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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2:12-23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우리가 요즘 보고 있는 에스더서는 보통 신데렐라 이야기로 여겨지고는 합니다. 신데렐라처럼 예쁘고 성격좋고 성실한 에스더가, 신데렐라처럼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다가, 완벽한 남자인 왕을 만나 발견되고 인정되어 왕비가 되고, 그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스토리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어릴 때에는 마치 진짜 신데렐라 동화책을 보듯이, 에스더서는 보면서 설레였고 역전의 스토리까지 멋졌지만, 왠지 나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오늘의 나와는 상관없는 스토리로 여겨졌습니다. 동화책 마지막이,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지극히 동화적이기에 재미가 있지만, 삶으로 동의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에스더서가 성경의 말씀이 된 것은 단지 멋진 동화 스토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동화, 전설, 무용담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실제적이고, 우리 삶의 실체를 드러내 줍니다. 실제 신데렐라도 현실을 살았다면 달라졌겠지만, 실제 현실을 살았던 에스더와 아하수에로는 동화 스토리처럼 모든 갈등이 단순하지도 않았고, 악과 선이 명확하지도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왕인 아하수에로는 다른 의견도 있지만 역사 기록의 크세르크세스로 보는 것이 대부분인데, 에스더가 왕비가 된 시기는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원정을 실패한 시점으로 여겨집니다.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는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인 다리오1세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놀라운 통치를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아버지마저 이루지 못한 그리스 원정을 위해 긴 시간 준비했지만, 전쟁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페르시아 대제국의 왕이었음에도, 아버지처럼 위대한 왕이 되기가 쉽지 않고, 왕이라고 해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워야 하는 왕비조차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와스디가 어떤 이유로 왕명을 거역했는지 성경에서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으나, 와스디를 폐위하고 내린 조서 내용을 보면, 어쨌든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화를 참지 못했고, 그래서 와스디 왕비를 폐했지만, 화가 사그라들자 이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후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왕비를 폐하고 자신이 내린 조서를 이제와서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상황도, 가장 가까운 사람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가련하지만 겉으로는 대제국의 왕인 아하수에로가 낙심할까봐, 혹은 이 기회에 왕의 신임을 더 얻고자, 측근 신하들은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합니다. 이만큼 그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행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가 보기에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하수에로는 에스더를 구원할 만큼 완벽한 남자도, 넓은 아량을 가진 대인배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혈질에, 가진 힘을 주체 못하는, 측근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왕후 간택 과정(12-14)
이 왕비 선발 행사에서 에스더도 이끌려 가서 후궁으로 가게 됩니다. 넓은 대제국의 각지에서 아름다움으로는 저리가라 하는 처녀들이 모이고, 각자가 1년이나 준비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선발행사는 잔인하다 할만큼 냉정합니다. 왕과 하룻밤을 지낸 후에 둘째 후궁으로 가게 된 여인들은 왕이 다시 부르지 않으면 그냥 그곳에서 평생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룻밤 동안 왕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자신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다른 능력과 재능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는 무가치하여지는 것입니다.
(14)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그를 기뻐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
여인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고향, 민족, 가족의 기대와 부담감을 가지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치열함 가운데에서 여유롭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구도 속에서 다른 경쟁자들에게 사랑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아하수에로의 에스더 왕후 간택(15-18)
(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사랑스러움은 단순히 외모의 아름다움 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경쟁 속에서 예쁘기만 했다면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될 뿐 사랑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이는 에스더가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닌, 내면도 매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TV에서 아이돌 혹은 가수를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논란 여부를 떠나서, 기억해 보십시오. 그 때 우리가 좋아했던 참가자들의 매력이 무엇이었는지. 물론 외모도 아름다웠고, 실력도 있었지만,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성상 경쟁 속에서 같이 연습하고 생활하는 평소의 모습도 중요합니다. 평소 그들의 모습이 이기적이거나 다른 참가자와 어울리기 힘들다면 처음에는 외모 때문에 주목 받다가도 금새 인기가 식어버리곤 했습니다. 끝까지 상위권에 남은 참가자들은 외모 뿐 아니라 내면도 매력적으로 보였기에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에스더의 외모 뿐 아니라 내면의 사랑스러움은 아하수에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에스더를 모든 여자보다 더 사랑했고, 그녀를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습니다.
(17-18)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
에스더는 와스디를 대신하는 왕후가 되었고, 아하수에로는 에스더를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풉니다. 이는 에스더의 명예를 높이고 새 왕후가 되었음을 공표하는 자리였습니다. 큰 잔치와 새왕후를 축하하는 자리에 걸맞게 세금 면제와 큰 상이 베풀어졌습니다. 세금면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리더십의 자애로움과 은혜를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상을 주었다는 것은 잘한 것에 포상했다는 뜻이 아니라, 음식을 제공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이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한 끼 먹는 것도 쉽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제공되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암살 모의를 알림(19-23)
여기까지 말씀을 보면 이제 끝이 나야 할 것 같습니다. 동화로 치면 ‘신데렐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왕후까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민족을 밝힐 수 없는, 페르시아 안에서도 천대받고 핍박받는 민족인, 유대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다른 왕비처럼, 자신의 권력과 정치력을 이용해서 왕비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히 왕의 선택에 의해서,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왕비이지만 아직 자신의 세력이 없고 언제든 와스디처럼 폐위될 수도 있는 연약한 자리였습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된 후에도 아직 자신의 민족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부터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명령한 대로 한 것입니다.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왕후가 된 에스더였지만,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같은 존재인 모르드개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유대인임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은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약소민족에 불과했고, 다민족이 모인 제국인 페르시아에서 유일신을 섬기며 자신들의 확고한 종교관이 있는 유대인은 다른 민족들에게 밉상으로 여겨졌으며, 주류 세력에 끼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지도 못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곳에서 핍박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뒤에서 나오는 유대인 전체를 멸절시키고자 한 하만의 음모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서 왕후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왕후가 된 후에도 출신을 밝힐 수 없을 만큼 낮습니다. 아직은 왕후자리도 공고하지 않고, 유사시 에스더를 지켜줄 수 있는 세력도 없습니다.
유대인임을 드러내면 여러가지로 어려워질 것을 알기에 신앙이 깊은 모르드개도 유대인임을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역사상 유래 없는 대제국인 페르시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많은 민족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민족만큼 다양한 자신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이상의 강력한 왕권이 있었습니다. 즉 유대인이 섬기는 하나님의 자리는 없어보였습니다. 그래도 믿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일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곧, 핍박과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손해만 가지고 왔습니다. 대단한 권력의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도, 이마저도 유대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유대인임을 드러내고 산다는 것은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현대 사회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고, 자신들은 무신자라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과 가치관을 보면 다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에 중독되고, 맹신하고, 인생을 쏟습니다. 이는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정을 쏟으면 성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인정받고 더 나은 자리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왜 하나님만 신이냐.” 며 편협하게 여겨지고, 극성맞다고 평가받고, 때로는 주류에 들어가기 어려워지며, 손해와 핍박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 페르시아에 있습니다. 다신을 믿지만 결국 그 목적지는 자신을 향하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들 꺼려하는, 손해보는,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은 그 페르시아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에스더 시대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하나님의 움직임이?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스더서를 읽고 있노라면, 그분의 손길과 움직임이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한 번도 그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전체를 보았을 때의 일입니다. 에스더서를 볼 때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 발 떨어져서 멀리 보며, 시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찍혀 있는 하나님의 손도장을 볼 수 있는데, 과연 에스더는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모르드개는 알고 있었겠습니까?
때로 우리도 도저히 느껴지지 않고, 도저히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캄캄함 속에서 발버둥치면서도 ‘내가 이렇게 발버둥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자괴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 것입니까?
요셉과 다윗도 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기보다는 그저 그들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드러난 것 뿐입니다. 많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요셉과 다윗처럼 결국 드러나지도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저 캄캄한 어둠 속을 살다가 돌아가신 분도 있습니다. 굳이 로마시대에 핍박이나 선교사님들의 순교를 들지 않더라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캄캄한 어둠 같은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과 시기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름 한 번 드러내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21-23)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 앉은 관직에 있었습니다. 이는 나름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게 된 것입니다. 마침 모르드개의 관직이 그 자리이었기에 알게 된 음모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통하여 이를 알립니다. 이는 사실이었기에 조사하니 증거가 나왔습니다. 결국 이 음모는 암살하려한 두 사람이 나무에 달리고 끝이 납니다. 그리고 기록까지 되었으나, 정작 왕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에게는 어떤 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왕의 암살 음모였고, 이것이 왕후의 입을 통해 전해졌는데도 두 사람만 나무에 달리고 끝났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록만 되었던 이유로 인해, 뒤에 가면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지금 당장 상을 받지 못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타이밍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뒤에 가서 볼 말씀이기에 이 정도로 하고, 우리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21세기 페르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각자가 에스더이고 모르드개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맘껏 드러낼 수 없을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어렵게, 캄캄함 속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시지도 않습니다. 예전에 명동거리나 지하철 역사에서 많은 전도자들이 외쳤다고 해서, 즉 그분의 이름이 곳곳에서 울려퍼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움직이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분의 이름이 아무 곳에도 없다고 해서 움직이시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전하고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리가 작다고 해서, 우리가 미미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드러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하루, 우리 삶의 곳곳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과 움직임을 느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동화 속의 왕자처럼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고, 이 세상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용하지만, 의미있게 매일을 준비해 간다면, 하나님께서 드러나실 때에 저희도 쓰임 받을 줄 압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저희 내면이 채워지게 하옵소서. 세상의 영광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겼던 에스더처럼,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저희가 느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저희가 드리는 오래된 혹은 연약한 기도도 다 놓지 마시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페르시아 대제국을 다스리는 아하수에로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내 마음대로 가장 안 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경쟁 속에서 이기는 것만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내 역할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그리스도인임을 가장 드러내기 어려운 때는 언제이며 왜 그런 것 같은 지 생각해 봅시다.
4. 나에게 있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한 부분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자: 윤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