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며 율곡과 막역한 친구였던 우계 성혼의 사당과 묘는 파주군 파주읍 향산리에 있다. 파주읍에서 문산읍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가다가 군 부대를 조금 지나면 마을이 있고, 마을 안길로 가면 가게가 있는데, 이 집은 우계의 후손으로서 사당과 묘를 관리하고 있다.
마을의 끝에서 논과 밭 사이로 난 좁은 시멘트 길을 50여 미터를 가면 저 멀리 산자락에 사당이 보인다.
우계는 학문의 깊이는 물론 후학을 육성함으로써 조선 성리학 발전에 공헌하여 파산학파(坡山學派)의 큰 봉우리를 이룩하였으나, 한사코 벼슬을 거부한 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시가 전한다.
사십 년 동안 푸른 산에 누었는데 (四十年來臥碧山) 시비는 무슨 일로 이 인간에 오는고 (是非何事到人間) 소당에 홀로 앉으니 봄 바람 속에 (小堂獨坐春風地) 꽃이 웃고 버들은 자니 끝 없이 한가하다 (花笑柳眠閒又閒)
이 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생원·진사의 양장(兩場)에는 합격하였으나, 복시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과 재주를 아까워한 율곡에 의하여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도록 부탁을 받았으나, 번번이 병을 핑계 삼아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성혼(成渾, 1535∼1598)의 본관은 창령(昌寧)이고,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이다.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현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나, 이곳 파주 우계(牛溪)에서 거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우계라 불러 자연스레 호가 되었으나, 본래 호는 묵암(默庵)이다. 율곡은 우계를 이렇게 평하였다.
"만약 견해의 도달한 바를 말한다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할 것이나, 지조를 삼가하고 지키며 실천함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수 없다."
우계는 양장에 합격한 후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1554년(명종 9)에는 같은 고을의 율곡과 사귀어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34세에 학문의 깊이가 세상에 전해져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장원(掌苑)·현감(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육에만 힘썼다. 우계는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지도하였으며,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한다.
39세에는 율곡의 천거로 과거 출신이 아니고서는 벼슬살이를 할 수 없는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575년에는 선조가 지평에 제수하고 다시 불렀으나 병으로 사양하자, 의원과 약을 보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궤(金潰)의 의병군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성천(成川)의 분조(分朝)에서 세자를 뵙고 대조(大朝: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사후 1602년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 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에 추증되고, 1681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 내려졌다.
우계와 청송(聽松)의 묘
포장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비닐로 덮어 놓은 시멘트 길 끝에 있는 사당은 근래에 지어 담장이며, 기와며, 단청이 새로웠다.
사당 위쪽에는 신도비를 모신 비각이 있는데, 그 곳에는 우계와 아버지 청송의 비가 있다. 신도비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우계의 업적을 찬한 것으로, 오랜 세월에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더러 있다.
신도비 한 옆으로는 묘에 대한 안내판이 있고,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쌍분인 묘 두 기와 그 윗쪽에 커다란 묘 한기가 있다.
아래의 두 묘는 '聽松成先生之墓.贈貞夫人尹氏 '라는 비문이 있어 우계의 부모 묘임을 알 수 있고, 위쪽의 묘는 '昌寧成公諱渾之墓'라는 비문이 알려 주듯이 우계의 묘이다.
부모의 묘가 아들인 우계의 묘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아들의 벼슬이 높아서 일 것이고, 비석 위에 옥개석이 있고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이겠지만, 어딘지 당대의 유학자이며 성리학자였던 선생의 효심에 비추어 볼 때, 그 것은 우계가 바라던 바가 아닐 것이다.
「파주목(坡州牧) 읍지(邑誌)」에 의하면, 우계의 묘는 하양리 청송(廳松)의 묘 뒤에 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글을 썼다.
영조(英祖)께서 이내 치제(致祭)하라는 명이 있었다. 제릉(薺陵)을 가다가 선생의 묘를 보고는 스스로 시 2구를 지어 제문의 머리에 덧붙여 이르기를,
"도(道)는 송나라 정주(程朱)·정이(程 ) 형제와 같은데, 길가에서 묘를 참배하는 감개가 깊다."
라고 하였다. 우계는 효심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한때 청송이 병에 위독하자 우계는 두 번이나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약으로 썼다고 전해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