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당의 유래 및 문화재적 가치
- 절충장군 강희철공의 자연과 몰아일체된 함경당 정자
내금위어모장군, 절충장군 강희철(康希哲)공의 자연과 몰아일체(沒我一體)된 함경당(涵鏡堂) 정자
무인(武人)이면서 당상관(정삼품)이신 절충장군
함경당(涵鏡堂) 희철(希哲)할아버지는 시조 후(侯)의 26대손이다. 자(字)는 원명(原明)이고 호(號)는 함경당(涵鏡堂)이다. 선산파(仁碩)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충순위전력부위(忠順衛展力副尉)를 지낸 25대 귀형(貴亨)이다. 조선 성종 대에 태어나서(1492.3.10-1583.8.1) 선조 대에 92세로 돌아가신 분이다. 그 시대의 연령으로 볼 때 대단히 장수하신 기골이 장대한 무인이다. 부친 대(父親 代)에 안동부(安東府) 가야곡(佳野谷 : 현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에 정착했다. 관직으로는 내금위어모장군(內禁衛禦侮將軍)이면서 정삼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절충장군(通政大夫 折衝將軍)이다. 통정대부는 문신의 정3품(현재의 차관급)인 봉록의 서열을 나타내며, 절충장군은 무신의 정3품(현재의 소장급 별2개 이상)의 품계를 표하는 것으로 문무를 겸비한 것으로 보여 진다. 공은 무인으로서 성정이 곧고 굳으며, 선비로서는 맑고 밝은 기개를 가지셨다. 그러나 퇴계 문하이면서 사마시(司馬試)로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인 독자(獨子) 진사공(進仕公) ‘륜(崙)’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천등산(天燈山) 봉정사 서북방향인 가야(佳野)에 터를 잡았다. 집 옆 천등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를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둔덕 위에 정자를 짓고 당호를 함경당(涵鏡堂)이라 하였다.
원래의 함경당(涵鏡堂) - (지금은 함벽당으로 바뀌어 경북지정문화재 제 260호로 지정)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이 거울처럼 어리는 함경당
“안동부 읍지”(1832 간행,규장각 영인본) 누정(樓亭)편 따르면 안동부 서쪽 삼 십리에
가정간(嘉靖間 : 중종 18년-명종22년 간 가정연대임), 무직(武職) 강희철(康希哲) 공의 함경당(涵鏡堂) 정자가 있다“고 하였다. 낙향한 함경당은 안동의 거유인 퇴계 이황(李滉), 박사 김팔원(金八原,) 송암 권효문(權孝文), 부사 권응정(權應挺) 송음 권응인(權應仁) 등 명문 제현(諸賢)들과 시를 쓰면서 교류하였다.
함경당 정자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람의 기품에 대하여 차음한 동양 최고의 명현 퇴계 이황의 차운(次韻) 시(詩)로 살펴보기로 하자.
퇴계선생의 차운(次韻)시판
닳은 돌길에 푸른 이끼 깊은데, /鹼砑石逕綠苔深
연못 거울 속의 정자는 숲속에 우뚝 드러난다. / 鏡裏池亭特出林
완연한 가을 서리는 물가에서 노래 부르고, / 宛在秋霜歌水沚
장차 눈서린 달이 산그늘 찾아갈 것 즐기리라. / 聊將雪月訪山陰
바위 모서리 깊은 데 뛰어드는 것은 물고기의 취미요, / 娵隅跳碧幽居趣
그윽한 데 살기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늙은이 마음이라. / 脉望捿玄老去心
대들보는 티 없이 흔쾌하게 웃어젖히고, / 客槢無塵欣一噱
뜬 구름 같은 처마 뿔은 맑은 노래 배우네. / 浮雲檐角學淸吟
달빛 아래 정자는 밝게 드러나 물가 대나무에 어리고, / 月榭敞明臨水竹
구름은 문을 닫아 속세를 멀리했네. / 雲關迢遞隔塵喧
창 사이의 그림자 움직임은 연못 물고기 노님이요, / 窓間影動魚游沼
자리 위에 봄 무르녹음은 술통 가득한 술이로다. / 座上春融酒滿尊
늙은이 억지로 읊어 시를 지으니, / 老我强吟追盛作
장차 처마에 걸쳐질 이름자가 부끄럽구나. / 愧將名字傍楣門
이렇게 거울 속에 함몰된 자연의 풍경처럼 아름다운 함경당이 아쉽게도 현재는 유경시(1666-1737, 유학자)의 함벽당(涵碧堂)이 되었다. 추정해 보건데 함경당이 몰하고 난 뒤 외손자인 옥봉(玉峰) 권위(權暐)(1552-1630, 유학, 도계서원)가 관리 하였으나, 함경당 몰 이후 거주지를 안동부 남쪽 삼십리 남후면 검암으로 이주해 살아온듯하다. 시대별 비교를 해 보면 31대손 한성(漢成 : 1604.8.2-1664.1.24)대에 이르러 진남교위 훈련원 첨지(僉知),박천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이 끊어진 상태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28세 진남(震男 : 1536년-1597년, 武科 僉知)대 이후로 묘소가 안동부 남쪽 검암의 인근에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에서 검암(儉巖)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거지가 옮겨짐으로 자연스럽게 가야에 있는 재산 및 정자는 외손자인 “옥봉(玉峯) 권위(權暐)” (사위, 권심행의 2자)가 맡아서 관리하여 왔을 것이며, 31대 이후 벼슬이 끊겨지자 가세는 기울어지고 양반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족보에 기록 된 내용을 중심으로 벼슬이 이어져 양반을 유지한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족보상으로 선산파 중시조 ‘인자석자' 이후 ’안동검암‘ 쪽 '거자보자'(23세; 합천군수, 대구부사, 묘 의흥군 거수리) 부터 31세( 8대 동안: 한성)까지는 벼슬이 이어져 왔으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24세 근: 좌리원종공신 통훈대부, 공주판관, - 25세 귀형: 충순위전력부위 : 안동입향조, 묘:안동남후면 건지기골, - 26세 희철(함경당) : 내금의 어모장군, 절충장군 통정대부 당상관, - 27세 윤 : 성균관진사, 사마방록재, - (27세 강소사: 열녀- 평창군수 권두문의 처), - 28세 진남: 무과 첨지, 정삼품, - 29세 연: 통덕랑, 병란의병장, 증 공조참의, - 30세 회무: 통덕랑 , 31세 한성 : 진용교위 훈련원 첨지, 박천군수, 정삼품)이다. 즉 1470년부터 1660년 약 200여년은 양반으로서 벼슬을 유지 존속하여 왔음을 볼 수 있다. 1660년부터 1852년(32세- 36세 : 6대) 약 190년 동안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벼슬을 이어오지 못하여 몰락된 양반으로 전락 된 듯하다.
주로 이 시기가 묘지의 분포도로 보아 검암에 기거한 것으로 추정 된다. 그 후 한말 고종 시대에 와서 37세에 기, 기호(고종, 장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벼슬이 피폐하여 나아가지 않음), 38대 필진(한말, 일제시대 유학, 서당운영, 함경당 정자 중건, 1885-1942년, 58세몰)에 와서 안동 유림에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가문의 위상을 재건 하고자 하였음.
이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세(勢)를 유지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옥봉 권위’ 또한 1630년 몰(沒)하고 정자는 관리되지 못하였을 것이고, 방치된 정자는 60여년 후 당대 그 지역의 유력한 유학이던 류경시(柳敬時)에게로 (어떤 연유에서이든) 넘어 갔을 것이다. 그 후 ‘유경시’는 정자이름을 자신의 호인 함벽당(涵碧堂)으로 개명하고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내용은 함벽당 중수기에 주인이 두 번 바뀐 것으로 기록되고, 또한 물물교환으로 매입한 것으로 이야기 한다. 어찌하든 지키지 못함은 선조에게 송구할 뿐이다.
원래 함경당(涵鏡堂)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 글씨라고 전해지며 시판 또한 원판이 일제 강점기 까지 ‘유경시’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회자 되어 왔다. 해방 전, 그들 집안에서는 별 소용없는 현판과 시판의 원판을 찾으려고 했으나, 처음에는 돌려주기로 했다가, 어수선한 시국에 혹 정자의 소유권 문제가 대두 될 것을 우려 하여서인지 부인하여 무산 되었다고 강씨문중(康氏門中) 안에서 전해오고 있다.
남후 검암(儉巖)에 중건한 함경당(涵鏡堂)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검암 후손으로서 선조의 유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문중에서는 형평상 정자를 새로 짖지는 못하고 인근 이십 여리 밖에 있는 정자를 사서 이건하게 된 것이다.
원래 검암(儉巖)은 ‘영가지’의 지명소개에서도 동네 어귀에 검은 바위가 있어 ‘검바우’라고 하여 ‘검암’이 되었으며, 솔밭과 경치가 좋아 원족(遠足)을 오는 곳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당시, 37세손 기락(基洛), 장릉참봉으로 제수된 기호(基浩), 검암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던 필진(38세손, 弼鎭)이 유림에서도 폭넓은 역할을 하고 있을 때 ‘함경당’정자의 중건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전반적인 사정을‘함경당 중건기’를 번역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남후면 검암리 당골, 솔 숲 노송아래 잠긴 함경당 전경
검암에 중건한(1939년) 함경당 원경
涵鏡堂記
余嘗讀先祖退陶夫子文集中 涵鏡堂次韻詩 月榭敞明臨水竹雲關迢遞隔塵喧之句 此卽粤昔國朝明宣晟代 有若將軍康公諱希哲 休退棲隱之所也 堂在天燈山下 鑿池開園 述四韻以揭 而當時諸先輩 續和之 輝煌懿蹟 至于今昭載於永嘉堂號誌 安得不使後人想像而起慕哉 但世代寢遠 子姓零替 未能奠守乎舊居 搬移水南之儉巖 堂遂以泯沒無傳 且數百年之久矣 迺者後孫 基洛基浩弼鎭等 爲是之懼 新築數架堂宇於所居之傍 倣舊制仍舊扁 囑不佞以記其顚末 且曰 舊堂之不能肯構 是吾罪也 非舊堂而冒舊號 亦吾罪也 然惟其不忍忘祖先之心 而諒此不得已之實 則其或不我罪歟 不佞斂袵而復之曰 觀過知仁 況未始過乎 有是扁而攬其地之勝有似有不似 則必將愾然懷思 指其山曰 靑蔥者猶舊 而峻極磅礴之惑殊也 指其水曰 淸冷者猶舊 而淺深揭厲之或變也 見其似 欣然喜也 見不似 愀然感也 有祖先是思 則追慕殫誠 自是源流之無彼此 奚論地勢之有西東 夫儉之巖 蔽於古而顯於今 豈非地之有數於遭遇而然耶 觀於是 可以認人事之衰而旺否而泰之運會矣 堂旣成 而月榭水竹之勝 無減於當日光景 可以見後承之保守遺謨 康氏僉君子 盍圖勉旃 顧此藐然晩生 固不敢簒述 敬慕先詩之信筆 且幸托名之榮 不揆拙訥 謹爲之記
屠維單閼嘉平節 從仕郞前章陵參奉 李忠鎬謹記
함경당기(涵鏡當期)
-원문해석-
내가 일찍이 선조 퇴계선생의 문집 중의 함경당 차운시에서,
달빛 어린 정자가 물가의 대숲을 내려다보니 月榭敞明臨水竹
높은 누대가 멀리 속세의 소란과 떨어져 있네 雲關迢遞隔塵喧
라고 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정자는 곧 옛날 조선조 명종 선조의 융성했던 때에 장군 강희철(康希哲) 공 같은 분이 계셔서,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던 곳이니, 당은 천등산 아래에 있다. 연못을 파고 동산을 만든 후, 율시 한 수에 심회를 써서 편액하자, 당시의 여러 선배들이 그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였다. 그 휘황한 자취가 지금까지 영가지의 당호 편에 소명하게 실려 있으니, 어찌 후인으로 하여금 그 때를 상상하여 경모심을 일으키게 하지 않겠는가?
다만 세대가 점점 오래되어 자손들이 영락하자, 옛날에 살던 곳을 지키지 못하여 낙수 남쪽의 검암(儉巖)으로 옮기게 되고, 이 당 또한 드디어 민몰되어 전하지 않게 된지가 또한 수백 년의 오랜 세월이었다.
근자에 그 후손 기락(基洛), 기호(基浩), 필진(弼鎭) 등이 이를 두렵게 생각하고, 몇 간의 당을 사는 곳 곁에 새로 지었다. 옛날의 제도를 따라 옛날의 편액을 건 후, 나에게 그 전말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하고, 또한 말하기를 “옛 정자를 능히 조상의 뜻대로 잘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의 죄요, 옛 정자가 아닌데도 옛 이름을 그대로 쓴 것 또한 우리의 죄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차마 조상의 마음을 잊지 못하여 이렇게 부득이한 일을 한 실상을 아신다면 혹시라도 저희를 허물하시지는 않겠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옷깃을 여미고 대답하기를 “허물을 보면 어짊을 알 수가 있거든, 하물며 처음부터 허물이 아니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함경이라는 편액을 걸고서 지세의 비슷한 점과 비슷하지 않은 점을 분간한다면, 반드시 앞으로 개연히 옛일을 추억하여 그 산을 가리키고는 말하기를 푸르고 빼곡한 산봉우리들은 옛날과 같으나 높이 치솟아 등 두렷이 퍼진 모습은 혹 다르구나! 라고 할 것이며, 그 물을 가리키고는 말하기를 맑고 차가운 물은 옛날과 같으나 깊고 얕아 개울이 되고 심연이 된 모양은 바뀌었구나! 라고 할 것입니다. 그 같은 모양을 보고서는 흔쾌히 반가워할 것이며, 그 다른 모습을 보고서는 서글피 옛날을 추억할 것이니 조상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면 오래도록 추모하며 효성을 다하게 되어 이로부터 근원[조상]과 지류[후손]가 피차의 간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지세에 동서가 있음을 논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대저 검암이라는 바위가 옛날에는 가리었다가 지금에 드러난 것이, 어찌 땅에도 세상을 만나는 운수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볼 때에 인사의 쇠망과 왕성, 비색과 태평의 운회를 알 수가 있으리라.
당이 다 완성되자, 달빛 어린 정자와 물가의 대숲이 어울린 경치가 옛날 당시의 광경에 못지않아, 가히 자손들의 보수에 조상의 유법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강(康)씨 여러 군자들은 어찌 힘써 노력하려 하지 않겠는가!
나, 이 아득한 후생을 돌아보건대 감히 기록을 남길 수 없으나, 선조 시의 신필을 경모하며 또한 말단에 이름을 남기는 영광을 행운으로 여겨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기문을 쓴다.
기묘년 가평절[연말 납향일]에 종사랑 전 장릉참봉 이충호(李忠鎬)는 삼가 기문을 쓰노라.
남후 검암(儉巖)에 중건한 함경당(涵鏡堂)
기묘년(1939년) 검암으로 이건 중수한 ‘함경당’은 현재 80여년 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자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기둥은 원주기둥이고 기단은 자연석으로 되어있다. 정자 중앙은 누마루로 마루 주변에 계자난간을 둘러 달았다. 마루방 정면에는 함경당(涵鏡堂) 현판이 있고, 함경당기, 시판 등, 마루 좌우 전후로 8개가 달려 있다. 마루 밑에 좌우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있고 방은 온돌 구들방이다.
열악한 재정과 관리의 소홀로 좌측 서가래는 물이 들어 일부 썩어 가고, 기둥 또한 하부가 많이 훼손되는 등 여러 부분이 폭우와 세월에 견디지 못하고 많이 상하여 있는 상태이다. 빠른 시간에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유서 깊은 문화재가 함몰 될 형편이다. 어떤 형태로든 보수를 하여 보존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숙제이다.
현재의 ‘함경당’은 검암 집성촌 동네 문중의 앞에 있기에 관리가 용이로운 위치에 있으나,
재정적인 열악성 때문에 물 건너 불구경하듯 방치됨이 안타까울 뿐이다. 향후 여러 여건을 고려하고 관련 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지방문화재로라도 등록할 수 있게 하여 문화재관리 보수 지원금이라도 지원 받아 보수 및 정비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조상의 훌륭한 얼을 기리며 유서 깊은 문화재가 보존 관리가 될 수 있도록 여러 방도로 노력해 볼 요량이다. -끝-
(후인 41世 희동 삼가 살펴 씀)
* 참고사항
신천강씨(信川康氏) 인물
첫댓글 사진이 하나도 안 보임....나만 그런가........갸우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