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붇다왕사 172강 - '신심'이란 (4)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신심 (saddhā) 1) saddhā, saddhādhamma, 믿음(*원문은 미얀마어): (1) 존경 정도만 있는 담마(믿음). (2) 진짜 saddhā(믿음), (3) saddhā cetasika(‘믿음’ 마음부수). 1-1. 업과 업의 결과, 삼보를 믿음, 1-2. 거듭해서 반복적으로 생겨나는 믿음. 1-3. 출세간 법(로꾿따라 담마 lokuttara-dhamma)를 원하는 바른 서원(삼마 찬다sammā-chanda)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업과 업의 결과’와 ‘삼보’를 믿는 믿음. 1-4. 삼보에 대한 믿음과 존경. 1-5. 붇다가 설하신 담마와 붇다를 믿는 상태. 1-6. 붇다와 담마에 확립된 흔들림 없는 믿음. 1-7. 법을 설하는 제자(담마까티까 dhamma-kathika)와 법문에 대한 믿음. 1-8. 업과 업의 결과와 내생에 대한 믿음. 1-9. 세간과 출세간에 대한 믿음. 1-10. 신심을 일으키는 대상(삳데이야 왇투 saddheyya-vatthu)을 접하고 깊이 들어가서 생기는 믿음(= 오깝빠나 삳다 okappana-saddhā). 마음을 맑게 하는 대상(빠사다니야 왇투 pasādanīya-vatthu)을 접하고 매우 존경하는 믿음(= 빠사다 삳다 pasāda-saddhā). 1-11. 흔들림 없이 ‘들어가서(okappana) 생기는 믿음’ (= 성자들의 믿음) 1-12. 도의 순간에 따라오는 믿음. 1-13. 보시의 원인이 되는 믿음. 1-14. 반조의 자와나(빳짜웩카나 자와나 paccavekkhana-javana)와 함께하는 믿음. 1-15. 함께하는 담마(마음부수)들을 매우 맑게 하는 담마, 함께하는 담마(마음부수)들을 매우 맑게 하는 원인이 되는 담마. 2) 믿음 경(saddhā sutta): [6차 결집본] 상윧따니까야 3권 197쪽. ‘압빠나 숟따’(Āpaṇa-sutta, S48:50). 앙굳따라니까야 3권 264쪽. ‘자나 숟따’(Jhāna-sutta = Saddhā-sutta, A10:8). 3) 외도에 대한 믿음 (유사 신심: 믿음의 퇴보(saddhahanākāra) — 결정 짓는 마음부수(adhimokkha-dhamma)) 4) 청신녀의 이름(saddhā) 5) 천상계 왕의 딸 이름(saddhā) - 미얀마 <삼장(tipiṭaka) 사전> 中, 'saddhā' |
믿음이 있어야 선업을 짓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일단 믿음이 있어야 선업을 짓는다고 합니다. 믿는 마음이 있어야 일부러 선업을 짓겠지요. 믿음이 있어야, 바른 믿음이 있어야 꾹 참고 선업을 짓습니다. 삼장 사전에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삼보(佛·法·僧)와 현생(현재 세상)과 내생(다음 세상), 업과 업의 결과, 의도와 의도의 결과, 이것들이 정말 있다고 믿으면 진짜 믿음이 있는 겁니다. 이번 생이 있고 내생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업과 업의 결과, 나의 의도가 결과로 올 것이라고 믿으면 믿음이 있는 겁니다. 진짜 믿음인 겁니다. 그거는 가짜 믿음이 아니라 진짜 믿음입니다.
그게 아니라 뿌라나 깟사빠, 어제 설명했던 외도 수행자들이죠. 이런 잘못된 견해를 지닌 외도들을 믿는 것. 다른 종교의 스승들을 믿고 의지하는 것. 이것은 밋차 아디목카(micchā adhimokkha), 잘못된 결정(결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짜 믿음인 거죠.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있는데 진짜 믿음은 현생을 믿고 다음에 올 세상(내생)을 믿고, 의도와 의도의 결과들을 믿는 것. 이것을 믿는 것은 진짜 믿음이고 뿌라나 깟사빠 같은 수행자들, 붓다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을 따르는 수행자들, 이교도의 스승을 믿는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가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는 것은 똑같은데 그것은 가짜이고 이것은 진짜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업과 업의 결과를 믿어야 바른 믿음입니다
뿌라나 깟사빠는 깜맛사까따 삼마딛티(kammassakata-sammādiṭṭhi) 즉, 업과 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외도였습니다. 이교도도 여러 가지가 있죠. 힌두교는 업과 업의 결과를 믿습니다. 대승(마하야나)도 업과 업의 결과를 믿죠. 조금 변질됐는데, 교리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모든 붇다들이 다 죽어서는 어느 천상계에 모여서 다 같이 살고 있다. 이런 이상하게 흘러가는 부분이 있지만,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종교들 중에는 성전(聖戰),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하느님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은 좋은 천국에 태어나는 일이고 죄를 지어도 돈을 내면 면죄부를 살 수 있고. 이런 부분들은 업과 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가르침 입니다.
붇다의 말씀과 붇다의 말씀이 아닌 것의 큰 차이는 붇다의 말씀은 둑카를 이야기하고,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어디에 살아도 그게 둑카라는 겁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둑카가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종교는 사성제밖에 없습니다. 이런 교주는, (부처님은 도저히 교주로 보이지도 않는데) 이런 종교는 이 테라와다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어디에 있어도 삶이 있는 동안은 둑카라는 겁니다. 태어나서 살고 있는 한, 5온이 있는 한, 나라는 것이 있는 한 둑카이지만, 둑카가 아닌 유일한 게 있다는 거죠. 나를 벗어난 무아가 되면 둑카가 아닌 상태가 되는 겁니다. 열반을 보는 것, 열반을 보면 무아를 압니다. 이런 경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그리고 그 방법이 분명하게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 외 다른 종교들은 어디 계속 영원한 무언가를,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산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무상을 애기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불법이 남아 있지만 불법이 없는 시대를 살아야 될 때,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종교를 믿으십시오. 원인과 결과, 의도의 결과를 믿는 종교를 찾아서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안 그러고 아무 거나 믿으면 다음 생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어디에 태어날지 모르는 거지요. 고통만 계속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 충분히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뿌라나 깟사빠는 업과 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외도였습니다. 힌두교나 일부 종교들은 업과 업의 결과를 믿었습니다. 이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종단의 제자들은 부처님 상가에 출가했을 때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중간에 보호 관찰하는 기간 없이. 그렇지 않고 업과 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종교의 사문들은 개종해서 들어올 때 오랫동안 보호관찰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석가족일 때, 석가족이 출가하면 바로 받아줬습니다. 부처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의 가문에는 특혜를 준 거죠. 뿌라나 깟사빠는 원인과 결과를 믿는 깜마삿까따 삼마딛티(바른 견해)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바른 견해를 가르치는 종단의 교주가 아니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을 믿는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짜 믿음이라는 거죠.
믿음이 생기면 용감하게 뛰어듭니다
그 다음 믿음의 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이런 예를 듭니다. 전륜성왕의 루비는 물을 맑게 하는 맥반석과 같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모든 혼탁하던 것들이, 정리가 되지 않던 것들이 다 깨끗하게 맑아집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확신이 생깁니다. 이건가 저건가 이렇게 결정내리지 못하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게 맑아져서 잘 보이고 용감하게 뛰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전륜성왕의 루비 같은 돌과 같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는 믿음을 전쟁터에서 아주 용감한 장군과 같다고 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 장군들이 앞장서서 나가서 돌진하지 않습니까, 화살이 쏟아지는데. 그런 장군과 같다는 겁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항상 앞장서서 싸웠답니다. 많은 대륙을 점령한 알렉산더. 그런 용감한 장군과 같다는 거지요. 믿음이 있으면 겁이 없어지는 거지요. 믿음이 있으면 겁 없이 하게 됩니다. 겁 없이 수행하고 겁 없이 보시하고 겁 없이 봉사합니다. 집을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으면 겁이 없는 장군과 같다, 이럽니다. 미얀마나 네팔에서는 어려서 출가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13살 또는 13살 전에도 출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1살에 출가해서 선원에 오면, (제가 보기에는 정말 기가 찬 거죠.) 집에 있지 왔고 왜 여기 와 있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이런 게 믿음인 거죠. 겁이 없는 거죠. 겁 없이 출가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믿음이 있으면 가치 있는 것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또 믿음을 손에 비유합니다. 코끼리의 코는 사람의 손과 같은 일을 하지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으면 손이 뭘 합니까. 잡지요. 손은 물건을 잡습니다. 코끼리의 코도 물건을 잡을 수가 있죠. 믿음이 있으면 뭘 하는가 하면 선업을 짓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시하고 계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수행하려고 하고.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걸 포기해야 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는 거죠. 그래서 더 큰 선업을 짓게 됩니다. 제일 큰 선업인 수행 선업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손이 여러 가지 것들, 가치 있는 것들. 좋은 것들을 손이 가서 잡듯이 믿음이 그 가치있는 것을 잡아서 내 것으로 가져온다는 겁니다. 코끼리가 자기 코로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 입에 넣듯이. 그런 것들이 내게로 들어오는 거죠. 보시도 하고 계도 팔계를 지키려고 하고 그리고 수행을 하려고 하고. 경전을 배우려고 하고. 여러 가지 믿음이 있어야 이게 이루어지는 거죠. 많은 선업들을 짓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수행할 때 통증도 꾹 참고 버팁니다.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는 믿음으로 하죠. 사띠가 좋아지면 나중엔 통증이 없지만 사띠가 없는 처음에 통증을 참고 한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버티려면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수행이 나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믿음. 참아도 아무 탈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참다가 자세 바꾸고 또 바꾸고 하다보면 사마디도 안 생기고 사띠도 안 생기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수행할 때 다리가 아주 아팠습니다. 다리를 바꾸면 법을 얻지 못할까봐 버텼습니다. 아주 아주 아팠지만 버텨서 다리에 좀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지금도 감각이 없습니다. 20년 됐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걸 얻었죠. 그 조금 감각이 없는 게 대수겠습니까. 어쨌든 믿음이 있으면 아파도 버티고 수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하다가 계속 탈이 나기 때문에, 수행하면 계속 탈이 납니다. 몸에 이상 증상이 나옵니다. 그만두고 나가는 거죠. 믿음이 있으면 견디며 계속합니다. 수행이 절대 나한테 해로움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으면.
그 다음 또 믿음을 물과 같다고 합니다. 물이 깨끗하게 씻어주는 일을 하지요. 더러움을 씻어줍니다. 그리고 믿음은 꽃과 같다고도 합니다. 꽃은 아름답게 해주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믿음은 풀과 같은, 붙이는 기능을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좋은 것들이 와서 좋은 것들에 가서 붙고, 좋은 이들이 와서 붙고 선업에 가서 붙고. 선업을 하게 되고 좋은 일들을 찾아서 하고 거기 가서 붙죠. 믿음이 있으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문과 같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들어갑니다. 믿음이 있어야 보시도 하고 좋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보시도 하고 계도 지키고 희생을 감수하며 수행도 하고, 믿음은 세간을 사는 데도 매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일들을 하게 되는 거지요. 문이 되는 것이죠. 모든 좋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믿음이 있으면 노력과 시간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또 믿음은 그에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돈과 같다고 합니다. 가치인 거죠. 믿음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경전에 보면 주로 이렇게 나오죠.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마하사와까(대제자)가 되는데 전생에 부처님 때 일주일 동안 상가를 모셔서 공양을 올리고 서원을 세우죠. 제가 두땅가(dhutaṅga, 두타행) 제일의 사와까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서원을 말하면 부처님이 “그래, 넌 그렇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보통.
일주일 동안 상가의 많은 스님들을 모셔서 몇천 명을 모셔서 크게 일주일 내내 올리죠. 그러고 “제가 이런 이러한 사와까가 되고 싶습니다.” 이러면, “그래, 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지요. 이럴 때 그에 합당한 가격, 가치를 지불하는 거죠. 믿음이라는 것이 그만큼의 뭔가 선업을 짓고 이정도 선업을 지으면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거지요. 그런 믿음이 없으면 그런 걸 하지 않겠지요. 2000명의 상가 스님에게 가사를 보시하는 게 그 당시에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시장에 가면 천을 살 수가 있지요 그때는 다 목화를 심어서 씨를 뽑아서 천을 짜야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라서 조각조각 내어서, 손바느질이죠. 재봉질이 아니라. 손바느질로 가사를 기워서 가사보시를 했습니다. 2000명의 비구들에게 이런 보시를 할 때 이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드는 겁니다. 공이 들어갑니다. 이것의 결과로 내가 정말 가치있는 것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을 때 그에 합당한 선업을 짓습니다. 그만큼의 믿음이 없으면 안 하지요. 믿음이 없는데 왜 하겠습니까.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것을 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예들로 나옵니다. 내가 믿음이 있으면 이런 것들을 하게 된다는 거지요. 믿음이 이런 것들과 같다는 겁니다. 손과 같고, 믿음이 있어야 잡죠. 선업의 기회를 잡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산과 같다는 거지요. 믿음이 있어야 이 재산으로 우리가 뭔가를 하지 않습니까. 든든한 거죠. 믿음이 있으면 불선업을 짓지 않으니깐 씨앗과 같다.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하나인데 심어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많이 열리죠.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을 가지고 많은 선업을 지어서 큰 선업 풍성한 선업이 되게 만든다는 거죠.
이런 예들을 듭니다. 믿음이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무상하다는 것과 무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것, 위빳사나를 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4가지 믿음
믿음을 4가지로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4가지인가 하면 빠사다 삳다(pasāda-saddhā)와 오깝빠나 삳다(okappana-saddhā), 아디가마 삳다(adhigama-saddhā), 아가마나 삳다(āgamana-saddhā, 또는 āgamanīya-saddhā). 이렇게 4가지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다음 시간에 해야 되겠네요. 4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4가지로 나누는데 빠사다 삳다는 맑게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마음을 맑게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맑아져서 깨끗해져서, 시야가 탁하면 헤매죠. 어둡고 탁하면 헤매입니다. 할까 말까 안 보이니깐. 이 길이 맞나 들어가도 되나. 이렇게 물이 혼탁하면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깐 두렵고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이런 거죠. 길이 어두우면 빨리 달리지 못하고.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이게 다 맑아지니깐 환히 보이니깐 남이 보기에 겁 없이 들어가는 거지요.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합니다. 잘 보이니깐 두렵지 않은 거죠. 잘 보이지 않으면 두렵죠. 캄캄하면 두렵습니다. 캄캄하면 뭐가 어디에 있을지 갑자기 나올 것 같고. 하면 안 될 것 같고. 조심해야 될 것 같고.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훤해지고 탁하던 것이 맑아지니깐 잘 보여서 용감해집니다. 용감하게 수행합니다. 수행 잘하는 수행자들 용감하게 합니다. 매우 용감하게 수행합니다. 그게 믿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뭐 다른 일할 때도 용감한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일할 때는 용감한 믿음들도 있지요. 보시하고 봉사하고 이런 일할 때 아주 용감한 믿음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수행할 때 아주 용감한 이들도 있고.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근기나 성향이. 어떻든 믿음이 있으면 빠사다 삳다라는 것은 맑게 하는 마음인데, 맑아지는 마음인데, 여기에서 빠사다 삳다라는 것은 벽화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탑이나 그리고 이야기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생겨나는 믿음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삳따-낭 바-제-마
삽베- 삳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필사자: 사무량심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0-14 인터넷(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