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과 정 서
신앙과 정서 - 정리.doc
The Religious Affections
1746
저자 : 조나단 에드워즈
정리자 : 송다니엘 .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목사 .
한국어 번역판 :
1. 신앙과 정서 . 지평서원 / 서문강 2011 개정역판 .
2. 신앙감정론 . 부흥과 개혁사 / 정성욱 2005.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가 :
이상웅 목사 / 신학박사 : http://jonathanedwards.cyworld.com . 이곳에서 이상웅 목사가 에드워즈의 „ 신앙감정론 “ 을 요약한 것을 볼 수 있다 .
김홍만 교수 : www.puritankorea.org
그 외에도 많은 청교도 연구가들이 있다 .
정리자는 본고를 위해 이들의 강의와 논문들을 참조하였다 . 소제목은 너무 길어서 정리자가 짧게 요약했으며 , 영어 소제목과 그 번역은 이상웅 목사의 요약본에서 복사했다 .
정리자의 의견은 괄호에 넣거나 „ 참고 “ 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표기하였다 . 때때로 à 를 사용하여 정리를 하였다 . 괄호 속에 있는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
신앙과 감정은 내용도 어렵지만 표현도 어렵다 . 정리자가 가끔 인용된 영어 표현을 보니 내용을 한국어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 따라서 한국어판 번역도 이해하기 어렵다 . 이렇게 중요한 책이 읽기 어려워서 방치되지 않도록 정리자가 최선을 다해 쉽고 간결하게 정리했다 . 때때로 해설도 달았다 . 이 정리서를 읽은 분들은 책을 구해서 다시 읽고 또 읽고 몇 번이고 읽어보기를 바란다 . 좋은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 .
목차
정리자 안내의 글
지은이 머리말 : 참된 부흥과 거짓 부흥은 정서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I. 정서란 무엇인가 – 정서의 중요성
1. 정서의 중요성 : 정서가 참신앙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2. 정서의 정의
3. 정서가 없는 신앙은 없다
4. 신앙의 정서 아홉 가지
5. 참 신앙적 정서는 거룩한 정서이다
6. 그리스도는 모든 정서의 총화시다
7.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정서를 가진다
8. 정서와 관련된 신앙의 방편
9. 결론
II. 신앙적 정서인지 종교적 정서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
1. 신앙적 정서가 매우 크고 높게 고조된다 – 감정의 강도
2. 몸에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다
3. 신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있다
4. 초자연적으로 신앙적 정서가 일어났다
5. 정서가 성경 말씀과 함께 일어난다
6. 신자의 사랑
7. 여러 가지 신앙적 정서들이 동반된다
8. 말씀을 통해 양심이 각성되고 , 자신의 죄를 깨달은 후에 위로와 기쁨이 왔다
9.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 열심을 낸다
10. 하나님을 진지하게 찬미한다
11. 구원의 확신이 매우 강하다
12. 위선자들에게 나타나는 매우 높은 신앙의 정서
III. 신앙적 정서들의 두드러진 표지들
1. 신앙의 정서들은 성령님 역사의 결과이므로 초자연적이다
2. 은혜로운 정서가 생기는 근거는 신적인 것 자체가 탁월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3. 거룩한 정서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함 ( 거룩 ) 을 사랑할 때 나온다
4. 은혜로운 정서는 지성이 조명을 받아 생기며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한다 .
5. 은혜로운 정서는 합리적이고 영적인 확신을 수반한다
6. 은혜로운 정서는 복음적인 겸손을 수반한다
7. 은혜로운 정서는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8. 은혜로운 정서는 , 그리스도의 어린양 같고 비둘기 같은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9. 은혜로운 정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자신의 죄를 쉽게 깨닫게 한다
10.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은 서로 균형을 이룬다
11. 은혜로운 정서는 고양될수록 영적 갈망이 커진다
12. 반드시 행위와 열매로 나타나는 신앙
정리자 안내의 글
„ … 아무리 철저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 교회에서 신앙이 지극히 훌륭하고 밝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 ( 그를 훌륭한 신자로 ) 오해할 수 있다 . 그에게 전적으로 사랑이 가고 마음이 빼앗긴다 . 그러나 이처럼 탁월한 성도로 받아들여지고 굉장한 신앙고백자로 행사했으나 ,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 ( 175 쪽에서 )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에 대한 평
로이드 존스 : „ 조나단 에드워즈에서 청교도주의의 정점과 극치 에 이르게 된다 “. „ 나에게 힘이 있다면 , 나는 이 두 권 ( 전집 ) 의 책을 모든 사역자들이 강제적으로 읽게 할 것이다 . 에드워즈는 모두를 만족시킬 것이다 . 그는 정말 놀라운 사람이다 “
새무얼 홉킨스 ( 에드워즈 전기작가 ): „ 어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
이안 머레이 (Iain Murray) : „ 내가 그 책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40 세가 되어서 였다 “ à 우리가 이 책을 정독해야 할 이유이다 . 이 책을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 .
새무얼 데이비스 : „ 미국이 배출한 가장 심오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신학자 “
서문강 : „ 기독교 고전들 중에서 최고의 등급에 속할 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
김홍만 : „ 신앙과 정서는 참된 은혜와 거짓 은혜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주는 작품이다 “
이상웅 : 참된 신앙 감정은 꼭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이다 . 성령의 열매인 감정들을 가짜와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 참된 회심 , 참된 믿음의 본질을 밝힌다 .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
존 스미스 : 에드워즈가 수행하고자하는 이중적 과업은 , 1) 신앙에서 감정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성론자에 맞서 감정의 중요성을 변호하고 , 2) 감정적 광신주의 , 열광주의에 맞서서 감정의 진위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 감정은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만 , 거짓된 감정이 있기 때문에 ,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송다니엘 : 에드워즈는 최고의 관찰자이다 . 그는 하나님 말씀이 인간에게 떨어져서 작용할 때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며 , 참신자 안에서 어떻게 말씀의 고유한 능력이 발휘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관찰하여 이것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였다 . 이것은 스스로 말씀을 실천해보지 않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 이것은 청교도들이 말씀의 실천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연구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 이 일에 매우 철저했던 에드워즈에 의해 청교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 폈다는 말을 실감 나게 한다 .
에드워즈 :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은혜와 , 그것과 유사하지만 모조적인 것을 분별하게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영분별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 나의 신앙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올바른 신앙인지 , 혹은 문화적 신앙 ( 거짓 신앙 ) 인지를 구별하게 한다 . 선교학자들에 의하면 참신자는 교인 중에서 10% 밖에 안 된다고 한다 . 그러면 , 참신자는 10 명 중의 1 명꼴이라는 말인데 , 이 글을 읽는 자는 자신이 참신자가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
그러나 신앙과 정서는 참신자와 모조 신자 , 혹은 위선자를 가려내기 위한 책이 아니라 , 참신자이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고 힘있게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자는 매우 주의 깊게 자신의 신앙을 검토하고 , 에드워즈가 3 부에서 제시한 신자의 12 가지 표징이 자신에게 나타나 보이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찾아보아야 한다 . 만약 그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크게 근심하며 대책을 세워야 한다 . 신앙의 열매는 여러 개가 아니라 단 하나이다 ( 갈 5:22-23). 이 하나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 따라서 12 가지도 결국은 하나이다 . 그중에서 하나라도 문제가 되면 , 자신의 신앙이 병들어 있거나 믿음이 아예 없다는 의미이다 .
정리자의 생각으로는 , 한국교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 교인이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 문화적인 멍에로 말미암아 올바른 믿음 생활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 정리자는 독자가 에드워즈의 글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자신의 문제점을 잘 진단하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는 마음이다 .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문화적인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 .
2. 청교도와 종교개혁자
청교도와 종교개혁자 , 특히 루터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이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루터가 발견한 복음의 진리 ( 원칙 ) 를 , 칼빈이 조율해서 교회에 적용하고 , 청교도는 이것을 교회와 개인 경건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실천적 이론을 세웠다 .
청교도의 책을 읽어보면 놀랄 만큼 루터의 가르침이 많이 나온다 . 청교도의 핵심인 회심 교리는 루터의 이신칭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 성화 교리는 루터의 복음과 율법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간소화한 것이다 . 단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한 것에 비해 , 그들은 칼빈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했으나 , 실천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하심 양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할 수 있다 .
청교도의 가르침은 실천적이므로 , 가르침의 근원을 찾으려면 , 루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실천적인 것만 배운다면 가르침을 오해하기 쉽다 . 청교도를 율법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 이들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
예를 들어서 청교도들은 , 거룩한 생활과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 비록 루터는 이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 루터는 그러한 삶이 이신칭의의 결과로 당연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 그는 신자의 삶이 율법적으로 될 것을 염려해서 그것을 강조하지 않은 것뿐이다 . 여기에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 . 율법을 강조하지 않으면 , 신자는 율법을 경시하는 도덕률 폐기론자가 되기 쉽다 . 그렇다고 율법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다 . 율법주의자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지키지 않고 단지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사람이다 .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 루터는 가톨릭의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고 , 그에 대한 오해로 그의 제자인 아그리콜라와 같은 반율법주의자가 등장하였다 . 청교도는 그와 반대로 구교의 잔재가 있는 느슨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말씀 ( 순수한 가르침 ) 으로 돌아가려고 하였고 ,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시의 반율법주의자 ( 도덕률 폐기론자 ) 와 싸웠다 .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침의 실천 에 큰 역점을 두었다 . 신자가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 이것은 율법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 또한 실천 과정에서 율법적으로 흐를 위험이 항상 내포되어 있으므로 , 청교도들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근본 원리 ( 살인하지 마라 à 미워하지 마라 ) 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청교도의 성화론에서 한 가지 부연할 점은 , 그들의 성화론의 뿌리도 종교개혁자들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완전성화론을 반대하였다 . 몇 군데를 인용한다 :
„ 그런데 바로 그 동일한 성도의 마음속에 부패와 위선과 불의 역시 정말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20).
„ 비록 세상에서는 탁월한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부패의 혼잡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
(HC 제 60 문 :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 오직 믿음으로 ) 가능합니다 . 비록 내 양심이 ,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 완전하게 )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순전한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속죄와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
청교도들은 인간의 부패성을 결코 잊지 않았다 . 이들은 단지 중생과 성화를 구분해서 성화론을 발전시킨 것뿐이다 .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완전성화론은 이율배반이었다 ( 인간의 전적 타락과 완전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 그러나 그들은 거듭난 자는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품격 , 그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특징 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중생된 자의 표징인 성화라고 불렀다 . 따라서 , „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 “ 는 말로 이러한 표징이 나타나지 않아도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착각에 빠진 것이다 .
3. 신앙적 정서와 종교적 정서
신앙과 정서는 일차적으로 신앙적 정서를 종교적 정서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 신앙적 정서는 진실로 거듭난 자가 가지는 정서이며 , 종교적 정서란 종교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정서이다 . 기독교에서 나타난 종교적 정서는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정서가 기독교라는 옷만 입고 있을 뿐이다 .
책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 에드워즈의 „ 신앙과 정서 “ 는 1740-42 에서 미국의 제 1 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후 1746 에 쓰인 책이다 . 부흥이 일어남과 동시에 반 부흥론자와 열광주의자들이 일어나서 부흥의 효과를 무효화 시키려고 하였다 . 이에 에드워즈는 반 부흥론자 ( 찰스 촌시 ) 에 대하여 부흥을 변호하여야 했고 , 열광주의자들에게는 참된 부흥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했다 . 반 부흥론자는 알미니안주의자 , 혹은 이성주의자들이었으며 , 열광주의자들은 도덕률 폐기론자로 나타났다 . 특히 열광주의자들에게 종교적 정서가 왕성하게 일어났으므로 , 에드워즈는 이들이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 이에 에드워즈는 참신자라면 그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서 교회 내에서 참신자와 위선자들을 분명히 구분하려고 하였다 .
에드워즈가 직면한 당시의 교회상황은 ,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모양만 바꾸어서 교회사적으로 항상 있는 국면이었다 . 즉 진정한 신자는 보통 교회 외부에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도전을 받아왔다 . 참신자는 전체 교인 수에 비하면 훨씬 적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 중세에는 참신자가 극도로 적었음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하고 , 중세에 올바른 신앙운동이 일어났을 때마다 교회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음을 알아야 한다 . 종교개혁은 루터 혼자서 일으킨 운동이 아니다 . 그 이전부터 여러 번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 불이 붙기도 전에 개혁자들은 순교하고 운동은 사그라졌다 .
4. 한국교회가 배울 수 있는 점
한국민족은 종교적 정서 가 매우 풍부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종교성은 기독교 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 또한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 재래적 종교의 정서에 머물러있게 하는 큰 해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 따라서 종교적 정서와 신앙적 정서를 분명히 구분해주는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교회는 1907 년 평양 대부흥 당시에는 물론이거니와 , 그 후 일본강점기 시대에도 매우 훌륭한 신자들이 있었다 .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사람 , 투옥을 당하여도 끝끝내 믿음을 지킨 사람들 , 지하교회 활동을 한 성도들이 적지 않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교회와 교인이 너무나 쉽게 신사참배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신사참배는 단순하게 일본 신에게 절을 하는 예식이 아니라 분명한 배교행위였다 . 교회에서의 신사참배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
„ 일본강점기 말기에 교회당 동쪽 벽 에 ' 천조 대신 ' 이라는 한문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 예배보는 중 사이렌이 울리는 12 시가 되면 ' 천황 ' 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했다 . 그리고 교회당 안에 작은 신사 (portable shrine) 를 동쪽 편에 설치했고 , 기독교 예배를 시작할 때 제 1 부 예배순서로 신사참배를 했다 . 신사참배 순서에는 황국신민선서인가를 외우고 , 일본식 기도를 하고 , 일본식 종교 예의로 손뼉을 서너 번 쳐서 신을 예배하고 … “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해방 후에 이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 이 죄는 회개하기에는 너무도 큰 죄라서 그럴까 ?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출옥성도는 해방 후에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그들이 제안한 회개의 절차는 무시되었다 . 그뿐 아니라 그 후에도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오히려 정죄당하는 분위기였다 .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
한신대 교수였던 김재준 , 정하은 은 … 순교자들과 옥고를 치른 자들의 신앙은 현실참여 의식이 결핍된 피안적이며 둔세적인 것이라고 단정한다 . 그들을 비정상적인 신앙의 소유자로 규정한다 .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덧없는 신념체계로 인한 불필요한 희생을 한 것으로 본다 . 피안적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회참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
감리교 신학대학의 박봉배 도 „ 그들의 태도나 저항에는 기독교적 사회윤리에 대한 책임 의식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 그런 뜻에서 그들의 초월 개념은 무속적 - 불교적 도피주의 와 흡사하다 “
감리교 신학대학의 윤성범 은 … 신앙이 약한 자일수록 신사참배에 항거했고 , 신앙이 강한 자일수록 그것에 적극 참여했다고 본다 …“ 담대한 마음으로 신사참배가 아무런 신앙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했다면 그들은 바울이 말한 강한 자들 ( 롬 15:1) 임에 틀림 없다 “.
이러한 자들이 신학대학 강단에서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가르쳤다면 , 그리고 항거자들을 오히려 무속적 , 불교적인 도피주의자라고 가르쳤다면 , 그들 밑에서 자란 오늘날의 한국 목사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 그리고 신자들은 ?
따라서 한국 신자는 모두 자신의 신앙을 , 자신의 신앙감정과 성경에 대한 이해까지도 이 기회에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 . 우리는 배교자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 배교자들이 가르친 신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 이러한 정황을 생각할 때 , 신앙과 정서는 우리에게 매우 절실한 신앙의 안내서이다 .
신앙과 정서는 에드워즈의 글만 해도 500 쪽이 넘는다 . 그 많은 내용 대부분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이야기이며 우리와 직결된다 . 즉 , 내가 신앙으로서 사고하면서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다 . 그렇다면 , 이 책은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하며 또한 필요한 책인가 ? 분량의 방대함을 생각할 때 ,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할 수 있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에드워즈의 글이 자기에게 직접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 그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
첫째 , 우리는 습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에드워즈의 이야기가 거의 전부 나와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연관점을 찾지 못하는 것은 , 내가 합리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둘째 ,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교회에서 말씀을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해주는 곳은 대체로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이다 . 이곳에서는 말씀을 자의적으로 풀어서 매우 그럴듯하게 회원들에게 적용시켜서 그들을 매혹시킨다 . 이것은 말씀의 도구화라고 볼 수 있다 . 즉 , 말씀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주일성수 , 십일조 , 선교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여 조직을 키우는 방편으로 사용한다 . 이런 곳에서는 또한 지도자에 대한 순종도 강조한다 . 이러한 잘못은 이단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사용하는 곳이 많이 있다 . 문제는 , 잘못된 해석이 이미 머리에 자리잡고 있으면 ,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 비극을 해결해야 한다 .
신앙과 정서를 이해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 에드워즈가 평범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 문체도 어렵기 때문이다 . 예일대학교에서 나온 에드워즈 전집의 편집자 존 스미스 교수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
„ 신앙감정론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언어의 정확성과 생생함 이다 . 에드워즈는 언제나 정확한 단어 즉 그가 의도하는 뜻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선별했다 … 에드워즈의 문체가 가지고 있는 생생함과 상상력은 그 작품이 다루고 있는 근본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즉 교리와 문체가 어울린다 “
따라서 번역자들이 올바른 표현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가 충분히 이해된다 . 그러나 정리자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 되도록 문체를 쉽게 바꾸고 의미가 큰 차이가 없는 한 평범한 표현을 찾았다 . 어려운 부분에는 별도로 해설을 달았다 .
5. 정리자 체험담
인간의 삶에는 운명적인 요소가 있다 .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나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사람으로 태어났고 , 어려서 동내 교회에 다셨으며 , 또한 선교회에도 다녔다 . 이것은 물론 나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지만 , 내가 처한 환경에서 이것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
우리는 한국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 한국인이므로 한국교회를 다닌다 . 그리고 그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 우리가 배운 것이 참된 복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내가 배운 복음이 진정 올바른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 왜냐하면 어떤 종교든지 발생지를 국경을 넘어가면 변질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 순수한 기독교가 전해진다고 하더라고 수용자 편에서 왜곡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은 대단히 크다 . 이러한 현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그러나 기독교에서 큰 문제가 된다 . 진리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는 자세한 교리보다는 확신을 더 많이 가르친다 .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의 내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 무조건 믿고 아멘하고 , 단체에 충성스러운 사람이 대우받는다 . 의심은 금기이다 .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 자신이 믿고 있는 복음이 진정으로 바른 것인가를 진지하게 의심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이것을 불건전한 의심으로 보고 정죄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 그러나 진정한 신앙을 수많은 의심을 통해 확실해진다 . 진정한 신앙은 의심을 통해 깊어지고 성장한다 . 복음의 내용은 우리의 체험이 가르치는 것과 우리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의문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다 .
정리자는 15 세에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 물론 하나님이 누구 신지도 모르고 믿었다 . 그 이후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배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 고등학생 시절부터 선교회도 다녔다 . 신학을 공부하고자 독일에 유학하러 왔다 . 그러다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자 선교회에 들어가 삶 전체를 드리고자 하였다 . 나는 위선을 하지 않고 실제로 모든 것을 바치려고 애를 썼다 .
그런데 아무리 내가 애를 쓰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해도 , 그리고 열심히 배워도 ,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 내가 있던 선교회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고 , 40 세 중반에 그곳을 떠났다 .
그때부터 한국사람과 교제를 끊고 건전한 독일 신자와 목사들을 사귀면서 그들로부터 배웠다 . 그리고 보수적 개혁신학교에서 신학을 다시 공부했다 . 그때부터 믿음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배우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다 . 공부를 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생업도 중단했다 . 모든 것을 중단하고 공부만 할 정도로 무섭게 공부를 하였다 . 그 결과 경제 문제로 가정이 파탄 날 위험을 수없이 넘겼다 . 나는 생명을 건 공부를 하였다 . 종교개혁자들 , 특히 루터의 책을 많이 읽고 , 독일의 좋은 주석서를 많이 읽어서 성경이해를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 이렇게 10 년을 공부해서 50 대 중반이 되어 과거에 수십 년 간 잘못 배운 것을 거의 씻어버리고 순수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이 과정에서 잃은 것은 귀중한 시간이다 . 40 여 년을 복음을 찾으면서 헤맨 것이다 . 너무 늙어서 복음을 깨달아서 이젠 일을 할 시간이 별로 없다 . 그 후로 다시 힘을 보아서 지금까지 불과 몇 년 동안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 그리고 늦게나마 복음을 깨달은 그 기쁨이 나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 .
올해 2 월에 신앙과 정서를 처음 접하였다 . 꼭 읽어보라는 권고를 받고 , 읽기 시작하여 단숨에 책의 절반을 읽었다 . 에드워즈가 기술한 거의 모든 것이 , 그간 내가 체험하고 , 고민하고 , 의심하고 확신한 것들이었다 . 나는 지난 15 년간을 그간 내가 잘못 배운 것을 계속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 물론 그의 생각은 나보다 훨씬 철저하며 매섭고 정확하다 . 그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나보다 더 용감하다 .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 그간 수많은 잘못을 몸소 체험하면서 되묻고 , 믿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면서도 내가 믿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찾는등 , 오랫동안의 실천과 연구를 통해 몸소 배운 결과이다 . 내가 에드워즈를 잘 이해하는 이유는 , 내가 루터 신학을 많이 연구한 이유도 있다 . 나는 복음의 기초를 놓기 위해 루터 신학을 연구했다 .
에드워즈의 신학은 루터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그의 독특함은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철저함과 솔직함 , 예리함 , 용감함 , 그리고 현실감이다 . 그는 루터와 칼빈 이후 가장 예리하고 용감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나처럼 올바른 복음을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 진정한 신앙을 가지려면 영웅과 같이 용감해야 한다 .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 발견되는 즉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 이때 많은 아픔이 따르므로 용기가 필요하다 . 그러나 이것은 아무도 할 수 없다 . 오로지 하나님만 하신다 .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야 하며 , 나를 그분의 진리와 성품에 맞게 빚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
나를 온갖 위험과 절망에서 , 그리고 거짓 형제들의 가르침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
나의 삶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소서 !
지은이 머리말
참된 부흥과 거짓 부흥
정서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의 두드러진 품격 (Qualification) 은 무엇인가 ?...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거룩과 덕행의 뚜렷한 특징들 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
[ 독자는 이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에드워즈는 지금 ,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 하나님 자녀들로서의 합당한 품격 – Qualification – 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고 있다 . 즉 , 신앙은 종교적 경배나 활동이 아니라 품격 – 거룩과 덕목 – 이라는 것이다 .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다 . 즉 , 내가 얼마만큼 헌신했으며 무엇을 얼마만큼 아루었는가 ( 헌신을 많이 있으면 소유가 많은 것이다 )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 ( 존재의 변화 ) 이다 .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반드시 새로운 품격을 가지게 되고 , 이것은 삶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 이 말은 성경 가르침의 핵심임에도 한국인의 일반적인 신앙관과는 거리가 멀다 .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참신앙과는 다른 것이다 . 즉 , 열심히 선교하며 , 헌금하며 ,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 추종자 ( 자기 교인 ) 가 많다는 것은 ,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자로서의 품격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 이것은 육신의 행위이므로 본인과 교회에 오히려 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두 가지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이므로 각 개인은 여기에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로 방대한 책 „ 신앙과 정서 “ 는 시작한다 .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선명하고도 풍부한 빛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 신약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훈계에 잘 나타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교인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으며 , 견해마저도 다양하다 . 이러한 현상은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 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선언이 진리임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 에드워즈는 교회 내에서도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이 매우 적음을 계속해서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 ( 에드워즈 ) 는 , 매우 오랫동안 , 최선을 다하여 조심스럽게 정확한 탐구와 연구를 하였다 . 그런데 독자는 이 강론에서 정죄당하는 종교적 정서에 속하는 것들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서 마음이 불편해질 것 이다 . 어떤 이들은 성도에게 필요한 정서가 이렇게 많은가 하고 크게 분노하면서 경멸할 것 이다 . 근래에 올바른 믿음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세를 취해왔다 . 이러한 정황에서 선하고 영광스럽던 것을 마음 깊이 열렬하게 지지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 그와 동시에 악한 것들의 치명적인 성향을 알고 , 그것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 그러나 내가 겸손하게 확신하는 것은 ,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진리의 길에 들어설 수 없으며 , 하나님의 인정받는 생명의 길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에드웨즈의 진리를 위한 확고한 투쟁정신 ).
하나님의 교회 안에 그렇게 많은 선과 그렇게 많은 악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사실이 아니며 ,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 참된 신앙의 부흥이 크게 일어나던 시대에 동시에 거짓 신앙이 크게 만연하며 , 참된 성도들 가운데 많은 위선자들이 일어나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제자들 가지고 계셨지만 , 끝까지 남은 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 대부분 배교의 길을 갔다 .
이와같이 최근에 뉴잉글랜드에 대부흥이 일어나서 우리는 매우 행복했지만 , 전도가 유망한 대부흥이 ( 핍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 가짜 신앙에 의해 쉽게 제압을 당했다 . 큰 기쁨과 소망을 얻은 지가 바로 엊그제인데 이리도 신속하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 사단의 계략에 말려든 이 땅에 있는 시온의 딸들이 처량한 몰골로 바닥에 누워 있게 되었다 . 그들의 옷은 찟겨지고 , 그 얼굴은 상하였고 , 몸은 벌거벗었고 , 뼈는 부러지고 , 상처에서 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일어나지 못한다 ( 영적 대 각성이 있던 직후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잘 기억하라 . 교회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 표현이 극적이다 . 따라서 에드워즈는 그 원인을 분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 그 이유를 가짜 신앙 , 가짜 신앙의 정서에서 찾았다 .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대세를 차지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를 이미 점령한 이 가짜의 정체를 우리는 밝혀야 한다 ):
„ 시온 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 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 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 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 애 1:17)
따라서 신앙이 크게 부흥할 때마다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분하고 , 구원받을 만한 정서와 체험들과 그것을 가장한 현란하고도 매혹적인 겉모습을 구별해야 한다 . 가장된 모습들과 참된 것을 구분하지 않을 때에는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결과가 나타난다 . à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가짜 신앙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망한다 .
이것은 특별히 사단이 많은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속이기 때문에 그렇다 . 그는 당시의 교회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1) 사단은 거짓 신자에게 강한 구원의 확신을 준다 . 이들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끔 한다 . 이들은 자신이 매우 거룩하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한다 .
2) 이들은 확신과 열심은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매우 비열하다 .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한다 .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다 . 가증스러운 예배를 드린다 .
이에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이고 , 어떤 것이 아닌지 영분별 을 해야 한다 .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갖게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에드워즈가 진단한 당시의 교회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과 거의 같다고 하겠다 . 한국신자만큼 구원의 확신이 강한 교인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 한국은 신자수가 전 인구의 20% 나 되지만 ,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 이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대부분의 신자에게는 진정한 신앙의 정서가 없다는 증거이다 . 그럼에도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 그 확신은 에드워즈 말대로 사단이 심어준 것이다 . 구원의 확신은 이단에 속할수록 강하다 .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곳은 대부분 이단이다 .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의심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잃는다 . 자기 신앙을 의심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것을 불신으로 정죄하며 , 회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심어준 교조를 꼭 붙들도록 한다 .
그러나 신자의 구원의 확신은 , 자신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진정한 교제와 실천에서 자라나는 것이며 , 이것은 성령님께서 증거 해 주시는 것이다 . 구원의 확신은 성령님의 열매와 함께 자란다 . 또한 각 신자가 거룩한 생활을 하면 교회에서 부패가 있을 수 없고 ,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한다 .
에드워즈는 신앙고백자들의 인격적인 활동 중에서 정서 (affections) 가 높다 는 것에 착안하였다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바 그리스도와 그와 관련된 진리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신앙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 따라서 그는 진정한 신자들의 신앙 인격과 활동 속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을 제시 하여 하나님께로서 난 참된 신앙의 정체 를 밝히고자 한다 .
I. 정서란 무엇인가 ? – 정서의 중요성
1. 정서의 중요성 : 정서가 참신앙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30-34)
즉 , 순전하고 고상하며 신적인 초자연적 기쁨 ( 보통의 기쁨이 아닌 ), 깨끗하고 거룩한 범상한 마음과 정신 상태 , 거룩함을 갈망하는 마음 등의 정서들은 참신앙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다 . à 감정이 참신앙의 실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신앙의 정서는 신적인 것이므로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이들은 불투명하고 거짓된 정서를 가질 뿐이다 . 순수한 신앙의 정서가 나타나려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시련을 거쳐야 한다 . ( 거듭난 자에게 신앙의 정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 그가 시련을 피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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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사상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정리서)
송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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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4
12.11.14 06:0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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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철저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신앙이 지극히 훌륭하고 밝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를 훌륭한 신자로) 오해할 수 있다. 그에게 전적으로 사랑이 가고 마음이 빼앗긴다. 그러나 이처럼 탁월한 성도로 받아들여지고 굉장한 신앙고백자로 행사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라는 글이 저를 되돌아 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영분별을 해야 한다. 사람이 참된 신앙을 갖게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