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도살된 소는 정물일까? 도축된 소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 카라밧지오가 그러했듯 베이컨도 평생을 자기 안의 괴물과 갈등한다.
<트랜지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실패 후 8년 가까이 작업을 중단하고 간간히 습작만을 제작하던 베이컨은 1944년부터 다시 열정적인 작업에 돌입한다. 1935년 베이컨은 파리에서 <입안의 질병>이란 중고서적을 구입하는데 이 책에 수록된 구강구조에 관한 삽화들은 이후 베이컨의 작품에 여러 변형으로 등장한다.
베이컨은 이 작품을 자신의“원천이자 근원”이라고 표현했는데 1945년 헨리 무어 등 유명작가들과 함께한 전시에 출품되어 종전 직후 전쟁의 참상을 애써 잊으려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베이컨의 독창적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된다.
1944년 전시의 성공으로 베이컨은 지명도를 얻기 시작한다. 작품의 사이즈도 점차 커져가고 그림의 축을 이루는 불편한 이미지들이 정착되어 간다. 이 작품은 평생 베이컨을 따라다녔던 강박적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절단된 머리와 쩍 벌어진 입, 펼쳐진 우산과 날고기, 매달린 밧줄과 파스텔톤의 바닥, 새장 같은 금속골격의 구조물 등은 관람자에게 불길한 정서를 퍼붓는다. 화면 중앙의 괴기스러운 인물은 <뭇소리니>인데 전쟁은 끝났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남은 외상은 쉽사리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화상 ‘브라우센’은 이 작품을 200파운드에 구입하고 파리에서 열린 <현대미술 엑스포> 영국 섹센에 전시하는데 MoMA가 구입함으로서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첫 작품이 된다.
베이컨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그림에 사로잡혀서 이 작품을 포함한 변형작품을 무려 25점이나 그렸다. 허물어져 사라져가는 교황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권세의 상징인 의자에서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다. “우리 모두는 고깃덩이”라는 말을 남긴 그는 인물을 그릴 때도 얼굴을 일그러뜨려 표현하곤 했지만 입만큼은 또렷하게 묘사했다. 그의 그림에서 입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사악한 도구이자 동시에 가장 나약하고 비극적인 기관이기도 한 것이다.
어두운 배경의 바닥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빛이 들어와 바닥을 가르고...거친 흰색 선들은 유령과도 같이 엉기어 전율스러운 형태를 만들어 놓는데 날필로 이루어진 형태는 존재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공포를 가중시킨다. 모든 동물들은 어슬렁거린다. 맹수들만이 아니라 수족관 안의 열대어도 봄 들판의 토끼들도 숙명적인 식욕과 성욕의 명령에 따라 끊임없이 어슬렁거린다. 포식자이자 피식자인 운명은 모든 존재에게 예외가 없다. 오늘도 저 그림 속의 개와 같이 어슬렁거리는 우리는 포식자인가..? 피식자인가...???
첫댓글 선생님의 안내로 베이컨을 듣고 나니,
그의 무서웠던 그림에서 이젠 측은지심마저 느껴집니다.
항상 독창적인 강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