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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맏타 상가하> 7장 범주의 모음(사뭇짜야 상가하 samuccaya-saṅgah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제7장 사뭇짜야 빠릿체도(Samuccaya-paricchedo. 범주의 장)
4. “삽바 상가호(모든 본질의 모음)” 중의 52. 사성제의 본질
사성제의 실재 52. Dukkhaṃ tebhūmakaṃ vaṭṭaṃ, 둑캉 떼부마깡 왇땅 ③둑카삿짜(고성제)이다. ①세 가지 세상에서 생겨나는 ②담마들이 taṇhā samudayo bhave. 딴하 사무다요 바웨 ④집착은 ⑤사무다야 삿짜라는 이름(집성제)이 ⑥된다. Nirodho nāma nibbānaṃ, 니로도 나마 닙바낭 ⑧니로도 삿짜(멸성제)라고 부른다. ⑦열반은 maggo lokuttaro mato. 막고 로꾿따로 마또 ⑩막가담마 8가지를(막가삿짜(도성제)라고) ⑨로꾿따라가 되는 ⑪알아야 한다. |
사뭇짜야 장(章)에서 문단번호 52번 “사성제의 본질” 할 차례입니다.
삽바상가하(sabba-saṅgaha)는 마음·마음부수·물질·열반 네 가지를 다른 각도에서 재정리한 장입니다.
52번 보시면 두 번째 줄 “딴하 사무다요 바웨(taṇhā samudayo bhave)”입니다. 딴하는 원인이다. 집착은 고성제의 원인입니다. 이 집착이 모호한데, 뭐가 집착이냐 하면, 내 마음이 보고 있는 그것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법문 듣고 있지 않습니까? 사성제에 대해서 듣고 있으면 사성제에 대해서, 아비담마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내 마음은 집착하는 거기에 가있습니다.
근데 듣고 있어도 마음이 여기 안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마음은 딴 데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마음이 다른 데 집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잠시도 쉬지 않고 집착합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존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라한만이 집착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이 아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도 집착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 우리의 마음이 가 있는 거기에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집착이 사람마다 다르죠. 대부분 욕계 중생은 5욕락에 집착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5욕락을 구하고, 모아놓은 5욕락을 쓰는 데 보내지 않습니까? 5욕락은 6문으로 들어오는 대상으로 느끼는 즐거움, 이것을 5욕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욕계에 살면서 필요한 것들 많습니다. 이런 것들 거의 대부분 5욕락입니다. 5욕락 중에서도 악업에 집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녹이 쇠에서 나와서 쇠를 부식시키듯이 악업에 집착해서 자신을 잡아먹는 집착도 있습니다. 선정을 얻는다는 것은. 좀 더 섬세하고 좀 더 오래 가고 좀 더 깨지지 않는 좋은 느낌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색계 선정을 얻는다는 것은 5욕락보다 좀 더 수준 높은 집착인 거죠. 더 높은 수준은 무색계 선정에 집착하는 것.
욕계에 사는 중생들도 집착하는 것이 각자 다 다르죠. 어떤 사람들은 가족에 집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고, 요즘은 사람이 아닌 가족 반려견, 반려묘에도 집착하죠. 그들도 욕계에 사는 중생이니까 지구 공동체이긴 합니다만, 마음이 끌리는 곳에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죄송하지만 높습니다. 마음이 거기로 향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법구경 주석서(*법구경 21~23 게송에 대한 주석)에 나오죠. 고사까 거부의 전신(前身. 꼬뚜할리까kotuhalika)이 오랫동안 굶주리며 긴 여행 끝에 목동의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러 들어갔다가 그 집의 개가 우유를 먹는 걸 봅니다. 자기들은 며칠을 굶었는데 개가 귀한 우유를 먹는 것을 보고 되게 부러워합니다. 굶주리다 음식을 너무 많이 급하게 먹고 소화를 못 시켜 그날 밤 죽습니다. 그리고 부러워한 개의 자궁에 들어갑니다. 좋아하는 방향으로 끌리기 마련입니다. 끌려서 가장 이익이 있는 방향으로 마음을 계속 채찍질해나가는 것이 지혜의 쓸모입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게 다 다른 거죠. 우리는 각자 다른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각자 취향이 다릅니다. 취향이 달라서 다른 걸 좋아하고 다른 것에 집착하고 그쪽으로 추구하면 그쪽으로 갑니다. 색계 선정을 원하면 색계 선정을 얻고, 무색계 선정을 원하면 무색계 선정을 얻고, 부를 원하면 부를 얻고, 학위를 원하면 학위를 얻고, 권력을 원하면 권력을 얻고,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원하면 열반을 얻습니다. 집착하는 게 다 다릅니다.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음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듣고 있겠죠.
이런 모든 집착들이 딴하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 어느 쪽에 많이 집착하느냐에 따라서 그쪽으로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그 대상을 오랫동안 집착합니다. 어쨌든 정성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옵니다. 시간을 보낸 만큼 집착한 대상에서 결과가 나오죠. 자식에게 보통 많이 집착하죠.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낳았으면 미성년 동안은 부양의 책임을 져야 하죠. 가족에게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습니까? 그 결과가 오겠죠. 집착이라는 것은 그 보고 있는 대상,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집착을 크게 나누면 세 종류의 집착이 있습니다.
세 종류의 집착이 5욕락에 대한 집착(욕애. kāma taṇhā), 생이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집착(상견. sassata diṭṭhi), 생이 항상하지 않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집착(단견. uccheda diṭṭhi) 이렇게 세 종류의 딴하가 있습니다.
욕계 집착은 대상 6가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5욕락의 대한 집착은 6문으로 들어오는 대상, 여기 6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형색·소리·냄새·맛·감촉 그리고 마음으로 들어오는 대상에 집착하는 게 까마 딴하(kāma taṇhā)입니다.
바와 딴하(bhava-taṇhā. 존재에 대한 집착)는 '삿사따 딛티(sassata-diṭṭhi)'라고도 합니다. 삿사따 딛티라는 것은 '생이 영원하다는 견해'입니다. 영혼이 있다. 영혼이라고 말하죠. 만년영가(萬年靈駕)인가? 이렇게 붙어 있던데, 귀신으로 만 년 동안 떠돌라는 뜻입니까?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 한자를. 귀신이 돼서 영가가 돼서 만 년 동안 떠돌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건가? 좋은 데 가라고 기원하는 건가? 삿사따 딛티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사견(邪見)입니다. 영혼은 불교의 견해는 아니죠. 불교에서는 영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윤회하는데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하다면 무아를 부정하는 겁니다.
영혼이 아닌 '마음과 물질'이 있죠. 정신적인 나마담마(nāma-dhamma)와 물질적인 루빠담마(rūpa-dhamma)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쉼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여기에 나는 없는 거죠. 정신과 물질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건 없습니다. 계속 변하죠. 영원한 거, 아트만이 있다, 신이 있다, 우주와의 합일, 이런 믿음은 삿사따 딛티입니다.
'바와(생)란 계속해서 생긴다. 그래서 바와(bhava)라고 한다.' 항상 끊이지 않고 생겨서 바와랍니다. 빠알리어로 생을 바와라고 하는데, 이 바와를 단어 그 자체에서 풀어 해석한 겁니다. '생이 계속 생겨나기에(bhavati)' 바와(bhava)라고 합니다.
빠알리는 단어를 가지고 단어의 뜻을 유추합니다. 그걸 ‘위가하(vigāha/vigāhana)’라고 하는데, 중생을 삿따satta라고 합니다. 삿따의 어근(saja)으로 이 뜻을 보면, 6문의 대상에 집착해서 중생입니다. 보디삿따는 “붓다의 지혜, 보디 냐나”에 집착해서 보디삿따이고 일반 중생인 우리는 그냥 아무 데나 집착해서, 목적 없이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눈 가는 대로 거기에 집착합니다. 이렇게 뭐가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고 아무 데나 집착하는 삿따, 그래서 중생입니다.
우리가 개로 태어나면 개에게 필요한 것을 집착하겠죠. 천신으로 태어나면 천신의 5욕락에 집착하겠네. 그때그때 집착하는 게 다릅니다. 아무런 목표 없이 그때그때 끌려 다니는 중생, 그때그때 필요한 것에 아무것에나 집착해서 중생입니다.
삿사따 딛티(상견), 생이 영원하다고 믿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 중생들은 또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냐면, 대상, 형색·소리·냄새·맛·감촉 이런 대상들에 자아가 있다고 믿습니다. 나무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죠. 책상에 생명이 있다. 자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물질에도 자아가 있다고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같이 포함돼 있습니다.
생이 항상하다고 믿는 집착입니다. 형색·소리·냄새·맛·감촉 이 대상들, 밖에 있는 대상, 유정물과 무정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온갖 들어오는 대상들에 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문기둥에도 자아가 있다고, 대들보에도 자아가 있다고 믿고, 이런 것들 이 자아들이 영원하다고 믿는 거죠. 이게 바와 딴하입니다. 온 세상과 중생을 조물주가 창조해서 모두 다 조물주가 다스린다고 믿는 것 역시 바와 딴하입니다.
위바와 딴하(vibhava-taṇhā)는 '웃체다 딛티(ucchedadiṭṭhi)'입니다. 이것은 죽으면 더 이상 없다. 이렇게 믿습니다. 죽으면 없다. 죽으면 끝이다. 이렇게 믿는 것, 위바와 딴하입니다. 이들도 형색·소리·냄새·맛·감촉 이런 대상들에 자아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그 생이 끝나면 끝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을 위바와 딴하라고 합니다.
불자들도 보면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바른 견해, 원인과 결과를 믿습니다. 합리적으로 행동합니다. 이치에 맞게 판단하고 결정 내립니다. 근데 또 어떨 때는 위바와 딴하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끝이다.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하고 같은 사람인데 어떨 때는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어서 끝나지 않고 어딘가에 영원한 뭔가가 있다. 바와 딴하, 상견 이걸 믿습니다. 오락가락 합니다. 어떨 때는 지혜롭고 어떨 때는 잘못된 견해에 빠졌다가 어떨 때는 다시 또 바른 길을 가다가 이렇게 왔다갔다합니다. 이런 견해를 ‘아사야(āsaya. 둥지)라고 한다.’ 했습니다. 어떨 때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어떨 때는 상견이나 단견으로 갔다가, 대부분 범부들은 계속 돌아다니는데 잘못된 견해로도 갔다가 바른 견해로도 왔다가 이렇게 왔다갔다하는 거죠. 싫을 때는 단견 죽으면 끝이다. 5욕락을 즐길 때는 죽으면 끝이다. 이러고 5욕락을 즐기고, 지혜로울 때는 '선업을 지어야지,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이렇게 또 생각하는 거죠. 나쁜 짓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기 힘듭니다. 너무 괴로운 거죠. 계속 단견으로 살기에는 아닌 것들이 분명히 또 보이는 거죠. 자기들 눈에도 원인과 결과가 보이는 거죠. 살면서 계속 왔다갔다합니다.
이 세 가지 딴하가 있고, 견해도 상견, 단견, 그리고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견해. 세 가지 견해를 왔다갔다합니다. 수다원이 되면 더 이상 상견이나 단견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남이 다른 견해를 얘기해도 아니라고 압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그럴 듯하게 얘기하면 긴가합니다. 넘어갑니다. 그냥 넘어갔다가 또 다시 바른 견해를 들으면 이게 바른 견해인 것 같다. 이렇게 되죠.
이렇게 집착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다음, “니로도 나마 닙바낭(Nirodho nāma nibbānaṃ)” 열반은 니로도 삿짜(멸성제)라고 부른다. 열반은 둑카의 소멸이라는 삿짜입니다. 진정 고통이 없는 자리는 열반 하나뿐입니다. 다른 행복이라고 아는 모든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왜곡된 고통입니다. 앞에서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마음이 가 있는 거기에 집착한다'고 했죠. 우리가 열반이라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집착을 끊음', 막가 삿짜(Magga-sacca)가 필요합니다. 팔정도가 필요한데 팔정도의 핵심은 사띠죠. 사띠가 관건입니다.
사띠가 관건인데 우리 마음은 어떤 대상이든지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대상에게로 갑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은 ‘나’입니다. 밖의 대상으로 가지 못하게 마음을 자꾸 나에게로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게 1차적으로 명칭하는 겁니다. 몸, 느낌, 생각 이 세 가지에 명칭합니다. 위빳사나는 일단 명칭하고 그 다음에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명칭하지 않으면 마음이 ‘나’에게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있는 겁니다. 명칭해야지 그나마 잠시 붙습니다. 끊임없이 밖의 대상으로 나가는 마음을 끌어당겨 계속 나에게 붙입니다.
지금 제가 법문을 하고 여러분은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밖의 대상에 있는 겁니다. ‘나’라는 대상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계속 ‘나’가 아니라 밖의 대상에 마음이 가서 삽니다. 드물게 ‘나’라는 대상에 마음이 있을 때는, 몸이 아플 때 내 몸에 있습니다. 그 외에는 계속 밖에 있습니다. 아니면 아주 번뇌가 심하다거나 이러면 괴로울 때 괴로운 줄 알죠. 이 마음이 너무 힘들구나. 즐겁거나 이러면 내 마음에 있지 않습니다. 밖에 즐거운 대상,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마음이 가 있죠.
나라는 대상에 명칭으로 일단 마음을 붙이고 그 다음에 그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을 사띠합니다. 일어나는 느낌이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이 일어나겠죠. 좋고 싫고 아니면 뭔지 모르고 우뻭카, 이런 대상들이 일어났을 때, 그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딴하(집착)와 의도는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다르지만 의도가 있다는 것은 딴하가 있어서 의도가 있는 겁니다. 이게 그걸 진행되지 못하게, 그걸로 업을 짓지 못하게 계속 자르는 거죠.
딴하가 일어나더라도 진행되지 못하게 계속 자르는 거죠. 이게 막가 삿짜입니다. 위빳사나는 딴하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딴하는 계속 일어납니다. 대상에 마음이 갔으면 일어납니다. 마음이 1초에 1조개가 일어나니까 얼마나 빨리 일어나겠습니까? 가자마자 일어납니다. 그걸 일어나자마자 자르는 거죠. 이게 사띠하는 겁니다. 엄청 빨라야 되겠죠. 마음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는데, 가자마자 집착은 일어나고 집착을 빨리 잘라야 됩니다. 그게 막가 삿짜입니다. 그렇게 해서 집착을 계속 계속 잘라서 완전히 집착이 없는 상태가 되면 열반을 봅니다.
집착과 로바, 탐욕은 같은 거죠. 같은데 로바(lobha)가 완전히 없는 상태, 나라는 위빳사나 대상에 로바가 완전히 없을 때, 나에 대한 로바가 완전히 없을 때, 우리의 로바는, 우리의 집착은, 다 나로 인해서 생기지 않습니까? 나로 인해서 나를 위해서 집착이 생깁니다. 아닌 것 같습니까? 나를 위해서 필요로 합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 가족이 있고, 나를 위해서 나라도 있어야 되고, 나를 위해서 자식도 있어야 되고, 나를 위해서 지구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나에 대한 집착, 내가 제일 중요한데 나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열반을 봅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닌 것 같습니까? 그러면 붓다입니다. 또는 아라한입니다.
그래서 이 나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없으면 둑카가 완전히 소멸합니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집착이 끊어져서 고통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 이게 니로다 삿짜입니다. 집착이 끊어지면 고통이 끊어집니다. 집착이 있으면 고통이 있고, 집착이 없으면 고통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막고 로꾿따로 마또(maggo lokuttaro mato)”, 로꾿따라(출세간)가 되는 막가담마 8가지를 막가삿짜(도성제)라고 알아야 한다. 로꾿따로 막가는 무엇인가 하면, 막가 찓따(magga-citta, 도 마음) 네 개 안에 있는 팔정도입니다. 도 마음 네 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입니다. 팔정도라는 마음부수죠. 삼마 딛티(sammā-diṭṭhi. 지혜), 삼마 상깝빠(sammā-saṅkappa. 바른 사유. 위딱까. 겨냥), ‘나’라는 대상으로 겨냥하는 그 겨냥을 말합니다. 이게 바른 사유이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그리고 바른 노력, 바른 정진(노력) 그리고 삼마 사띠(sammā-sati), 그리고 바른 집중, 8개의 마음부수, 바른 집중이라는 마음 부수는 없죠. 바른 집중이라는 마음 부수는 없고 이건 에깍가따(ekaggatā)입니다. 위리야(vīriya. 정진)은 5문에서 일어나는 마음(전오식) 이외에는 모두 위리야가 들어가죠. 문으로 대상이 들어올 때는 저절로 들어오는데 그 대상을 가지고 선업과 불선업을 지을 때는 위리야(노력) 없이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삼마사띠(바른 사띠) 이 여덟 가지 마음부수, 도의 마음 네 가지에 있는 8개의 마음부수. 즉 8정도 이것을 막가삿짜라고 한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내일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삳따-낭 바-제-마
삽베- 삳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4-17 인터넷(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