비
(2) 민족교회 형성
(3) 교회건축의 준비
(4) 하나님의 영광선포
(5) 광야 교회의 준비
(6) 메시아의 대속죄제 선포
2. 광야교회(B.C. 1446-1406)
(1) 율법의 정립
(2) 의식의 제정
(3) 신앙적 방황
(4) 하나님의 교회전파
(5) 교회훈련과 교육
3. 실로교회와 12부족 교회(B.C. 1405-1390)
4. 사사시대 교회(B.C. 1390-1075)
5. 사무엘 시대 교회(B.C. 1075-1050)
제3장 국가 교회(B.C. 1050-586)
1. 사울시대 교회(B.C. 1050-1010)
2. 다윗시대 교회(B.C.1010-970)
(1) 다윗에 대한 오류적 평가
1) 다윗을 성군으로 추대하는 성경적 근거
2) 성경에 대한 해석
① ‘삼상 13:14’
② ‘왕상 3:14
③ ‘왕상 15:5’
④ ‘행 13:22-23’
⑤ 다윗의 시편들
3. 솔로몬시대 교회(B.C. 970-931)
4. 분열 왕국시대 교회(B.C. 931-586)
제4장 포로시대 교회(B.C.722-444)
1. 이스라엘왕국교회 시대의 주변정세
(1) 바벨론제국
(2) 페르시아 제국
(3) 마케도니아 제국
(4) 로마제국
2. 일반역사의 기독교 준비
(1) 이스라엘의 기독교
1) 하나님과 메시아 전파
2) 기독교 전파
(2) 헬라의 기독교 준비
(3) 로마제국의 기독교 준비
1) 정복과 식민지 정책
2) 종교 정책
3) 도로 건설
3. 포로생활 시대의 교회(B.C. 733-B.C. 444년)
제5장 포로귀환 시대 교회(B.C. 444-)
제6장 말라기 선지자 이후의 교회(B.C. 450년-)
1. 헬라니즘의 형성
2. 유대인의 헬라화
3. 70인역의 헬라어성경
4. 유대인의 저항
(1) 유대의 상황
1) 토비아스가(家)와 오니아스가(家)의 세력싸움
2) 안티오쿠스의 박해
3) 마카비우스가(家)의 저항
4) 하스몬 왕조
제7장 예수 그리스도강림 직전의 교회
1. 혜롯 왕조
2. 유대교 분파들
(1) 바리새파
(2) 사두개파
(3) 엣세네파
(4) 쿰란공동체
(5) 열심당
제4부 신약 기독교의 출발
제1장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1. 기독교 신학의 완성
2. 교회조직의 완성
3. 하나님나라 선포
4. 하나님섭리 선포
5. 하나님말씀 선포
6. 제자훈련
7. 교회사명 부여
8. 메시아의 사명 완성
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10.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
(1) 탄생의 역사성
1) 로마의 역사적 증거
2) 헤롯왕조의 역사
3) 서력 기원의 증거
(2) 부활의 역사성
1) 시체 도적설과 유대의 전승
2) 기절설과 로마의 증언
(3) 에뎃사 왕과 다대오의 이야기
1) 아그루스바 왕이 예수 그리스도께 보낸 편지.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그바루스 왕에게 보낸 답신
제2장 사도시대의 교회
1. 예루살렘교회(A.D.33년)
(1) 예루살렘교회의 역사성
(2) 예루살렘교회의 위치
(3) 성령하나님의 가시적 임재
(4)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사상
(5) 예루살렘 교회의 갈등
(6) 기독교 총회로서의 기능행사
(7)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8)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9) 열심당의 저항과 유대의 멸망
(10) 유대교의 잔존
(11)예루살렘교회의 종료
(12) 하나님의 섭리
1) 율법시대의 종료를 위한 허용
2) 세계적 기독교 역사를 위한 허용
2. 사도시대 교회
(1)사도 교회시대의 서막
(2) 사도 바울
(3)사도시대의 교회들
1) 안디옥교회
① 안디옥교회의 설립
② 바나바 파송
③ 안디옥교회의 성장과 선교
④ 안디옥교회의 바울 선교
2) 로마교회
① 로마 선교와 바울
② 로마의 상황
③ 로마교회 설립
④ 로마교회의 성장
제5부 기독교박해의 역사
제1장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1.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
2. 민족적 개념에 의한 대립
3. 교리적 개념에 의한 대립
제2장 이방인들에 의한 박해
제3장 로마정부에 의한 박해
1. 박해의 원인
(1) 정치적 원인
(2) 종교적 원인
(3) 사회적 원인
(4) 황제들의 음모
2. 박해의 역사(10대 박해)
(1) 네로(Lucius Domitius Ahenobar-37-68)의 박해
(2)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의 박해
(3) 트라야누스(Trajanus-97-117 재위)의 박해
(4) 하드리아누스(Hadrianus-117-138 재위)의 박해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재위)의 박해
(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rverus.191-211 재위)의 박해
(7) 막시미누스(Maximinus 235-238 재위)의 박해
(8) 디키우스(Dicius 249-251 재위)의 박해
(9) 발레리아누스(Varerianus 257-259재위)의 박해
(10)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 284-305재위)의 박해
3. 박해의 종료
(1) 기독교박해와 콘스탄틴의 전쟁역사
(2)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
1) 기독교 역사학자들의 평가
2) 일반 역사학자들의 평가
3) 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의 평가
4) 객관적 차원에서의 평가
5) 우리의 평가
4. 로마제국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역사
(1)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2) 기독교의 발전
(3) 박해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4) 박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5) 사단의 심정
제6부 순교의 역사
제1장 사도들의 순교
1. 베드로(Πετπος-Petros)
2. 안드레(Ανδρεας-Andreas)
3. 야고보(세베대의아들)(Iακωβος-Iakobos)
4. 요한(Ιωαννης-Ioannes)
5. 빌립(Φιλιππος-Philippos)
6. 바돌로매.(Bαρθολομαιος-Bartholomaios)
7. 도마(Θωμας-Thomas)
8. 마태.(Μαθθαιος-Maththaios)
9. 야고보(알패오의 아들)(Iακωβος-Iakobos)
10. 다대오(Θαδδαιος-Thaddaios)
11. 시몬(Σιμων-Simon)
12. 맛디아(Μαθθιας-Maththias)
13. 바울(Παυλος-Paulus)
제2장 하나님의 종들의 순교역사
1. 바나바(Bαρνβας-Barnabas)
2. 전도자 빌립(Φιλιππος-Philippos)
3. 디모데(Τιμοθεος-Timotheos)
4.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
5. 시몬(Simeon-A.D.107)
6. 이그나티우스(Ignatius-A.D.110)
7. 폴리갑(Polycarp. A.D.55)
제3장 성도들의 순교역사
1. 오리겐과, 레오니다스
2. 퍼페투아(Perpetua)와 그의 동료들.
3. 아피아누스(Apphianus)
제4장 자원 순교자들과 거짓 순교자들
1. 오류적 신앙에 의한 자원 순교
2. 명예욕에 의한 자원순교
3. 불신앙자들의 거짓순교
제5장 배교자들에 대한 처리문제
제6장 순교와 하나님의 섭리
제7장 순교역사와 사단
제7부 세계 기독교로의 확장
제1장 로마의 기독교
1. 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
(1) 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원인
1) 기독교의 사랑
2) 기독교의 평등사상
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4) 콘스탄틴의 승리
(2) 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과정
2.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준 영향
(1) 십자가 처형제도의 폐지
(2) 유아살해 금지
(3) 우상숭배 금지
(4) 노예제도의 수정
(5) 검투사 시합의 폐지
3. 로마제국 기독교의 타락
(1) 황제숭배
(2) 교회의 거룩성 훼손
4. 로마교회의 분열
(1) 콘스탄틴의 천도(遷都-A.D.330년)
(2) 로마제국의 분열
제2장 세계적 기독교로의 확장
1. 이탈리아지역 기독교
2. 고울(Gaul-프랑스)의 기독교
3. 대영제국 기독교
4. 동로마지역의 기독교
5. 북아프리카지역 기독교.
제8부 초기 신약교회시대의 이단들
제1장 기독교와 철학의 충돌
1. 기독교신학에 영향을 준 고대철학
(1) 서양학문의 출발
(2) 고대의 철학자들
1) 소크라테스(Socrates)
2) 플라톤
① 플라톤의 생애
② 플라톤의 사상
(3) 아리스토텔레스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②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2. 기독교와 철학의 충돌 원인
(1)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무시함으로 인한 충돌
(2) 철학이 계시된 로고스라는 주장에 의한 충돌
(3) 하나님의 예비하심
3. 스토아학파(Stoicism)와의 충돌.
제2장 기독교와 로마종교의 충돌
제3장 이단주의자들에 대한 신학적 변증
1. 사도들에 의한 변증
2.교부들에 의한 변증
(1) 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변증
(2) 철학에 대한 신학적 변증
1) 타티아누스(Tatianus)의 야만인 변증.
2) 아리스티데스(Aristides)의 무신론 변증.
3)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의 부활론 변증
4)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기독교 윤리학 변증.
5) 황제 예배 거부에 관한 변증
6)철학과 기독교의 부조화에 대한 변증.
① 저스틴의 로고스(Logos) 신학
② 성경의 로고스(Logos)신학
③ 로고스의 어원적 유래
제4장 초기 신약교회시대의 이단주의자들
1. 영지주의(Gnostic Dualism)
(1) 그노시스교의 역사
(2) 그노시스교의 사상
1) 발렌티누스파(Valentinus)
① 우주 기원론
② 구원론
2) 사토르닐루스파(Satornilus)
3) 기타 종파
(3) 그노시스교의 활동
(4) 교회의 조치
2.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3. 마니교(Manichaeism)
4. 몬타누스주의(Montanism)
(1) 몬타누스주의 교리
1) 기독교의 역사
2) 계시의 계속
3) 성령의 은사
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5) 금욕주의 신앙생활
6) 순교자
7) 여성들의 지도력 인정
(2) 교회의 대응
5. 니골라당(Nicolaism)
6. 유대교적 분파들
(1) 나사렛파(Nazarenes)
(2) 에비온파(Ebionites)
(3) 엘카이파(Elkaites)
7. 신(新)플라톤학파
(1) 플로티누스(Plotinus-A.D.208-269)
(2)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8. 기타
(1) 루키아누스(Lucianus-A.D.120-200)
(2) 셀서스(Cesus)
제5장 이단들에 대한 교회의 조치
1. 교회의 단결
2. 교리의 정립
3. 정경의 정립
4. 이단들에 대한 조치
5. 교훈
(1) 영향
(2) 특징
1) 비진리적 교리
2) 개인추종
3) 파벌형성
(3) 결과
서론
하나님의 우주창조와 함께 출발된 기독교 역사는 약6000여 년간 전개 되어지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역사를 아우르고 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진행시켜왔다. 수많은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일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를 때로는 주관적 입장에서 때로는 객관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그토록 수많은 기독교 역사서적 가운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바르고 정확하게 정리하고 평가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대와 장소, 민족적 문화와 전통, 학문적 변화에 따라 기독교의 진리가 수없이 오류 되고 변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독교 신학원리에 의하여 바르게 정리, 평가 되지 못하였으며 역사학자 개인들의 주관적 신학이나 개인적 신앙 및 역사관에 의하여 또는 당시의 신학사상이나 시대적 역사관 등등에 의하여 진리가 무시되고 오히려 오류와 비진리가 진리와 정통으로 둔갑하여 정리되고 평가된 일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오류를 재범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기초로 하여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에 충실한 기독교역사를 정립한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역사학자나 일반 역사 학자에 구별 없이 모두 다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인류구원에 대한 역사적 차원에만 매달려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류구원을 위하여 세워지고 존재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세워지고 존재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인류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구원이 인간에게는 최고 최대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설립하신 궁극적 목적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것과 인류에게 주어진 사명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임을 성경을 통하여 여러 차례 선포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포가 아니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에 기독교의 본질이 인류 구원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언어도단이다. 만약에 기독교의 본질이 인류 구원이라면 그리하여 기독교의 역사가 인류구원을 위한 역사라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시며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 것이었다. 즉, 성자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오시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죽음으로 치루신 것이다. 그리고 성자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죽은 궁극적 목적은 성부하나님의 의(意또는 義>를 이루기 위함이며 성부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성자하나님께서 예수로 십자가에 죽은 것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죽음의 궁극적 목적은 ‘성부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성부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인류의 구속역사는 그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 과정중의 지엽적인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의 구원을 본질로 하는 기독교역사를 정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독교역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할 것이다.
둘째: 기독교역사 속의 일반역사를 정리한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역사학자나 일반 역사 학자에 구별 없이 모두 다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일반역사 속의 기독교역사를 논증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역사에 슬그머니 참여한 하나의 종교적 차원에서의 기독교역사를 다룬 것이다. 일반 역사학자들은 인류사회가 상당히 오랜 역사적 진행을 거듭한 어느 시점에 기독교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한다. 저들은 기독교가 로마 점령하의 유대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으로 인식한다. 때문에 저들의 기독교 역사에 대한 개념은 언제나 당연히 인류역사 속의 기독교역사이다.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어졌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저들은 기독교역사를 정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해서 출발되는 창세전부터의 기독교역사를 전혀 배제한 채 그리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되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회까지도 거부한 채 사도들로부터 시작되는 초대교회를 기독교 역사의 시발점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들은 기독교역사는 물론이요 일반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오잘못된 개념이다.
성경은 언제나 현존하는 모든 역사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출발되고 전개된다는 역사적 진리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전개하시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곧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기독교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 도구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진다. 따라서 기독교가 모든 역사의 출발이고 중심이며 결론인 것이다. 일반역사는 그것이 아무리 대단하고 다양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는 역사적 도구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반역사를 어떻게 포용하시고 아우르시는가 하는 것을 도처에서 증거함으로서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는 섭리적 도구임을 밝혀준다. 예를 들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민족을 형성한 후 애굽을 떠나는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라던가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바벨론과 메대파사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또는 로마제국을 통하여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하나님의 섭리 등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역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역사를 정리하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역사를 정리할 것이며 일반역사는 기독교역사를 변증하고 보좌하는 차원에서 적용할 것이다.
셋째: 기독교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로서 완전무결한 최고, 최상의 종교이다. 때문에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절대 거부하고 기독교의 명칭하에 독립적으로 존재함으로서 일반종교와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역사는 진리에 바로 서있는 역사보다는 수많은 오류와 비진리에 빠져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이탈되어진 역사를 진행시켜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점을 수없이 간과하였다.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다만 역사의 진행과정이나 결과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그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결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과 함께 그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과 배경까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역사의 진행과정에 존재했던 오류와 비진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역사학자는 역사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해서는 않된다. 역사에 대한 평가를 잘못하면 진리가 비진리로, 비진리가 진리로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역사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의 주관적인 신학과 신앙 및 역사관에 의하여 그리고 시대와 문화적 전통에 의한 객관적 역사관에 의해서 이루어져왔다. 때문에 하나의 주제가 역사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평가됨으로서 혼란과 갈등을 야기 시켰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독교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성경이 있으며 신학이 있고 그 신학에서 비롯되어진 신앙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주관적 신학이나 역사관 및 개인적 신앙이나 시대적인 문화와 전통 등등에 의한 객관적인 차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평가하지 않고 오직 성경과 그 성경을 토대로 형성된 신학에 근거하여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고 평가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점진적, 단계적 역사 진행에 유의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때로는 태풍과 번개처럼 급진적으로 전개되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완만하고 또한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져왔다. 기독교가 아담으로부터 출발되어졌지만 그로부터 2000여 년이 경과한 후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되었으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는 그로부터 다시 20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강림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바울을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정립시켜주신 성경과 그 성경으로부터 정립되어져야할 기독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 다시 20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기독교의 본질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이 있기까지에는 수많은 역사적 완만함과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역사들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완만함과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역사들은 하나님께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들의 무지함과 아둔함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성령하나님의 특별하신 조명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일에 항상 어두웠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일사분란하게 순종하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침으로서 하나님을 답답하게 하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빠르게 진행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완만하게 역사를 진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역사와도 관련된다. 일반역사도 성령의 조명을 받지만 일반역사가 받는 조명은 기독교가 받는 특별한 조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일반역사의 진군은 더욱 완만하며 또한 점진적, 단계적 발전을 이루어나가게 된다. 반면에 기독교역사는 독립적이지만 또한 일반역사를 아우르고 이끌어 가는 특수성을 갖기 때문에 일반역사와 필연적으로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역사는 일반역사의 완만함과 점진적, 단계적 진군에 조화를 이루며 진행하게 됨으로서 같은 차원에서 완만하고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역사적 진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적 진행에 절대 유의하여 기독교역사를 함부로 왜곡하거나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보다 앞서 가는 만행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제1장 역사의 출발
역사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살펴보면 언제나 인류역사를 전제로 한 역사연구가 진행된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우선으로 전제한 후 정치역사, 종교역사, 산업역사, 문화역사, 예술역사, 전쟁역사, 학문역사 등등의 역사를 인류역사에 적용하고 병행하여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출발을 언제나 인류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이 고대역사의 현장들을 발굴하는 목적도 인류역사의 가장 최 근원을 찾아내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출발은 언제나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져야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출발은 역사를 창조한 창조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정립함에 있어 그 출발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제2장 역사의 중심
역사학자들의 역사 연구가 인류역사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 논증 중심은 당연히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정립하지 않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정립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으로서 창조주와 피조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피조 세계를 섭리하시는 것이 되지 못하고 인류역사를 뒤쫓아 가면서 인류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자신의 섭리 역사를 꿰어 맞추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거부하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이다.
역사의 출발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역사의 중심 역시 하나님이시다. 우주만물은 3류 종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며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기운이나, 정신이나, 운동력에 의해서 생겨나고 발전된 것도 아니고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생물들로부터 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도 아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목적에 의하여 작정되고,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목적에 따라 진행되어져왔고 계속하여 진행되어져 갈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당연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일반 역사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개념 하에서 인간을 모든 역사의 중심으로 세운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능력을 발휘하여 자체적으로 만물의영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하셨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 세계를 진행하시는 섭리주 하나님이시다.
제3장 기독교 역사와 인류 역사의 관계
역사의 중심이 하나님이신 반면에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주역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역사의 중앙 무대에 인간을 주역으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들의 역사를 진행하시고 그 인간들의 역사를 아우르시고 다듬으시면서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신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독교역사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 공간에는 언제나 이미 인류역사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음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역사가 진행되어질 시공간에 이미 인류역사를 전개시키시어 그들이 기독교역사를 보좌, 준비, 예비, 보증, 변증하게 하신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때가 이르매”라고 표현한다. 때가 이르매 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실 때 일반역사들이 기독교역사에 보조를 맞추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역사가 기독교역사를 보좌, 준비, 예비, 보증, 변증하게 하실 때에 일반역사의 진행을 조절하시어 때로는 빠르게 진행시키시는가 하면, 때로는 천천히 진행시키시어 조화를 이루게 하신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입각하여 기독교역사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 일반역사를 함께 병용하고 적용하여 일반역사들이 하나님의 기독교역사에 어떻게 사용되어지는가를 증명한다.
제4장 기독교역사와 하나님의 종들
기독교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에 의하여 출발하고 진행되지만 기독교의 중심적 활동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진행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여러 유형의 종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각각 고유한 사명을 부여하시며 또한 그 사명에 적합한 은사와 능력들을 부여하시어 그들이 맡은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기독교역사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수 없이 등장한다. 이때에 하나님의 종이라함은 반드시 인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에는 국가를 비롯하여 가정, 민족, 직장 등등의 각종 조직사회 영역들이 포함되어지며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교육, 과학, 철학, 상업, 공업, 문화, 예술, 체육 등등의 영역들이 포함되어지고 심지어는 천사까지도 포함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또한 반드시 선한 종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한 자들을 들어 쓰시며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들어 쓰신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를 정립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등용되어지는 여러 유형의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들을 정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을 정리함에 있어서 그들의 개인적인 신상이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논증을 삼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들의 개인적 신상이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무엇에 대하여 쓰임 받았으며 어떻게 쓰임 받았는가 하는 것과 그들을 통하여 진행되고 결과 되어진 하나님의 섭리역사만을 논증한다.
제5장 기독교역사와 사단의 활동
어떤 자(한국침례교 성락교회의 김기동)는 기독교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와 사단의 한판 승부에 대한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을 제압하기 위하여 강림하였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까지 사단과 계속적인 싸움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므로 논증하거나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사단은 첫 사람 아담을 공격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끊임없이 끼어들어 온갖 오만 방자한 악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단의 악행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욥1:6-12절을 통하여 증거한다. 어떤 몰지각한 자들은 욥1:6-12절을 함부로 오해하여 사단의 활동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에 의하여 허락되었으므로 아담을 통하여 인류역사에 도입된 죄악이 결국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정죄하시어 심판하시지 아니하시고 그의 악행을 오히려 섭리역사에 적용하신다는 이유에서 사단의 활동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신적 작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어진 오류이다. 사단의 활동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가 아니라 관용적인 섭리이다. 사단은 이미 정죄 받았으며 심판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 사단에 대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관용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단의 오만 방자한 악행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허용하시며 오히려 사단의 악행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유유히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적 섭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사단은 아담을 무너뜨린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그러한 훼방을 오히려 적절하게 아우르시면서 당신의 섭리역사를 전개하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군분투하며 헛수고를 하는 사단의 불쌍하고 피곤한 모습과 그것을 유유하게 다스리시며 오히려 그것을 시의 적절하게 적용하시어 승리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멋지신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정립해 나감에 있어서 악전고투하는 사단의 어리석은 활동과 그것을 멋지게 다스리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유유한 섭리역사를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제6장 기독역사와 성령의 사역
어떤 자들은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 행2:1-4절에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그와 같은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장차 보혜사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요14:16’ ‘요15:26’ ‘요16:7’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창조에 대한 계획을 세우실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성령하나님은 기독교의 출발에서부터 함께 하셨고 기독교의 모든 진행 과정에 쉼 없이 역사하시며 기독교의 역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역사 속에 촌각의 틈도 없이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 속에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낱낱이 증거하고 선포한다.
제7장 시대적 기독교의 특성들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에는 수많은 영역들이 있고 그 영역들은 각자에 부여된 고유한 사명에 따라 자신들의 역사를 진행해 나간다. 이러한 영역 사회적 역사성은 기독교 세계에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된다. 하나님역사의 주역이며 중심인 기독교에 소속되어 있는 수많은 교회들은 시대와 영역의 특성에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사명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지 교회들에게 개 교회적인 사명을 부여하심과 동시에 또한 시대적 또는 지역적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진행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 개 교회적으로 부여된 사명을 정리하는 동시에 시대적, 지역적 교회들에게 연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들을 신학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정리한다.
제8장 기독교의 비진리적 역사
기독교역사 속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등장하지만 그 교회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법과 진리 안에서 맡은바 사명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역사 속에는 수많은 교회들의 비진리적인 역사들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학적 차원에서는 사단의 흉계이지만 신앙적, 사명적 차원에서 보면 교회 지도자들의 열악한 신학수준과 그로부터 비롯되어진 오류적신앙, 그리고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과 사명감의 부재 등등으로 인하여 비롯되어지는 비진리적 역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비진리적인 것으로 얼룩진 이면에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각종 욕심들이 있었다.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명예욕, 권세욕, 권위욕, 재물욕, 지위욕, 성욕 등등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각종 비진리적 행위를 전개함으로서 기독교역사를 피멍으로 얼룩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비진리적 역사들을 묵묵히 품에 안으시고 아우르시며 당신의 역사를 진행해 나가신다. 우리는 이러한 비진리적 교회 역사들을 숨김없이 공개하여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거한다. 그리고 아울러 현재의 교회들과 미래교회들이 더 이상 부끄러운 역사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린다.
제1부 인류 사조思潮 역사
기독교역사를 정리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역사 현장 주변의 일반역사와 그 일반역사를 이끌어 갔던 인류 사조의 역사적 흐름을 고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역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함께 이끌고 가면서 자신의 역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역사와 인류역사는 인류 사조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여 전개되어짐으로 피차에 불가분리의 절대적 연관을 갖게 된다.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인류 사조역사를 고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심에 있어 인류 사조를 적절하게 적용하신다. 기독교가 히브리니즘-헬라니즘-라틴니즘-오리엔트니즘을 포용하면서 진행된 것이 그 증거다.
둘째는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 현장들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독교역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의 일반역사와 인류 사조의 역사적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사실은 동방신학자들과 서방신학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신학 논쟁과 성경해석의 차이를 통하여 증명된다. 초기 신약 기독교시대에서 서방신학자들은 라틴적 사조에 영향 받았던 반면에 동방신학자들은 헬라적 사조에 영향받았다. 당시의 라틴사조는 로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주로 법률적이었고 따라서 성경을 근거로 하였다. 반면에 헬라사조는 철학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이었고 신화적이었다. 그리하여 서방신학자들의 신학은 비교적 성경을 근거로 하는 반면에 동방신학자들의 신학은 문화적이었고 신화적이며 인본주의적이었다.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될 것이지만 인류 사조가 기독교에 사용되는 과정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차원의 결과를 이룬다. 인류 사조가 하나님의 섭리에 적용될 때에 그것은 항상 형이상학적인 결과를 이룬다. 반면에 인류 사조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적용될 때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이룬다. 때로는 형이상학적인 결과를 이루는가 하면 때로는 반대로 형이하학적인 결과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이 문제는 앞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입증 될 것이다.>인류역사에 나타나는 인류사조는 크게 구분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요약되어진다.
첫째: 시오니즘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역사와(히브리니즘>
둘째: 마케도니아 중심의 그리스역사와(헬라니즘>
셋째: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제국의 역사와(라틴니즘-로마니즘>
넷째: 인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역사와(오리엔트니즘>
이 4개의 지역적 역사와 사조는 각각 특별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형성하고 있는데 반하여 모두가 기독교역사에 응용되고 적용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기독교역사 현장의 주변역사들과 그 역사에 나타나는 사조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했음으로 그것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기독교역사가 진군되어지던 시대를 전후 한, 그리고 기독교역사가 전개되어지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의 일반역사와 인류사조의 역사적 흐름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우리가 기독교 주변의 일반역사들을 정리함에 있어서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의 역사적 정리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다만 기독교역사를 보좌하는 차원에서의 역사적 정리를 할 것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제1장 이스라엘역사와 히브리니즘
1. 이스라엘민족 역사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순전히 일반역사적 차원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 역사는 타 민족과는 매우 다른 민족적, 역사적 특성을 갖는다. 그들의 역사는 민족적역사가 곧 종교적 역사이며 종교적 역사가 곧 민족적 역사이다. 민족적 역사와 종교적 역사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집약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히브리민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이 히브리 민족이었고 그 명칭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는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다. 이스라엘민족 역사를 정리하려면 당연히 창세기로부터 전승되어지는 그들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담은 물론 인류의 시조이기도하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멸망하였다. 따라서 홍수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셈이 히브리민족의 시조가 된다. 한편 일반 역사가들은 히브리민족의 시조를 아브라함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이다. 따라서 일반역사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민족이 주장하는 셈은 모두 다 아담으로부터 출발 되어지는 히브리민족의 후예이므로 어떤 방법대로 정리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적 명칭의 유래는 창 14:13에 최초로 증거 되어지는데 그 명칭의 어의語意는 ‘강 저편에서 온 자’로 전해진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한 후 모세와 여호수아의 연계적 지휘 하에 가나안에 이르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여 이스라엘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 국가는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거치는 동안 근동일대를 평정하는 국가적 민족적 부흥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사망한 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유다 역시 B.C. 587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바사(페르시아>헬라, 로마 등등의 열강들에 의하여 통치된다.
2. 히브리니즘Hebraism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따라서 야훼하나님과 동행하는 역사였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 문화, 사조, 사회제도 등등은 모두가 야훼하나님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특성 하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히브리니즘은 당연히 오직 야훼하나님 중심의 종교적 사조였는데 그들의 야훼 중심 종교사조는 사실상 그들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립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세워주신 사조(히브리니즘)은 오직 신본주의 사조(야훼중심사조)로서 야훼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전제로 하는 율법적 사조이며 야훼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절대 이의 없는 순종이 요구되어지는 수직적 사조였다. 히브리인들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든 것에 대한 개념은 당연히(Yes> 아니면(No>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삶 속에는 중도中度나 타협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야훼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Yes로 순종하면 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No로 거부하면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시어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그와 같이 이끌어 가셨던 것은 하나님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성격이 포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을 통하여 기독교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의 종교적 훈련이었으며 기독교의 기본 원리들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의도적인 섭리였다. 한편 이스라엘민족은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또 하나의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시오니즘은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적 삶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성전이 있었던 시온산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하에 시온산을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고 시오니즘이란 사상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시오니즘은 곧 히브리니즘이었다.
제2장 그리스역사와 헬라니즘Hellenism
1. 그리스 역사
그리스Greece라는 국가적 명칭은 라틴어 그레키아Graecia의 음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스 국민은 인도-아리안계에 속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헬렌(Ελλην-Hellen)여신의 후손이라 하여 헬레니스 또는 헬레네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는 B.C. 750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도시국가(Polis)를 형성하였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라케다이몬Lakedaimon였는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고대그리스의 역사를 크게 좌우하였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무력을 앞 세워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규합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체결함으로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실제적인 맹주가 되었다. B.C.500-493년에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에서 독립을 전제로 하는 집단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아테네가 그들을 지원하였다. 이에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페르시아는 막강한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수없이 분열되어 있는 소국小國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는 당연히 페르시아의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B.C490년의 1차 육지전쟁(마라톤전쟁)에서 아테네에게 패하였고 B.C. 480년의 살라미스해전에서도 역시 아테네에게 패하였으며 B.C. 479년의 3차 전쟁 플라타이아 전쟁에서도 아테네, 스파르타 및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군사력을 앞세워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해군력을 장악하는 동맹을 맺었다. B.C.478-477년, 이 동맹은 본부가 델로스 섬에 있기 때문에 델로스동맹으로 전해진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체결한 것은 이미 6세기경부터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맹주로 자리 잡은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델로스동맹은 명목상으로는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해상력海上力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B.C.454년에 동맹본부를 아테네로 옮겼고 동맹 국가들로부터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거출하였다. 이로서 아테네는 그리스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스파르타와 함께 폴리스의 맹주가 되었다. 아테네가 점점 강성하면서 폴리스들을 장악해 나가자 스파르타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았고 아테네를 꺽을 기회를 노렸다. 이러한 때 B.C. 433에 코르키라와 코린토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테네가 코르키라를 지원하였다. 그러자 아테네의 횡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폴리스들은 스파르타를 부추겨 아테네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B.C.431-404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에 스파르타는 이미 아테네를 제압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즉시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어 연합군을 조직한 후 아테네와의 전면전에 들어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대패하였고 스파르타의 예속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역시 크게 타격을 입었다. 스파르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점점 쇠퇴해 갔고 그리스 일대의 맹주다운 면모를 잃어 갔다. 그러자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 아르고스 등등이 페르시아의 후원 아래 동맹을 하여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코린토스 전쟁(B.C.395-386년)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다시 한번 그리스를 배반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게 그리스 일대의 식민지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페르시아가 개입하여 전쟁이 종료되었으나 B.C.371년에 이르러 테베가 다시 스파르타에 도전하였다. 스파르타는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테베군에게 대패하였고 그리스의 패권은 테베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테베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B.C. 362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다가 서로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풍부한 자금을 폴리스들에게 지원하면서 그들을 이간시키고 권력투쟁을 조장하였으며 결국은 스스로 궤멸하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B.C. 359년에 이르러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가 필리포스 2세(B.C.359-336재위)의 영도 하에 그리스정복을 시작하였다. 그리스는 동맹군을 결성하여 마케도니아에 대항 하였으나 B.C.338년 케로네아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필리포스 2세는 코린토스동맹(헬라스동맹)을 통하여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하나로 규합하였다. 이로서 그리스의 폴리스시대는 드디어 종말을 고하였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전체가 마케도니아의 통제아래 들어갔다.
B.C.336년에 이르러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알렉산더(B.C.336-323,재위)가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알렉산더는 부왕이 이루지 못한 페르시아 정복을 이루기 위하여 B.C. 334년부터 전쟁을 시작하였다. 알렉산더는 3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등을 차례로 정복한 후 드디어 B.C. 331년에 아르벨라전투를 통하여 다리우스3세의 페르시아군을 굴복시켰다. 이로서 알렉산더에 의한 마케도니아제국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더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영토와 북쪽으로는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영토와 남쪽으로는 이집트제국의 영토와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하류에 이르기까지의 드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B.C. 323년에 아라비아와 지중해 원정을 준비하던 중 열병으로 급사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이 임종할 때에 장군들이 후계자를 지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알렉산더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강한 자가 제왕이 될 것’이라고 말한 후 부왕 필리포스의 충실한 신하였던 페르디카스 장군에게 자신의 반지를 주었다. 장군들은 후계자 문제를 놓고 의논한 결과 알렉산더의 동생 아리데우스와 알렉산더의 왕비(빅토리아왕국출신)록사네가 아들을 낳을 경우 둘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아리데우스와 록사네가 공동으로 통치하고 페르디카스가 섭정을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마케도니아제국은 크게는 4개, 작게는 20여개로 분열되었다.
섭정을 맡았던 페르디카스가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려하자 지역을 맡아 관리하던 총독들이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알렉산더의 시체를 마케도니아에 안치하기 위하여 바벨론에서 운구할 때에 애굽의 총독이었던 프톨레미가 수리아에서 운구행렬을 공격하고 알렉산더의 시체를 가로채어 애굽으로 가져가서 장사지냈다. 페르디카스는 그것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B.C. 321년에 애굽을 공격하였으나 기병대장 셀루쿠스를 비롯한 수하 장군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러한 혼돈의 와중에서 마케도니아 주권을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었고 제1차 후계자 전쟁을 통하여 마케도니아제국은 캇산드로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셀레코스 왕조의 시리아, 프톨레미 왕조의 ‘이집트’등 세 개의 나라로 분할되었다.
2. 헬라니즘Hellanism
헬라문화로 상징되는 그리스문명은 B.C.8-B.C.4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양문화의 근간을 형성하는 역사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스문명의 원조는 미케아 문명인데 미케아 문명은 아케아계系의 초기 그리스인들이 크레타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한 문명이었다. 크레타는B.C.1500년경부터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왕궁을 중심으로 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던 호전적 민족이었으나 그들의 문명은 평화와 자유의 문명이었다. 아케아계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호전적 문명과 크레타의 평화와 자유적 문명을 결합 시켰다. 그리하여 탄생된 것이 ‘폴리스문명-그리스 도시국가적 문명’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국가 문명은 독립과 주권,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는 문명이었는데 이러한 그리스 도시국가의 문명이 그리스문화(헬라문화)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헬라니즘은 이러한 헬라문명을 근본으로 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따라서 헬라니즘은 자유적이면서 또한 도전적이고 학문적 사조이며 예술적 사조이다. 헬라니즘은 논리적인 반면에 공격적이고 문학적 예술적인 반면에 자유적이며 독립적인 표현력을 갖는다. 또한 헬라니즘은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이다. 헬라니즘은 그리스가 도시국가 형태였을 때에 생긴 사상으로서 처음에는 신화적이고 학문적이며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조는 지정학적 차원에서 오리엔트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헬라니즘에 포함되어 있는 오리엔트니즘은 전통적인 오리엔트니즘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오리엔트니즘은 감성적이고 신앙적인 반면에 헬라니즘에 포함되어 있는 오리엔트니즘은 신화적이고 학문적이며 예술적이다. 즉 감성적인 오리엔트니즘이 헬라화 되면서 헬라적인 특색을 지닌 새로운 오리엔트니즘을 형성한 것이다. 한편 헬라니즘은 지정학적 차원에서 서양적인 요소를 함양하고 있다. 유럽적 사조인 서양사조가 헬라적인 사조에 깊은 영향을 주면서 또 다른 차원의 서양적사조(헬라화 된 서양적 사조)를 형성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양의 사조가 지정학적 차원에서 헬라사조와 교류하면서 원래적인 그리스적 헬라니즘과는 다른 헬라문화와 헬라사조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헬라적사조가 마케도니아제국 문화를 거치면서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것이 추가 되었고 또한 인간 중심적인 것이 연합되어지는 가운데 이기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형되었다. 한편 그리스의 폴리스문명이 헬라문명화 되기까지에는 아테네의 역할이 컸다. 아테네는 B.C.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발발한 후부터 27년간의 전쟁을 치루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문화적 유산들을 후세에 남겼다. 이러한 아테네의 문화는 훗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철학적 정치학적 사상들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고전문화를 헬라문화로 발전시킨 것에 대한 가장 큰 공로는 역시 알렉산더대왕에게 돌려야할 것이다. 알렉산더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자신의 영토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나갔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차원 높은 정치력이었다. 원래 고대그리스어는 매우 차원 높은 언어로서 예술적이며 학문적이었다. 고대그리스어는 그리스본토와 터키, 알바니아 등등의 여러 가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누면(아티카방언>(이오니아방언>(아르카디아방언>(키프로스방언>(아이올리스방언>(북서그리스방언>(도리스방언>등등으로 구분된다. 그중에 아테네언어인 아티카방언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문학적인 요소와 예술적인 요소를 함양하고 있었다. 때문에 B.C. 5세기경부터 아티카방언이 당시 그리스의 맹주 중 하나였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 일대에 폭넓게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 일대를 완전정복 하여 마케도니아제국을 이룩한 후 제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능력 있는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대중적이면서도 품위있는 헬라적 언어를 연구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코이네다. 한편 일반역사가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B.C. 4세기 초에 이르러 알렉산더에 의한 마케도니아제국이 수립되었을 때부터 그리스문화권이 하나로 통일되어짐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국가적 의식이 크게 신장되고 또한 하나의 제국 하에서 통일된 언어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코이네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코이네는 아티카방언을 중심으로 하여 이오니아방언을 추가하고 그것에 기타 여러 방언들의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시켜 만들어졌다. 마케도니아제국의 헬라니즘 사조는 코이네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인류 언어 중에 헬라어 특히 코이네가 매우 학문적 언어, 예술적 언어인 것은 그것이 헬라니즘을 반영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제3장 로마제국역사와
라틴니즘-로마니즘Latinism-Romaism
1. 로마제국의 역사
로마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건국시조는 로물루스이다. 1세기 말의 연대기 작가 타키투스와 리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는 B.C.753년 4월 21일에 창건되었다. 로물루스는 고대 이탈리아 로마 남부지역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인 레아실비아가 마르스신을 통해 낳은 쌍둥이 아들 중에 형이었다. 그는 동생 레무스와 함께 티베르강(현재의 테베레강)에 버려졌으나 이리의 젖을 먹으며 자라던 중 양치기 파우스툴루스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손에 양육되었다. 그는 B.C.753년 4월 21일에 동생과 함께 새로운 도시 로마를 건설했는데 그들이 건설한 로마는 테베르 강과 아니에네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라티움이다. 이곳은 에트루리아, 라틴, 사바누스의 3종족이 접하는 곳이며 그러한 교통 도시의 요소에 시장도시로서 로마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간에 반목이 생겼고 로물루스는 레무스가 도시의 신성한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다. 로물루스 왕조는 7대로 마감하였고 그 후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조의 지배 하에서 시벽(市壁)을 갖춘 도시로 성장했다. 에투트리아 왕조는 3대(B.C.6세기말)에 이르러 폭군 정치를 하다가 추방 당하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귀족들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 하였고 여러 라틴제도시의 맹주가 되면서 고대 로마제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로마가 공화제를 실시할 때에 로마의 정치적 중추 기관은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최고의 정치가들로 구성된 최고의 기관으로서 로마제국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를 총괄하였다. 때문에 로마제국 황제들은 항상 원로원과 충돌하였고 황제와 원로원의 정치적 반목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로마제국은 B.C. 4세기 후반에 라티움(Latium)을 통일하였고 3세기 중엽에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였다. 그 후 로마는 시칠리아 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하면서 지중해 제패를 위한 전쟁에 들어갔다.
로마는 (B.C. 264-201년까지 제1, 2차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격퇴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에 지중해 동부지역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들이 분쟁을 계속했는데 로마는 여기에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시리아, 아이톨리아 동맹 등과 싸워 그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로마는 그후 계속하여 세계 정복을 추진해 나갔고 유럽 일대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이르는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군사문제로 진통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귀족들과 제후들의 세력 싸움에 의한 내전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내전이었던 B.C.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 그리고 제2차 내전이었던 B.C. 40년대 전반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 등등의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하여 로마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 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락수스) 제2차 3두 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시대를 거치면서 옥타비아누스파가 최후 승리자가 되어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B.C44년 카이사르(시저)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B.C.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27년에는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공화제를 실시하였다. 이때에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제는 형식적으로만 공화제였고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일대의 제1인자(元首)가 되었는데 이러한 정치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Principatus)로서 역사가들은 그것을 제정정치라고 불렀다. 이후부터 황제에게 제국에 대한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으며 국가가 곧 황제의 것이라는 정치적 사조가 발생하였다. 이제 황제는 새로운 시대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따라서 황제에 대한 개인숭배 및 신격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로부터 신격화되기 시작한 황제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황제들의 폭군적 통치와 귀족과 제후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로마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A.D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무렵 로마는 제국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밀라노와 라벤나에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 옮겨졌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하였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로마제국은 양분되었고 따라서 로마의 멸망이 시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A.D. 4세기 말에 이르러 게르만 민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의 대대적인 이동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로마는 수많은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라인강과 다뉴브 강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서로마제국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1세(A.D.364-375재위)황제와 그의 동생인 동로마제국황제 발렌스(A.D.364-378재위)의 협력도 소용없이 알라만인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가 난(亂)을 일으켰으며 브리타니아, 파노니아, 북아프리카 등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A.D. 365년에는 고트족이 반란 일으켰고A.D.376년에는 흉노족에게 쫒긴 서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착하려고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전토를 침입하여 발렌스 황제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로마는 내란과 외적들의 침입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였으나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외국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고트족들은 테오도시우스1세(A.D.379-395재위)황제에게 패하여 쫓겨 갔으나 A.D. 382년에 다시 침입하여 정착지를 요구하였고 외국인들로 구성된 군대는 그들과의 전투를 기피하였다. 황제는 결국 그들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제국영내 정착을 허락하였다. 테오도시우스1세는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최후의 황제였으나 그가 사망 후 제국은 동서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동로마제국은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렸고 서로마제국은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그 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인 무장武將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후 각지에 황제들이 난립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A.D. 410년에 이르러 알라리크 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 군대가 로마시를 점령하였고 게르만인 반달족이 아프리카로 진군하여 왕국을 건립하였으며 부르쿤트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침입하였고 색슨족은 브리톤 섬에 진군하였다. A.D. 451년에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 하였으나 A.D. 455년에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다시 정복되었다. 그 후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를 접수하였으나 A.D. 476년에게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로 물루스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서로마제국을 장악하였고 이로서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한편 동로마제국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안정 속에 제국의 위상을 지켜갔으나 A.D. 1453년에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하였다.
2. 로마니즘(Romaism, 라틴니즘)
라틴니즘은 라틴어로부터 출발되어졌다. 라틴어는 본래 중부 이탈리아 반도를 동서로 흐르는 테베레 강하류의 라티움Latium>역 방언 중 하나로서 그 언어를 사용하였던 라티니Latini족의 언어였다. 이 부족은 본래 알바노산 기슭에 살고 있었으며 이 부족에게는 로마니Romani를 비롯한 여러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라틴니즘과 로마제국은 라티움Latium지역, 로마니Romani부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로마가 테베르 강과 아니에네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라티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언어로서 B.C.1세기경부터 고대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가 되었고 후에 유럽일대 언어의 근원이 되었다.
로마제국을 통하여 형성되어진 로마니즘(라틴니즘)은 법적, 행정적, 사조이며 또한 정치적, 군사적 사조이다. 때문에 라틴니즘은 사회 조직적 체계의 질서와 규율이 엄격하였고 분명하였으며 특히 상하上下의 위계질서가 조직적이었고 일사분란하였다. 이러한 라틴니즘은 로마제국의 발전과 확장에 따라 더욱 강화되면서 권위주의적인 것이 되었고 따라서 장엄하고 웅장한 것이 되어지는 가운데 무겁고 경직된 것이 되었다. 로마제국이 이러한 라틴니즘을 발전시킨 것은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가운데 정책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 일대를 정복하면서 그들을 통치하기 위한 법적, 행정적, 정치적, 군사적 수단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러한 제국적 통치수단과 방법이 자연스럽게 강하고 권위주의적인 라틴니즘을 형성시킨 것이다. 한편 라틴니즘은 본래 유럽적(서양적)사조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므로 실용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사조가 기본적으로 함양되어 있었다.
제4장 오리엔트니즘
일반적인 차원에서 고찰할 때에 인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진 오리엔트니즘은 감성적사조이다. 인류역사에 위세를 떨쳤던 철학사상을 크게 구분하면 서양철학으로 대변되는 헬라니즘, 로마니즘이 있고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힌두니즘, 오리엔트니즘이 있는바 힌두니즘은 힌두교의 브라만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었고 오리엔트니즘은 공자. 맹자. 노자 등등의 중국계 현인들의 사상들을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러나 힌두니즘과 오리엔트니즘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양대니즘은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곧 오리엔트니즘의 특징인 감성적 사조이다. 감성적 사조는 신앙과 긴밀한 유대를 이루는 사조이다. 때문에 인간적 감성이 내재된 동양 특유의 오리엔트니즘은 종교적 신앙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힌두교와 불교처럼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적 사상과 효孝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어진 유교적 사상은 모두가 인간적 감성에 깊이 호소하는 동양 특유의 오리엔트니즘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진 신앙적 사상들이다. 따라서 오리엔트니즘은 영적이고 신앙적이지만 정신적이고 박애적이며 타애他愛적이다.
제5장 기독교와 4대사조의 관계
동서양에 형성되어진 4대사조는 인류역사와 함께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나 기독교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는 그 사조들의 영향을 받으며 진군하는 가운데 발전을 거듭하였다. 우리는 기독교와 4대사조의 관계를 정리면서 4대사조의 형성과정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계셨음을 본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이러한 주장을 아전인수라고 비판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사조의 형성에 관여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적당히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대로라면 사조와 기독교의 관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필연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이 하나님 섭리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 없이 진행되는 역사가 없다는 신학적 차원에서 반대하고 둘째는 사조들이 기독교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참으로 정교하고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많은 공헌을 하였다는 이유에서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조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의도적, 강제적, 주권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조들은 지역적 특성과 민족적 특성들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고 그것들을 형성한 것은 각 지역의 민족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음이 분명하다. 즉 성령하나님께서 그 사조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여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하나님의 조명하심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그 사조들이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에 매우 귀하게 적용된 것을 통하여 보증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정리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움을 토로하게 된다. 물론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하나님의 종들 특히 신학자들이 그 사조들을 기독교에 적절하게 반영하고 적용하였다면 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역사가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반대로 사조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였다. 때문에 신학의 정립 과정에 수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아직까지도 완전한 신학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반면에 우리는 그토록 수많은 시간과 그토록 어리석은 종들의 역사를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여전히 기뻐하심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절대적 경의를 드린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4대사조가 어떻게 적용되어 졌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그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고자 한다.
1. 히브리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1) 성경의 확립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히브리민족을 통하여 본격적인 진군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진군시키실 때에 가장 우선적인 당면 과제는 하나님의 섭리일체를 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히브리인들에게만 주어지는 당면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독교 전체에 영원히 주어지는 과제였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구두口頭로 고지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성문화 법전이어야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모세를 통하여 (모세 5경>을 성문화 하셨고 계속하여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을 들어 쓰시어 성문서들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구약성경이라고 명칭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세우시어 새로운 성경을 확립하셨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신약성경이라고 명칭한다. 이 두개의 하나님 법전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그 내용에 따라 율법서, 역사서, 선지서, 지혜서, 복음서, 목회서신 등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구분된다.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칭하며 성경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신학이라고 명칭 한다. 하나님과 기독교,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적 진행은 신학(성경)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신학으로 말씀하시고 당신의 종, 당신의 자녀들에게 임재하실 때에도 역시 신학으로 임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일반종교의 가공적 신들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시지 아니하시며 따라서 인간들에게 강림하실 때에도 언제나 말씀(신학)으로 강림하신다. 이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이요 권위이고 권세이며 능력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임재하실 때에 당연히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율법으로 오셔야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먼저 법적인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 통치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 등등의 법적인 하나님으로 오셔야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되어지는 기독교의 역사가 창조주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섭리주 하나님, 통치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계속하여 선포하는 것과 인간에게 처음 주어진 모세오경이 또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섭리주 하나님, 통치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계속하여 선포한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에 대한 원칙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곧 법이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서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과 기독교,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신학적 함수관계는 의논이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수직적인 것으로서 명령하심과 순종, 임재하심과 영접을 전제로 한다.
조직신학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체결되어진 신학을 계약신학이라고 하지만 그 계약은 인간 대 인간의 계약과 같은 차원의 타협적, 절충적 계약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은 창조주와 피조사이의 계약이며 따라서 절대적 명령권자와 절대적 순종자 사이의 수직적, 일방적 계약이다. 계약의 두 당사자 관계에서 하나님은 소유주, 명령권자로서 계약을 선포하시는 계약의 수여주授與主이시며 인간은 피소유자, 순종자로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계약을 다만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계약의 수납자受納者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 타협, 절충, 변경, 누락, 추가 등등을 행사할 수없으며 다만 아멘으로 수납하고 이행하고 순종할 뿐이다. 이러한 기독교원리의 특성 때문에 신학이 정립되어지는 기독교 출발과 확립의 진행과정에는 율법적이며 수직적인 히브리니즘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진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기록한 성경기자들이 한결같이 히브리인들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이 히브리니즘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였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히브리니즘에 익숙한 성경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함에 있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에 입각하여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성경의 정경 정립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성경의 정립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그 문서가 과연 사도적인 권위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히브리니즘에 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기독교 전래의 선구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제자들인 사도들의 권위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과정에 사도들의 권위(히브리니즘)가 적용되었음을 본다.
히브리니즘은 하나님의 신학이 조직화(조직신학)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적용되어졌다. 물론 신학자들이 신학을 정립할 때에 그들이 히브리니즘을 의도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목숨 걸고 추구했던 하나님 절대주권신학이란 곧 히브리니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히브리니즘은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의 사조로만 존재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신학적 사조로 영원히 존재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보면서 우리는 히브리민족에게 수직적인 율법적 사조(히브리니즘)가 형성되어진 배경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계셨다고 믿는다.
2. 헬라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히브리니즘이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하게 사용된 것과 같이 헬라니즘도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학문적 사조, 예술적 사조인 헬라니즘을 통하여 성경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가 영원히 최고의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은 문법과 내용이 학문적, 문학적, 예술적 탁월함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율법서, 선지서, 시가서 등등이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 강림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히브리니즘적 수직적 사조를 바탕으로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예표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한 이후의 성경은 히브리니즘을 필연적 전제로 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을 요구한다. 이제 신학(성경)은 하나님을 율법적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으로만 선포해서는 안되고 율법과 공의를 사랑, 자비, 은혜로 승화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성경은 히브리니즘(수직적>이면서도 사랑, 자비, 은혜가 선포되는 차원의 것이어야 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학문적이면서 문학적인 헬라니즘을 반영하시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후에 다시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던 것과 대부분의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섭리의 특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헬라니즘의 형성 과정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에 사용된 헬라니즘의 특성을 네 가지로 구분하고 그들이 기독교에 적용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헬라니즘의 인본주의적 특성
헬라니즘은 신본주의적인 히브리즘과는 반대로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다. 헬라인들이 파르테논신전과 올림푸스 산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시킨 수많은 신화들은 그것들이 신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언제나 인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리스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의 이야기들이 한결 같이 ‘신 중심이면서도 신들과 인간의 교류가 있으며 신들은 절대적 존재가 아닌 상대적 존재로서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영역싸움과 주권싸움에 패한 신은 권토중래하거나 조용히 은퇴하는 반면에 항상 인간과 타협하거나 때로는 인간을 의지 한다’는 사실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헬라문화(헬라니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독교신학을 정립하는데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기독교신학이 절대적 신본주의로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수직적으로 정립하지만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자연의 관계를 포함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적 수직 관계이지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당연히 수평적이다. 기독교신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할 때에는 수직적인 히브리니즘이 필요한 반면에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정립할 때에는 수평적인 헬라니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때에 수직적인 것이나 수평적인 것 모두는 당연히 하나님의 신본주의를 근본으로 전제한다. 수평적인 것이라 하여 인본주의적인 것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수평적 사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정립된 신본주의적인 것과 인간의 속성을 따라 정립된 인본주의적인 것 사이에는 비교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신본주의적인 것은 원형으로서 영원하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 완전성으로 진행되지만 인본주의적인 것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조건적이고 상대적이다. 성경이 인간 대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정립할 때에 가장 강조된 것은 기독교의 기본 원리인 평등, 사랑, 용서, 자비 등등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본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 의한 것으로서 곧 원형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 용서, 자비, 등등이 기독교에 의하여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성경 기자들은 헬라니즘을 적용하여 인간 대 인간에 관한 신학을 정리하되 인본주의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신본주의적으로 정립하였다.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는 평등주의는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차원 낮은 평등주의가 아니라 원형적 평등주의로서 형이상학적인 평등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 되어진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인본주의에 입각한 해석을 하여 하나님의 신학을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낮추지 말고 신본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해석하므로 하나님섭리의 완전성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비진리자들은 헬라니즘의 인본주의 특성을 그대로 적용하여 기독교신학을 오류, 변질시켰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미니우스의 ‘인본주의 예정론’과 슐라이에르마허의 ‘도덕적 그리스도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기독교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오직 ‘구속사’적 기독교만 아는 자들이다.
(2) 헬라니즘의 학문적 특성과 예술적 특성
헬라니즘은 지극히 논리적인 학문적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매우 예술적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철학자들이 내어 놓는 사상들은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비논리적인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세인의 이목을 집중 시킬 만큼 대단히 논리적인 학문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전개하는 방법도 매우 문학적이고 예술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헬라니즘과 헬라어를 들어 쓰신 것은 율법적인 히브리니즘을 통하여 세우신 기독교신학을 학문적, 문학적, 예술적, 조직신학으로 다듬어 정립하시기 위함이었다.
기독교는 일반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성을 갖는다. 일반종교의 종교적 교리들은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조잡하지만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저급하고 무지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독교신학은 내용상에 있어서도 완전하지만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속성에 조화를 이루어야함으로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또한 당연히 품위와 예술성을 갖추어야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히브리니즘을 통하여 전수되어진 율법적 기독교신학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학문적, 예술적으로 다듬어 표현하기 위하여 헬라니즘과 헬라어를 들어 쓰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특히70인 역본)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나타난다. 헬라어로 기록되고 번역된 성경의 문장 형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학문적이며 또한 문학적이고 예술적이다. 성경 기록에 사용된 각종 용어들이나 그 용어들이 적용된 문장들은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원한 신학(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임재)임을 차원 높게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논리적 학문성과 예술적 문학성을 아울러 입증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로고스’ 신학이다.
(3) 헬라니즘의 묵시적 특성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철학자들의 사상 속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묵시가 들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 속에 하나님의 기독교에 관련된 묵시적 증거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속에는 분명히 기독교에 대한 신학사상들이 묵시적으로 담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훗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을 추종하는 그들의 후배들이 선배들의 사상 속에 기독교적인 신학사상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을 통하여 증명된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있었던 ‘모든 것을 파생시킨 절대적 지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과 ‘목적적 우주론’이 그것이다. 물론 저들이 말하는 절대적 지고의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속에 있는 절대적 지고의 존재는 주권과 속성과 섭리 등등에 있어서 거의 기독교하나님을 예표하고 상징한다. 저들은 또한 우주의 존재함에는 어떤 불가사의적 존재에 의한 필연적인 목적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헬라니즘에 형성된 그러한 묵시들을 기독교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 적용하셨다. 훗날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저들의 주장을 토대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변증하였고 조직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도 저들의 묵시적 철학 사상들을 대거 적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어두운자들은 헬라철학의 묵시들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적용함으로서 오히려 기독교신학을 오류시키고 변질시켰다. 초기 신약 기독교시대의 영지주의 자들이나 ‘저스티누스’, ‘오리게누스’ 등등의 동방교부들, 그리고 ‘터툴리아누스’를 비롯한 서방교부들의 신학적 오류들은 모두가 헬라철학의 묵시적 요소들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결과들이었다.
(4) 헬라니즘의 변증적 특성
헬라철학에는 기독교신학을 변증할 수 있는 요소들과 논리적인 방법론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Thales. B.C. 6-7C)나 그의 제자였던 아낙시만더Anaximander를 비롯한 일단의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창조를 변증할 수 있는 다양한 우주론들을 내놓았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기독교신학을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학문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시대, 수많은 사이비이단자들의 비진리들이 난무할 때에 하나님의 종들은 헬라철학자들이 형성한 변증적 요소와 변증법들로 기독교신학의 진리를 변증하였고 저들의 오류와 이단사상을 책망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이미 앞에서도 논증한바 있고 앞으로도 여러 차례 지적하게 될 것이지만 역대 기독교신학자들이 헬라니즘의 이러한 특별성을 기독교신학, 기독교역사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헬라철학을 기독교신학에 접목함으로서 각종 오류를 발생시켰다. 특히 동방교회는 수많은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 히브리니즘적인 것이 아니고 헬라니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신학적 논쟁에서 사용된 변증법의 논리적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신학의 변증순서는 일단 신학이 히브리니즘적 신학(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수직적 신학-신본주의 신학)으로 정립된 후에 그것을 헬라니즘(논리적-학문적-문학적-인본주의적)사조들을 통하여 변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이와 같은 순서를 뒤바꾸어 먼저 기독교신학을 헬라니즘적 신학(인본주의적 신학-수평적 신학)으로 정립한 후에 그것을 다시 헬라니즘(논리적-학문적-문학적-인본주의적)사조들을 통하여 변증하였다. 때문에 저들은 수많은 시간과 정열만 허비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을 양산해 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저스틴의 로고스론과 진화론자들의 기독교 진화론이다.
3. 라틴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기독교가 로마를 통하여 성장하고 전 세계에 전파된 배경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다. 로마제국을 통하여 형성된 라틴니즘은 법적, 정치적, 행정적 사조로서 조직사회 체계의 질서와 규율을 수립할 수 있는 기본요소였다. 로마가 당시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라틴니즘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서 단일적 유기체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 정치적, 행정적 차원의 일사 분란한 조직체계를 이루어야 하며 엄격한 규율과 질서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조직적 특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라틴니즘을 들어 쓰시었다. 라틴니즘을 통하여 교회에 법적, 행정적, 정치적 제도와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실제로 라틴니즘의 영향아래 있던 서방교회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결속되어지는 가운데 법적, 행정적, 정치적, 차원의 교회 조직체계를 이루었고 나중에는 군사적 체계까지 이루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로마 가톨릭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은 교권주의에 매달린 채 각종 비진리를 양산하면서 기독교로부터 스스로 이탈되어져 갔으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체제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세계적인 종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헬라니즘의 영향 하에 있는 동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같은 교회적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였다. 동방교회는 교회적 조직체계를 이루려는 노력보다는 교구적 주도권 싸움에 매달려 이전투구만을 거듭하였고 그리하여 교회를 법적, 행정적, 정치적, 조직화 하는데 실패하였다. 동방교회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심한 세력싸움을 벌였고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까지 가세하여 주도권싸움을 벌이다가 드디어는 사분오열된 분파 속에서 지리멸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현대 기독교사회에도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니즘의 기반 위에 수립되어진 법적, 행정적, 정치적, 조직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여 아직까지도 단일적 교회조직 사회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개혁주의 기독교 교파들은 로마니즘적인 교회조직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끝없는 분열과 분파를 계속해 나감으로서 기독교의 위상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4. 오리엔트니즘과 하나님의 섭리
오리엔트니즘은 감성적인 니즘으로서 신앙과 각별한 관계를 이루는 사조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신학으로 말씀하시고 신학으로 임재하시지만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학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한편 신앙에는 감성적인 오리엔트니즘이 요구된다. 신앙이란 신학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학 안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를 형성한다. 왜냐하면 신학을 통하여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에 인간 특유의 감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은 체계적으로는 신학적이며 논리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감정적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은 하나님의 절대주의 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는 논리적인 신학이 아니라 진실이 수반된 신앙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상하며 속죄의 회개를 할 때에는 논리적인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신앙으로 하며 저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에도 논리적인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신앙으로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감성적인 오리엔트니즘을 들어쓰시는 섭리이다. 기독교가 유대, 로마, 유럽, 아메리카 등등을 거쳐서 동양(한국)에 진출하는 동안 가장 기독교적 신앙을 형성한 것은 한국기독교였다.
그동안의 기독교는 히브리니즘적, 헬라니즘적, 라틴니즘적, 신앙을 형성하면서 진행되었다. 때문에 기독교신앙은 히브리니즘 하에서 율법적이었고 헬라니즘 하에서 인본주의적 이었으며 라틴니즘 하에서 제도적,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한국의 오리엔트니즘 하에서 비로소 본연의 형태를 갖추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한국기독교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한국기독교는 오리엔트니즘의 특성 때문에 신앙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오리엔트니즘의 영향 아래 토속적 종교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감성적인 기독교신앙 문화를 형성하였고 때문에 서양을 비롯한 타 지역의 기독교역사에 비하여 매우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신앙적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감성적 사조인 오리엔트니즘을 현대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동양에 세워주신 섭리를 떨리고 비장한 심정으로 감사하고자한다.
5. 로마에서 연합되어진 4대사조
인류역사에 존재하는 4대사조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하에 형성된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은 그 4대사조가 로마제국에서 연합되어지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었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보증 받는다.
동서양 인류의 사대 사조인 히브리니즘, 헬라니즘, 라틴니즘, 오리엔트니즘은 로마제국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되어지면서 매우 특별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4대사조의 연합의 과정역사를 고찰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놀라운 경륜을 발견하게 된다. 동서양 인류의 4대사조가 로마에서 연합을 이루는 과정을 순서적으로 정리하면 먼저 라틴니즘이 형성되어 졌고 다음에 헬라니즘이 유입되었으며 그 다음에 히브리니즘이 유입되었고 마지막으로 오리엔트니즘이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4대사조의 전래 과정의 배후에는 한결같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이미 언급했거니와 라틴니즘의 형성 과정에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있었다. 라틴니즘은 로마제국이 부국강병 해지면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다스려 나가는 가운데 정치적, 군사적, 행정적 차원의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형성되었다. 반면에 헬라니즘은 알렉산더대왕 이후에 근동일대에 확산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에 까지 전래되었는데 그 과정에는 로마의 명문 귀족출신 장군 리비우스의 카르타고전쟁(B.C.241)이 있었다.
리비우스장군의 집에는 전쟁 포로출신의 그리스소년 노예가 있었는데 그는 매우 지혜롭고 총명한 문학가였다. 리비우스는 그를 매우 사랑하여 자신의 가문 이름을 적용하여 리비우스안드로니쿠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를 노예가 아닌 가정교사로 채용하였다. 안드로니쿠스는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리비우스가 카르타고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해인(B.C.240년)에 전승기념 축제를 준비하였다. 이때에 그는 자신의 조국 그리스에서 유행하였던 연극을 준비하였고 자신이 직접 출연하였다. 그의 연극은 리비우스를 비롯한 로마 귀족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안드로니쿠스는 <오딧세이> <트로이의 목마>등등의 그리스문학을 라틴어로 번역 출간하였다. 안드로니쿠스의 그리스문학 번역은 로마에 그리스문화를 전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로마에 헬라니즘이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로마인들은 헬라문화, 헬라니즘을 받아들여 로마화 하였고 헬라니즘은 로마에서 새로운 헬라니즘(라틴적 헬라니즘)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히브리니즘의 로마 유입은 로마의 팔레스타인 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히브리인들이 포로가 되어 로마에 왔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야훼중심의 시온주의 사상(히브리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히브리인들은 조국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다른 포로노예들과 심지어는 로마의 귀족들까지도 기독교 신자가되었다.
황제를 신격화하였던 로마는 오직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나 탄압이 가중 될수록 기독교는 오히려 왕성하게 번창하여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기독교가 승리하여 로마제국을 장악하였으며 헬라니즘의 경우와 같이 히브리니즘도 로마에서 새로운(라틴적 히브리니즘)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마에 유입된 오리엔트니즘은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입성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유럽일대에는 오리엔트문화가 하나의 전리품처럼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는데 오리엔트니즘은 특히 로마에서 크게 번영되었다. 이렇게 동서양의 4대사조가 로마에서 연합을 이루었지만 그러한 역사를 가장 혁신적이고 의미있게 연합시킨 영역은 기독교였다. 그것은 기독교가 당시의 모든 영역의 중심이었던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4대사조의 라틴적 연합이었기에 그러한 결과는 당연이고 필연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로마에서 4대사조를 연합시키시고 그것을 통하여 기독교 체제를 확립하셨으며 아름답고 찬란한 기독교문화를 또한 확립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찬양하지 않을 수없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전쟁을 비롯한 사악하고 참혹한 각종 사건들을 일으킨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일으킨 사악하고 참혹한 사건들을 통하여 오히려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적 승리를 이루신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인류사회를 파괴하고 패망시키는 사건을 일으키고 각종 패륜적 죄악을 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인간들의 그 사악하고 참혹한 사건과 범죄의 현장들을 치유하시고 아우르시면서 하나님의 찬란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루시고 또한 인류사회에도 보다 발전된 역사를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 영역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증거한다.
(1) 기독교문화의 형성
동서양 인류의 4대사조가 로마를 통하여 연합되는 가운데 매우 특별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16세기 기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의 유럽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였다. 유럽의 각 제국들은 나름대로의 민족적 국가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종합 문화는 여전히 기독교 문화였다. 그것은 당시의 유럽 전체가 기독교 안에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유럽제국들은 기독교가 어떠한 입장이 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유럽의 문화적 변천사를 통하여 확인한다. 유럽제국들의 문화는 기독교의 문화적 변천에 따라 같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유럽사상을 대표하였던 라틴니즘은 헬라니즘, 히브리니즘, 오리엔트니즘 등등이 차례로 유입될 때마다 본래의 사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헬라니즘이 로마에 유입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초였다. 로마가 마케도니아 일대를 정복하면서 헬라니즘을 접하게 되었을 때 로마는 헬라니즘의 찬란한 예술적 감각에 매우 놀랐다. 때문에 로마는 리비우스가(家)의 젊은 가정교사가 헬라문학을 소개하였을 때 곧 헬라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헬라문화를 중심으로 한 라틴니즘을 발전시켰다.
당시의 로마는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적인 기틀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문화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헬라문화의 찬란함을 접하게 된 로마는 크게 고무되었고 따라서 급격하게 헬라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라틴니즘은 주후 2세기경에 로마에 히브리니즘이 유입되면서 다시 한번 새롭게 변형된다. 로마가 히브리니즘을 받아들인 것은 헬라니즘을 받아들인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로마가 헬라니즘을 받아들인 것은 헬라니즘의 찬란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던 반면에 히브리니즘은 로마에 유입된 기독교인들의 끈질긴 신앙적 투쟁의 결과에 의하여 로마에 유입되었다. 로마는 기독교가 로마에 입성하였을 때 철저하게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강력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기독교는 오히려 상대적인 상승적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결국은 로마가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로마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히브리니즘에 젖어 들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히브리니즘과 헬라니즘은 각각 유대와 그리스에서 형성되고 출발되었지만 로마에서 라틴니즘과 연합되면서 그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라틴니즘은 십자군전쟁 후에 로마에 오리엔트니즘이 유입되면서 또 한 차례의 변혁을 하게 된다. 오리엔트니즘은 라틴니즘에 오리엔트니즘의 전통적 특성인 감성을 유입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동서양의 4대사조가 연합되고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었는데 그것이 곧 기독교 문화였다.
기독교문화는 히브리니즘(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절대 수직적-절대 신본주의)과 헬라니즘(학문적-예술적-수평적-평등주의)과 라틴니즘(법적-정치적-행정적)과 오리엔트니즘(감성적-신앙적)문화가 연합하여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룬 ‘신학-조직-규율-질서-신앙’의 문화(장엄-웅장-예술-학문-찬란)의 문화를 이룬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증거를 4대사조의 연합이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찬란하게 꽃 피워졌던 유럽의 문화와 예술(기독교의 문화와 예술)을 통하여 제시한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은 유럽에 헬라니즘, 히브리니즘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의 최종적 발전은 오리엔트니즘이 유입되어 기독교 문화가 완성되었던 16세기에 이루어졌다. 건축, 음악, 미술, 문학 등등의 유럽문화 예술은 미켈란젤로, 네오나르드 다 빈치, 라파엘로, 모차르트, 바하, 헨델, 베토벤, 셰익스피어 등등의 예술적 거장들에 의하여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역사를 이루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무렵에야 비로소 찬란하게 꽃 피워졌던 유럽의 문화와 예술은 16-18세기까지, 크게 발전한 후 유럽의 기독교 몰락과 함께 조용히 은퇴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그 역사가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시작하고 진행되고 결과 되었다는 사실을 자증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동서양의 4대사조 연합에 의한 기독교문화 형성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께서 시날 평야의 바벨탑사건을 통하여 민족을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각각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하사하시었지만(창 11장)그들에게 주어진 공통의 사명은 오직 단 하나(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사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계속하여 선포되어지고 결과 되어지는 것은 결국(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세계 각국의 기독교문화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기독교는 국가와 민족, 시대와 장소의 특성들에 의하여 각각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지만 그 문화는 결국 히브리니즘(하나님의 절대주권적-절대 수직적-절대 신본주의)과 헬라니즘(학문적-예술적-수평적-인본주의)과 라틴니즘(법적-정치적-행정적)과 오리엔트니즘(감성적-신앙적)문화가 연합하여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룬(신학-조직-규율-질서-신앙)의 문화(장엄-웅장-예술-학문-찬란)라는 공통적(기독교)문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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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기독교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은 대단히 장구(長久)하고 요원(遙遠)하였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기독교가 본격적인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한 기독교가 현대 기독교에 이르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다사다난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을 크게 구분하면 ‘신학의 형성과 정립’ ‘교회의 조직체계 구축’ ‘신앙의 수혜와 정립’으로 단락되어 진다.
이와 같은 역사를 근거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세우신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대전제는 아직 시작조차도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4대사조를 정립시켜 주신 의미를 자각하고자한다. 이미 앞에서 밝힌바 있듯이 기독교는 히브리니즘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학을 전수받았고 헬라니즘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학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정리하였으며 로마니즘을 통하여 교회의 법적, 행정적, 정치적 체계를 조직화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리엔트니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감성적 신앙을 정립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세우신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대전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교회에게 내리셨던 명령(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준수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교회를 비롯한 모든 교회들에게 영원히 내리셨던 명령인(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룩하는)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소명의식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하나님의 기독교역사를 정리하는 가운데 기독교가,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 기독교역사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이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정립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최고의 신학과 최상의 신앙이 절대적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기독교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또한 구성원들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고차원적 인격과 백절불굴의 사명의식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절대 수직적-절대 신본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사수하고 보존하고 보전해야 하며 ‘법적-정치적-행정적’ 교회조직 체계를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사분란한 역사를 진행시켜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신실하고 순전한(감성적 신앙)의 순종과 그 순종에 입각한 사명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