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라 2:43-70
찬송가 367장 ‘인내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우리는 고레스의 칙령에 의거하여 고국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때 기억해야 할 사실은, 1차 귀환자의 명단은 약 80년 후 에스라가 2차로 돌아와 기록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즉, 유다가 멸망하고 약 70년 후에 1차 귀환이 있었고, 에스라는 그로부터 또 8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에스라는 당시 남아 있던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첫 귀환자들의 명단과 인원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이 남의 일만 같지 않게 느껴지는데, 우리 역시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몰락하면서 이 땅을 떠나게 된 재외동포들이 그러한데, 그중에도 재일동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본 강점기 시절 조선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초기에는 유학 또는 일을 구하기 위해 건너갔지만, 점차 강제 징용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1945년 광복 당시 일본에 머물던 한인은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한인 중 150만여 명이 한반도로 귀환한 것으로 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일본 각지의 항구에서 부산항으로 귀환선이 사람을 실어 나릅니다. 한인들은 타국살이와 일본의 박해로 심신이 고단했습니다. 그렇다고 변변한 재산을 만들어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삶의 터전을 다진 이들은 귀환을 택하기 어려웠습니다. 배에 오른 그들은 해방의 흥분감과 더불어 황폐해진 조국에 대한 착잡함이 뒤섞인 채로 이 땅에 발을 내딛습니다. 새롭게 만들어 갈 한민족의 국가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기대감을 품고 고향 땅에 돌아옵니다. 이 기막힌 일이 불과 약 80년 전에 있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70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건을 80년이 지나 기록하는 에스라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방 직후 한반도로 몰려들었던 재외동포들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에스라서는 우리에게 보다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명단에 기록된 인물들의 처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70년 동안 생존해 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는 아마도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고레스 원년에 칙령으로 돌아온 자들이라면, 그때는 다니엘이 살아 있는 시기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니엘은 이미 적어도 80대 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자녀들은 이미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살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유대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귀환에 필요한 모든 경비와 후원을 약속받은 이때,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다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2장은 그 자손들의 구성과 인원수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어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 제사장, 레위 사람의 숫자까지 다뤘고, 오늘 명단은 느디님 사람,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 남종과 여종, 노래하는 남녀가 포함됩니다.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 자손(43-58)
(43)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3절부터 58절까지는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을 언급합니다. 이들을 한데 계수한 것으로 봐서 그들은 어느 정도 동질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느디님 사람은 새번역 성경에서 성전 막일꾼이라고 옮기는데, 말 그대로 성전의 온갖 막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느디님이란 말은 바쳐졌다는 뜻으로, 여호수아 때 흡수된 기브온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쟁을 통해 포로가 된 이방인 중에서 성전 관련 막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굳이 왜 이렇게 지루해 보이는 기록을 성경에 남겼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렇게 명단을 기록하는 부분이 곧잘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다는 영광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책에도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것으로 영광인데 성경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더 나아가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자 기쁨이겠습니까?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를 헤아리는 것과 사람이 수를 헤아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숫자가 발명되고 수학이 발전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이 주위 대상을 수량화하고 수치화하기 위함입니다. 즉 나 아닌 것들을 수치화하고 통제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수는, 헤아림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며 대상화합니다. 수치는 인간에 담긴 이야기를 제외합니다. 오늘날로 옮기자면, 인구수, 혼인 건수, 출생 건수, 사망 건수 등등은 국가 전체로 볼 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개개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우리가 아파 병원을 찾게 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치화됩니다.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며 우리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완치율, 생존율 등등의 수치로 바뀝니다. 하지만 사실 개개인에게 그 수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생명의 문제조차도 자료로 정리될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헤아림은 철저히 인간을 소외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려고 할 때에도 하나님의 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 주신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그들의 안위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국가 지도자로서 또는 지휘자로서 사람을 숫자로 대상화한 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셈하심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배제가 아닌 포용을 위해, 배척이 아닌 위로를 위해 우리를 세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 명단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선 자들입니다. 마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에서도 자신의 핏줄을 지키고, 전통을 수호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이 그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기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접한 에스라 시대의 독자들은 2차 포로 귀환 당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약 80년 전 자신들의 선조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했던 기록을 살피며 그곳에 머물고 있는 조상의 신실한 삶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느디님 사람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암시하듯이, 그들 대부분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 공동체에 통합되기는 했지만, 태생이 막일을 하는 신분이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뒤바뀌어 비록 사는 곳은 페르시아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시편 84:10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노래합니다. 이들이 돌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보다 더한, 성전의 막일꾼으로 있는 것조차 열망했던 자들입니다. 시편의 고백처럼 예루살렘에서 한 날이 페르시아의 천 날보다 낫기 때문에,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어떤 모습으로라도 하나님의 성전 근처에 머무는 것이 낫기 때문에 그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예배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는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5, 58)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인 이들이 성전 막일꾼들과 함께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아마도 솔로몬 시절에 전쟁 포로가 되었다가 성전 업무에 배정된 자들로 보입니다. 그들도 느비딤 자손과 마찬가지로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귀환자의 무리에 등장합니다.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솔로몬의 신하로서 성전을 섬겼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섬긴다는 이 자부심이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어제 말씀을 보면 제사장의 수에 비해 레위인의 수가 매우 적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느비딤 사람 35개 가문과 과 솔로몬의 신하들 가문 10개 가문에서 온 자가 392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계보에서 찾지 못하는 자 및 총계(59-67)
(59-63)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는지를 해명할 수 없는 이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마도 전쟁과 강제 이주의 난리통에 족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자들로 보입니다. 일반 백성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사장 중에도 세 가문이 족보를 보관하지 못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르실래 자손은 제사장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가문의 이름을 따르게 되면서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괄적으로 부정하게 여겨져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백은 아마도 세스바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고 명합니다. 이 부분도 쉽지 않은 내용으로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림과 둠밈을 분실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 이를 통해 제사장이 판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을 내릴 영적 분별력과 권위를 지닌 대제사장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그들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는 말로도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어찌 되었든, 제사장 가문이, 그것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고 열망하는 가문이 족보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점은 다소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아주 혼란했던 상황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족보를 관리하지 못한 사실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속하려고 했던 그들을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 역할에서만 제외되었을 뿐 돌아와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에 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제 총인원이 기록됩니다.
(64-65)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합계가 42,36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장에 기록된 수를 다 더하면 29,838명으로 약 만 이천 명 정도가 더 많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로는 함께 한 무리에서 여성의 수는 기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남종과 여종을 칠천 명 넘게, 노래하는 자를 이백 명이나 데려왔다는 점입니다. 숫자로만 보면 1/6 정도가 종입니다. 포로가 종을 거느리고 온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귀환자들이 페르시아에서 잘 정착한 자들이고, 어느 정도 부를 누린 자들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보는데, 첫 번째 출애굽 때 약 200만 명이 함께했다고 본다면, 4만 명이라는 수치는 그다지 대단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이라는 안락한 곳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향한 그들의 결단과 믿음은 오히려 순도가 더 높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유다로 향했던 것과 닮아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은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갔다가 다시 유다를 향하는 여정을 밟는 것입니다. 이 걸음은 제2의 출애굽이자 제2의 아브라함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죄악된 곳을 떠나는 출애굽의 길은 알지 못하는 약속의 땅을 행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도 이 제2의 출애굽과 제2의 아브라함의 여정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회중의 헌신과 정착(68-70)
(68-70)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이제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그곳을 다시 건축하려고 합니다. 몇몇 족장들은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힘 자라는 대로 드립니다. 금이 514킬로그램, 은이 2,850킬로그램 최고급 옷 백 벌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곳곳에 흩어져 레위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제2의 출애굽을 경험하고 각자의 기업에 정착하여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전쟁을 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이 거저 주십니다.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입니다.
(예레미야 30:3-5, 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고속도로 진입 진출로, 또는 대교로 빠지는 곳에서 끼어들기를 하는 차량들을 접하게 됩니다. 물론 초행길이기 때문에 피치 못한 사정으로 끼어드는 차량이나 응급한 사정에 있는 차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출근이나 퇴근 시간에 상습적으로 앞에서 끼어드는 차량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몇 백 미터, 그리고 심지어 몇 킬로미터를 줄지어 서있는데 그것은 애써 무시하고 합류 직전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운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또는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길게 늘어선 차량을 보며 어리석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모든 차량이 합류 지점에 들어서 합류하겠다고 한다면 교통은 마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은 각자의 성읍에 자리 잡은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벨로니아, 페르시아의 시대에 걸쳐 그곳에 겨우 자리 잡은 이들은 예레미야의 말씀을 붙잡고 머물렀습니다. 그 자손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러합니다.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라는 궁극적인 선물이 주어졌기 때문에 공의롭지 않은 자들, 하나님의 룰을 어기는 자들이 보여도 인내할 수 있고, 보내 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지키고 붙잡고 거기에 머무는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영웅이자, 증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그 은혜의 자리를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포로되었던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살핍니다. 우리 역시 제2의 출애굽, 제2의 아브라함의 여정을 걸어야 하지는 않은 것인가 돌아봅니다. 예배를 향한 강력한 열정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은혜 역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유다 백성의 포로귀환과 개인의 삶과 우리 민족의 삶이 닮아있는 점은 무엇입니까?
2. 느비딤 사람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의 셈과 사람의 셈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4. 우리가 걸어야 할 제2의 출애굽의 길 또는 제2의 아브라함의 여정은 무엇입니까?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