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연구와 우주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천체물리학자이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소장인 뤼미네(Jean Pierre Luminet)는 자신의 전공 외에도 금속세공, 조각, 그리고 음악 등의 다방면에서 전문가적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과학 지식을 대중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15권의 과학서적과 7권의 역사소설, 그리고 몇 개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이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금성의 약속(Le Rendez-vous)』은 한 세기에 딱 두 번, 그것도 8년 간격으로 지구에서 볼 때 금성이 태양의 앞면을 약 6시간에 걸쳐 지나가는 역사적인 순간을 전 세계 각지로 분산되어 관측하는 프랑스 천체물리학자들의 열정과 사랑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술한 소설이다. 따라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들이 대부분(하지만 장 바티스타 샤프 도트로슈에 대한 사료는 찾을 수 없었음)이고, 등장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일화들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데다, 각지에 파견된 천체 관측자들의 여정이 일자까지 자세히 기술되어 사실성을 더하고 있다.
핼리혜성의 공전주기를 처음으로 찾아낸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핼리(Edmund Halley)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간대에 행성간 시차를 관찰하면 태양과 지구간 거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한 데서 소설은 출발한다. 우리들에게 자칫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천체관측을 소재로 한 소설이지만, 세 명의 천체물리학자의 박진감 넘치는 과학자적 열정에 더하여, 수학자이자 시계기술자인 렌 르포트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둘러싼 애증의 관계가 적절히 배치되어 흥미를 더한다.
첫 번째 금성과 태양의 만남이 가까워지면서 제롬 랄랑드는 금성 관측의 총책임자의 직을 맡아 파리에 머무르고, 샤프는 시베리아로, 르 장티는 인도로 가게 된다. 하지만, 르 장티는 프랑스 해군의 비협조로 선상에서 금성을 관측하다 배의 심한 요동으로 실패하고, 귀국도 여의치 않아 이후 필리핀, 타이티를 거쳐 인도에 들어가지만 두 번째 관측 역시 심한 구름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11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가정을 이루고 잃을 뻔한 가산도 되찾으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 관측지로 맥시코를 경우하여 남부 캘리포니아에 들어간 샤프는 현지의 풍열병에 걸려 금성 관측에 착수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만다. 늘 렌 르포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품고 만남의 순간을 그리워하던 샤프는 그렇게 허무한 삶을 마감한다.
끝까지 살아남아 금성 관측의 책임을 수행하고 역사적인 보고서를 발간하여 공적을 널리 인정받은 데다, 모두의 연적이었던 렌까지 차지했으니 제롬 랄랑드야말로 소설 속에서의 최후의 승자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천체물리학자로서 장티와 샤프의 학문적 열정과 탐구정신, 그리고 변하지 않은 사랑이야말로 아름다운 비너스의의 찬란한 만남(Rendez-vous)의 주인공들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