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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장군(경상우수사)의 옥포해전
1. 옥포해전(1592.5.7)의 승전이 있기까지의 행적
가. 1592년 2월 중순경 거제동부 가배랑성(오아포)에 경상우수사 부임
나. 약 2개월 후인 서기 1592년 4원 13일 임진왜란 발발
다. 합동해전 이전 왜적과의 해전
라.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경상우수영 관할 남해현을 불태움
마. 인접한 우군에게 참전조치를 요청
2. 옥포해전(1592.5.7)의 승전
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의 출전
나. 옥포해전
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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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장군(경상우수사)의 옥포해전
1. 옥포해전(1592.5.7)승전이 있기까지의 행적 (서기 1592년 4월13일부터 5월6일까지 24일간의 행적)
가. 1592년 2월중순경 거제동부 가배랑성(오아포)에 경상우수
사 부임
나. 약 2개월 후인 서기 1592년 4원 13일 임진왜란 발발
1) 관문(關文)을 띄어 한양 조정에 급보를 올림
( 4월14일 부산,동래 차례로 함락됨 )
2) 관하 각 관포의 첨사 만호를 경상우수영에 집결토록 명하여
❶ 우후 우응진으로 하여금 머물러 본진을 지키게하고
❷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 남해현령 기효근을
곤양해구로 나아가 그곳을 지키게 함
❸ 의병장 강덕룡(姜德龍) 장군을 사천·곤양·고성 등으로
급히 보내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수군을 모집하고 함대를
재편성하여 전열 재정비 ( 이상 원균 행장기)
※ 임진년 여름에 왜병이 급작스러이 침공해오니 공은 원균의
휘하에 달려갔다. 그때 장선(裝船)과 전구(戰具)가 또한 많이
갖추어 있지 못하였으므로 원균은 졸지에 대책을 세우지 못
하였다. 공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사천, 고성, 곤양 등지
를 돌아다니면서 군인을 모집하여 마침내 수군을 정비하였다.
(매촌공 강덕룡 행장기)
❹ 인접한 전라좌수영에 적침상황을 4차례 알림
△1592년(선조25년) 4월15일/4월16일/4월17일/4월18일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❺ 비장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에게 5~6차례 보내 힘을
합쳐 적을 치자고 청함
☞ 「지키는 바가 각기 다르다」하여 오지 아니함
다. 합동해전 이전 왜적과의 해전
○ 공은 순신이 오기 전에 수차에 걸쳐 왜적과 싸웠으며, 그러한 결과
적선 10척을 불사르고 노획하니 비로소 군성(軍聲)이 떨첬다.
(원균행장기)
☞ 나는 전라도 남원에 있었으므로 호남과 영남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경상우수사는 적을 많이 잡았으니 승성(勝聲)이 크게 떨첬
다. 이로 인하여 민생들은 각자 모두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고
서로 경동치 아니하였다(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 남쪽 변의 적(敵)은 수사 원균이 제장을 거느리고 그들과 힘을
합하여 차포(借捕)하고 있다.(선조 25년 6월 김수의 장계)
☞ …경상우수사가 회답한 관문에 「본 도 주사(舟師)를 초발(抄發)
하여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분멸했다.(이순신장군의 부원경상 도장, 임진장초)
※ 선조 25(1592)년 4월14일에 왜의 육군은 부산성, 5월 초에 서울 인 한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장군이 지키고 있는 남해에 있는 왜적은 더이상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라.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경상우수영관할 남해현 불태움
(1592년 4월 29일)
「남해는 호남과 가까운 경계이다. 그러므로 아직 그곳에 적이 나 타나지 않았을 때 현령 기효근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적의 침공이 있다는 통보를 하였더니. 이순신은 동현(東縣)이 그가 있는 수영과 가 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만약 적이 그곳의 양식을 얻어 오래 머므르면 반드시 장차 호남을 침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령(기효근)이 바다 로 내려가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틈을 타서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창 고를 모두 불질러 버렸다. 그로 인하여 현민들과 미조항, 평산포에 있 던 많은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현령이 바다에서 돌아와 보니 식량과 무기와 군졸들은 모두 없어지고 다만 빈 성뿐이었다. 그는 할수 없이 보리를 베어 양식을 이어가며 흩어진 군졸들을 모아 어렵게 성을지켰다.」(초유사 김성일의 장계 선조 25년 6월 28일)
마. 인접한 우군에게 참전조치를 요청
1) 비장 이영남이 이순신장군에게 힘을 합쳐 적을 치자는 요청을 「지 키는 구역이 각기 다르다」하여 오지 않으므로 조정에 명령해 줄 것을 건의(1592년4월19일)
2) 조정의 출전 명령(1592년 4월27일)
○ 조정에서 선전관 조명(趙銘)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보니, 그가 각 포(捕)의 주사(舟 師;전투함)를 거느리고 바다에 내려가 싸움을 벌여 적을 암격코자 작전계획을 세웠다하니 이는 일대의 기회인지라 불가불 그 뒤를 밀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하니 그대는 원균과 더불어 합세를 하 여 적선을 공파하면 적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선전관을 파견하여 유시를 내리노니, 그대는 휘하 각 관포의 병선 을 독촉하여 급히 나아가 기회를 잃지 말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천 리 밖의 일인지라 혹 뜻밖의 일이 생길 수 도 있으니 그때는 때에 맞도록 처리하라(부원경상도장;임진장초)
2. 옥포해전(1592.5.7)의 승전
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의 출전
1) 조정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장군은 4월30일 경상해역으로 출전한다 고 통보하여 원균장군은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며, 이순장군은 약 속한 날에 출전하지 않고서 조정에 자신의 견해를 보고함.
○「평산포 등 네 진영의 진장과 현령등이 왜적들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고 먼저 도피 했으므로, 신의 군사로는 그 도의 물길이 험 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 전을 상의 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은 또한 천만 뜻밖의 실패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 에게 소속된 전선을 모두 모아도 30척 미만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도(전라 도) 우수사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 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했으므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배를 띄워 경상도로 출전 할 것입니다.」
2) 합동해전 요청후 20여일이 지난 5월 6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
전함 24척을 이끌고 경상해역으로 출전
나. 옥포해전
1) 4월 30일 양속한 당포에 이순신장군이 오지 않았으므로 경상우수영 함대는 철수하였으며, 5월 5일 당포에 도착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 군이 경상우수사 원균장군에게 자신이 출전하여 왔음을 통보
2) 5월 6일 오전 10시 원균장군이 이순신장군을 만나 적선의 수와, 현 재 머무르고 있는 곳, 접전한 과정, 등을 알려주고 앞으로의 전투계 획을 두 장군이 의논함.
3) 5월7일 조선수군의 연합함대 옥포해전
가) 원균장군의 출전
○이날 새벽 원균장군은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 지세포만호 한백록등 을 거느리고 장군의 아들인 당년 18세의 사웅(士雄)과 함께 최선 봉에 서서 옥포 앞 바다로 진격하니 진을 치고 있던 적선들이 개 미떼 같이 몰려 있었다. 중앙에서 장군이 북을 울리며 곧바로 돌 격해 들이쳤는지라 적의 중앙이 여지없이 무너지며, 적장 우시죽 천수가 탄배를 붙잡아 적장의 목을 잘랐다. 적장의 배에서 금부 채, 금병풍등 많은 노획물을 얻었다.
적의 본진이 무너져 내리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일시에 몰아쳐 적을 무너뜨렸으며…
(원균 행장기-옥포,합포,적진포등 5월 해전을 묶어서 서술)
나) 승전에 대한 연명장계 제의
○전투의 승리에 대하여 원균장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에게 전승보고에 대하여 제의하였다. “누구의 공이 크든 간에 함께 싸 워 이겼으니 연명으로 승전장계를 올립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대답했다. “공(원균장군)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왜노를 무 찔렀으나 아직까지 다 섬멸치 못하였소. 이와 같은 작은 전과를 구태여 행조(북쪽으로 피해 있는 조정)에 알릴필요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내가 타도로부터 창졸간에 달려오느라 미처 병기도 다 갖 추지 못하고 왔으니 장차 적장의 머리를 얻은 다음에 다시 장계 를 의논하는 것이 좋겠소.” 장군은 그(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다) 옥포해전 승전에 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의 단독보고
그동안(임진년;1592년.5월~7월) 9번의 전투를 치뤄 모두 승전하였 건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에, 이순신장군의 말을 믿고 원 균장군은 승전 장계를 올리지 않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의 단독 장계로 인하여 군중이 술렁거렸다. 그 단독 장계의 내용에는 경상우수영 장령들이 활약한 내용은 보잘 것이 없었다.
○【사간원에서 계하되 “원균과 이순신은 공이 같은데도 상은 다 르니 균의 마음이 좋지 않은데다, 관하 장사들이 제각기 옳으니 그르니 하며 서로 수근거려, 그들의 사이가 더욱 멀어졌습니다.” (「선조실록」선조27년12월29일조)】
○【이순신은 임진년에 경상우수사 원균과 더불어 거제 양중(洋中) 에서 적선 50여척을 무찔렀다. …… 그때 그해전의 작전계획과 선 봉은 모두 원균이 한 것이었다. …… 대첩이 있은 뒤 원균은 연명 으로 장계코자 하였더니 , 순신이 서서히 장계하자 합의해 놓고 순신은 밤을 타서 행조에 보고하였으되 전공을 모두 스스로가 세 운양 과장되이 하고 원균의 공이 없다고 하였다. 원균은 이로 인 하여 크게 성내어 드디어 서로 협조치 아니하였다.(「선조실록」 선조36년4월21일조)】
○【순신의 수하는 많이 당상관으로 승품이 되었는데, 원균의 수 하인 우치적·이운용 같은 장령들은 그 공이 가장 큰데도 그 상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니 서로 상격(相激)하였다.(「선조실 록」선조27년11월12일조)】
○ 뒤늦게 그러한 단독장계를 사실을 안 장군이 장계를 올려 경 상우수영 관할 장령들의 상세한 혈전의 전투상황을 올렸으나, 육 군은 이미 패하여 한양을 사수치 못하고 임금이 파천한 상황에 있던 행조에서는 단독으로 올린 이순신장군의 승전장계를 받아 온 조정이 좋아하였고, 그 결과 전라좌수사와 그 휘하 장령들을 상당수 승품시킨바 있으며, 뒤늦게 원균장군이 올린 장계내용은 전하지 않으며, 조정에서 장군의 장계를 받고 일부 논공행상을 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비변사에서 계를 올렸다. “경상도 원균이 올린 승전장계는 전일 이순신이 올린 옥포등지의 싸움과 같은 장계입니다. 싸움의 대소에 따라 반드시 차등이 있어야 하겠는 바, 여기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을 베인 것으로 기준해 보면 전력을 다하여 혈전 을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 하오니 관직을 한 등급 올려 주고 따로 상도 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첨사 김승룡 과 현령 기효근은 특히 당상관으로 올리고 현감 김준(金遵)은 3품 으로 올리고 주부 원전(元典)은 5품으로 올리고 우치적등 4인은 6 품으로 올리고 이효가(李孝可)등 13인은 상당한 직책을 주고, 만 호 한백록은 전후의 공이 큰데 총을 맞고도 싸우다가 싸움이 끝 나자 바로 죽었으니 극히 참혹하고 불쌍한지라 또한 당상관으로 추서를 하고, 장계를 가지고 온 박치공(朴致恭)은 적 세명을 버히 고 한 명을 사로 잡았으니 6품으로 올려주는 것이 어떠하오리 까?”하였다. 선조임금이 비답하되 “그렇게 하라”하였다.(「선조실 록」선조25년8월24일조)】
○ 이와 같이 비록 경상우수사 예하 장령일지라도 만호가 싸우 다가 순직했는데도 이순신장군은 그의 장계(「임진장초」만력20년 5월10일)에서 “순천 대장선의 사부와 접전병(接正兵) 이선지(李先 枝)가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 다른 피상자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바, 이순신장군의 승전장계는 전라좌수영의 전투보고서일 뿐 인 것이다.
라) 선조임금이 원균장군을 위로하다.
○ 그 때 선조임금께서 장계를 읽으시고 글월을 내리시어 칭찬 하시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직 경은 나라가 허락한 간담(肝膽)이요, 세간에 다시없는 영 웅호걸이라 몽동(兵船)을 한수(漢水)에 다스림에 공손(公孫)이 오독(吳督)의 위풍을 두려워하고, 주즙(주즙;배의 총칭)을 형강 에서 칠때에 갈호(羯胡)가 사웅(士雄)의 의기를 꺽었도다. 북채 를 잡음에 사졸들이 용약하고 강물에 맹서하니 해와 별이 어두 워 지도다. 당항포에서 수차 결전하니 적두(賊頭)가 강을 막았 고, 한산도에서는 적선 70여척을 불태우니 고래가 머리를 바쳤 도다. 위급한 때를 당하여 기발(奇拔)한 계책을냈다 함은 옛이 야기로 들었더니 소수의 군사로써 큰 적을 무찌른 일을 오늘에 이르러서 볼 수 있었도다. 의연한 천진 절벽이요, 엄연한 일대 장성이로다. 주나라가 중흥함에 있어서는 곧 윤길보의 정벌이 있었고, 당나라가 재건됨은 실로 곽자의(郭子儀)의 진충(盡忠)에 힘입었도다.』(원균행장기)
마) 원균장군 거제 전공자에 대한 표창 상신하다.
(당시 거제 항전의 군공자 위패를 현재 거제옥포대첩기념공원내 효충사에 위패봉안, 이순신장위패 중앙 봉안,원균장군은 제외)
( 선조실록 51권 선조27년6월20일(정묘) )
경상우도수사(慶尙右道水使) 원균(元均)에게 하유(下兪)하기를 “거 제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이 육지의 전장으로 달려가 거제 한 고을이 주재(主宰)가 없게 되자 적병이 그 틈을 타서 성에 들 어 갔는데 그곳 백성들이 항복하지 않고 향촌(鄕村)의 사람을 규 합, 서로 단결하여 날마다 밤에 습격하고 혹은 매복하여 앞길을 차단하기도 하므로 적이 마침내 성을 버리고 떠났다. 그 당시 힘 을 다해 싸운 군사가 아직까지 상을 받는 반열에 들지 못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프다. 공이 있는데도 논상(論賞)되지 못한 자가 있 으면 생존자나 죽은 자를 막론하고 사실에 따라 치계(馳啓)하라” 하였는데 원균(元均)이 하서(下書)에 따라 공이 있는데도 상을 받 지 못한 자를 개좌(開坐)하여 아뢰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각인(各人)의 군공(軍功)에 대해서 사목(事 目)으로 논한다면 비록 준례가 없더라도 마땅리 은전(恩典)을 마 련하여 해읍(海邑)의 잔민(殘民)이 충성을 바친데 대한 권장을 해 야할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빨리 특례를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였다.
3. 결론
가. 개전초기 경산도해역 방어 책임자인 원균장군은 왜군이 처들어오자
미리 겁을 먹고 우수영 본영인 거제 오아포를 불사르고 수군을 해 산시킨 뒤 전선 73척과 대포 군기등을 바다에 버린채 부하인 이영남 과 이운룡과 함께 사천 곤양방면으로 도망했다.고 하였으나.....
☞ 1592년 2월 초순경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어 도임한 원균장군은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미쳐 전쟁에 임할 수 있는 준비가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일단 물러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우후 우응진으로 하여금 머물러 본진을 지키게 하고,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 치적 남해현령 기효근과 함께 곤양해구를 지키면서 관문을 띄워 먼 저 조정에 왜의 침략사실을 보고하고 원균장군의 휘하로 달려온 의 병장 강덕룡 장군을 사천, 곤양, 고성 등으로 급히 보내 밤낮을 가 리지 않고 수군을 모집하고 함대를 편성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전라 좌수사 이순신장군,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과 함께 옥포·합포·적진 포·사천·당포·제1차당항포·율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웅포해전까지 3도 수군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승전하였으며 이순신장군이 삼도수 군통제사로 활동한 후에도 제2차 당항포·제1차장문포·영등포·제2차 장문포해전까지 빠짐없이 참전하여 승전하였음
☞ 전선 73척과 대포 군기등을 을 바다에 버렸다.....고 하는 서술 또한 임진왜란 1년여 전에 전라좌도 해역의 책임자인 전라좌수사로 임명 을 받아 군사를 모집하고 전함을 준비한 이순신장군이 옥포해전에 24척의 판옥선으로 참전한 것과 2년여 전에 전라우수사로 임명 받아 준비한 이억기장군도 사천해전에 전함 25척으로 참전한 것으로 볼 때 사실에 근거한 기록으로 볼 수 없으며 이는 이순신장군의 공을 높이고 원균장군을 폄하하기 위한 권력의 왜곡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1597년 이순신장군이 한양으로 압송 하옥된 것 역시 원균장군의 모 함 때문이었다.....고 하나 선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장군의 하옥 에 대한 죄명은
❶ 欺罔朝廷 無君之罪 ; 도체찰사 이원익이 수하 군관 정희원등에 영을 내려 부산 왜영의 가옥․창고․군량미 ․왜선등을 불태운 사건을 이순신장군이 스스로의 공으로 장계했다가 허위임이 밝 혀진 일.
❷ 奪人之功 陷人於罪 ; 옥포 연합해전의 전공을 자신만의 공으로 꾸며 장계하고, 원균장군의 18세된 적자 원사웅의 군공을 12살 소실의 자식이라 했다 이덕형의 현지조사로 밝혀진 일.
❸ 從敵不討 負國之罪 ; 임진왜란이 약 2년간 소강상태 였는바, 왜 장 기요마사가 부산으로 갈 것이라는 첩보를 받고도 묵살 한 일.
❹ 無比縱恣 無忌憚之罪 ; 조정의 수차 독전을 무시하고 세자인 광 해군이 어명으로 불렀으나 불응한 일 등
위와 같은 4가지 죄명 중 원균장군의 모함에 의한 죄명은 단 한가 지도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서 원균장군의 모함에 의해 하옥되었 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4백여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 여 국민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오도하고 있음.
다. 이순신 장군과의 불화 역시 첫 해전인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 후 “누구의 공이 크든 간에 함께 싸워 이겼으니 연명으로 승전장계를 올립시다”라고 연명장계하자는 원균장군과 합의 해놓고 이순신장군 이 단독 장계함이 원인으로서, 물길을 안내하며 앞장서서 목숨을 걸 고 전쟁에 임하였던 경상우수영 장병들의 소외감의 표출을 수사인 원균장군이 대·내외에 표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오늘날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와 전라좌수영의 전투상황으로 보고 된 장계의 초본으로 임진왜란의 역사가 쓰여 진다고 하여,
수 백리 물길을 헤치고 참전한 전라우수영의 수사와 장병들, 그리고 자신들의 싸움에 도움을 주러 온 전라 양도의 수군들에게 앞장서라 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관할 경상해역의 주장으로서 적의 동 향과 물길을 안내하며 언제나 선등 돌격하며 싸움에 임하여 승전한 경상우수영의 수사와 장병들이 이뤄낸 혈전의 역사를 우리가 유린 한다는 것은 배은의 죄를 짓는 일에 다름아니라고 생각되오며,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기준으로 그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참혹 한 전쟁을 치뤄 이겨낸 그 세분에게 이분법적인 평가를 가하여 그 세분중 어느 한 분만을 성웅으로 추앙하는 것은 역사를 수단화하여 우매한 국민을 계몽하던 시대에 한하며, 지금이라도 역사적 반성을 통하여 올바른 역사관을 물려주어 수만년 이 땅에 살아야 할 후세 들에게는 다시는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하는 것이 현시 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라 사료됩니다.
감사합니다.
원주원씨 평택종중 일동 배상
( 회장 원영재 011-713-1706, 간사 원성식 010-3784-2780)
첫댓글 잘보았어요
늘 ,,수고하세요,,,역사가바로세워지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