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男子
작가:이은집
오전 八시.
남들 같으면 출근을 서두를 그 시각에 나는 퇴근을 위해서 개구리나 뱀 등의,
냉혈동물을 연상시키는 매끄럽고도 찬 감촉의 카시미론 이불속에 묻었던 알몸을 꺼냈는데,
그때 문득 가슴의 골짜기를 타내려 훨씬 아래에 위치한 검은 숲속의 머리만 내어놓고 있는 것에
시선이 간 순간 나의 기분은 여지없이 참담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용수철처럼 오그라든 채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사막의 초목도 이러한 아침에는 싱싱하게 잎사귀를 펼치는 법인데 너무나 나의 그것은 초라했다.
그러나 간밤의 격전을 상기할 때 나는 오히려 나의 이용사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야 했다.
한번도 아닌 일곱번이나 나는 저 직업적 전쟁푸•로•패•셔•날•조차 두려워 할
요새(要塞)를 점령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눈부신 백열전구의 조명이 온 방안을 꽉 채웠는데, 여자는 마악 외출에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녀는 핸드빽을, 스카프를, 코트를, 투피스를, 스타킹을, 스미즈를, 브라자를, 삼각팬티를,
이러한 순서로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안에 벗어버리고,
미니냐 맥시냐의 논쟁을 교묘히 회피한 미디 스타일의 잠옷으로 바꾸었으니까…….
그때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불의의 사나이가 마치 몇 날을
굶주린 호랑이가 사슴을 덮치듯 그러한 기세로 여자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잡아 먹으려는 호랑이와 잡아 먹히지 않으려는 사슴의 처절한 공방전은 실감있게 전개되었다.
엎치락뒷치락! 결코 여자도 만만치는 않았다.
내가 위에 오르는가 싶으면 재빨리 몸을 굴려 역전시키고,
목과 귓밥을 아무리 잘근잘근 씹어대도 결코 얼른 다음의 순서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싱갱이질 쳐야했다.
촬영기는 계속해서 원근(遠近)을 바꾸면서 그녀와 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 여름날의 흉사는 너무나도 돌연히 찾아왔으므로…….
그것은 영이, 바둑, 순이, 철수를 거쳐 개미가 종이배를 타고 시냇물을 한없이 떠내려 가던 즈음이었다.
그때, 나이에 비해 유난히 왜소하던 나의 몸둥이중 발바닥은
한나절을 걷지 않아 벌써 몇 군데에나 잘 익은 앵두같은 물집을 만들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토옥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던 물집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북새에 하필 홍역을 얻어 결국 서낭당이 있던 고개 마루턱에서 꼴깍 마지막 숨을 뱉은 동생이
아직도 어머니의 등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끝내 걸어야 했다.
그리고 가끔 희미하게 지워진 부분도 있지만 아버지가 낯모르는 어떤 사람들한테 한밤중에 불려 나가서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것이라든지, 촬영기가 지금처럼, 아니 야•크•기라 불리던
비행기가 빙글빙글 머리위를 맴돌며 따르륵 퍼부어대던,
그때마다 폴싹폴싹 메마른 땅에 먼지를 일으키던 장면은,
죽은 동생을 업은 채 허겁지겁 논뚝밑으로 나를 휩싸안고 쓰러지던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또렷이 떠오른다.
내가 어머니의 가슴속에 머리를 파묻고
『이애만은…!』이란 한마디였지만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윽고 여자는 숨을 할딱이며 지쳐 넘어졌다.
나는 이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여 한 손은 여자의 발끝으로부터 머리끝을 수색하는데,
반대편은 나의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제거하는데 사용했다.
처음과는 달리 이젠 여자도 반항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표정과 동작을 해내고 있었다.
나의 용사는 참으로 용감했다.
비록 작전상 수십 아니 수백번의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긴 했어도,
끝내 그는 저 숲으로 교묘히 위장한 동굴을 찾아 여지없이 적을 섬멸했으니까…….
드디어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항복을 해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승리를 차지하는 순간에 전사하는 불운을 감수해야했다.
나의 용사는 피를 토하며 그 동굴에서 쓰러졌던 것이다.
내가 그녀로부터 시체를 인수했을 때 격전지이던 그 골짜기에는 백혈(白血)이 흥건히 고여 넘쳤다.
그리고 종군기자는 끔찍스런 그 장면까지 보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좋았어!』
단장은 묘한 얼굴로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전쟁을 치르고 나면 으례히 찾아오는 메슥메슥한 허탈감에 빠져서 그 대로 누운 채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의 격전은 그로부터 겨우 한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C레이숀이나 깡맥주 대신 날계란과 드링크로서 전쟁의 피로를 몰아내고 있었을 때,
단장은 나에게 주민등록증에는 분명히 사십이 넘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을 텐데
그런 따위는 아예 싹 무시해 버린듯 피둥피둥 살이 찐,
그러나 절대로 뚱뚱하지는 않은 귀부인을 데려왔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보는 순간 흡족한 미소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장에게 모종의 약속을 수락한다는 뜻의 눈짓을 보냈다.
『돈이 너무 많아 원수라는 여재벌이야! 알아서 잘 모셔!』
거구의 단장답지 않게 씽긋 한 쪽 눈을 감았다 뜨며 귀에 대고 뜸을 주지 않더라도
나 역시 그녀의 모습에서 일견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자가용으로 이곳 산속의 통나무집까지 오게 되었다.
허지만 말이 통나무집이지 방안에는 더블베드에 T · V 냉장고까지 갖추어져 있다.
놀라운 것은 온냉수를 적절히 배합할 수 있는 목욕탕 시설까지 완비된 것이었다.
첫댓글 이 소설은 서점에서도 품절된 작품을
저와의 소중한 인연으로 한국문인협회
이은집 부이사장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탐독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