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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조선신춘문학평론>
매저키스트의 치욕과 환상-최승자論
『매저키스트는 순종 속에 거만함을, 복종 속에 반란을 감추고 있다』-질르 들뢰즈
嚴景熙 이화여대·숭실대 강사
1. 과연 페미니즘인가?
1990년대는 여성 문인들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문인들의 작품이 유례없이 풍부한 성과를 보였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요한 해 결 과제로 부각된 여성성의 문제가 문학 연구가의 관 심을 집중시켰기 때 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최승자를 비롯하 여 김혜순, 김승희, 김정란, 고정희, 황인숙, 허수경, 최영미, 이선영, 나 희덕 등 많은 여성 詩人(시인)들의 작품이 페미니즘적 시각 속에서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러한 비평의 세례는 그간 남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표준화되 고 고착화된 여성적 삶의 문제를 깊이있게 해부함으로써 문학 내부에 감추어져 있던 여성적 가치 를 발굴해내고 문학의 지평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간혹 페미니즘에 대한 과다한 의식은 개인의 독자적 詩(시) 세계가 지닌 가치를 동일한 비평의 틀 속에 가두면서 단순화, 혹은 도식화하는 경 향을 낳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창조해내고 있는 의미의 신경조직 가 운데 일부가 전체를 유기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론의 과잉은 詩의 원초적 생명감과 자유를 억압하게 될 것이다. 최승자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몇몇 평자들은 최승자 詩를 부분적으로 독해 함으로써 그의 詩가 남성에 의한 여성 성의 억압과 파괴를 폭로하고 있다고 귀결짓는다. 최승자 詩에 자주 등장하는 분만의 상상력, 더럽혀진 性의 상 징물로서의 자궁, 낙태와 死産(사산), 가학과 피학으로 물들어 있는 사랑의 행각, 생산에 대한 갈망 등은 충분히 이러한 오해를 반복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왔다.
예를 들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와 같은 시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과의 치열한 싸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비평 에 잘 들어맞는 예이다.
<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
이 詩가 「아버지」로 비유되는 남성적 세계의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승자의 詩세계는 남성적 세계와의 싸움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있다. 그의 詩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는 폭력적 세계상은 다만 남성중심주의, 혹은 가부장적 권력으로 요약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다.
최승자와 더불어 동시대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1970∼80년대의 다 양한 힘들을 과연 남성중심주의라는 한마디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는 혹 세계를 너무 단순하게 뭉뚱그려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단순성이 오 히려 세계를 정치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 리고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책임을 모두 남성중심주의에 떠 넘기려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페미니즘 비평은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성 적 물음이 비평의 구속으로부터 한 시인의 詩的(시적) 깊이와 자유를 되돌 려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2. 폭력적 세계의 공모자, 혹은 희생자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주체의 삶에 관여하 는 타자적 힘의 발현태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는 인간 모두는 他者(타자)적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숙명성을 내포한다. 인간 존 재가 문화적 주체로서의 위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성 일부를 자기로부터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는 라캉(Jacques Lacan)적 아이러니나, 집 단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他者적 힘과의 타협을 통해서 외적 인격(pers ona)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융(C.G.Jung)의 논리는 이와 같은 인간 삶의 근원적 존재 양태를 말해준다.
1980년대는 주체와 他者,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힘의 운동 성이 균형감을 잃은 채 파행적으로 치닫던 때이다. 이러한 시대로부터 탈주 를 꾀했던 최승자의 詩는 비극적이다. 시인은 <일찍이 세계는 / 내 실패들 의 전시장. / 내 상처들의 쓰레기 더미>(「일찍이 세계는」 中)라고 고백한 다. 그의 시에서 세계는 심하게 부패해 있고, 인간 존재의 육체와 정신은 그 썩음을 숙주로 기생하면서, 동시에 부패의 일부로 헌납된다. 이처럼 타 락한 관계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세계는 타락한 언어로 말해질 수밖에 없다. 불결하고 병적인, 때로는 불경스럽고 비천하기조차한 최승자의 詩的 언어 는 그러나 이러한 세계를 기습한다. 우선 그의 언어는 폭력적인 세계상을 폭로한다.
<오 이 모든 진땀나는 공모! 공포!
이 세계를, 이 세계의 맨살의 공포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밀려온다,
이 세계는,
내 눈알의 깊은 망막을 향해
수십 억의 군화처럼 행군해 온다>
「無題 2」
세계는 개별자의 의지를 초월해 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충돌과 왜곡은 예 견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 內(내)에 존재해 있는 현존재는 이미 주어진 세 계와의 교섭을 통해서 삶을 구성해가야 한다. 세계와 자아에 대한 像(상)은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마주침에 의해 비롯된다. 개 체의 욕망과 긴밀한 유대감이 형성될 때 세계는 주체의 의식과 동일화를 이 루면서 긍정적 삶의 기반으로 기능하게 된다. 반면 개체의 의지와 지향을 배반하면서 균열을 이룰 때 세계는 투쟁의 場(장)이 되거나, 아니면 주체를 세계의 의미 밖으로 추방시키는 소외의 근원지가 된다.
최승자의 詩에서 세계와 주체의 관계는 「수십 억의 군화처럼 행군해」오는 일방적인 폭력과 그러한 힘에 짓밟힌 무력한 자아로 드러난다. 시인은 이 러한 존재의 무력함을 그의 詩에서 「다족류의 벌레」(無題 2), 「독 안에 든 쥐」(악순환), 「오줌 자국」(일찍이 나는), 「차트 같은 표정의 얼굴 들」(여의도 광시곡)로 비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폰 가갸 씨의 肖像」과 같은 詩에서 시인은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극단화한다.
<12시, 점심이 그를 잘도 먹어 치우고
때가 되면 오줌이 유유하게 그를 갈긴다.
때때로 심심해서 전화가 자꾸 그를 걸어 본다.
여보십니까? 여보십시다!(존재의 딸꾹질)
시간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면서
이윽고 월급 봉투가 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6시 반, 54번 버스가 다시 폰 가갸 씨를 올라탄다.
원효대교가 다시 홀라당 그를 넘어간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전화를 받고, 월급을 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폰 가갸 씨의 생활은 별 의식 없이 진행되는 소시민의 삶이다. 이 詩는 이러한 일 상의 공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강력한 시적 긴장을 획득한다 . 시인은 반복적 일상의 리듬이 어떻게 인간을 노예화하고 기계화하는 가를 냉담하게 그려낸다. 의식의 진공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폰 가갸 씨의 수동 적 모습이야말로 노예화된 소시민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주체와 객체가 철저하게 전도된 비인간적 세계를 통해서 폰 가갸 씨의, 아니 「나」 자신 의 실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를 실종케 한 이 사건의 주범은 누구인가? 그것은 「맨 살의 공 포」로 엄습해오는 「세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無題 2」에서 진술 되어 있듯이 부조리한 세계의 「진땀나는 공모」에 우리 모두가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공모는 권력적 세계를 감싸고 익명화함으로써 그 힘의 발현태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게 한다. 대항의 구심점이 애매해지 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모두 폭력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희생자라는 모순에 갇히게 된다. 원인과 결과가 뒤틀려 있는 인과적 모순으로서의 세계 는 이 詩人에게 있어 절망과 비극의 근원지이다. 따라서 이율배반적 상황과 존재에 대한 비극적 인식은 그의 시에서 수많은 아이러니적 진술로 반복된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그 눈 못 감은 꿈 / 눈 안 떠지는 생시」, 「슬픈 기쁜 생일」, 「이 열린 희망의 감옥」, 「끝을 위한 시작」, 「말하기 싫다는 / 말을 나는 말한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 / 찬란하구나」, 「네 운동의 목적성의 무목적성」, 「어디 선가 뜨지 않은 해가 또 지고」, 「나의 성공한 실패들의 집적」 등이 그것이다. 아이러니는 修辭(수사)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인식이며 태도이다. 분열과 갈 등을 인지하고, 통합함으로써 삶의 전체성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고 자 하는 노력이 아이러니의 발원지이다. 따라서 최승자의 詩에서 반복되고 있는 아이러니적 진술은 존재의 이율배반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혼란을 돌파해가려는 시인의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한편 최승자 詩에 드러난 인과적 모순으로서의 존재 상황은 자본주의 구조 와 상동성을 갖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주도권을 박탈하고 인간 의 실체성을 교환가치로 바꿔버리는 것은 자본가이다. 그런데 그 힘의 원천 인 자본의 증식은 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증식된 자본은 다양한 권력을 양육하는 데 이용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자본가의 권력 생산에 공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된 존재 상황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진리와 非(비)진리, 거짓과 진실을 가릴 수 없는 세계는 뫼비우스 의 띠처럼 혼란 그 자체이다. 따라서 맞서 싸워야 하는 敵의 정체는 복면한 채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공포감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
그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발바닥까지
어떻게 내 목구멍까지 적시는지를>
「편지」 부분
敵(적)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은 그 힘이 통제권 밖에서 활동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잠재되어 있는 敵은 표면화되어 있는 敵보다 더 교활하고 더 무 섭다. 이 시에서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는 숨어있는 敵을 상징화함으로써 非주체적으로 전면적 힘을 행사하는 세계의 실상을 암시하 고 있다. 敵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이 혼란을 야기할 때 그 敵의 상대는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익명의 敵은 삶의 곳곳을 적시면서 존재들의 생명력을 알게 모르게 거둬들이고 그것을 자기 힘의 일 부로 환원시킨다. 꽃, 달빛, 인간의 육체 등 일군의 생명적 이미지들의 병 적인 모습은 공포스러운 힘에 의해 추악하게 일그러져 가는 존재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존재의 치욕과 소외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시대에 대해 시인은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 팔십 년대는 치욕이었다」(세기말), 혹은 「죽음과 삶이 상피붙는 神聖 코리아」 (望祭), 「순교도 배교도 구원이 될 수 없는 시대」(서녘 항구), 「파멸의 냄새 / 보이잖게 살이 타는 푸른 냄새」(無題 1)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시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더불어 부조리한 세계를 어찌해 볼 수 없는 무력한 자아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공포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자의식이다. 세계가 타락한 敵과의 공모에 의해 이 루어졌다는 것, 敵과의 결탁이 결국 자신을 수동화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권 력의 일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있 는 자기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을 시인은 빈번히 「치욕」이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치욕」은 최승자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단계, 즉 주체를 객체로 전환시키는 냉정한 과정 가운데 느끼게 되는 실존적 기분이다. 그는 「치욕」을 통해서 삶의 형식을 탐색한다. 이는 왜곡된 세계와 자율성을 박탈당한 자신을 동시해 통찰하는 것이며,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 갖는 것을 뜻한다. 최승자의 시에서 시대와 「나」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치욕의 감정은 존재의 삶이 세계 밖으로 소외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 내가 없는 어디에서
내 친구는 내 친구의 친구와 히히덕거리고
지금 내가 없는 어디에서
내 애인은 내 애인의 애인과 놀아나고>
「지금 내가 없는 어디에서」 부분
<내가 버린 세월, 내가 포기한 세월 위에
올해도 수백 펜지꽃들 피어난다.
지랄처럼, 간질 발작처럼>
「봄의 略史」 부분
이제 「내」가 없는 세계에서 친구들은 「히히덕거리고」, 애인은 「놀아난 다」. 그리고 미친 듯이 펜지꽃이 무더기로 「피어난다」. 「내」가 없다는 엄청난 사건은 나의 문제일 뿐 어느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전혀 의미화되지 않는 격절의 세계를 화자는 부정적 의미의 動詞(동사)로 기술하면서 「나」를 소외시킨 세계를 냉소한다. 이러한 고립의 상태는 진 지한 자기 폭로와 자기 부정을 예견하고 있다.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히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나는」 부분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
「未忘 혹은 備忘 2」 부분
하우저에 의하면 소외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상실되었다는 감각이고, 자기 자신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있다는 감각이며, 또 자신의 향상심이나 자신의 규범 또는 야심을 살릴 희망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감 각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줄 수 있는 그 어떠한 보편적 의미도 획득할 수 없는 상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어떠한 방법적 기반도 허용되지 않는 상태는 존재를 非인간적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위에 인용한 詩에서 詩的 화자는 곰팡이, 오줌 자국, 시체, 루머, 오물 등 으로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전이시킴으로써 자신의 형상으로부터 과감하 게 인간적인 모습을 지워버린다. 스스로를 무효화하는 무자비한 자기 비하 와 혐오의 감정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 권위나 존엄함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이같은 비유를 통해서 세계로부터 무가치하게 고립되어버린 그야말로 치욕적인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또한 우리가 인간적 가 치로부터 느끼는 보편적 심미성을 몰수함으로써 독자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최승자의 詩에서 세계의 부정은 곧 자아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세계로부터의 소외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이중의 소외를 의미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외의 감각은 개인의 차원에 한정된 현상은 아니 다. 소외는 1980년대가 지닌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이 피부 로 느꼈던 보편적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승자는 자신의 소외 체험 을 「그」라는 삼인칭의 범주로 확대한다.
<이 세계의 문법을 그는 매번 배우지만
매번 잊어버린다.>
「주변인의 초상」 부분
<그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밖을 잠근다.
그는 더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또 밖을 잠근다.>
「下岸發 4」 부분
세계의 문법과 화해할 수 없는 「그」나, 안의 공간 속으로만 몰입하는 「 그」는 「나」와 더불어 세계의 밖으로 밀려난 주변인들이다. 시인은 이같 이 「나」와 「그」의 삶의 방식을 동일한 의미로 맥락화함으로써 「소외」 의 의미를 보편적 삶의 방식으로 인식시키고자 한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 의 노래」, 「버림받은 자들의 노래」,「버려진 거리 끝에서」, 「걸인의 노래」 등의 詩題(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인의 詩에 유독 버림받은 詩的 자아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처럼 「나」의 절망과 고통을 「그」의 차원과 동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자 하는 태도는 최승자의 詩를 그만의 신변잡사에 대한 기록물이라는 섣부 른 오해로부터 구원해 줌과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감력을 담보해내는 데 중 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또한 독자에게 당신 또한 이러한 소외로부터 예외 가 아님을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소외된 자들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터전을 상실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의 詩에서는 일상적 공간을 상징하는 「집」의 의미가 붕괴된다. 온전한 지 붕과 벽, 그리고 울타리는 안도감과 충족감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붙잡아준다. 그러나 최승자의 詩에서 정주와 휴식을 의미하는 「집」은 더 이상 없다.
<우리들의 발은 일 피트 높이에서 영원히 땅에 닿지 못하고
오른손은 영원히 왼편에 닿지 못한다.>
「고요한 사막의 나라」 부분
<집이 처처에 바람이요.
집의 몸통에 자울신경 장애가 생겼소
집이 큰 파도 속의 일엽편주요.
집이 인적 없는 사막이요.>
「未忘 혹은 備忘 9」 부분
최승자의 「집」은 안착되어 있지 못하다. 허공에 떠 있거나, 큰 파도에 흔 들린다. 그리고 인적 없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 세계로부터의 고립은 「오 른손은 영원히 왼편에 닿지 못한다」는 자기 소외로 심화되기도 한다. 이처 럼 고립과 흔들림으로서의 「집」의 이미지는 삶에 대한 행복한 몽상을 해 체시킨다. 집의 원초적 기능이 감싸는 것에 있다면 이러한 집의 공간은 내 부를 상실한, 외부의 힘에 의해 안의 공간이 망가진 상태를 나타낸다. 내부 가 온전하지 못한 집의 형상은 불안과 고독 속으로 내몰려 있는 詩的 화자 의 의식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집의 몸통」에 일어난 병적 징후는 인 간 존재가 앓고 있는 장애로 환원된다. 즉 「집」과 존재는 하나인 것이다. 최승자는 「집」의 이미지를 통해서 타자의 세계에 「영원히 닿지 못하는」 격절의 심리를 상징화한다. 그런데 소외는 고립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소외로서의 삶은 「나」와 「너」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만이 아니라 그 관계 방식이 진실성을 상실한 채 왜곡될 경우에도 발생한다.
4. 타락한 관계의 표상으로서의 왜곡된 性
타락한 세계는 타락한 존재 방식을 성립시킨다. 고립과 소외를 겪는 주체는 삶속에서 타자와의 진정한 교섭을 갈망하지만, 세계와 자아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반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타락한 세계에 종속되 어 있는 타락한 존재는 수동화된 자아를 의식하지 못한 채 그 구조 속에 맞 물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 간의 진정한 교섭은 와해되고 타락한 방 식만이 남게 된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빼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부분
주체와 타자를 연결짓는 접속사의 무의미함과 허부적거림은 우리들의 관계 가 와해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짓는 근원적 에너지는 인 간의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이 믿음이든 사랑이든 간에 타자를 향한 내 적 에너지만이 실체와의 직접적 대면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순수 한 관계 방식을 온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자 본」으로 성립된 관계 방식은 인간 존재의 존엄한 가치가 물질의 양으로 추 상화됨을 의미한다. 자본으로 대체된 관계는 존재의 실체를 묵살하고 서로 간의 내적 친밀감을 박탈해버린다. 최승자의 詩에서 이처럼 존재간의 뒤틀 린 관계 방식은 오염된 性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 애인은 太平洋처럼 누워 있다.
내 애인의 눈동자 속으로
한 낯선 사내가 걸어 들어간다.
그녀의 홍채가 휘황한 꽃잎처럼
벌어졌다 접히고
일순 나의 일평생이 조용히 닫혀진다.
닫혀진 문 안에서 그들이 나를
씹고 또 씹는 소리가 들린다.>
「S를 위하여」 부분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해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밤부엉이」 부분
「S를 위하여」는 애인의 간통을 에로틱하게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태평 양」으로 비유되고 있는 애인은 풍부한 물의 이미지에 의해 거대한 자궁을 형상화한다. 꽃잎처럼 벌어졌다 접히는 그녀의 홍채는 성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영상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람 은 내가 아니라 「낯선 사내」이다.
「나」는 소외된 채 그들의 즐거운 신음을 「나를 / 씹고 또 씹는」 고통으 로 받아들이게 된다. 「밤부엉이」에서는 「오토머신」과 같은 강력하고도 기계적인 힘을 가진 기괴하고도 잔인한 「밤부엉이」의 이미지를 통해서 강간의 공포를 강렬하게 시각화한다. 개체간의 유대를 가장 직접적 방식으 로 드러내는 性 관계가 타락한 세계 속에서는 이처럼 간통과 강간 등 왜곡 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창조성을 상실한 性, 신 성함이 제거된 性은 역겨움과 추악함을 드러낸다. 간혹 그의 다른 詩에서 사랑이 종기, 문둥병, 매독균 등으로 비유되고 있음도 이와 관련된다. 타자와의 뒤틀린 관계는 결코 창조적 세계로 이어질 수 없다. 따라서 최승 자는 세계 창조의 근원지로서 「자궁」을 불모의 이미지로 비유한다.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 들은 누워 있다」(여성에 관하여),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밤부엉이), 「죽은 여자는 흐물흐물한 빈 껍데기로 남아 / 비닐처럼 떠돌고 있었다」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 창 속으로 /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Y를 위하여), 「 어디선가 붉은 양수가 질펀하게 / 새어 흐르기 시작하고」(문명) 등의 詩구 절은 공통적으로 석질화되거나 더럽혀진 「물」의 이미지를 환기하고 있다.
「물」이 생명 창조의 원형성을 함의하는 이미지라면 최승자의 「물」은 생 명의 원천이 이미 파괴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승자는 이와 같이 더럽혀진 자궁의 이미지를 사산, 난산, 낙태 등 절망적 상황과 자연스 럽게 연결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타락한 세계가 낳고 있는 악순환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詩세계에서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관계 방식의 생산은 다만 객관적 풍경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직접적으로 「나」와 「님」 과의 관계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최승자의 詩에서 「님」이 폭력적이고 기 만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있다.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부분
<그때 당신이 또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기 시작한다.
뒤에다 무엇인가를 숨기고서
당신은 꿀물을 타 주며 자꾸만 마시라고 한다.
나는 그게 독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받아 마신다.
나는 내 두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장난이
내게는 얼마나 무서운 진실인가를 모르는 체 한다.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연습」 부분
최승자 詩에서 「나」는 버림받은 자이고, 「찔림」을 당하는 존재이다. 반 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와 「쇠꼬챙이」가 환기하는 금속적 이미지 처럼 「님」은 非인간적이고 僞惡的(위악적) 인물이다. 님과의 관계는 이처 럼 대부분 가학과 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최승자 詩에 등 장하는 님을 단순히 詩的 자아를 박해하는 「남성적 폭군」으로 규정하는 것을 유보할 필요가 있다. 「S를 위하여」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삼십 세」 「첫사랑의 여자」 「K를 위하여」 등의 시에서도 「나」는 여성, 「 님」은 남성이라는 도식을 역전시키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가 학과 피학으로 이루어져 있는 님과의 관계 양상을 여성주의적 관점이 아닌 인간 보편의 관계 양상으로 파악할 필요성을 제공한다.
그러면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고 있는 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이 러한 설정을 통해 詩人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님이 극악한 현실에서의 환상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라면 이런 환상 속에는 불가피하게 온전 할 수 없는 질병이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님조차도 불신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이 시대의 사랑이고 이 시대의 가장 「무서운 진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철새는 날아 가고 사회적 문화적 애인은 비명횡사한다」(고요한 사막의 나라)는 시구처 럼 이는 사회 구조가 부조리하면 그 사회 속에서 태어난 사랑도 부조리한 구조를 떠 안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5. 연대성 회복을 위한 매저키즘적 전략
타락한 세계 내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이다. 존재 간의 「접속사」 가 무의미하게 된 상태에서 타자와의 사랑을 시도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 러나 소외와 결핍이 극단에 이를수록 연대성 회복은 필연적 염원일 수밖에 없다. 최승자는 연대성 회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님의 부재」 라는 고전적 테마를 詩的 전제로 끌어들인다. 不在(부재)하는 님이야말로 님과의 관계를 가장 적극적 드러낼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
오 개새끼
못잊어!>
「Y를 위하여」 부분
우리 서정시의 역사 속에서 부재하는 「님」의 표상은 그야말로 유구하다. 고려 속요 「가시리」에서부터 김소월과 한용운의 詩에 이르기까지 반복되 어 온 고전적 테마라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자에게 이 고전적 테마는 보다 적극적이고도 리얼한 방식에 의해 수용된다. 그는 님에 대한 그리움과 막 연한 기다림, 슬픔의 정황이라는 고전적 포즈를 버리고, 이별의 모티브를 욕설과 비속어가 동원된 「버림받음」의 정황으로 현실화한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나와 他者와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막연한 관념 속에서 추상화되고 非현실화되는 과정을 억제시키고, 감정의 피상성으로부터 벗어 나 님과 자아와의 치열하고도 적극적인 관계를 담보해낸다. 아울러 시적 자 아의 고통을 부각시키는 방법이기도하다.
최승자의 「님」은 부재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폭 력적이고 위악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즉 「님」 또한 타락한 세계의 일부 인 것이다. 고귀한 님이 아니라, 부조리한 님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시도 함으로써 시인은 「의도적 매맞기」를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치욕과 신체적 고통을 감내하며, 때로 의사죽음을 반복한다. 그런 면에서 최승자 가 보여주고 있는 사랑의 방식은 다분히 매저키스적이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부분
이 시에서 詩的 화자는 님에게 가기 위해 자신의 비천함을 불사한다. 그 몸 짓의 애절함은 비극적이기조차하다. 그런데 그 도달점에는 「찔림」과 「죽 음」이라는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 찢김을 통한 에로티즘의 체험은 고립된 개체로 하여금 이질적 존재와의 연속성을 획득하게 한다는 점에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이차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자허 - 마조흐(Sacher-Masoch)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주인공 세 베린은 자신의 연인 완다에게 『저는 순교자들이 그 끔찍한 고문을 의연히 견뎌내는 모습, 감옥에 갇혀 고생하고, 화살에 찔리고, 끓는 물에 던져지 고, 사자에게 던져지거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무서운 장면들을 머리 속에 그리며 두려움과 함께 미묘하고도 강렬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 끔찍한 고통을 견디는 것이 가장 숭고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라고 고백한다.
세베린의 이같은 고백은 매저키즘이 변태적 쾌락의 일종이라는 통념 이상의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순교자들은 고문받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 적 고문을 감내함으로써 또다른 가치를 얻어내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굴 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겨울 들판에서)」라고 말하는 최승자의 매저키즘(Masochism)적 사랑도 육체의 순교를 통해서 고통 너머에 있는 새 로운 가치를 목적으로 한다.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꽂아다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부분
자신을 처벌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도록 설득함과 동시에 고통의 지연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은 매저키즘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이 시 에서 시적 자아는 「바스라짐」이라는 고통에 대해 오히려 능동적으로 다가 간다. 즉 「님」에게 자신의 곁을 떠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고통의 지연을 각오한다. 「가거라」라는 詩的 화자의 어조 속에서 다분히 명령적이고 단호한 결의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학적 견지에서 이와 같은 매저키즘은 모순된 현실 상황에 맞서는 독특 한 태도이며, 변화를 위해 他者에 대해 자아가 취하는 치열한 관계 방식을 의미한다. 매저키즘은 타자에 대한 의존성을 과장하고 자학적 고통을 감행 함으로써 「이것」 너머에 있는 세계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詩에 서 보여지는 현재적 상황은 어떠한가?
「콘크리트 벽」의 경화된 물질성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착시키는 도 시적 삶을 암유한다.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는 모든 삶의 방식을 그 구조 안 에 귀속시킨다. 최승자 詩에서 진짜 폭력적인 敵은 「콘크리트」 같은 구조 속에 잠재되어 있다.「주먹의 바스라짐」이라는 개체의 희생을 요구하는 세계의 구조 속에서 존재와 존재의 만남 또한 「바스라짐」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균열과 부서짐, 연인들 사이에서 그것은 곧 이별이며 존재 간의 상처이다.
「너」와 「나」의 관계를 고통 속으로 몰고가는 세계의 「콘크리트 벽」은 「우리」의 관계 밖에 울타리를 치고「우리」를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프 롬(E.Fromm)에 의하면 매저키스트적 성격 혹은 매저키스트적 사고의 공통된 특성은 개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관심 밖에 있는 힘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기존 사회를 고수하기 위한 막강한 힘이 개인의 삶을 함 몰시키기 위해 작용하는 순간, 그리고 그러한 위기를 절박하게 인식하는 순 간 매저키즘은 탄생한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他者와의 관계가 아무런 장애없이 소통된다면 그것이 야 말로 부조리한 관계이다. 최승자는 세계와의 결탁 혹은 순응에 의해서만 이 가능한 거짓된 온건주의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의 「사랑의 방식」은 희 생과 고통의 대가가 크면 클수록 왜곡된 세계를 돌파하고 보다 진실된 소통 구조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매저키스트적 사랑의 방식을 취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라 고 말함으로써 이별의 고통에 능동적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죽음」이 아니 라 오히려 사랑에 도달하는 행위임을 역설화하는 시적 자아의 태도는 매저 키즘의 전형적 구도이다.
이별과 기다림의 고통 뒤에는 사랑의 재생이 마련되어 있다. 신체의 「찢김 」에 의한 고통스런 사랑의 축체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꽃병」으 로 전이되어 있는 님의 몸속에 「나」의 신체는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꽃」의 피어남은 「콘크리트 벽」의 의미를 무너뜨리는 생 명적 가치를 전달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승자의 詩에서 보여지는 고통의 지 연은 일종의 통과제의(Initiation)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제 곧 그가 다리를 절룩이며
예언 속의 길을 찾아오고
붉은 달 아래 소리 없이 땀 흘리며
나는 거듭 낳을 것이다.
이 세계를
거대한 암흑덩어리를.
그리하여 내 태초의 남편아 받아라,
이 세계
이 거대한 핏덩어리를.
이것은 시초에 네가 꾸었던 꿈,
그러나 내가 완성한 꿈이다.>
「昏睡」 부분
고통의 종결점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분만의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 이제 곧 그가 다리를 절룩이며 / 예언 속의 길」을 향해 돌아오는 미래적 시간은 시원을 향해 열려 있다. 「님」은 「나」와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투쟁의 공간으로부터 영웅처럼 귀의해오고 있는 것이다. 詩人의 상상력은 나와 나의 남편을 태초의 신화적 공간으로 되돌려 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그 지점은 「거대한 핏덩어리」가 탄생하는 공간이며, 아직 「거대한 암 흑덩어리」인 채 새로운 질서를 기다리는 꿈의 공간인 것이다. 가학과 피학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행각 이면에는 이처럼 미래에 대 한 집요한 기대와 희망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적 전략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 환상을 창조하기 위함이며 새로운 존재 전환을 이룩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승자의 詩에서 고통은 쾌락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은 내 몸에 닿아 극대화되지만
그러나 나를 잠시 비워 두고
낮게 낮게 포복해 가면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약해져
저 먼 어느 지맥 속에선가
나의 고통인 듯 그의 고통인 듯
고통인 듯 즐거움인 듯,
들리누나 사방팔방으로
물 흐르는 소리. 졸졸 자알 잘,
아득하게 슬픈 기쁜 이쁜 물소리.
되흘러 들어오누나,
내 혈관 속까지.>
「脈」 전문
고통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나」와 「님」과의 관계는 보다 새로운 전기를 갖게 된다. 「나의 고통인 듯 그의 고통인 듯」 뒤섞이면서 둘은 유 대감이 충만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방식은 기실 식민지라는 난세를 치열한 정신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한용운 詩의 맥락과 일맥상통한다.
「이별이 쓸 데 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 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 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님의 沈默)라는 한용운의 의지 속에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 (알 수 없어요)으로 전환되는 고통의 변증이 있는 것이다.
이별의 고통을 새로운 만남의 힘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다운 삶의 유대를 붕괴시킨 극악한 현실로부터 삶의 진정성을 복원하기 위한 노 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방식을 통해 역사의 모순과 현실의 부조리함을 드러내 고,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 놓고자 했던 한용운의 시도와 최승자의 매저키스트적 상상력은 서로 맞닿아 있다. 그러나 최승자의 「님」은 한용 운의 「님」과 차이를 갖는다. 「님」이라는 대상에 전통적으로 부여되었던 고전적 의미가 그의 詩에서는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매우 현대적 의의를 갖는 부분이기도 한데, 기존의 우리 시가에 수 용되고 있는 님의 성격은 숭배적 대상으로서의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 따 라서 님은 갈망, 도취, 흠모의 대상이며, 버림받은 자의 상황은 주로 증오 보다는 그리움, 기다림, 아픔 등으로 윤색되고 있다. 이는 「나」와 「님」 이 서로 다른 존재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즉, 님은 부조리한 현실 넘어에 존재하는 관념적 이상을 의미하는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반면 최승자의 詩는 님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고상함의 기대를 제거함으로써 더 리얼하게 사랑의 실체를 해부한다. 「님」의 위악 성을 강조하는 데는 「님」 또한 「나」와 더불어 타락한 세계라는 동일한 존재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님」은 타락한 세계 속에서 스스로도 타락된 존재임을 각성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연대성 회복을 위해 이를 함께 돌파해나가야 하는 공동인인 것이다.
6. 허무적 자기 응시
최승자는 철저하게 타락한 세계 속에서 타락한 사랑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 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적 세계는 다만 남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 세계 라고 단순화시킬 수 없다. 敵은 실체를 은폐한 채 우리의 삶을 엄습한다. 분명치 않은 敵의 얼굴 속에 「나」의 모습이 되비친다. 타락한 세계 속에 기생하면서 그 부패의 살을 증식시키는 우리 모두는 세계의 공모자인 것이 다. 그러나 자신이 공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노예적 삶을 견딜 수 없는 치욕으로 느끼는 순간, 그리고 자신이 삶의 중심으로부터 버림받은 주변인임을 자각하는 순간, 삶의 부조리와 모순을 헤쳐나갈 새로운 전략은 불가피하다.
최승자는 타락한 세계의 전복과 인간다운 유대감이 회복된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위해 「사랑」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세계와 단절된 피 안의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숭고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사랑을 거절한다. 대신 기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사랑, 증오와 욕설이 난무하는 사랑, 버림받 은 사랑, 끊임없이 아이를 사산하는 사랑, 즉 「의도적 매맞기로서의 사랑 」을 선택한다. 매저키스트로서 「님」으로부터 버림받기를 간청하고 매저 키스트로서 「나」의 신체를 매질하도록 요구며 스스로 비천해지기를 작정 한다.
他者와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축소하고 분해시키는 이같은 사랑의 방식은 부조리한 세계의 폭력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무가치해진 주체의 삶 을 회복하기 위한 詩人의 의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詩人에게 있어서 매 맞기의 반복은 자신을 「치욕」과 「소외」로부터 해방시키는 아이러니적 행위이며, 새로운 삶을 향한 에너지의 발현인 것이다. 이같은 詩的 맥락은 「님」으로 상징되는 타자와의 유대성 회복만이 유일한 삶의 희망이라는 강렬한 전제를 내포한다.
그러나 최승자 시의 맥락 속에서 매저키스트로서의 치욕과 그 안에 꿈꾸었 던 환상이 과연 세계와의 화해라는 보다 큰 가치에 도달하고 있는지는 회의 적이다. 시 「昏睡」에서 세계의 거대한 핏덩어리를 태초의 남편에게 받으 라고 명령하는 태초의 아내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의 울림 은 왠지 공허하고 허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약 20년에 걸쳐 출간해낸 다 섯 권의 시집 속에서 他者와의 진정한 화해나 행복한 교감을 찾기란 좀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아니 믿어야 하는 당위가 그를 꿈꾸게 하고 시를 쓰게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숲은 없는데,
숲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데,
오늘 아침 창 밖에서 느닷없이
터지는 도시 새들의 울음 소리가
내 눈앞에 천연덕스럽게
숲을, 숲의 배경을 구성해내고
미처 깨어나지 못한
내 머릿속 공장에서는 뇌세포들이
샛된 새소리들을 실(絲) 삼아
꿈과 생시를 넘나드며
황홀한 환상의 숲을 짜고 있다.>
「없는 숲」 전문
불가능한 세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꿈꾸며, 그런 것을 꿈꾸는 자의 허무 를 견디며 그는 다만 순교자처럼 고통이 깊을수록,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수 록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이 는 「황홀한 환상의 숲」이 우리에게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믿음조차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의 감옥」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소외의 房」을 탈출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병든 세계 속에서 「황홀한 환상의 숲」을 꿈꾸는 이 진실의 포즈는 그런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포즈조차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 최승자 詩의 변화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서 출간된 두 권의 시집 「내 무덤, 푸르고」(1 993, 문학과지성사), 「연인들」(1999, 문학동네)에서 시인은 1980년대적 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동시에 세계와 자아와의 치열했던 관계가 매우 허무적으로 잦아들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한없이 외롭다. / 입이 틀어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중구 난방이다)에서 보여지는 뭔가 석연치 않은 허탈감이라든가, 「내 영원의 집 쇼 윈도는 / 텅 텅 비어 있다」(너에게),「일생토록 점점 더 탱탱하게 불 어난 내 빈 몸」(상경)에 암시되어 있는 존재의 근원적 허무감이라든가, 「 나는 내가 써왔던 텍스트를 모두 지워버렸다」(빈공책)라는 진술에서 읽을 수 있는 자기 무효화 등은 세계와 섣불리 화해할 수 없는 의식의 상태를 반영한다. 아울러 최승자는 이제 세계 보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 음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한 여자가 제 삶의
가로수 길을 다 걸어가
소실점 바깥으로 사라진다.
소실점이 지워진다.>
「둥그런 거미줄」 부분
이 詩에서 보여지는 소멸의 의미는 1980년대 詩에서 빈번하게 보여지던 擬似 죽음과는 그 의미가 분명 다르다. 이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실존적 허무의식을 의미한다. 이제 그의 詩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비 중은 급격히 줄어드는 반면 「나」라는 존재의 무상성에 대한 인식이 부각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여자」가 사라지고 「소실점」마저 사라진 공백의 공간을 시인은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의 공간 속에서 세계와 역사는 「우수수 무너져」(둥그런 거미 줄)내린다. 이처럼 허무의 심연에서 뒤척이고 있는 詩人의 詩的 인식은 그 만큼 이 詩人의 詩가 완숙한 경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 된다. 그런데 그 허무가 시를 쓴다는 행위조차도 덧없는 것으로 몰고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유카 나방이)된다는 의식처럼 그의 존재 탐구의 문제가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는, 즉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인식함으로써 총체적 인생의 문제를 천착하는 데 이르게 되리라 기대한다.
출처 :휘수(徽隋)의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 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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