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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1…개구리소년 추정 유골 발견, 사건일지
1991년3월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뒤 실종됐던 대구의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이 11년반 만에 발견됐다.
2002년9월26일 오전11시반경 대구 달서구 용산동 대구성산고교 신축 공사장 뒤편 와룡산 자락에서
최환태씨(55·달서구 용산동)가 개구리 소년들로 보이는 어린이 유골과 옷, 신발들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최씨는 “산에서 도토리를 줍기 위해 낙엽더미를 헤치다가 유골과 신발 등이 나와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어린이용 신발 5켤레와 운동복 등 옷가지 10여점이 함께 발견됐다.
유골 1구의 치아에서는 실종된 조호연(趙浩衍·당시 12세·대구성서초등학교 5년)군이 하고 있었다는 보철이 나왔다.
경찰은 신발과 옷가지, 일부 유골의 치아 보철 흔적 등이 실종된 어린이들의
것과 같다는 가족의 말에 따라 발견된 유골이 개구리 소년들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유골들이 한데 엉켜 있었고 현장에 구덩이의 흔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어린이들이 추운 날씨에 길을 잃고 헤매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체온이 떨어져 숨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실종 후 와룡산 일대에 대한 수차례의 정밀수색에도 불구하고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집중호우로 유골을 덮고 있던 흙더미가 씻겨 내려가면서 유골이 발견됐을 가능성이 있어 이들이 타살된 뒤 암매장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유골이 발견된 현장은 개구리 소년들의 집이 있는 달서구 이곡동 동네에서 2㎞가량 떨어진 곳이다.
경찰은 신원 확인과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유골과 옷가지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정밀 감식을 의뢰했다.
▼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 일지▼
1991.03.26 = 대구 성서초등학교 어린이 5명 개구리 잡으러 갔다가 실종
1991.07.05 = 경찰 50명 25개조로 특별수사대 편성
1992.08월 = 개구리 소년을 소재로 한 영화제작
1992.11월 = 실종사건을 영화화한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 개봉
1993.01월 = 실종 어린이 부모들, 김영삼 당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제출
1993.09월 = 실종 어린이 부모들, 자식들에 대한 직접적인 수색 작업 포기
1995.07월 = 경찰, 실종 어린이 5명의 변모된 얼굴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생시킨 전단 2만여장을 제작해
전국 경찰에 배포
1996.05월 =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 해체, 달서경찰서장을 본부장으로 한 수사본부체제로 전환
2001.10.22 = 실종 어린이 아버지 1명 우울증과 스트레스, 간암으로 사망
2002.09.26 = 11년만에 개구리 소년으로 추정되는 유골 발견,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4부 능선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편에서 실종 어린이들로 추정되는 유골 발견
▼개구리 소년 명단▼
우철원(당시 13세·대구성서초교 6년)
조호연(당시 12세·5년)
김영규(당시 11세 ·4년)
박찬인(당시 10세·3년)
김종식(당시 9세·3년)
개구리 소년 유골 확인 어떻게 하나
발견된 유골들이 '개구리 소년들'인지를 과학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유전자(DNA) 검사를
해봐야 한다. 유전자 검사는 유골에서 DNA를 추출하고 실종 어린이 가족들의 혈액에서 DNA를 추출해 비교하는 것.
유전자 검사의 정확도는 거의 100% 수준. 50년 이상 된 유골에서도 유전자를 추출해 사망자를 확인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실종된 지 11년이 된 개구리 소년들의 경우에는 오차 없이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 유전자 검사에는 3주 이상 걸린다.
유전자 검사 이전에도 두개골의 치아 상태를 통해 사체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또 개구리 소년들이 치과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다면 진료 당시 찍은 치아 엑스레이 사진과 발견된 두개골의 치아 상태를 비교해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골만으로 사인(死因)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뼈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둔기로 맞아 두개골이 함몰됐거나 뼈에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의 상흔이 남아 있지 않는 이상 타살이라고 단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목이 졸려 살해됐거나 독극물에 의해 타살됐다고 하더라도 11년이 지난 유골만으로 이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과수 법의학실 한길로(韓吉路법) 박사는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인지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만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골의 상태와 발견된 장소에 대한 정밀 감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구리소년 사건 개요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은 1991년3월26일 오전 8시경 대구 달서구 이곡동에 사는 우철원(禹哲元·당시 13세·성서초등학교 6년)군 등 같은 동네 성서초등생 5명이 “마을 인근 와룡산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된 사건. 이날은 기초의원 선거로 임시공휴일이었다.
실종된 어린이는 우군을 비롯해 조호연(趙浩衍·당시 12세·5년), 김영규(金榮奎·〃 11세·4년), 박찬인(朴燦印 ·〃 10세·3년), 김종식(金鍾植·〃 9세·3년)군 등이다.
이들이 간 것으로 알려진 와룡산은 해발 299.6m의 야산으로 남쪽에 4, 5개의 계곡이 있고 서쪽에 배실못 등 3개의 저수지가
있으며 낮은 산인데도 비교적 숲이 우거져 있다.
이들이 실종된 뒤 단일 사건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연인원 30만명이 투입돼 실종 지점으로 추정되는 와룡산 일대를
300회나 수색했다. 또 TV방송은 물론 2000만장의 수배전단이 뿌려졌고 유명 역술인까지 동원됐다.
어린이는 물론 집배원 등 전 국민이 개구리 소년 찾기에 나섰으며 92년에는 개구리 소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실종 2년째를 맞은 93년 1월에는 실종된 다섯 어린이의 부모들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당선자에게 자식들을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부모들은 실종된 자식을 찾아 전국을 샅샅이 뒤졌으나 성과가 없자 사건 발생 2년6개월 뒤인 93년 9월 생활고 등으로 직접
자식들을 찾는 작업을 포기하겠다는 ‘눈물의 선언’을 했다.
또 실종 5년째인 96년 1월에는 다섯 어린이 중 한 명이 자신의 집에 암매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굴착기와 곡괭이 등으로
집안 화장실과 부엌 바닥을 파는 소동을 벌였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 사건이 장기화하자 한때 ‘외계인 납치설’, ‘북한공작원 유괴설’, ‘불치병 치료용 희생설’ 등 갖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2001년 10월 실종 소년 중 한 명인 김종식군의 아버지 김철규(金鐵圭·당시 49세)씨가 평생 아들을 찾아 헤매다 끝내 찾지
못한 채 눈을 감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동안 경찰은 대구 달서경찰서에 7명의 전담수사반을 편성해 가출, 사고, 납치 또는 유괴 등 세 갈래로 수사를 펴왔으나
진전이 없었다.
‘개구리소년’ 유골발견 표정
“아이고, 이 일을 우야꼬…, 이 일을….”
9월26일 오후 5시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실종 11년 반 만에 발견된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중턱.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온 유족들은 넋을 잃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유골 발굴 현장은 순식간에 유족들의 통곡과 신음으로 가득 찬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아들들이 어엿한 청년이 돼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부모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유골을 보는 순간 “믿을 수가 없다”면서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흐느꼈다.
김영규군(당시 11세)의 어머니 최경희씨(48)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갖고 온 우황청심환을 손에 쥔 채 먹지도 못하고
유골만 응시했다. 최씨는 “우리 영규는 아닐 겁니다. 믿을 수 없어요. 지금도 영규가 돌아올 것 같아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있는데…”라고 말하다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영규군의 아버지 김현도씨(59)는 “경북 구미에 출장갔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 왔는데 유골을 보는 순간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면서 “유골을 덮고 있는 체육복은 당시 내가
운동하라며 사준 옷인 것 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10년 동안 아들을 찾아 헤매다 지난해 10월 간암으로 세상을 뜬 김종식군(당시 9세)의 아버지 김철규(金鐵圭·사망 당시 49세)
씨를 대신해 현장을 찾은 종식군의 삼촌은 조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종식이의 유골이 아니다”며 애써 눈물을 감춰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유골을 처음 본 순간 반신반의하던 유족들은 “아이들이 어떻게 야산에 11년 동안이나 매장돼 있다가 갑자기 발견될 수
있느냐”며 “아이들의 사망 원인이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실종 당시 우철원군의 담임이던 김광자 교사(40)는 “아이들이 반드시 살아 돌아올 줄 알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서초등학교 이영숙 교사(48·여)는 “4년 전 학교에 부임하면서 ‘실종된 어린이 5명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면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돌아오면 언제든지 복학할 수 있도록 학적을 정원 외로 특별 관리해 왔는데 허사가 됐다”고 말했다.
김영규군의 친구 강용찬군(19)은 “영규가 실종된 지 11년이 지났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정말 안타깝다. 지금도 영규가 ‘용찬아’ 하며 나타날 것 같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개구리소년 아버지의 한맺힌 죽음
‘종식이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2001년10월22일 오전 대구 중구 삼덕동 경북대병원 중환자실. 10여년 전 동네 친구 4명과 함께 실종된 개구리소년
김종식군(당시 9세·성서초등학교 3년)의 아버지 김철규(金鐵圭·49·대구 달서구 이곡동)씨가 평생 아들을 찾아 헤매다
끝내 찾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아들이 실종된 뒤 주업인 농삿일도 팽개친 채 발바닥이 닳도록 전국을 돌아다닌 김씨는 아들을 찾지 못하자 우울증과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아들이 실종된 지 만10년째 되던 3월 간경화와 간암 합병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7월째 투병생활을 해왔다.
가족들은 “고인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죽기 전에 꼭 아들을 찾아 낼 것 이라고 장담했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해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고 말았다” 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종식군과 함께 실종된 나머지 개구리소년
4명의 부모 등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아와 조의를 표했다.
종식군 등 4명은 91년 3월 26일 마을 부근 와룡산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 며 집을 나간 뒤 실종됐다.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은 단일 사건으로는 국내 최대인 30여만명의 경찰과 군 병력이 수색에 동원됐고 사회단체 등이 전단 2억여장을
뿌리는 등 국민적 관심을 모았다.
동아일보[횡설수설]최화경 안타까운 父情
아버지는 미친 듯이 무너진 학교건물 잔해를 파내려 갔다. 구조대원조차 ‘이미 깔려 죽었을 것’이라며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네게 아빠가 필요할 때는 꼭 네 곁에 있을 것이다.” 그는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아들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러기를 하루하고도 14시간,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순간 환청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는 영화가 아니다.
3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때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비극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부정(父情)이다.
▷세상에 자식사랑보다 더한 것이 또 있을까. 목숨 있는 동안은 자식 몸 대신하기를 원하고 죽은 뒤에는 자식 몸 지키기를
원하는 게 부모 마음이다.
자식을 위해 몸을 던진 부모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도 많다. ‘부모 속에 부처가 들어 있다’는 옛말도 그래서 나왔을 터이다.
자식사랑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가시고기 수놈은 보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알을 지키다 새끼들이 부화되어 나온 뒤 기진해 죽는다고 한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식사랑은 이처럼 무조건적이고 본능적이다.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지 올해로 꼭 10년이다.
“뒷산으로 개구리 잡으러 간다”며 대구의 다섯 어린이가 집을 나섰던 게 1991년 3월26일, 그들은 그 길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부모들은 생업을 내던진 채 자식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맸고 전국적으로 ‘개구리 친구 찾기 운동’까지 벌어졌지만 허사였다.
이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19세부터 22세까지의 청년이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이 오죽했을까.
▷다섯 어린이 가운데 당시 아홉살로 막내였던 김종식군의 아버지가 그저께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실종되자 그는 회사까지 그만둔 뒤 5년 동안 아들 사진을 붙인 화물차를 몰고 전국을 다니며 전단을 뿌렸다고 한다.
올해 그의 나이 겨우 마흔아홉, 생전에 입버릇처럼 “죽기 전에 꼭 종식이를 찾겠다”고 말했다는 얘기이고 보면 아들 잃은
한(恨)이 그의 몸에 깊은 병을 심었으리라.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에게 ‘아르메니아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개구리소년2…死因미궁, 실탄-탄두등 발견, 유족표정
‘개구리 소년’ 死因미궁…발굴장소서 실탄-탄두등 발견
‘개구리 소년’ 5명의 사망 사건을 수사중인 대구 달서경찰서는 2002년9월2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대학 등의 전문가들과
함께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중턱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경찰은 이날 유골이 발견된 장소에서 길이 1㎝가량의 탄두 2발과 그 부근에서 금속탐지기로 10여발을 발견해 소년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 실탄의 종류와 출처 등을 조사중이다.
유족들은 현장에서 실탄과 탄두가 발견되고 옷소매에 묶인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며 타살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경찰은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1994년 11월까지 대구 50사단이 운영하는 예비군사격장이 있었기
때문에 군에서 오발된 실탄이거나 숨진 소년들 가운데 누군가가 실탄을 주워서 갖고 있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 감식반은 유골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마치 문화재 발굴작업을 벌이듯 솔과 특수장비를 이용해 돌
하나하나까지 검사했다. 경찰은 이날 유골과 뼛조각, 옷가지, 신발 등을 추가로 찾아냈다.
경찰은 발굴된 유골을 모두 국과수에 보내 유전자 분석을 통해 타살 여부 등 사망 원인과 시기를 밝혀내기로 했다.
이날 김종식(金鍾植)군의 삼촌 김재규(金在圭·42)씨는 “산에 익숙한 아이들이 동네 뒷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며 경찰이 사인을 분명히 밝혀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영규(金榮奎)군의 아버지 김현도씨(59)는 “가출할 아이들이 절대 아니라고 해도 경찰은 목격자의 신고를 근거로
엉뚱한 곳을 집중 수색하는 등 수사방향을 다른 데로 돌렸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모 일간지가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돼 경찰에 신고되기 전날인 25일 이 신문사 편집국에 40대 남자가
전화로 “와룡산에 가면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이 묻혀 있을 것이니 확인해 보라”고 제보했다고 보도한 것과 관련해
사실 여부를 조사중이다.
경찰은 이 제보 내용이 사실이라면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돼 경찰에 신고되기 하루 전에 전화가 걸려왔고
장소와 숫자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점을 중시해 전화발신지 추적 등을 통해 제보자를 찾아낼 방침이다.
유골 발굴단장 “개구리소년 확실한듯”
2002년9월27일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현장을 감식한 곽정식(郭精植·경북대 법의학 교수) 발굴 단장은“당시 실종된
소년들의 유골로 최종 확인됐다”며 “육안으로는 외부 가격에 의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곽 단장은 또 육안 감식을 해본 결과만으로는 이들이 타살됐다고 볼 흔적은 전혀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신원확인의 근거는….
“발굴 유품들에 대해 유가족들이 실종된 아들들의 것으로 인정했다.”
-사고사인가 아니면 타살인가.
“아직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발견된 총탄은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 발견된 체육복 상의 팔 부분의 매듭은 본인이
했을 수도 있고 타인이 했을 수도 있다. 이는 법의학적인 문제라기보다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혀내야 할 문제다.”
-타살로 보이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나.
“육안으로는 총탄이나 가격에 의해 손상된 뼈를 찾을 수 없었다. 일단 외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유골은 어떤 상태인가.
“서로 뒤엉켜 있는 상태였다. 30㎝ 정도의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물이 흘러 원 모습을 흐트러뜨렸을 수도 있고
(소년들이 숨진 뒤) 동물들이 뼈를 옮겼을 수도 있다. 살해당한 뒤 매장됐는지, 추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동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인은 밝힐 수 있는가.
“유일한 단서는 의복과 유골인데 소년들이 죽은 지 벌써 10년 이상이 지나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인 규명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총탄이 10여발이나 발견됐는데….
“금속탐지기 2개로 발굴 현장 부근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다. 발굴 현장에서는 총탄 탄두 2개가 발견됐다.
그러나 11년 전 당시 인근에 사격장이 있었기 때문에 사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생각된다.
좀 더 조사 영역을 넓혀 금속탐지기로 조사해서 총탄이 계속 나오면 총탄은 의미가 없다.”
“왜 자연死로 몰아가나” 유족들 분통
2002년9월27일 오전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뒤편 기슭에는 경찰의 현장감식을 앞두고 유족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전 7시부터 해발 150m의 현장에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 40여명의 유족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체념한 모습이었다.
흰색 비닐장판으로 가려진 아들 우철원(禹哲元)군의
유골 앞에서 아버지 우종우(禹鍾宇·53)씨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듯 오히려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이 깨진 것은 오전 11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경북대 법의학팀 등 감식반이 도착하면서부터. “사고로 인한 자연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경찰 보고가 계속되자 유족들은 “수색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고사로 몰아가고 있다”며 반발했다.
김종식(金種植)군의 삼촌 김재규(金在圭·42)씨는 “산이 곧 놀이터인 아이들이 동네 뒷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마을 불빛이 지척에 보이는 곳에서 추위를 피하려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분노한 유족들의 모습과는 달리 경찰의 현장감식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감식반이 약 2시간 만에 완전한 모습의 탄두 1개와 실탄 1발을 발견하자 유족들과 경찰 사이에 다시 긴장이 감돌았다.
유족들은 “당시 인근에 군부대와 사격훈련장이 있었고 실종 당일 유골이 발견된 지점 부근에서 아이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는 제보가 있었다”며 “경찰 수사가 완전히 엉터리였던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구리 소년’ 유족들 고통과 상심의 11년 세월
“잊을 만하면 터지고…. 차라리 잘된 기라예.”
2002년9월27일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을 찾은 뒤 돌아서는 유족들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이제는 살아 돌아올 수 없구나’ 하는 체념의 눈빛도 역력했다.
유족들에게 지난 11년은 길고 긴 고통과 가슴 조임의 나날이었다.
생업도 포기한 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은 물론 상심을 술로 달래기도 했다.
유족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문도 잠그지 않고 살아왔는가 하면 거짓 신고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철원(禹哲元)군의 아버지 우종우씨(53·자영업)는 그동안 분신처럼 보관해왔던 노랗게 빛이 바랜 전단지와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공중전화카드 10여장을 품속에서 꺼내며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둘째(철원)를 잃고 몇 년간은 일도 못했지예. 견디다 못해 애를 하나 더 낳으려고 했지만 그놈이 눈에 아른거려서….
” 우씨는 98년 여러 사정으로 이사를 가야 했지만 끝내 와룡산 기슭을 떠나지 못했다.
“이 지역이 개발되는 바람에 유족들도 이사가야 할 상황인 기라. 그러나 멀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있나. 있어도
여기 안 있겠나 싶어서….”
김종식(金種植)군의 아버지 김철규(金鐵圭)씨는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술로 달래다 지난해 10월 꿈에 그리던 아들 곁으로 갔다. 부인 허도선(許道先·44)씨는 “술 담배를 전혀 못하던 남편이 상심을 이기지 못해 술로 슬픔을 견디곤 했다”며 “지난해 1월
간경화 판정을 받은 뒤 결국 9개월 만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허씨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열흘에 한번꼴로 300여만원씩 드는 남편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과
땅을 팔아 지금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씨와 마찬가지로 술로 상심을 달래며 살아가던 한 아버지는 주변과의 잦은 마찰로 19일 경찰에 붙잡혀 현재 대구구치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숱한 허위 신고도 유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1996년 아이들 시신이 동네 재래식 공중화장실 밑에 빠져 있다는 제보로 밑바닥을 온통 파헤쳤는가 하면 거액을 요구하는
괴전화도 잇따랐다.
김종식군의 삼촌 김재규(金在圭·42)씨는 “제보 신고가 잇따를 때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고 말했다.
<개구리소년 유족들의 안타까운 사연> (2002.09.30/월)
지난 26일 유골로 발견된 개구리소년 유족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발굴 현장을 찾은 시민 등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실종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영규(당시 11세)군의 누나 윤정(26)씨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하늘이 영규를 찾아 줄 것'이라 생각해 경북대 간호대를 졸업하고 지역 모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흐르면 동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윤정씨는 동생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일을 제대로 못해 동료들의 애를 태웠다.
또 김종식(당시 9세)군의 아버지 철규(사망 당시 49세)씨는 아들을 찾아 생업을 포기하고 전국을 헤매다 개구리소년이
실종된지 만 10년이 되는 지난해 3월 간암판정을 받고 병마와 싸우다 7개월여만에 숨을 거뒀다.
종식군의 누나 순옥(23)씨는 '경찰이 돼 잃어버린 동생을 찾겠다'고 마음먹고 계명대 경찰학과에 입학, 올해 경찰 임용시험에
응시할 계획이었으나 동생의 유골발견 소식을 들은 뒤 실신해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했다.
실종 사건 이후 태어나 형에 관한 이야기를 모르고 자랐던 종식군의 동생(9)은 유골 발견 소식이 알려진 뒤 가족들에게
'개구리소년이 뭐야?'라며 물어 유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발굴 현장을 찾은 시민들은 "유가족 뿐 아니라 전 국민이 무사귀환을 그토록 염원했는 데 이렇게 결말이 지어져 안타깝다"며
"경찰이 죽은 소년들의 원혼을 달래기위해서라도 한점 의혹도 남기지 않고 수사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수색만 제대로 했어도…”…반대편 능선만 집중수색
“지난 11년여 동안 유골이 발견된 곳을 수색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이 발견된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속칭 세방골에서 4대째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주민
도모씨(70)는 “우리 집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서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씨는 “아이들이 실종된 직후 경찰이 제대로 수색했더라도 시체나마 일찍 찾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안타까워했다.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 11년반 만에 자신들이 살던 동네에서 3.5㎞가량 떨어진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되자 ‘경찰은
그동안 뭘 했느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은 해발 299.6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나 면적이 270여만평으로 넓은 데다 유골이
발견된 곳(해발 150m지점, 깊이 2m)과 같은 골짜기와 구릉이 많아 수색이 쉽지 않은 곳.
경찰은 일단 개구리 소년들이 끼니를 거른 채 온종일 산을 헤매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길을 잃고 추위를 피해 골짜기
안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무너져 내린 흙더미에 매몰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 당시의 목격자 진술에 지나치게 의존해 이들이 발견된 반대편 능선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쳤을 뿐 정작 유골 발굴 지점은 수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달서경찰서의 한 직원은 “당시 수색작업은 전·의경들을 동원해 소년들이 살던 동네 쪽의 와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그나마 길이 없는 골짜기나 언덕은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고 말해 경찰이 ‘엉성한 수색’을 했음을 시사했다.
당시 6개월가량 초동수사를 지휘했던 김윤환(金允煥) 전 달서경찰서 수사과장(현 대구 동부경찰서장)은 “와룡산은 물론이고
인접한 성주군의 야산까지 여러 차례 수색했다”며 “수색에 허점이 있었는지, 타살된 뒤 매장됐는지는 확실치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당시 경찰이 가족의 얘기보다는 목격자의 신고를 더 믿는 바람에 제대로 수색이 안됐다고 지적했다.
김영규(金榮奎)군의 아버지 김현도씨(59)는 “가출할 아이들이 절대 아니라고 해도 경찰은 수사 방향을 다른 데로 돌렸다”며
“막연하게 수사를 확대하지 않고 수색을 철저히 했더라면 시신이라도 빨리 찾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당시 성서초교 도형기교장 “하루도 마음 편한날 없어”
“아이들 생각에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1991년 3월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 당시 대구 성서초등학교 교장이던 도형기(都亨基·76·대구
수성구 상동·사진)씨는 27일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퇴임해 지금까지
죄스럽다”고 말했다. 도씨는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뒤 정년퇴임한 그 해 8월까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거의 날마다 학생들과 함께 역이나 터미널에서 안내전단을 돌렸고 틈만 나면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그들의 가족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기도 했지요.
그래도 아이들이 살아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는데 이렇게 유골로 발견돼 허망합니다.”
도씨는 교직원과 학생 400여명이 참석한 퇴임식에서조차 “실종된 우리 학생들을
꼭 찾아야 한다”는 말로 퇴임사를 대신했다.
“골목에서 어린이들이 여러 명 지나가면 혹시 그 아이들이 아닌가 싶었어요.
외국에 나갔을 때 한국 어린이를 보아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종된 아이들은 꿈에도 여러 번 나타났습니다.
어디에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는 “아이들이 뜻밖에 와룡산에서 발견돼 더 미안한 마음”이라며 “처음부터 산을 잘 살폈더라면
가족들의 상처도 적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종된 아이들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산에서 헤매다 과연 얼어죽었을까요? 아이들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갖고 경찰이 수사했으면 합니다.”
도씨는 “이제 아이들을 가슴에 묻어야겠다”며 “아이들이 저 세상에서 실컷 공부하면서 함께 뛰놀기를
바랄 뿐”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개구리 소년’ 신고 보상금 5427만원… 이자붙어 사상최고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걸었던 신고보상금이 유골 발견자에게 지급될 경우 사상 최고액이 될 것으로 보여 관심을 끌고 있다.
신고 보상금은 91년 실종사건이 발생한 뒤 포항제철 등 6개 시민·사회단체 및 기업이 보상금을 기부하면서
1995년 4200만원으로 늘었다.
경찰은 당시 개구리 소년을 발견하거나 행방을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보하는 사람에게 이 돈을 주기로 했으나
성과가 없어 전액을 은행에 넣어두었다. 그 후 7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보상금은 원금에 이자가 붙어 27일
현재 5427만7450원으로 불어났다.
이는 부산교도소 탈주범 신창원이 전국을 무대로 탈주극을 벌임에 따라 경찰이 98년 7월 내건 현상금 5000만원이나
화성연쇄 살인사건 발생 당시 경찰이 내건 1000만원의 현상금에 내무부장관과 경기도지사의 기탁금 4000만원을 보탠
5000만원을 뛰어넘는 것.
경찰은 이번에 발견된 유골이 개구리 소년들의 것으로 확인되면 신고보상심의위원회를 열어 최초 유골 발견자에게 보상금
지급 여부를 확정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시신이나 유골을 발견했을 때도 보상금을 지급하는 규정이 있는지
일단 확인한 뒤 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적절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개구리소년3…타살인가, 조난사인가. 의문점 집중 수사
(2002.09.30/월)
"개구리 소년들 실종당일 사격장 탄두 주우러 갔다"
대구 달서경찰서는 지난달(2002년9월) 30일 ‘개구리 소년들이 총기 오인사격으로 살해됐다’는 제보와 소년들이 실종 당시
유골이 발견된 장소 인근의 군부대 사격장으로 탄두 등을 주우러 갔다는 제보를 확보, 사실 여부를 수사중이다.
경찰은 주민 한모씨(43·무직·대구 달서구 월암동)가 28일 수사본부에 찾아와 “7월 중순 옛 대구 달서구청 부근에서 구두닦이
일을 하던 중 30대 초반의 남자 손님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 복무를 할 때 소년들을 살해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제보했다고 밝혔다.
한씨에 따르면 이 남자는 ‘군 복무 당시 사격을 하던 중 어린이 5명이 나타나 2명이 총알에 맞아 1명은 사망하고 1명은 부상해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으로 쏴 죽였다’고 말했다는 것.
경찰은 문제의 발언을 한 남자의 인상 착의와 구체적인 대화 내용 등을 파악 중이다.
이와 관련해 경찰은 소년들이 실종될 당시 와룡산의 육군 모 부대 사격장(유골 발견지점에서 250m 거리에 위치)으로
탄두 등을 주우러 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 사격장이 소년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를 조사중이다.
숨진 박찬인(朴燦印)군의 친구인 김모군(19)은 “개구리 소년들과 군부대 사격장 주변에 탄두를 주우러 자주 놀러간 적이 있고
실종 당일에도 함께 사격장으로 가다가 사격장 부근의 연못 부근에서 ‘다리가 아프다’고 말한 뒤 헤어져 집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군은 55년부터 94년까지 와룡산 일대에 주둔한 육군 모 부대의 간이 사격장에서 쏜 유탄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날아갔을 수 있으며 당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울타리가 없어 마을 어린이들이 사격장 주변 일대에서 탄두 등을 주우며
놀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군은 또 유골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각종 총기류의 탄부들을 육안으로 검사한 결과 탄두 등이 심하게 부식된 점 등으로
미뤄 실종사건이 발생한 91년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유골발굴 하루전 제보” 정신이상자로 밝혀져▼
한편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2002년9월) 25일 서울의 한 언론사에 개구리 소년의 죽음에 관해
제보한 사람은 정신이 불안정한 정모씨(40·무직)로 30일 밝혀졌다.
서울경찰청은 이날 경찰에 자진 출두한 정씨를 조사한 결과 “10여년 전 가출한 뒤 서울에서 노숙하면서 껌팔이 등을 하고
있으며 가출 직후 권투를 하다 머리를 다쳐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로 91년부터 검찰과 언론사에 수시로 개구리 소년과
관련한 제보 전화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타살인가… 조난사인가…
‘타살인가 조난사인가, 아니면 사고사인가….’
‘개구리 소년’의 사인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경찰 수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골발굴 지점과 부근에서 발견된 탄두는 무엇인가〓유골 발굴 장소와 부근 반경 150m 안에서 모두 146개의 탄두
등이 발견됐다. 이에 따라 소년들이 탄두 등을 주워 갖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격장에서 날아온 유탄에 의해 숨졌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경찰은 ‘소년들이 실종된 91년 3월 26일은 지방선거를 위한 임시공휴일로 지정돼 통상 공휴일은 사격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군 관계자의 진술을 확보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중이다. 그러나 경찰관계자는 “군부대 사격일지의 문서보관 기간이
1년으로 당시 사격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당일 사격훈련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유골 위에 놓여 있던 돌은 무엇인가〓이 돌(가로 10㎝, 세로10㎝)은 최초로 유골을 발견한 주민이 지팡이로 밀어 놓은
것으로 판단돼 매장에 사용됐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경찰의 판단.
그러나 경찰은 이 돌이 인위적으로 놓여졌는지를 가리기 위해 돌의 성분과 현장의 흙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할 계획이다.
▽유골 1구의 체육복 상의 소매와 바지 아랫부분이 묶여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경찰은 일단 매듭의 조임
정도로 미뤄 저체온사 때 생기는 이상체온의 상승으로 옷을 벗었을 가능성이 있고 보온을 위해 매듭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사망자 본인이 매듭을 지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매듭을 만들 수도 있다는 소견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아직 매듭에 관한 명쾌한 설명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지형에 익숙한 소년 5명이 한꺼번에 길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가〓경찰은 실종 당일 와룡산의
기온이 최저 3.3도였던 데다 비까지 내려 체감온도는 영하일 것으로 추정돼 이들이 산속을 헤매다 길을 잃고 동사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유골이 발굴된 곳에서 600m 지점에 구마고속도로가 있어 소년들이 도로에
켜진 가로등 불빛만 보면 쉽게 산을 내려 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당시 지형과 산세에 밝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산 가능 여부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개구리소년 관련 7가지 의문점 집중 수사
개구리소년 타살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소년들의 사인과 관련해 유족 등이 제기한 의문점을 밝히는 데
수사력을 모으기로 했다. (2002년9월) 30일 경찰에 따르면 유족 등이 타살을 주장하며 제시한 7가지 의문점과 관련,
과거 수사기록과 각종 신고 및 제보사항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경찰은 우선 대규모 수색에도 사체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소년들이 타살돼 암매장됐을 것이라는 유족들의 주장과 관련해 지난 91년 당시 수색 소홀여부를 가리기위해 당시
수사기록을 전면 재검토하고 임야 소유자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 이 소년들이 와룡산 지형에 익숙했고
이들이 한꺼번에 저체온사 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 기상조건 등을 다시 검토하고 저체온사와 관련한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할 계획이다.
개구리소년들이 유골 발견 장소까지 가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이들의 친구 등이 '도롱뇽을 잡거나 탄피를 줍기 위해
자주 와룡산에 오르내렸다'고 진술함에 따라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와 함께 현장에서 600m 가량 떨어진 곳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야간에도 차량불빛이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현장을 중심으로 다시 수사하는 한편 아동심리학자 등의 자문을 받아 계속 수사하기로 했다.
체육복 윗도리 등이 묶여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매듭의 조임 정도가 약한 것 등으로 미뤄 소년들이 저체온으로 사망 직전
보온효과 또는 이상 체온 증가현상 때문에 옷을 벗었을 것으로 봤지만 누군가 살해한 뒤 암매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또 현장에서 발견된 탄두 등에 대해서는 군부대 관계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조사중이지만 부대내 사격일지가 없는 상태이고
군이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골이 발견될 당시 돌에 눌려있었던 것과 관련해서는 현장에서 발견된 돌의 일부분과 주변 흙 등에 대한 정밀감정을 통해
돌이 다른 곳에서 옮겨졌는지에 대해 밝히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국민 모두의 관심사인 만큼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한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원점에서 다시 수사를
시작했다
개구리소년4…유해발굴현장, 길 잃었을 가능성 희박
(2002.10.04/금 11:32)
`개구리소년' 길 잃었을 가능성 희박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굴된 대구시달서구 와룡산 일대에 대한 항공사진을 판독한 결과 이들이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2년 10월 4일 `성서초등생 실종사건 수사본부'에 따르면 지난 1990년 12월과 지난해 2001년 11월에각각 촬영된
항공사진을 비교, 검토한 결과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지점에서 250여m 떨어진 곳에 민가 3-4채, 600여m 떨어진 곳에
구마고속도로가 각각 있는 것을확인했다. 또한 민가와 유골이 발굴된 지점 사이에 있다가 개발로 인해 사라진 `안산'의높이가
유해 발굴 지점보다 높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개구리 소년들은 고속도로의 불빛이나 민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충분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경찰은 이날 유해발굴 지점 부근에서 발견된 움막이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지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지문채취 작업 등을
벌이는 한편 100여명의 인력을 동원, 와룡산 일대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한 "와룡산 중턱에서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함모(당시 11)군의 제보와"와룡산 부근의 `선원지'라는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20대 괴청년 6-7명을 목격했다"는 주민들의 제보 등 실종 직후에 접수된 제보와 51건의 새로운 제보가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이와함께 주둔부대 병력이 사격을 하지 않는 날을 이용해 미군들이 사격연습을 했다는 군 당국의 주장에 따라
실종 당일에 미군이 사격을 했는지 여부와 유해발굴 현장 인근에 간이 사격장이 있었는지 여부 등에 대한 수사도 병행하고 있다.
(2002.10.03/목 15:08)
유해발굴 현장 인근 '비트' 발견
‘개구리 소년’ 타살 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성서초등생 실종사건 수사본부’는 2002년10월3일 유해 발굴 현장 인근에서 ‘비트(땅굴)’로 추정되는 구덩이를 발견해,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지 여부를 수사 중이다. 경찰은 유해 발굴 현장 일대에
수색 작업을 벌이던 중 동북쪽으로 2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사람이 은거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로 1m,
세로 1.7m, 깊이 0.7m 크기의 구덩이 1개를 발견했다. 이 구덩이는 비를 피하기 위해 윗부분이 비닐장판으로 덮여졌고
남쪽 방향으로통로가 나 있었으며 구덩이 내부에서 2000년 8월 4일자 모스포츠 신문과 플라스틱통,가방, 분유통 등이 발견됐다.
경찰은 구덩이를 덮은 장판이 99년에 제조된 것으로 미뤄 이 구덩이가 3년전에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정밀감식을 위해
장판 등의 물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경찰은 또한 국정원, 기무사 등과 합동신문조를 구성해 대공용의점을
등이 산속에 거주하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이날 유해발굴 현장 인근에 간이사격장이 설치됐는 지 여부 등을 파악하기 위해 90년대초 현장 주변을 촬영한
항공사진과 2000년 이후 촬영된 항공사진을정밀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한 100여명의 인력을 동원, 유골발굴 과정에서 찾지 못한 조호연(당시 12)군의 점퍼와 나머지 뼈 조각 등을 찾고 있다.
개구리소년 사망정황 4년전 ‘쪽집게 예측’ (2002.10.03)
○…한 수맥 전문가가 5년전 자신의 저서에서 개구리 소년들이 대구 와룡산에 매장돼 있는 사실을 예언한 것으로 2일 밝혀졌다.
서울 역삼동 해청생활과학연구소 안국준(43)소장은 98년에 지은 ‘수맥과 명당 길라잡이’라는 책에 실린 ‘개구리 소년에
대하여’라는 1쪽 반짜리 글에서 “다섯명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며, 그 시체 위에 낙엽이 약 30㎝ 정도 덮여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다”고 적었다.
실제로 소년들은 지난달 26일 유골 발견 당시 5명이 함께 묻혀 있었고 30㎝ 전후의 흙·돌·낙엽 등이 유골 위를 덮고 있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날이 어두워져 길을 잃게 되었고 길을 찾으려고 이틀을 계속 헤매다가 사흘째 되는 날 배도 고프고
기진맥진하여 사망했다”고 쓰고 있다. 안씨는 이 책에서 “개구리 소년 중 한 명인 김종식군의 영혼과 대화를 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며 “소년들이 자신의 시신을 거두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개구리소년5…개구리소년 소식 중간마무리
경찰 "'개구리소년' 사인 단서 못 찾아"…10/25 중간수사결과발표
인위적 매장 여부 등 중점 수사
'개구리 소년' 타살 의혹 사건을수사 중인 대구지방경찰청은 10월25일 사인 규명에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따라 개구리 소년들의 사인 규명 작업은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찰은 앞으로 경북대 법의학팀 등 전문가의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다각적으로 수사를 벌이고 특히 소년들의 일부 두개골에
나타난 구멍과 함몰 흔적, 김영규(당시11)군의 옷에 매듭이 지어진 사유 등 타살 의혹에 대해 중점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달 26일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구릉지에서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이후 경북대 법의학팀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 곤충학자, 토양학자, 산림학자 등 관련 전문가를 총동원해 소년들의 신원 확인 및 사인 규명 작업을 벌였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의류.신발 등을 바탕으로 소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골에 대한 DNA 검사를 통해 최종 신원을
확정할 방침이지만 사인 규명과 관련해서는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유골과 함께 탄두와 탄피 등이 무더기로 발견됨에 따라 인근 군부대 유탄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수사했으나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김영규군의 상의와 하의가 묶여있는 상태로 발견됐으나 이 또한 매듭 방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려 제3자에 의해 묶여졌는지를 규명하지 못했다.
우철원(당시 13)군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에 나타난 구멍과 함몰 흔적이 외력에 의한 손상인지 여부를 조사했으나 두개골
내에서 금속 물질이 추출되지 않는 등 뚜렷한 타살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현장에서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발견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결론을 보지 못했다.
또한 경찰은 105건의 신고 및 제보와 주민 탐문 수사에서도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사체이동 여부를 밝혀줄 토양검사, 소년들이 민가나 인근 구마고속도로 불빛을 볼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지형검사, 유골발견에서 출토까지의 정황을 3차원 시뮬레이션으로 재구성하는 작업 등을 경북대 법의학팀 등 관련 전문가에
추가 의뢰, 조사 중이다.
경찰은 이와함께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움막 거주자 김모(36)씨의 소재를 계속 확인중이며, 지난 11일에 접수된 '92년
6-7월경 한 택시승객이 개구리소년을 죽였다는 말을 했다'는 택시기사 문모(44)씨의 제보 등 신빙성 있는 제보 3건에
대해 수사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과 국민들에게 속시원히 소년들의 사인을 밝혀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타살 의혹 등 모든 가능성에 대해 다각적으로 수사를 벌이는 등 사건해결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구=연합뉴스)
'개구리소년' 사인 규명 장기화될 듯 (2002.10.24/목)
개구리 소년들이 유골로 발견된지 오는 10월25일로서 한달이 되지만 소년들의 사인과 관련, 결정적인 물증이나
제보가없어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경북대 법의학팀, 곤충학자 등 각계 전문가에게 유골 및 현장 감식을 의뢰했지만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했으며 100여건에 달하는 제보도 대부분 신빙성이 떨어져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개구리 소년들의 사인 규명 작업은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 타살이냐 사고사냐 = 결론적으로 타살이냐 타살이 아닌 사고사(저체온사)냐를 밝혀줄 근거가 될 만한 단서가
확보되지 않았다.
경찰은 소년들의 유골과 옷가지, 유골발굴 현장 일대에서 발견된 탄두와 탄피등에 대한 분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으나 혈흔이나 탄흔 등 사인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찾지 못했다.
경북대 법의학팀도 유골에 외력이 가해졌는지와 두개골에 금속 물질이 있는지 여부 등에 대해 정밀감식을 했으나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유골에 묻은 곤충 각질분석을 통해 사체 이동 여부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곤충학 검사에서도
별다른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 경찰 수사 = 경찰은 유골 발견지점 인근에서 발견된 움막 거주자의 소재를파악하고 있으며 실종당시
인근 주민들에 의해 수상하게 여겨진 20대 초반 낚시꾼 5-6명과 도롱뇽 판매상 등을 찾고 있다.
또한 인근 군부대에 근무했던 전역자를 찾아 소년들의 실종 당일을 전후해 사고가 있었는지 여부를 탐문 조사하는 한편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옷가지 등을 찾기 위해 와룡산 일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있다.
경찰은 이와함께 유골 발견지점이 퇴적지형인지 침식지형인지를 밝혀줄 토양.지질검사, 소년들이 민가나
인근 구마고속도로의 불빛을 볼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지형검사, 유골 발견에서 출토까지의 정황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구성하는 작업 등을관련 전문가에 의뢰했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유골 및 유품에 대한 추가 감식 작업을 벌인 뒤 조만간 1차사인분석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며
필요하면 외국 전문가에게도 유골 감식을 의뢰,추호의 의심도 없는 결과를 도출할 방침이다.
◇ 수사 문제점 = 경찰은 유골 발굴때 삽으로 땅을 마구 파는 등 현장을 훼손해 사인을 밝혀줄 결정적인 단서를 놓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경찰 내부에서도 `수사와 감식을 전혀 모른 행위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한 유골발견 하루 전날인 지난달 25일에 공교롭게 모일간지 편집국에 제보를 한 정모(40.주거부정)씨에 대한 수사가
미진하고 유골 발견 현장에서 나온 탄두와 탄피에 대한 수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당시 유골 발견 현장 부근에 간이사격장이 있었는지, 미군의 사격장 이용여부 등 총기사고 관련성에 대해 군에서
통보하는 내용만을 수사 자료로 삼을 것이아니라 군과 공동으로 조사단을 구성,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유족 슬픔 = 실종된 소년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으로 믿고 11년여간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꿋꿋하게 살아온
유족들은 또 한번 부모로서 감당하기 어려운고통에 빠졌다.
유족들은 유골이 발견된 직후 경찰측이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섣불리소년들의 사인을 사고사(저체온사)로
추정하자 "아이들을 두번 죽이는 꼴"이라면서 거세게 반발, 수사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유족 가운데 김종식(당시 9세)군의 아버지는 10년간 자식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병을 얻어 지난해 세상을 떠났으며
박찬인(당시 10세)군의 아버지는 술로날을 지새다 최근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되는 등
실종 소년들의 가족들은 한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유가족대책위원회를 구성, 사인 규명 작업을 철저히 지켜보기로 했으며 지난 22일에는 국회에서 열린
실종미아에 관한 법 제정 공청회에 참석하는 등 또다시 굳센 모습으로 일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탄두·탄피서 혈흔 검출 안돼"
’개구리소년 집단 피살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유해 발굴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탄두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10월12일밝혔다. ‘성서초등생 실종사건 수사본부’ 관계자는 이날 “유해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탄두 65발과 탄피 1발 등을
감정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측이 탄두 및 탄피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고 탄환의 변형으로 인해 인체 관통여부를
감정할 수 없었음을 통보해왔다”고 전했다.
수사본부는 또한 “국과수측이 단팥빵 봉지 등 비닐 봉지 3개에서도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고 도롱뇽 알의 성분도 검출하지
못했음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한편 법의학팀은 이날과 13일 예정으로 두개골에 낀 이끼류와 곰팡이에 대한 현미경 검사를 실시하는 한편 현장 주변의
동물 생태계를 탐문조사하고 현장 지형을재조사하고 있다.
'와룡산은 우범지대였다'
개구리 소년들이 유골로 발견된 대구 와룡산에서는 지난 1988년 저수지에서 결박된 70대 노인의 시신이 발견되는 등
강력사건이 적잖이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와룡산 주둔 육군 제50사단에 파견근무했던 박모(38.자영업.대구시 북구)씨는 9일 "88년 가을 와룡산 선원지에서
손발이 천으로 함께 묶인 70대 노인의 익사체를 발견해 건져올린 적이 있다"며 "와룡산 일대는 밤이 되면 밖으로 나가기가
겁나는 우범지대였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자살로 처리, 종결됐으며 익사사건은 그 뒤에도 한 차례 더 발생한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지난 1989년에도 이번 유골 발견 장소와 가까운 각개전투장 부근에서 30대 여자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등
이 일대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이전에도 3차례가량 강력사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개구리소년 두개골에 이끼 흔적 (2002.10.08)
‘개구리 소년들’ 두개골 일부에서 ‘이끼’가 낀 흔적이 발견돼 이들의 사인 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개구리 소년들 유골을 정밀 감식중인 경북대 법의학팀(단장 곽정식·郭精植 교수)은 8일 유골을 씻는 과정에서
2개의 두개골 정수리 부분에서 이끼로 추정되는 물질이 나왔다고 밝혔다.
법의학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이끼는 땅속에 묻힌 상태에서는 자생할 수 없고 상당기간 외부에 노출돼야 생육이 가능한데
이끼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된 두개골의 경우 흙에 덮인 흔적이 없어 상당기간 외부에 노출된 채 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찰은 그러나 소년들의 시신이 매장돼 있다 빗물 등에 의해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두개골이 외부에 상당기간 노출돼
이끼 등이 끼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중이다.
법의학팀은 두개골에서 이끼가 낀 흔적만으로는 소년들이 ‘조난에 인한 저체온사’로 숨졌음을 입증할 수 없는 만큼
독극물 및 토양검사, 곤충학 검사 등의 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사인 규명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또 유골 발굴 현장에서 위쪽으로 5.3m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된 길이 3㎝, 지름 2㎝ 크기의 숯 20여개와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또다른 길이3㎝, 지름 1㎝ 크기의 숯 2개가 이들의 죽음과 관련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한편 개구리 소년들 유족들은 검사가 끝나는 대로 유해를 인도받은 뒤 화장(火葬), 대구 와룡산에 뿌려 주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개구리소년 목격자 최면수사 검토
'개구리소년' 사망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실종 당시의 목격자나 제보자 등을 상대로 최면수사를 실시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10월8일 수사본부 관계자는 "사건의 전면 재수사에 따라 당시 목격자나 제보자들을상대로 목격담 등을 재확인하고 있으나 많은 세월이 흘러 기억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며 "당시 정황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최면수사를 도입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건 발생 당시 "실종 다음날인 91년 3월 27일 오후 6시께 와룡산 부근한 상점에서 김종식(당시 9세)군을 봤다"고 진술한 바 있는 S(20.여)씨는 최근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최면수사는 뺑소니 교통사고 등에서 차량번호를 기억해 내는 등 자칫 미궁에빠질 수 있는 사건의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해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군 사격훈련 여부 확인안돼 수사지연 (2002.10.07)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발생을 전후해 현장 주변에서 주한미군의 사격훈련 실시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수사 장기화의 한가지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2002년10월7일 '성서초등생 실종사건 수사본부'와 육군 제50사단에 따르면 지난 2일 주한미군 제19전투지원사령부에 당시 현장 주변에 주둔했던 부대의 명칭과 주둔기간, 실종 전후의 사격훈련 실시 여부 등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육군의 이번 요청은 당시 달서구 장기동 일대에 미군이 주둔했었다는 주민들의 진술과 지난 88-91년 당시 50사단에 복무했던 전역자들이 '미군이 수차례 사단사격장에서 훈련을 했었다'는 진술을 근거로 이뤄졌다. 그러나 1주일이 다 돼가지만 미군은 상급부대 허락 및 당시 자료검색 등을 내세워 단순히 '사격훈련이 없었다'는 내용만 확인했을 뿐 당시 사격일지 등 명확한 증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미군측의 사실 확인이 늦어지자 유족 등 일부에서는 '국군과 달리 소비 실탄 수가 많은 미군이 훈련 도중 오발 사고를 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등 미군관련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한 유족은 "사격장 사선(射線)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오발 사고 가능성이없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수백발의 탄두가 발견된 만큼 당시 사격훈련을 한 적이 있는 미군도 의혹을 벗어버릴 수는 없다"며 미군의 빠른 사실 확인을 촉구했다. (출처: 대구=연합뉴스)
개구리소년6…개구리소년들 타살됐다
(2002.11.12/화)
'개구리 소년' 타살 공식확인…경북대 법의학팀
실종된지 11년 반만에 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 상태로 발견된 대구 '개구리 소년들'이 살해됐다는 법의학팀의 조사결과가 나왔다. '개구리 소년들'의 사망 원인을 조사중인 경북대 법의학팀(단장 곽정식·郭精植교수)은 11월12일 유골에 대한 신원확인 및 사망원인에 대한 1차 소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 법의학팀 채종민(蔡鍾敏)교수는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에 대한 정밀 감식 결과 우철원(禹哲元·당시 13세)군의 두개골 등 3구의 두개골 10여군데에서 함몰 흔적과 끝이 날카로운 흉기에 의해 찍힌 것으로 보이는 자국이 발견됐다"면서 "이 흔적은 소년들이 숨지기 전 외부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았음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발견된 두개골의 함몰 흔적 등에 대해 국내외 법의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았으며 그 결과 이들이 살해됐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두개골에 생긴 함몰 흔적과 구멍 등은 사냥총 등에서 발사된 산탄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될 당시 유골의 위치가 매우 부자연스러웠던 점도 이들이 살해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찰수사= 경찰은 개구리 소년들이 살해됐다는 법의학팀의 결론에 따라 이들이 일단 누군가에 의해 살해돼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사망 경위를 밝혀내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특히 경찰은 이날 법의학팀이 '정신이상자나 성격이상자가 끝이 날카로운 드라이브 등 흉기로 소년들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제시함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또 소년들이 실종된 대구 와룡산에서 고라니 사냥꾼들이 출몰했었다는 당시 주민들의 진술에 따라 소년들이 산에서 변형된 공기총에 의해 오인 살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달서구 성서지역 공기총 소지자 120여명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하고 있다.
▽유족 반응= 유족들은 법의학팀이 개구리 소년들이 살해됐다는 발표에 대해 당연한 결론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아이들이 처음부터 살해됐다고 주장했는데 경찰은 이같은 의견을 무시하고 실종이나 가출로 몰고갔다"며 "경찰의 수사가 처음부터 잘못됐음이 이번 발표로 여실히 드러났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영규군의 아버지 김현도(金鉉道·58)씨는 "아이들이 살해됐다는 법의학팀의 발표를 듣고 가슴에 맺혀있던 한이 어느정도 풀린 것 같다"면서 "타살로 확인된 만큼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해 범인을 반드시 잡아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개구리소년 살해도구 공기총 가능성 높아
개구리소년 피살 사건을 수사 중인 대구지방경찰청은 11월14일, 소년들을 살해한 범행 도구가 공기총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찰은 6.4㎜ 공기총으로 소년들의 유골 강도와 비슷한 돼지머리와 은행나무.참나무.물푸레나무 등에 발사한 결과 은행나무에 나타난 탄흔이 우철원(당시 13)군의 유골 상처와 육안상 유사한 것으로 확인했다.
경찰은 이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공기총 총알로 사용되는 납 대신 구리와 철사를 1.2-2.3㎜로 절단해 이를 공기총에 25-30개씩 넣어 발사해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경찰은 이 실험 결과를 경북대 법의학교실에 보내 정밀 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또한 `+'자 드라이버와 호미 등 예리한 흉기에 의한 실험도 계속적으로 실시, 유사한 상처 문형이 나타나는지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
이와 관련, 경찰은 개구리소년의 두개골에 나타난 1.4-2.0㎜ 크기의 직사각형 또는 `ㄷ'자 문형의 상처를 현미경으로 확대한 사진과 1천만원의 신고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 등을 실은 전단 5천장을 제작, 배포했다.
경찰은 이와함께 지난 92-96년도 성서초교 졸업자와 당시 목격자를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는 한편 유골 발견 인근지역에 살고 있는 정신 이상자, 주변 불량배, 밀렵자, 등산객 등에 대해서도 계속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다. 한편 경찰에는 범행도구와 관련, `철공소 망치', `목공용 끌' 등 다양한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한 시민의 주도로 개구리소년 위령제 추진
타살된 것으로 발표된 '개구리소년'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위령제가 한 시민의 주도로 치러진다.
지난 10여년동안 가족 이상으로 실종 개구리소년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볐던 나주봉(48.전국 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회장)씨는 경북대 법의학팀의 타살잠정결론 발표를 듣고 소년들의 넋이라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씨는 11월14일 "누군가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 싸늘한 유골로 돌아온 그들의 혼이 따뜻한 안식처를 찾아갈 수 있도록 부모들과 협의해 이들이 발견된 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내주중 `위령제'를 마련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나씨는 이날 종교계 인사들과 무속인들을 불러 개구리소년들을 위한 씻김굿 등넋을 기리는 의식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수사가 끝나면 장례식을 치르는 한편 소년들이 사라진지 12년째 되는 내년(2003년) 3월에는 추모비도 세울 계획이다.
나씨가 이처럼 '개구리소년들'의 일에 마지막까지 발벗고 나서는 것은 그들이그의 삶을 평범한 노점상에서 미아찾기 전문가로 탈바꿈시킨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나씨가 실종미아를 찾는 일에 뛰어든 것은 지난 91년 6월 인천 월미도에서 전단을 돌리던 '개구리 소년'들의 아버지 4명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당시 나씨는 각설이 차림을 하고 음반테이프를 팔러 트럭을 타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평범한 노점상이었지만, 사라진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부모들의 애타는 모습을 보고 전단지를 나눠갖고 장사 틈틈이 시민들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곧 전국을 무대로 테이프, 옷가지 등을 파는 그의 노점트럭은 사라진 아이를 찾는 부모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미아의 사진과 이름을 게시하는 등 '실종미아 홍보트럭'으로 바뀌었다.
나씨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실종미아들을 찾기 위한 정보공유가 필요하다고 판단,2000년 4월 200여 실종미아 부모를 회원으로하는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을 결성했다. 그의 노력으로 가족들의 품으로 되돌아간 아이는 20명을 넘어섰다.
그는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미신고 보호시설 등록 의무화 등을 규정하는 실종미아에 관한 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나씨는 "개구리소년들은 비록 싸늘한 유골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찾기 위한 노력끝에 많은 미아들이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 왔고, 실종미아를 위한 법안이 마련되는등 개구리소년들에게 큰 빚을 졌다"며 "넋을 기리는 영혼제로 어린 영혼들이 저세상에서나마 편안히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골 발견 1주년] (2003.09.25)
청와대 찾아간 `개구리 소년들의 넋`
"범인잡아 한 풀어줘요"
아버지들, 전면 재수사 요구
盧대통령 면담 신청…시기놓친 경찰에도 소송 검토
◀사진: 25일 오전 개구리 소년 아버지들이 청와대 민원실을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 면담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경찰의 강도 높은 재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개구리 소년’의 유골이 발견된지 1년을 맞은 지난 24일 밤 숨진 조호연·김영규·박찬인·우철원군의 아버지들이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2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범인 체포는커녕 범행 도구도 밝혀내질 못하고 있어 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러 온 것이다.
밤 늦게까지 술집에 앉아 이들은 소주로 울분을 털어냈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어진 우철원군의 아버지 우종우(52)씨는 “아이들 유골이 나온지 1년이 다 되도록 타살추정이라는 말뿐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아이들 장례식을 치르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골만이라도 보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마음만 더 아픕디다. 법의학팀에서는 우리 아들 유골에 제일 상처가 많고 저항이 심한 흔적이 있다며 나를 불러 놓고 수시로 큰 스크린에 상처 자국을 수십배 확대해서 보여주는데 고마 그런 날에는 밥이 안 넘어갑니다. 저렇게 날카로운 것이 와서 내 아들 머리에 박히는데 죽는 순간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자꾸 된다 아닙니까?” 그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 놓았다.
지난 1991년 3월 26일 개구리를 잡겠다고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아이들 5명의 유골이 사건 발생 11년 만에 대구 와룡산 중턱 성산고교 신축공사장에서 발견되자 당시 경찰은 ‘저체온사’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후 11월 경북대 법의학팀의 ‘타살추정’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발표한 후 재조사를 하기로 결정했었다.
그에 따라 경찰은 연인원 2만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고 신고·제보 200여건에 대해 일일이 확인작업을 벌였지만 별다른 소득없이 끝났다. 지난 4월부터는 수사요원 10여명으로 수사본부를 축소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찰은 “두개골에 난 수십 개의 상처로 보아 소년들이 정신이상자나 밀렵꾼들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일대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벌이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발표에 머물고 있다. 경북대 법의학팀도 어린이 유골과 비슷한 강도(强度)의 돼지 두개골로 손상실험까지 했지만 뚜렷한 소득을 얻지 못했다.
박찬인군의 아버지 박건서(47)씨도 “경찰은 ‘사건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사건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으니 대통령 면담을 통해서라도 재수사를 건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구리 소년’의 아버지들 중 김종식군 아버지는 유골이 발견되기 전인 지난 2001년 간암으로 숨졌다. 이들은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그 묘소를 찾아가 “범인은 우리가 꼭 밝혀내 종식이 원한을 풀어 줄테니 편히 눈 감으소”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사실상 수사 종결’ 상황에 직면하면서 개구리 소년 유가족들은 경찰청을 상대로 하는 민·형사 소송도 검토 중이다. 지난 91년 3월 26일 실종 당시 수사 소홀과 작년 9월 26일 유해발견 당시 현장훼손 등으로 범인 검거를 위한 시기와 단서를 놓친 법적 책임을 경찰에 묻겠다는 입장이다. 당초 유족들은 유골 발견 1주년을 맞아 26일 ‘개구리소년 합동장례식’을 치르려고 했으나 장례식을 ‘아이들의 원혼을 풀어줄 때’까지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2003년 9월 25일 오전 10시 개구리소년 아버지들과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대표 나주봉씨는 청와대 민원실을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 면담 신청서를 제출했다. 민원실 담당자는 “검토해볼 테니 일단 돌아가 기다리라”고 전했다.
(2003.09.23)
애타는 개구리 소년 유가족
유해발견 1주년 앞두고 대통령 면담요청 추진
◀사진: 작년(2002년) 9월26일 와룡산에서 개구리소년 5명의 유해가 발견된 후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와룡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12년 6개월 전 개구리소년 5명이 사라지던 날에도, 1년 전 그들이 유해로 돌아오던 날에도…. 두개골에 남은 상처만이 그날의 고통으로, 그동안의 원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오는 26일이면 개구리소년 유해가 발견된 지 1년이 된다. 경북대 법의학교실이 6주간의 정밀감식을 통해 사망 원인을 ‘타살 추정’으로 결론냈지만 경찰은 범인체포는 커녕 범행도구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 청와대 찾아나서는 유가족들 = 개구리소년의 아버지 4명은 25일 청와대 민원실을 방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면담을 요청할 계획이다. 자식 잃은 부모의 한맺힌 심정을 호소하고 범인검거를 위한 강력한 재수사를 경찰에 지시해 달라고 건의할 생각이다. 김영규(실종당시 11세)군의 아버지 김현도(57)씨는 “사인이 타살이라는 법의학적 결론이 내려졌다면 최소한 범행도구라도 밝혀졌어야 한다”며 “경찰이 사건해결 의지가 없다면 대통령 면담을 통해서라도 재수사를 건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경찰청을 상대로 하는 민·형사 소송도 검토 중이다. 지난 91년 3월 26일 실종 당시 수사 소홀과 작년 9월 26일 유해발견 당시 현장 훼손 등으로 범인 검거를 위한 시기와 단서를 놓친 법적 책임을 경찰에 묻겠다는 입장이다.
◆ 장례식도 못치른 어린 영혼들 = 지난 3월 합동장례식을 검토했던 유가족들은 범행 전모가 밝혀져 소년들의 원망이 풀릴 때까지 장례식을 무기 연기했다. 유가족들은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지난 2월 성서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는 자리에서 실종 당시 전국 교육청에서 모금해준 성금 2000만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해 주변에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 경찰 수사 제자리 걸음 = 경찰은 지난해 유해 발견 후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지만 사실상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수사본부에 접수된 신고 및 제보 200여건도 조사했지만 범인체포는 커녕 범행도구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수사 관계자는 “사건 발생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인적·물적 단서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범행 전모를 밝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서울까지온 개구리 소년 아버지
2003년9월24일 밤 10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한 식당에서는 대구에서 상경한 개구리 소년의 아버지들이 모여 앉아
소주를 들이키며 통곡과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유골이 발견된지 1년, 실종된지 12년 6개월을 맞는 26일을 앞두고 미궁에 빠진 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대통령 면담을 요청할 요량으로 먼 길을 달려 온 것이지요.
쌓여 있던 빈 소주병들을 치우던 호연이 아버지 조남환씨는 “세상에 우리 애들 유골이 1년이 다 되가도록 싸늘한 경북대
법의학팀 연구실에 보관돼 있다”며 “지금까지 타살추정이라는 결론만 나왔지 범인이 누군지, 범행도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어째 아이들 장례식을 치뤄 주겠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난해 9월 26일 이후 ‘아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가족들은 ‘두개골에
남아 있는 상처’만을 가슴에 끌어 안은채 또 다른 고통의 1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영규 아버지 김현도씨는 “유골을 확인하기 전에는 ‘북한에 끌려 갔든, 일본으로 인신매매를 당했든 살아만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내심 가지고 있었다”며 “이제는 밤만 되면 혼자 찬 방바닥에 누워 ‘참말로 죽었는가?’하고
하나 있던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말했습니다.
철원이 아버지 우종우씨는 술기운으로 온통 얼굴이 붉어져 있었습니다. “유골만 발견되면 한결 나아질 줄 알았는데,
자꾸만 죽는 순간 머리에 날카로운것이 와서 수십번 박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자꾸 됩니다.
더 괴롭기만 하니 술에 찌들어 살 수 밖에요” 그는 끝내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오자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었습니다.
지난 12년 6개월 동안 간암으로 세상을 먼저 뜬 아버지, 울화통을 경찰에 풀다가 공무집행방해로 감옥신세 진 아버지,
술과 담배에 절어 몸이 망가진 아버지, 빚더미에 올라 집세도 못내고 있는 아버지. 이들에겐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찰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지난 1991년 3월 26일 개구리를 잡겠다고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아이들 5명의 유골이 사건발생 11년 만에 대구 와룡산 중턱
성산고교 신축공사장에서 발견되자 당시 경찰은 ‘저체온사’라고 자연사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이후 11월 경북대 법의학팀의 ‘타살추정’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발표했고 조사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한때 연인원 2만 명이 동원됐던 대대적인 수사도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지난4월부터는 수사요원 10여명으로
수사본부를 축소 운영하고 있습니다.
명맥한 유지하고 있는 수사본부이긴 하나 유골 발견 당시 현장보존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사가 지지 부진해
사실상의 ‘수사 종결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경찰이 이렇게 맥을 놓고 있는 가운데 개구리 소년 아버지들은 공소시효가 2년 밖에 남질 않아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경찰 때문에 우리 실종된 찬인이가 못 돌아오고 있다”며 경찰을 폭행해 아들 유골이 발견된 날 현장에 가보지도
못했던 찬인이 아버지 박씨는 “경찰이고 뭐고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우리들끼리라도 사설기관에 의뢰를 하던 범인을
꼭 잡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박씨는 개구리 소년들의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고 온 우상태 형사에게 “뒷산에서 없어진 우리 아이들더러
가출이라고 하질 않나 유골이 나온 현장을 보존도 하질 않고 파헤쳐 놓질 않나?”라며 화풀이를 해 댔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는 우형사를 향해 이들은 “지난 12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형사들과 쌓인 ‘미운정’도 보통은 아니제?”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지난 2003년 9월 24일 밤 상경한 개구리 소년 아버지들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씨름을 하다가 결국
2001년 간암으로 먼저 돌아가신 종식이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낯선 서울 한 여관방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종식이 아버지. 남은 우리들이 종식이 원한을 풀어줄테니께, 걱정 붙들어 매고 편히 눈감으소.
언젠가 진실은 나타나게 마련 아닙니꺼.”
개구리 소년 아버지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12년 6개월전의 진실’.
과연 그날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