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三聖山)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때 새남터에서 서양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교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에 군문효수의 극형으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입니다.
한국천주교가 이 땅에 스스로 태어나 1784년 이승훈 선조가 북경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아옴으로 성사의 은총을 받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1786년 임시 준성직제도의 자치교회를 설립, 교세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초기 갓영세한 교우들이 교리부족에서 오는 잘못임을 곧 깨닫고 1790년 북경교구의 구베아주교에게 윤유일(바오로)를 밀파하여 미사성제를 드릴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속에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1795년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초대 본당신부로 맞이하는 은혜를 받아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해중의 어려운 여건에도 신자들은 날로 늘어 갔습니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회는 1801년 일어난 신유대박해로 주신부님과 교회지도자의 대부분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회를 북경교구 소속에서 분리시켜 독립된 교구로 승격과 동시 태국 샴교구 부주교인 소(蘇) 브뤼기에르 신부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47년 만에 맞는 큰 영광이었습니다.
소주교는 조선입국을 위해 중국을 거쳐 내몽고 서만자에서 성 모방(나) 신부를 만나 조선교우와 입국의 일자를 기다리다 뜻밖에 1835년 10월 19일에 뇌일혈로 숨을 거두자, 조선교구 초대 주교로 조선땅을 밟아보지 못한 비운의 초대 주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슬픔속에 성 모방 신부는 소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1836년 1월 변방에서 정하상 조신철 성인을 만나 상복차림으로 몸을 가리어 무사히 국경 관문을 넘어 먼저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한양에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문모 신부를 잃은 한국천주교회에 35년 만에 성직자를 맞이하는 경사이며, 서양인 신부(파리 외방전교회)로는 첫 번째로 조선땅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얼굴모양이 다른 서양인 신부가 조선에 입국할 때나 국내에서 다닐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상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입국한 모방신부는 지방을 다니며 전교에 열심하는 한편 낯선 타국에서 특히 박해중에 전교를 위해서는 방인사제를 양성하는 일이 제일 필요한 것으로 판단하여 3명의 소년-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꼬사베리오)를 선발, 정하상 성인과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 신부의 안내로 무사히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이 들은조선사람으로 최초의 서양문화를 배우는 유학생이 된 것입니다. 1836년 성탄절에는 소주교를 돕기를 자원한 페낭신학교 교수 신부였던 성 샤스땅(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국경변문에 도착하여 성 모방 신부가 보낸 교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 샤스땅 신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날을 위해 그간 받은 고통은 가슴 벅찬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해 마지막날 한밤중에 상복차림으로 안내교우를 따라 무사히 변문을 넘었습니다. 이로써 서양성교사로는 두 번째로 조선땅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성 샤스땅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나서 전교지방에서 돌아온 모방 신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1837년 5월 14일, 소주교의 후임으로 중국 사천성에서 12년간 성무활동을 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앵베르 주교는 곧 조선교회로 가기위해 여행을 떠나 중국대륙과 몽고를 지나 그해 12월에 봉황성 변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동지사를 따라온 교우들의 주교님을 안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칠흑같은 어두움속에, 살을 에이는 혹독한 변방의 추위와 싸워가며 상복을 입고 의주관문을 무사히 넘어 그토록 그리던 조선교회가 있는 한양 땅에 도착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땅 신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였으며, 이는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지 54년, 조선교구설정 후 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구장 주교와 신부들이 있으며, 신자가 있는 참 모습을 갖춘 훌륭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신부, 성 샤스땅 신부는 조정에서 천주교를 사교로 단정하여 교우들을 뿌리 뽑아 없애려는 위험한 박해상황에서도 조선의 전교를 위해 온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1839년 기해박해가 있기 바로전 교우수는 9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모진 풍파와 환난 속에서 꽃피운 조선천주교회는 새로 들어온목자들의 손으로 풍성한 추수를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쓴 앵베르 주교의 서한에는 성무활동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내 몸은 고달프고 시시각각으로 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세시에는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기도를 드리고, 세 시 반에는 예비교우가 있으면 성세를 주거나 견진성사를 주고, 그 다음에는 미사성제와 성체배령과 감사기도가 따라옵니다.
이리하여 열다섯 또는 스무 명 가량의 교우가 성사를 받고, 날이 밝기 전에 물러갈 수 있습니다. 낮동안에는 그만한 교우들이 하나씩 들어와서 고백성사를 받고 그 이튿날 새벽에 성체를 영한 후에야 물러갑니다. 이때쯤이면 나는 허기가 집니다.
왜냐하면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 일을 하고, 오정 때나 되어서야 별로 영양가치도 없는 음식을 먹게 되니, 조선과 같이 춥고 메마른 지방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점심을 먹고 잠시 동안 쉰 다음에는 학생들에게 신학 강의를 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밤까지 고백을 듣습니다. 밤 아홉시에야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몽고 양털로 만든 담요로 덥고 잡니다.
조선에는 침대도 없고 담요를 덮고 잡니다. 이와 같이 나는 약하고 병든 몸으로 늘 수고롭고 바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최고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곤란한 생활을 하는 우리가 그것을 마치게 하여 줄 칼이 목에 떨어지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조선교회의 전교를 위해 힘써 오던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보낸 3명의 방인 신학생이 사제가 되려면 많은 기간이 소요되므로 박해 중에 효과적 전교를 위해 방인 사제가 매우 절박한 상황이라 짧은 기간에 사제를 만들기 위해 4명의 나이든 신학생인 42세의 독신 성 정하상(바오로)과 32세 독신이며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용(도마), 26세의 성 이문우(요한), 30세의 성 최형(베드로)을 선발, 2, 3년 내에 신품을 받게 할 희망에서 신학교육을 시켰습니다.
1839년 기해년이 되어 조정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안동 김씨 세력과 조만영 일파의 정쟁의 갈등 속에 다시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유진길 성인과 조신철 성인, 정하상 성인 등 교회 중진들이 속속 잡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잠시 주춤했던 박해의 선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는 잠시 한양을 떠나 수원 상골마을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교자 김순성에 의해 피신처가 알려지자 성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박해는 서양 신부들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잘 아는 앵베르 주교는 나머지 두 신부도 자수하는 길이 교우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라 생각하고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땅 신부에게 서신을 보내 자수를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땅 신부도 자수하여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세 성직자들은 신문을 받았는데 당시 사료인 일성록(日省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헌종실록(憲宗實錄)에는 8월 12일에 신문 받은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인 범세형은 사뢰오. 말씀드릴 것은 이미 벌써 다 사뢰었나이다. 나신부와 정신부와 저는 정하상의 집에 머무르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였나이다. 물론 저는 주교로서 견진과 성세를 많이 주었으나 교우들은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라고 짐작합니다마는 성명은 전혀 모르외다.
교우의 총수는 그리 많지 않으외다. 그들의 성명을 생각해내는 것은 곤란 할 뿐더러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우정 이곳에 와 있으면서 이제 그들을 고발하고 그들에게 해를 준다는 것은 비록 죽을지언정 못하겠나이다. 칼과 톱을 눈앞에 늘어놓고 저희들의 몸을 토막토막 자른다하여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소이다.
이같이 세 성직자에 대한 포도청의 신문이 끝나게 되니 그들은 다시 의금부로 옮겨져서 거듭 세 차례에 걸쳐 비슷한 신문과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즉 1839년 9월 15일에는 범주교에게 장격(매질) 9회, 나신부에게는 장격 10회, 정신부에게는 장격 13회의 형벌이 내려지고 다음 날인 16일에는 범주교에게는 장격 5회, 나신부에게는 13회, 정신부에게는 11회가 내려지고 19일에는 각각 장격 5회씩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여지고 가마에 태워져서 무장한 1백명 정도의 병졸에게 호송되어 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들의 사형은 서울을 지키던 금위 대장의 지휘하에 집행되었는데 우선 병졸들이 성직자들의 의복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긴 다음 두 손을 앞으로 결박하고
기다란 막대기를 두 팔 밑으로 넣으며 두 개의 화살로써 양쪽귀를 아래위로 꿰뚫고 얼굴에는 물을 뿜은 다음 한 주먹의 횟가루를 뿌리고 나서 6명의 병졸이 막대기를 걸머지고 성직자들을 끌고 형장의 주위를 세 바퀴나 돌려 구경꾼들로부터 조롱과 욕질을 퍼붓게 하고 나면 한 명의 병졸이 장대 위에 기를 매달고 다른 또 한 병졸은 사형의 선고문과 그 이유를 길게 읽었습니다.
이 때 금위대장이 명령하여 성직자들이 무릎을 꿇게하여 각 말뚝에 붙들어 매게 하고는 곧 12명의 병졸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돌면서 한 번씩 그들의 목에 칼질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세 성직자의 목을 다 베고 난 다음 한 명의 병졸은 그 세분의 목을 주워서 송판 위에 얹어 가지고 대장의 앞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시체는 3일간이나 그대로 그곳에 버려 두었다가 강가의 모래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세 분의 성직자는 우리나라 역사상에 있어서 서양인에 대한 최초의 판결로서 사형이 선고되어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군문 효수라는 극형의 이름으로 한강의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우들은 바오로 성인이 말한 바와 같이 "약한 때에 있어서 강함"을 보인 거룩한 이들의 시체를 어떻게 해서든지 곧 거두어 모시려고 하였으나 형리들이 옷차림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처형된 뒤 4일째 되는 날에는 3명의 교우가 성직자들의 시체를 찾아 모시려고 꾀하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그중 1명은 잡히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일쯤 지나서 7, 8명의 교우가 죽음을 각오하고 감시를 피해 시신을 찾아 모시는데 성공하고 큰 궤짝에 넣어 노고산(지금의 서강대 뒷산)에 묻게 되었습니다.
이때 범주교는 조선입국 2년이었고 나신부는 3년 9개월, 정신부는 2년 9개월이었습니다.
1984년에는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기해 서울에서 세 분의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르자 성지 부근의 정부기관 소유의 땅 15,882평을 매입, 1989년 9월 10일 세 분 성인 유해를 이곳에 다시 천묘하여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그후 제대와 성지 인근 약수터를 정화하고 주변에 휴식시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 성지관할 본당인 신림동 성당에서는 그후 순교성인들의 신앙을 높이 기리고 그들의 덕을 칭송하면서 그 후손다운 신앙생활과 온 겨레의 그리스도교회를 다짐하기 위해 치명하신 달인 9월의 한 주일을 본당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삼성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해 오다가 1982년 9월 29일 신림동 본당 류영도 신부 지도하에 삼성산 성역화를 위한 기도회를 조직하고 성역화 운동을 전개하다 초본당 차원으로 삼성산 성역화 추진 위원회로 확대 개편하는 한편 치명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달이 21일을 기도회 날로 정하고 오전 11시에 언제나 삼성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현 관할 본당인 삼성산성당에서 계속 미사 봉헌하고 있습니다.
(당일이 주일인 경우는 다음날 미사봉헌).
더욱이, 순교성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기 위한 삼성산성지 성역화사업은 교구적 차원으로 주관되고, 삼성산성령수녀원 및 피정의집(지도 송광섭 신부)과 프란치스꼬 재속 3회 기념관(지도 오기선 신부)이 세워져 많은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삼성산성지로 발전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