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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23)
바알의 제단을 헐라
본문 : 삿6:25-32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시면서,
미디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고 주저하는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시면서 ...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16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도 기드온은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대접하기 위해 예물,
곧 염소 새끼 고기와
무교병을 만들어 가져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예물을
바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대는 순간
불이 나와서 그 예물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
이 같은 표징을 본 기드온은
그제야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뵙고 혹시 죽을까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24절)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감격한 기드온은 그 곳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첫 번째 명령 – 먼저 해야 할 일>
이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십니다.
<25-26절>
25절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절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을 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군사’를 모으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기’를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군사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식량을 비축하는 것’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쟁을
준비하기 전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몰고 온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처럼
미디안의 손에 고통을 받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앞서 한 선지자를 통해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7-10절>
7절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절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칼을 휘두르며 밖으로
뛰쳐나가기 전에
안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 숭배자들과의
내부적인 전쟁을 치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적인
바로 자신의 집안에 있습니다.
바로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집안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상’을 찍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산성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다가
‘아세라 상을 땔감으로 삼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칠 년 된 둘째 수소’일까요?
‘칠 년’은 미디안의 손에
고통을 당해온 지난 7년의 세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끝내겠다는
선언적인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둘째 수소’일까요?
아무래도 ‘첫째 수소’가
더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첫째 수소’가
‘바알에게 바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소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둘째 수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아무리 전쟁에서 이기게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아셨습니다.
참된 회개가 동반되지 않고는
외부의 환경이 변경된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신 것입니다.
미디안은 단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출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먼저 헐고, 찍고,
불태우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우상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우상을 태워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드온의 순종>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27절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이 아직도 소심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낮’에 행하지 못한 것은
기드온이 ‘아버지의 가문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화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때때로 사람의 약점도
하나님이 적절히 사용하신다고 믿습니다.
그의 소심함이 하나님의 일을
더욱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낮에 행하였다면
아버지 요아스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동네 사람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열 명의 종들은 끝까지
기드온의 명령에 순종하였을까요?
때로는 주의 일을 할 때
막무가내로 하면 안 됩니다.
지혜와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읍 사람들의 반응>
성읍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우상에게로 나갔습니다.
28절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아침에 일찍이’ 우상에게 나간 것으로 보아
이 성읍의 사람들은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코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들의 이와 같은 열심히 그들에게
그 어떤 유익도 줄 수 없었으며....
오히려 미디안 사람들의 압제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속도’ 보다는 ‘방향’입니다.
바른 방향으로 뛰지 못하면
뛰면 뛸수록 목적지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 열심히 일한다는 건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바른 것인가?
옳은 것인가?
가치 있는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바른 목표와 가치관 없이 사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하나님을 떠난 열심은 그 어떤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속히 깨닫고
속히 방향을 수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밤사이에 일어난 엄청난 일을
본 성읍 사람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29-30절>
29절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절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범인을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네 집 소가 제물로 드려졌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둘째 수소’가 드려진 것을
확인한 성읍 사람들은
그 범인이 기드온인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는 요아스의 집으로 몰려가
기드온을 내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바알을 성나게 했으니
이제 큰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드온을 죽임으로서 바알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과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브라 성읍 사람들에게 죽게 생겼습니다.
왜 기드온이 한 밤중에
몰래 바알을 부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기에
고난 중에도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6:33b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아스의 변호>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셨습니다.
뜻밖의 응원군이 등장합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그의 편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31절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나선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아버지 요아스의
대답이 너무 현명합니다.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자신의 제단을 파괴한 자를
그냥 놔둘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들 기드온의 행위를 통해
깨닫는 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가 깨달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제일 먼저
가족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자녀의 변화는 부모를 감동시킵니다.
결국 요아스의 이 한마디에
험악한 상황은 그대로 종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허물었다는 이유로 ‘바알’로부터
그 어떤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바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누구와도 싸울 수 없는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때부터 기드온은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32절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여룹바알’이란 별명이 생겼습니다.
‘바알이 싸우게 하라’(Let Baal strive)는
뜻입니다.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은
바알 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조롱의 의미와 함께...
기드온의 용감함을 높여주는
그런 이름이 되었습니다.
기드온 한 사람의 순종과 결단이
자신의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쳤습니다.
이일 후에 기드온의 이름은
주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기드온이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소집하는 나팔을 불었을 때에,
그의 집안사람들이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삿6:34),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삿6:35).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바알’이라는 우상을 온전히 제거하지 않고서 ...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으로 알려줍니다.
‘바알’은 사사시대에만 등장하는
가나안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이
우리의 삶에 주인 노릇할 때에
그것이 곧 ‘바알’이요 ‘우상’입니다.
지금도 온갖 종류의 ‘바알’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경계하셨던
물질만능주의 ‘맘모니즘’(Mammonism)이....
여전히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오직 축복만을 받으려고 하는
‘기복주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여
물질과 번영과 성공을 주인으로 섬기는 ...
이러한 ‘바알’과의 싸움이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가장 힘든 영적인 싸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우상들을
쳐부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바알’들이 우리를 지배하겠다고
덤벼들 때에, 적당히 타협하면 안 됩니다.
담대히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도 기도온과 같이
‘여룹바알’이란 별명을 얻어야 합니다.
‘바알더러 싸우자’고 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힘과 결심만으로는
바알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성도님들이
당장의 편안함을 이유로
그동안 모른 척 덮어두었던
바알의 제단을 엎어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넉넉히 이기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