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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지고 난 자리에 새 움이 돋는다
1999년 11월 1일 선화회 초청 법회 -법정스님
오늘 아침 <삶에 대한 티베트의 지혜> 무주선원에 올려드리고 이어서 법정스님의 책 <한사람은 모두를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을 타이핑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티베트의 쇼갈 린포체와 한국의 법정스님과 미국의 스코트 니어링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트라이 앵글처럼 서로를 뒷받침해주며 멋진 조화를 이루는 음악 같다고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날 법문이 길어서(책으로 16쪽) 2~3회에 걸쳐 올려드리겠습니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준비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제가 금생에서 처음으로 늙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도 늙었나 봅니다. 늙음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말을 하려는 것을 보니, 늙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합니다.
인생에는 생로병사의 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삶의 과정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 중에서 나이가 많든 적든 늙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늙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젊음과 마찬가지로 노년에도 그 나름의 분위기와 기쁨과 고뇌가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열매가 익어 가듯,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 인생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노년에 이르면 인생의 전 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관조의 시야가 열립니다.
며칠 전 미국에서 일흔일곱 살의 존 그레이라는 노인이 우주비행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우주 공간을 돌고 있습니다. 육신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혼일곱 살 먹은 노인이 일반 항공기도 아니고, 우주비행 캡슐을 타고 우주를 배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 우주비행은. 우주 공간에서의 무중력 상태가 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 실험에 자기 자신을 선뜻 제공한 것입니다. .그는36년 전에 우주에 다녀왔지만, 다시 한 번 그 때를 회상하면서 우주비행 나섰다고 합니다. 그 탐구 정신과 열정과 기상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늙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육신의 나이에 집착해서 우리가 그것을 묵혀 둘 따름입니다. 나이를 탓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한다면 삶 자체가 스스로 노쇠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쇠의 종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움직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이 우주든 작은 미생물이든 또 자연현상이든 늘 살아 움직입니다. 끝없이 움직입니다. 안팎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다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면, 팔 다리 근육이 쇠퇴하고 무기력해집니다. 두뇌도 마찬가지입니다. 활용하지 않으면 마치 묵은 밭처럼 잡초만 무성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지나칠 정도로 안정을 하게 되면 도리어 해롭습니다. 안정을 취하다 보면 끝없이 퇴행되어 갑니다. 눕기를 좋아하면 결국 관 속이나 흙 속에 파묻힐 때를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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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이 없는 사람이 늙습니다.
늙을 겨를이 없는 사람은 늙을 수가 없습니다.
늙고 싶어도 늙을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적당히 활동하지 않으면 뼛속 칼슘이 녹아 핏속으로 흘러가서 소변으로 배출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주 비행사들의 실험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활동을 하지 않으면 공기 중에 있는 산소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감소하여, 자연히 핏속의 적혈구 양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화가 더욱 촉진된다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 이와 같은 증상을 의학 용어로 폐용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페물이 되어가는 증후군에 걸리는 것입니다. 마치 폐차장에 쌓아놓은 자동차의 잔해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두뇌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기능을 맡은 대뇌 반구, 호두알처럼 생긴 뇌의 반쪽도 나이가 들면 위축이 됩니다. 대뇌 속에 있는 세포도 자극을 주지 않으면 활동이 쇠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년에 이르러 몸 놀리기를 싫어하고, 책을 읽거나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으면 치매가 빨리 찿아옵니다. 요즘 치매환자가 많습니다. 우리가 편하게만 살려고 하다보니 그렇습니다. 옛날이라고 해서 치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와서 우리생활이 여러 가지로 지나치게 편리하다 보니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몸이 창조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치매가 빨리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일입니다.
노년에 이르면 인생의 종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비해야 합니다.
대비한다는 것은 곧 배우는 일입니다.
젊어서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배워야 합니다.
죽음에는 노소가 없습니다. 언제 내 차례가 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나이를 막론하고 죽음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배워 두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사계절과 마찬가지로 이 생로병사는 순환의 질서입니다. 이 순환의 질서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노년은 그 인생의 과정에서 품위를 잃습니다.
<법구경(法句經)>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화려한 왕의 수례도 닳아서 망가지고
이 몸도 그와 같이 늙어 버리지만
선한 이의 가르침은 시들지 않는다.
젊었을 때 부지런히 노력하여
정신적인 재산을 모아 두지 못한 사람은
고기 없는 호숫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죽어 갈 것이다.
정신적인 재산이란 삶의 지혜를 뜻합니다. 살 줄 아는 지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젊었을 때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고 그러한 삶의 지혜를 모아 두지 못한 사람은 고기 없는 호숫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죽어 가리라는 것입니다.
삶의 지혜란 무엇인가? 순환의 질서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여유와 아량입니다. 죽음까지도 흔연히 맞아들일 수 있는 열린 가슴에 품위 있는 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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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계속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암으로 죽은 어떤 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시인은 아닙니다. 그는 일본의 유명한 내과의사입니다. 천명 가까운 사람의 임종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 그 의사는 나름대로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자기만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아사히 신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칼럼을 썼는데, 그것이 책으로 나온 것을 제가 읽었습니다.
나는 병원에서 내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내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낱 업무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내 가족에게는 다시없이 소중한 일인데도.
병원에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사무 보듯 처리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한 생애가 막을 내리는데 그 엄숙한 순간에 그저 하나의 물체로 다룬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런 구조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년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평소에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아무 의식도 없는데 호흡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기술적인 처치를 하는 것은 누구한테나 형벌입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소생시키면 좋습니다.
그러나 살 만큼 살고 인생의 4악장까지 마쳐서 조용히 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계속 주사를 놓고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은 당사자한테도 큰 고통입니다. 주사나 산소호흡 같은 것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이물질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남은 목숨이나 마음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절에서 그런 경우를 몇 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팔십 넘어 구십 살 가까이 사신 분인데, 제가 병원에 찾아갔더니 완전히 산송장이었습니다. 의식은 없는데 링거 주사만 꽂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노스님이더라도 살만큼 살았으니까 빨리 이 낡은 육신을 벗어나고 싶을텐데, 곁에서 상좌들이 그저 주삿바늘을 꽂아 놓은 것입니다. 의식은 없고 호흡만 간신히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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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위독한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켰을 때, 호흡이나 심장박동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병원에서는 가족과 친지들을 다 몰아냅니다. 의사가 차디찬 금속기계에 의지해서 간호사만 데리고 심폐생술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냉혹한 현대 의술입니다. 이런 기계적인 업무에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맡길 수 있는가, 이것입니다. 그분은 기계 앞에서, 낯선 공간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입니다.
그 의사는 자기는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떠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살 만큼 산 사람은 자연스럽게 잿불이 사그라지듯 돌아가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의 원을 세웠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어디 아무도 없는 산골에 가서 나무 밑에서 조용히 굶다가 가야겠다.’라고.
요즘은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으면 복도가 좁아서 관이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삿짐을 옮기는 곤돌라를 타고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에서 그것을 싫어한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따름입니다. 업고 나오든지 들고 내려오든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병원 영안실에서 다 알아서 해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바람직한 일인가? 그 낯선 공간의 차디찬 기계 앞에서 혼자 외롭게 죽도록 놔두는 것이 편리한 것인가? 매사는 병원 영안실에서 다 알아서 해 주니까? 그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인가? 평소 고인이 살던 주거 공간에서, 낯익은 장소에서,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가는 것이 도리인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생의 마지막 막을 내릴 때,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하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도 하나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고요한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 사람 나름의 죽음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그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평화롭게 떠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편안한 마음을 지니도록 곁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어 갈 때 순간순간 소멸되어 가는 그 시간을 누군가 곁에서 함께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구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간호사든 의사든 타인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순간순간 소멸되어 가는 그의 시간을 곁에서 함께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매우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꽃은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지는 꽃도 꽃입니다.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배워야 할 과제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 몸 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의 껍데기입니다. 콩으로 말하면 콩 껍질입니다. 영혼은 그 알맹이입니다. 영혼은 육체가 자기 할 일을 다 했음을 알고 낡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한쪽에 벗어 놓습니다.
죽음도 삶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거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잎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새 움이 돋는 것이 우주의 리듬이고 생명의 질서입니다.
또 일단 죽게 되면 미련 없이 다시 내생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각오를 평소부터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살 때는 전력을 기울여서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깨가 뻐근하도록 살 때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살 만큼 살다가 인연이 다해서 떠나게 되면 미련 없이 가야 합니다.
적어도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평소에 확고한 생사관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상황에 이르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의 실상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어떤 정신으로 사는가에 의해서 그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형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반드시 변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존재들은 과거의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들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해 항상 변화할 소지가 있고 유동적이라는 것입니다. 286~296쪽
내일 아침 편집 한번 더 한 후 이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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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남의 일이아니고 다 내 일입니다
죽음을 기쁨으로 환희로 맞이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염불로 왕생하는 길만이 우리가 가장 죽음을 편안히 맞이 할 수 있는 길이라 전 믿습니다.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 불자들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요즘 세간에도 Well Dying 즉 아름다운 임종을
추구하고 있지요.. 나무아미타불 (!)
죽음을 초연히 마지할수 있어야 할텐데...
dalma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