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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
“ 눈보라 치고 제아무리 추워도 봄은 꼭 오고야 말 것이다 ”
금년의 立春은 陽曆2月 4日이고 陰曆은 壬辰年 正月 十三日이다
立春은 24節氣 중에 첫 번째 節侯로 正月의 節氣이다
立春은 大寒과 雨水 사이에 들어 있으며 봄이 왔음을 알리는 첫節氣이다
立春은 太陽의 黃經이 315°를 통과 할 때이며 冬至로 부터 44일째
되는 날이다
太歲는 壬辰이고 月建은 壬寅이며 日辰은 十三日 乙未이다
卦는 坎 64이다
≪기후≫ 『高麗史』卷50,志4,曆 宣明曆 上,
初候 = 에 동풍이 불며 얼었던 어름이 풀린다 (東風解凍)
次候 = 에 동면하던 벌례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蟄蟲始振)
末候 = 에 물고기 들이 얼음이 있는데 까지 위로 올라온다(魚上氷)
≪절입시각≫ 陰曆 正月 十三日 午後 7時 22分 (戌時初)
일출(日出) = 오전 7시 34분 (주(晝) = 10시간 24분)
일입(日入) = 오후 5시 58분 (야(夜) = 13시간 36분)
[동지로부터 낮시간이 “41분” 더 길어 젔습니다]
(동지 해넘이 = 5시 17분 - - - 입춘 해넘이 = 5시 58분)
≪입춘의 뜻≫
이날부터 “봄이 시작 된다”는 뜻이다
입춘(立春)은 새해에 드는 첫 節侯 이므로 궁중과 일반백성들이 여러 儀禮를 베풀었다
그중에서도 “입춘하례”,“입춘축”,“입춘점복”“선조제”,등 여러 속신이 있었다 옛날에는“이날부터 봄이 시작 된다”하여 이날을 기리고 다가오는 일년동안 大吉多慶하기를 기원하는 갖가지 의례를 베푸는 풍속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立春祝”만 써서 붙이는 가정이 있을뿐 그 節日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또 일년에 입춘이 정월과 섣달 두 번 드는 해가 있는데 이럴경우“再逢春”이라한다
≪쌍춘년≫
일년에 입춘이 두 번드는 해를 “雙春年”또는 “再逢春”이라 하는데 윤달이 드는 해에 해당 된다 이런해를 운수가 대길(大吉)하다 하여 결혼도 많이 하고 출산도 많이 하여 이해에 태어난 아이는 運數가 大通 하여 출세를 한다고 믿는 속설이 있다
반대로 입춘이 들지 않은“無春年”도 있다 이런 해는“망춘년”이니
“과부해”니 하여 나뿌게 평하는 무속적 속설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2009년은 윤달이 있어서“쌍춘년”이었고 지나간 2010년은“무춘년”이었다
그르면 지나간 庚寅年에는 나뿐일만 있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속설이다
또 금년 인 2012년은 윤3월이니 또다시“쌍춘년”이 돌아왔다,
정월 13일이 입춘이고 12월 24일이 또 입춘이라“쌍춘년”입니다
[문화관광 해설사]또 [국민] 여러분들의 운수 대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춘축≫
입춘에는 각 가정에서 기복적인 행사로서 “입춘축”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인다
입춘축을 달리 “春祝,立春書,立春榜,春榜,”이라고도 한다
글씨를 쓸줄아는 사람은 자기가 써서 붙이고 남에게 부탁하여 써서 부치기도 한다
상중에 있는 사람은 써서 붙이지 않는다
입춘축을 써서 붙이는 유래는『東國歲時記』에 의하면『荊楚歲時記』에 입춘날에는“宜春”두 자를 써서 문에다 붙인다 하였으니 春聯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종이는 글자수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가로15cm 세로70CM 정도의 두장으로 한다
입춘축문 을 쓰는 방법은 “對句,對聯,單帖,單句”로 이루어저 있다
붙이는 시각은 입춘시에 맟추어 붙이면 좋다고 한다
(금년의 입춘시각은“初戌時(오후 7시 22분)”이다)
≪立春 祝文 例≫
1), 對句
國泰民安, 家給人足,
雨順風調, 時和年豊,
箕疇五福, 華封三祝,
門神戶靈, 呵噤不祥,
2), 對聯
壽如山, 富如海,
去千災, 來百福,
立春大吉, 建陽多慶,
堯之日月, 舜之乾坤,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天下泰平春, 四方無一事,
天增歲月人增壽, 春滿乾坤福滿家,
門迎春夏秋冬福, 戶納東西南北財,
六鰲拜獻南山壽, 九龍載輸四海珍,
3), 單帖
春到文前 增富貴,
春光先到 吉人家,
上有好調 相和鳴,
一春和氣 滿門楣,
一振高名 滿宰都,
◎사대부가에서는 글구를 새로지어 붙이기도 하고 또 고인의 좋은 글구를 쓰기도 한다,
또 붙이는 장소에 따라 글 내용이 다르기도 한다,
상강(霜降)
금년에 霜降은 양력 10월 24일이고 음력 9월 28일이다
霜降은 24절기 중에 18번째 節氣이며 9월의 中氣로 寒露 와 立冬 사이에 들어있다
霜降은 太陽 의 黃經이 210°를 통과 할 때이며 冬至로 부터 305일째 되는 날이다
太歲는 辛卯이고 月建은 戊戌이고 日辰은 壬子 이며 節入時間 은 初寅時 이다
卦는 兌 六三이고,
≪절입시간≫ 오전 3시 30분 (初寅時)
日出時間은 = 오전 6시 48분 (낮시간 = 10시간 56분)
日入時間은 = 오후 5시 44분 (밤시간 = 13시간 4분)
≪霜降의 뜻≫ =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시기를 뜻하는 節氣를 말한다,
≪霜降의 氣候≫ 『高麗史』卷50, 志4,역(曆) 宣明曆 上,(북한 번역본에서)
初候에 승냥이가 짐승을 잡아 제지낸다,(豹乃祭獸)(豹=범표)
次候에 초목의 잎이 누렇게 되어 떨어진다(草木黃落)
末候에 벌래들이 다 동면할 자리로 들어 간다(蟄蟲咸俯)(蟄=벌레움추릴칩)
1, 9월의 異稱,俗談,行事,飮食,
1); 이칭(異稱)=季秋,晩秋,暮秋,菊秋,霜冷,霜辰,戌月,詠月,重陽,秋霜,玄月,등,
2); 속담(俗談)=제비 돌아가는 날,
3); 행사(行事)=둑祭, 禰祭,崇善殿祭禮,七祀,(경우궁 내 칠묘을 말함,9월25일봉행)
4); 음식(飮食)=박속,아옥국,추어탕(鰍魚湯),추두부탕,별추탕(別鰍湯),등,
2, 옛날 기록에는
1); [제목]= 鰍魚(鰌魚) 『東醫寶鑑』卷3,湯液篇,魚部,
[원문]= 性은 溫하고 味가 甘하며 속을 보하고(補中) 설사를 멎게(止泄)한다
[해설]= 미꾸라지가 가진 효능의 설명이다,성질이 따뜻하고 몸을 보하는 미꾸라지의 특성으로 인하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추어탕이 보양식으로 널리 애용 되었다
2); [제목]= 霜降 『高麗史』卷120,列傳33, 吳思忠,
[원문]= 况天變屢見 星纏失度 霜降之餘 迅雷不收 立冬之後蒸霧發洩 此二氣有乘之驗也
(洩=샐설,迅=빠를신,纏=얽을전,屢=여러루,자주루,况(況)=하물며황,)
[해설]= 하물며 천변이 자주 나타나고 별 도는 것이 법도를 잃었으며 상강이 지났는 데도 빠른 우래가 그치지 않고 입동 후에도 증기와 안개가 일어퍼지니 이 두 기후에 괴이한 징조가 있습니다,
3, 시문(詩文)
1); [제목]=霜降 (權文海『초간선생문집』권2,詩,七言律詩,대동군부운옥,저자,醴泉權氏)
[원문]= 半夜嚴霜遍八紘 肅然天地一番淸 望中漸覺山容瘦 雲外初驚雁陣橫
殘柳溪邊凋病葉 露叢籬下燦寒英 却愁老圃秋歸盡 時向西風洗破觥,
( 凋=시들조,葉=잎사기엽,籬=울타리리,却=물리칠각,觥=뿔술잔굉,)
[해설]=“상강”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肅然)히 천지(天地)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넷가에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도리어 근심되는 것은 노포(老圃)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2); [제목]= “상강(霜降)”(채지홍 『봉암집』권2,시)
[원문]= 迎霜休百務 憀慓氣悲哉 賓雁引雛至 黃花得意開,
[해설]= 상강을 맞이하니 모든일 그치네
매서운 날씨에 기분이 슬프도다
기러기는 세끼를 데리고 이르고
황화는 뜻을 얻어 활짝 피었네,
◎; 상강은 조사되는 자료가 별로 없다, 순환되는 계절의 변화의 순서 일 뿐이다,
(연천향교 度坪 朴東一 조사정리)
입동(立冬)
금년에 “입동”은 양략 11월 8일 이고 음력은 10월 13일 이다
立冬은 겨울이 처음 시작 되는 날 이다
立冬은 24절기 중에 19번째 節氣이며 10월의 절기로 霜降과 小雪 사이에 들어있다
立冬은 태양의 黃經이 225°를 통과 할 때이며 冬至로 부터 320일째 되는 날이다
太歲는 辛卯이고 月建은 己亥이며 日辰은 丁卯이며 節入時刻은 初寅時 이다
≪절입시각≫ 午前 三時 三十五分 (오전 3시 35분)
일출(日出) = 午前 七時 四分 (晝 = 10시간 24분)
일입(日入) = 午後 五時 二十八分 (夜 = 13시간 36분)
≪ 기 후 ≫ 『高麗史』卷50,志4,曆,宣明曆 上,(卦는 兌 九四 이다)
初候에 물이 얼기 시작 한다,(水始氷)
次候에 땅이 얼기 시작 한다,(地始凍)
末候에 꿩이 큰물에 들어가 큰조개로 된다,(野雞入大水化爲蜃)
≪입동의 뜻≫ 우리나라에서는 입동을 특별히 명절로 생각 하지는 않지만 겨울로 들어서는 첫째 날로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겨울 채비를 한다
『淮南子』권3,天文訓, 에는 秋分이 지나고 46일후면 立冬인데 草木이 다 죽 는다고 하였다,
1, 十月의 異稱 과 행사
1); 이칭(異稱)
초동(初冬),맹동(孟冬),입동(立冬),소춘(小春),소양춘(小陽春),양월(陽月),양월 (良月),곤월(坤月),응종(應鐘),해월(亥月),
2); 행사(行事)
「墓祭」 = 歲一祀,歲一祭,라고 하며 관행적으로 時祭,時祀,時享,이라고 한다
“墓前祭祀”“墓祀”라고도 하며 일년에 한번 제사를 모신다하여 “歲一祭” “歲一祀”라 한다,
「상달고사(上月告祀)」= 음력 10월에 가정에서 말날이나 길일을 택해서 家宅神에 게 지내는告祀,城主를 비롯하여 祖上,竈王,三神,같은 가택신에게 제사 한다,
「城主告祀」= 城主神 에게 집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한편,햇곡으로 만든 술과 시루떡,과일 등 으로 祭儀를 행하여 한해 동안 지은 농사을 감사하는 儀禮,
2, 옛날 기록에는
1); [제목] = 東濊,“舞天”『後漢書』卷85,東夷列傳75,濊,
[원문] = 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해설] = 해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니 이것을 무천(舞天)이라 한다,
2); [제목] = 新羅“神宮祭祀”『三國史記』卷12,新羅本紀12,景哀王 元年,
[원문] = 冬十月 親祀神宮 大赦,
[해설] = 겨울 10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 하였다,
3); [제목] = 高句麗“東盟”『後漢書』卷85,東夷列傳75,高句麗,
[원문] = 以十月 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隧神 亦以十月 迎而祭之,
[해설] =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로 크게 모이는데 이것을 동맹이라 한다
4); [제목] = 百濟“天帝祭祀”『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始祖溫祚王38年,
[원문] = 冬十月 王築大壇 祠天地,
[해설] = 겨울 10월에 왕이 대단(大壇)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 지냈다,
(연천향교 度坪 박동일 조사정리 )
소설(小雪)
금년에 “소설”은 양력 11월 23일 이고 음력은 10월 28일 이다
소설은 이날 첫눈이 내린다 하여 소설(小雪)이라고 한다
소설은 24절기 중에 20번째 節氣이며 10월의 中氣로 立冬과 大雪 사이에 들어있다
소설은 太陽 의 黃經이 240°를 통과 할 때이며 동지로 부터 335일째 되는 날이다
太歲는 辛卯이고 月建은 己亥이고 日辰은 壬午이며 節入時刻은 初丑時 이다
≪절입시각≫ 午前 一時 八分 (1시 8분)
일출시각 = 오전 7시 19분 (낮(晝) = 9시간 58분)
일입시각 = 오후 5시 17분 (밤(夜) = 14시간 2분)
≪ 기 후 ≫ 『高麗史』卷50,志4,曆,宣明曆 上,氣候表,(卦는 兌 95이다)
初候에 무지개가 나타나지 않는다 (虹藏不見)
次候에 천기는 상승하고 지기는 하강한다 (天氣上昇,地氣下降)
末候는 천지기운이 막혀서 겨울이된다,(閉塞而成冬)
≪소설의뜻≫ 소설은 이날부터 첫눈이 내린다는 뜻이다, 겨울이 시작된 입동후 15일째 되는 날로서 우리나라 에서는 “소설”을 명절로 생각하지 않지만 눈이 내릴 정도 로 추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겨울채비를 한다
또 아직은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소춘(小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손돌 바람의 전설≫ 대개“소설”즈음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 진다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 에는 배를 잘 뛰우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몽진을 가던 때라고도 하고, 조선시대에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仁祖)가 한강을 건너던 때라고도 한다
사공중에 손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피난가는 왕을 모시고 뱃길을 서둘렀지만 왕이 보아하니 손돌이 자꾸 일부러 그런 것처럼 물살이 급한 뱃길을 잡아 노를 젓는 것이였다 왕은 의심이 갔다 그래서 신하를 통해서 물살이 세지 않은 안전한 곳으로 뱃길을 잡으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은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선상에서 손돌을 참수하고 말았다
손돌은 죽기전에 억울함을 하소연 하였지만 소용없음을 알고 바가지를 하나 내놓으며 물에 띄운 바가지가 가는 길을 따라 뱃길을 잡으라고 말하고 죽음을 당했다
물살은 점점 급해지고 일행은 하는수 없이 손돌이 가르처 준대로 바가지를 물에 띄웠다 바가지는 세찬 물살을 따라 흘러 갔으며 왕을 실은 배도 그 뒤를 따랐다 무사히 뭍에 내린 왕은 그때서야 비로소 손돌의 재주와 충심을 알았다
또 다른 전설에서는 손돌을 죽인 후에 더더욱 세찬 바람이 불고 물살이 급해졌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싣고 가던 말의 목을 잘라 제사를 모셨더니 파도가 잠잠해 졌다고도 한다,뭍에 도착한 왕은 곧 후해를 하였지만 손돌의 목숨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재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덕포진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장지(葬地)를 정해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이때가 음력 10월 20일이었는데 매년 소설 즈음인 이맘때가 대면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 진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 무렵에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東國歲時記에서),,
(이 전설은 김포시,강화시,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자료 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도평,)
연천향교 度坪 박동일(원우) 조사정리
동지(冬至)
금년의 동지는 양력 12월 22일이고 음력은 11월 28일이다
冬至는 24節氣 중에 22번째 절기이다
冬至는 11월의 中氣이며 大雪과 小寒 사이에 들어 있다
冬至는 太陽의 黃經이 270°를 통과 할 때이며
宣明曆(太陰太陽歷)에서 冬至를 基準點 으로 한 24節氣와
1년 365일의 시작점인≪ 0일≫ 이다
(AD1281년冬至點을 基準한曆,明건국후(1368년)-大統曆-授時曆-時憲曆 採擇,)
太歲는 庚寅이고 月建은 戊子 이며 日辰은 丙午이다
卦는 坎 初六 이다
≪기후≫『高麗史』卷50 志4 역(曆) 宣明曆 上
初候에 지렁이가 굳어진다 (蚯蚓結)(蚯=지렁이구,蚓=지렁이인)
次候에 고란이가 뿔을 간다 (麋角解)(麋=고란이미)
末候에 샘물이 얼어 붙는다 (水泉凍)
≪절입시각≫ 陽曆 12月 22日 午後 2時 30分
일출(日出) = 오전 7시 43분, (주(晝) = 9 시간 34분 )
일입(日入) = 오후 5시 17분, (야(夜) = 14시간 26분 )
≪동지의 뜻과 유래)
1); 동지의 뜻 = 일년 중에 낮이 가장짧고, 밤이 가장 긴날을 의미한다
동지는 태양이 적도이남 23,5의“남회귀선”(冬至線)곧 황경270도에 있을 때이다
동지는 [음력 동짓달](양력은 12월)초순에 들면 애동지(兒冬至)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하순에 들면 노동지(老冬至) 라고 한다,
금년의 동지는 음력 11월 28일이라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 그런데 애동지에는 팥죽대신 팥떡을 해먹는다고 하는데 이유는 애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으면 아이들에게 병이 들거나 안좋다고 믿었기 때문에 팥죽대신 시루팥떡 을 해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동지. 노동지는 팓죽을 끊여 먹는다고 하니 [금년이 노동지]이니 팥죽을 끓여 먹어도 좋다는 이야기이다 .
2); 동지의 유래 = 민간에서는 동지를“아세(亞歲)”또는“작은설”이라 하였다
이날부터 밤이 짧아지고 음(陰)이 쇠(衰)하여 낮이 길어저서 양(陽)이승(勝)하고
부생(復生)한다하여 주역(周易)에서도 양효(陽爻)가 처음 아래에서 회복되는 복괘 (復卦)를 11월에 배치 하였다 또 “生陽之日”이라고도 한다,
≪동지에 하는 일≫
1); 동지팥죽 =『荊楚歲時記』에“共工氏”의고약한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귀신 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러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동지가 지나야 한 살더 먹는다”“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 가 한 살 더먹는다”등 “冬至添齒”의 풍속이 있다
2); 冬至使 =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동짓날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이다
正使는 3政丞 6曹判書 중에서 임명 했으며 正使 이외에 副使,書狀官,從事官,通事, 醫員,寫字官,畵員,등 40여명을 파견 하였다 冬至使는 人蔘,虎皮,水獺皮,花紋席,종 이,모시,명주,금,등을 선물로 가저 갔는데 1429년(세종11년)에 금은 면제되었고 선물을 받은 명,청나라 에서는 그에 맞먹는 중국의 특산품을 조선에 선물했다
동지사의 파견은 1894년(고종31년)甲午改革 때까지 계속 되었다
3); 靑粧曆 = 東國歲時記에 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宮에 받친다
나라에서는 이책에 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달력을 黃粧曆,靑粧曆,白粧曆,의 구분이 있고 관원들은 이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端午에는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더불어“夏扇冬曆”이라 하였다 이조에 서는 지방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靑粧曆”을 선사 하였다,
4); 柑製 = 해마다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柑橘)이 진상되여 올 때 成均館의 明倫堂 에 官學儒生들을 모아 놓고 柑橘을 나누어 준뒤 試題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하던 黃柑製를 말한다 1564년(명종19년)처음시행 되었으며 시험과목은 詩,賦,表,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였다,
5); 冬至符籍 = 동지를 맞아 부엌이나 벽에 기둥에 잡귀를 방지하는 부적을 붙인다,
≪冬至의 異稱≫
老冬至, 丙冬至,首歲, 亞歲, 애동지, 履長, 작은설,中冬至,至日,호랑이장가가는날,등,
(옛날기록이나 신문,잡지,등에서 특별한 기록은 조사되지 않는다,)
(연천향교 度坪 박동일(원우) 조사정리)
소한(小寒)
금년의 小寒은 양력2012년 1월 6일이고 음력은 12월 13일이다
小寒은 24절기중에 23번째로 12월의 節氣이며
小寒은 12월의 節氣로 冬至와 大寒 사이에 들어 있다
小寒은 太陽의 黃經이 285°를 통과 할 때이며 冬至로 부터 15일째 되는 날이다
太歲는 辛卯이고 月建은 辛丑이고 日辰은 丙寅 이다
卦(괘)는 坎(감) 92이다
≪기후≫『高麗史』卷50, 志4,역(曆) 宣明曆 上,
초후에 기러기 북쪽으로 돌아 간다 (雁北鄕)(雁=기러기안)
차후에 까치가 둥지를 틀기 시작 한다(鵲始巢)(鵲=까치작)
말후에 꿩이 울기 시작 한다(野鷄始雊)(雊=장기울음구,)
≪절입시각≫ 陽曆 1月 6日 午前 7時 44分
일출(日出) = 오전 7시 47분 (주(晝) = 9시간 41분)
일입(日入) = 오후 5시 28분 (야(夜) = 14시간 19분)
≪소한의 뜻과 유래≫
小寒이란 “작은 추위”라는 뜻으로 12월의 節氣 일뿐 俗節이나 名節 은 아니다
宣明曆의 24節氣는 중국 황하 유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우리나라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節氣의 이름으로 보면“大寒”때가 제일 추워야 하나 우리나라에는“小寒”때가 가장 춥다 소한과 대한이 드는 시기는 시베리아 기단의 맹위로 몹시 추운 날이 개속 되고 건조한 날씨로 불이 일어나기 쉬우며 가뭄이 들때가 많아 겨울작물의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대한이 소한집에 놀려가서 얼어죽었다”
“소한추위는 꾸어서도 한다” 등의 겨울철 속담이 많이 생겼다
≪소한,대한 무렵에 유행하는 속담≫
○= 소대한 지나면 얼어 죽을 잡놈 없다,
○= 소대한에 객사한 사람은 제사도 지내지 말랬다,
○= 소한에 얼어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죽은 사람은 없다,
○= 소한이 대한집에 몸녹이려 간다,
○= 소대한에 얼어죽지 않은놈이 우수경칩에 얼어죽을까,
≪겨울철 행사≫
1) 기설제(祈雪祭)
음력 11월이나 12월에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사
눈이 와야할 시기에 눈이 오지않는 것을 天災라고 믿어 기설제를 지낸다
동지후 셋째 미일 곧 臘日까지 눈이 세번오면 이듬해에 풍년이 들 고 눈이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하여 기설제를 지내기도 한다
祈雪祭는 고려,조선시대의 국가의례로서 종묘와 사직 또는 신묘,풍 운뇌우단,산천,우사단,등에서 지냇으며 기우제와 함께 농사와 직 결된 대표적인 의례이다
2) 사한제(司寒祭)
◎ 司寒壇에서 추위와 北方의 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지내는 祭 祀,음력 12월에 얼음을 떠서 氷庫에 넣을 때“藏氷祭”를 지냈 고,春分 에 氷庫門을 열 때“開氷祭”를 지냈는데 이를
“司寒祭”라 한다
◎ [신라]때는“氷庫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빙고를 관리 하였으며 『三國史記』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6년(505)11월조에 “처음으 로 해당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토록 했다”라는 기사가 있으 나 司寒祭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때는 高麗史 卷63,志17,禮5,吉禮小祀司寒條에 司寒은 孟冬 (음력10월)과 立春에 얼음을 저장할 때,春分에 얼음을 낼 때, 제 사지내며 제사에 바치는 희생으로는 돼지 한 마리를 썼다,
◎=[조선]시대에도 司寒祭를 지냈다 『慵齋叢話』권10에“사한단은 동빙고에 있는데 얼음을 저장할때면 날씨가 추워지기를 제사 한 다”하였고 『漢京識略』권2,빙고조에 “해마다 12월이면 제관 이 사한단에서 현명씨에게 제사를 드리고 비로소 한강에서 얼 음을 뜨기 시작한다,--春分에 開氷祭를 드린후에 얼음을 나누 어 준다”라고 하였다
태종13년(1413)4월 13일에 사한제는 고려의 예에 따라 제사를 小 祀로 정하였다
세종30년(1448)11월 9일에는 사한제는 12월 月令에도 있는데 기후 를 고려하여 장빙할 시기가 오면 택일하여 거행하여 藏氷祭는 12 월에 지내게 되었다
사한제는 3품의 관원이 주관했으며 제사를 지내는 사한단은 [동빙 고] 근처에 있었다
조선의 사한제는 隆熙2年(1908) 勅令에 의하여 폐지 되었다,
(연천향교 박동일 조사전리)
『臘日』에 대하여
금년에는 “臘日”이 1월23일이고 음력 설날과 중복 되었다
매년 말 신(神)에게 제사지내는 날로 옛날 시골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原文]
國曆 用冬至後第三未爲臘 以東方盛德在木也 有事于太廟,- - -
(해설) 우리나라에서는 동지후 셋째 未日을 납일이라 한다 東方의 盛德이 [木]에 있기 때문이다 이날 종묘에 제사를 지낸다 (洌陽歲時記))
◎ 臘日의 定意
冬至 뒤 세 번째 未日을 臘日이라고 하며 臘平, 臘享日,이라고도 한다
◎ 臘日의 由來
夫餘에서는 迎鼓라 하여 12월중 하루를 택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新羅에서는 12월 寅日에 제사를 지냈고 高麗 文宗때는 戌日로 定하여 지냈지만 朝鮮時代에 이르러 冬至로부터 세 번째 未日을 臘日로 定하게 되었다 (韓國歲時風俗辭典冬編)
◎ [芝峰類說] (時令部 歲時)
蔡邕이 말하기를
[靑帝](봄을 맡은 동쪽의神)는 “未日”로 臘日을 삼고
[赤帝](여름을 맡은 남쪽의神)는 “戌日”을 臘日로 삼고
[白帝](가을를 맡은 서쪽의神)는 “丑日”을 臘日로 삼고
[黑帝](겨울을 맡은 북방의神)는 “辰日”을 臘日로 삼으며
[黃帝](중앙을 맡은 神)는 “辰日”을 臘日로 삼는다 고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未日”을 납일로 쓰고 있으니
아마 「동쪽은 [木]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고하여보니 中國에서는 冬至후의 셋째“戌日”을 臘日로 한다고 한다,
◎ [朝鮮大歲時記] 一卷
[臘月]
臘月 會游佃 取臘者 臘之意也
(해설)납월에는 모여서 사냥을 한다 [臘]이라고 한 것은 이시기에
사냥(臘) 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註]에 설명 하기를『臘月』은 12월을 말한다 『臘日』은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未日]이다, 중국에서는 세 번째 戌日 또는 辰日 등으로 시대마다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新羅 때에는 12月 寅日이었고 高麗 文宗때는 戌日로 납일을 정했지만 대체로 大寒 前後 辰日로 臘日을 삼았다
朝鮮時代에 와서 冬至 뒤 세 번째 未日로 定 하였다 臘日에 나라에서는 宗廟와 社稷에 祭祀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祭祀를 지냈는데 이를“臘享”이라고 했다 『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납일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산돼지와 산토끼의 고기를 썼다 그래서 서울 근교의 경기도 산악지대에서는 사냥꾼으로 하여금 산돼지와 산토끼를 잡게하고 잡은 고기를 진상 하였다 [正祖]가 이 제도를 파할때까지 포수들은 용문산과 축령산 등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사냥』= 납일의 “臘”자는 사냥한다는 뜻의“獵(렵)”에서 유래된 글자로서 『海東竹枝』에는 옛풍속에 포수를 동원하여 깊은산에서 산돼지를 사냥하여 臘享日에 백관들에게 나누어주며 민가에서도 또한 고기를 먹으니 이를[臘肉]이라고 하였다 『勉庵遺稿』에는 납향에 쓰는 고기는 멧돼지 혹은 산토끼를 잡는다고 하였다
◎ 臘藥
臘享을 올리는 납일에 內醫院에서 각종 환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린다
이것을 臘藥 또는 臘劑라고 하는데 [淸心元],[安神元],[蘇合元],의 세 가지 환약을 가장 요긴하게 여겼으며 정조 때인 경술년(1790)에는 [濟衆丹]과 [廣濟丸]이 세로 제조 되어 모든 營門의 군졸들 치료에 사용되었다
◎ 臘享
조선에서는 世宗때 五禮儀를 제정 하면서 臘享을 大祀로 정한이후 社稷과 宗廟에서 납향을 모시게 하였고 지방관아에서는 [나례]를 열어 한해를 정리하는 행사로 삼았다
◎ 臘雪水
납일에 온 눈을 받아 녹은 물을 藥用으로 쓰며 그 물에 물건을 적셔 두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 하였다 이물을“납평치”또는“臘雪水”라 하였다
◎ 臘肉
납일에 잡은 고기는 사람에게 모두가 좋지만 특히 참새는 늙고 약한 사람에게 이롭다 하였다 “참세가 소등에 올라가서 네고기 열점과 내고기 한점 바꾸지 않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참세와 아울러 납일에 잡은 고기를 [臘肉] 이라고 한다
◎ 납일에 행한일
文昭殿祭,社稷大祭,宗廟大祭,臘雪水,臘享엿먹기,참새잡이,臘肉,臘平전골,등
(東國歲時記(洪錫謨 原著, 崔大林 譯解,홍신문화사 1989년발행)에서)
◎ 淮南子時則訓篇其位東方其日甲乙盛德在木(註)太皞之神治東方也甲乙木日也 盛德在木木王東方也逵吉按太皞之神治東方也
◎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시려면 [五洲衍文長箋散稿(四冊)寒食春秋二社伏臘 辨證說]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연천향교 박동일 조사정리)
◎;死者는 西가 上이고 生者는 東이上이다
【문】의례문답=3
1),혼인예식의 신랑,신부의 위치,
2),묘지의 부부 합장시 남녀의 시체위치,
3),신위와 묘비문의 부부 위치가 다른점,
4),사무실의 上,下급자 좌석배치,
5),회의시의 上,下급자 의 좌석배치,
등에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사천 김영진)
【답】좌석배치에는 원칙이 제대로 지켜져야 합니다
첫째,예절에서 방향을 말할 때 前後左右라 하면 누구의 전후좌우인지 혼란스 러우므로 [東西南北]이라 말하고---
둘째, 예절의 東西南北은 자연의 동서남북이 아니라 上석을 北쪽으로 간주해 [上석의 左가 東], [右가 西쪽] 입니다
셋째, 죽은이(死者)는 西쪽을 上으로 하는데(死者- 以西爲上) 그것은 죽은이 는 어두운 세상으로 갔기 때문에 해가지는 서쪽이 上이고 산 사람은 동쪽을 上으로 하는데 (生子- 以東爲上) 밝은세상에 있기 때문에 해 가 뜨는 동쪽을 上으로 하는 것입니다
1)= 혼인예식은 主禮가 上석이라 [주례의 左가 東쪽 신랑]이고
[주례의 右가 西쪽 신부]입니다
2)= 묘지는 어떤 경우이든지 南向한 것으로 간주하여 [男西女東]으로 매장 합니다
3)= 지방 신주는 [神位]이기 때문에 [男子가 西쪽]=[女子가 東쪽]이고
[墓碑]는 신위가 아닌 [글]이므로 세로로 쓸때는 [우측부터 쓰기] 때문 에 남자를 右측에 먼저쓰고 여자를 다음에 左측에 씁니다
4)= 사무실의 좌석 배치는 최상급자가 북쪽에서 남향한 것으로 간주해 최상 급자의 左측이東 이고 右측이 西이며 차(次)상급자는 東쪽에 앉아야 합 니다
5)= 회의시의 좌석배치는 상석에 최상급자 혼자 앉고 하급자가 東西(左右) 로 앉을때는 次상급자가 東쪽이고 上席에 2인이나 3인이 나란히 함께 南向해 앉을때는 次상급자(2위자)가 최상급자(1위자)의 右측인 西쪽에 앉아야 [上東下西]가 됩니다 3인때는 3위자가 1위자의 左측에 앉으면 1위자가[중앙]이 되는 것입니다 (월간실천예절합3-231-1991년50집)
忌日祭祀에 대한 小考察
1, 四代奉祀의 根據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제사 지내는 대상을 어디까지 할것인가 ??
옛날부터 일정하지 않았다
1) 高麗朝
(1390년 高麗 恭讓王 2年에 [圃隱 鄭夢周] 선생이 지어올린 祭禮規定)
3品以上 = 曾祖 까지 3代를 祭祀하고
4品-6品까지 = 祖父 까지 2代를 祭祀 지내고
7品 以下-庶民까지 = 父母만 祭祀 지낸다
(身分이 높은사람도 --[3代까지만 祭祀] 한다)
2) 朝鮮朝 (經國大典=1470年 朝鮮成宗1年에編纂,지금의 六法全書,)
3品以上 = 高祖까지 4代를 祭祀
4品-6品까지 = 曾祖까지 3代를 祭祀
7品以下 - 선비 = 祖父까地 2代를 祭祀
庶民은 - (兩班아닌자) = 父母만 祭祀,
(朝鮮朝에서는 身分에 따라 [高祖까지 4代奉祀] 하도록 差別을 두었었다)
3) 甲午更張(1894年 大韓帝國)
身分制度가 撤廢되면서 孝道하는데도 差別을 두어서야 되겠느냐??
누구든지 앞을 다투어 [高祖까지 4代奉祀]를 하게 되었다
4) 家庭儀禮準則 (1969年 大韓民國)
누구든지 [조부까지 2대만봉사] 하도록 규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례준칙』을 따르고 있다,
◎ = 1894年에 『甲午更張』으로 身分制度가 撤廢되니까!!
앞을 다투어 4代奉祀를 하였는데 또다시 1969年에 『家庭儀禮準則』이 制定 되므로 다투어 祖父母까지만 祭祀지내는 풍조는 孝道하는 마음이 退色한 所致라 할 것이다,
◎ =祭四代 [4대를 제사 지낸다]【 儀禮問解 (沙溪全書 卷四十一)】
≪問「宋浚吉」≫ 今世士大夫家, 或祭四代, 或祭三代, 何者爲得,
≪答≫ 祭三代, 乃時王之制,然高祖當祭,不但程朱有明訓,我東先賢如退溪栗谷諸 先生,皆祭高祖云-,
【問】송준길이 물었다=오늘날 사대부들의 집에서는 혹4대를 제사 지내기도 하고 혹3대를 제사지내기도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
【답】3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바로 [時王]의 제도이네 그러나 고조까지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하니 이에 관해서는 비단 정자와 주자 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방의 선현들 가운데 퇴계나 율곡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고조까지 제사 지냈다고 하네,
◎ =忌祭之義 [기제의 뜻은 무엇입니까?]
≪問,宋浚吉≫(송준길이 물었다)
【答】忌者,含恤而不及佗事之謂,非祭名也,宋儒始以義起,禮經及先儒說可考,
【해설】기(忌)라는 것은 크나큰 슬픔을 머금고 있어서 다른 일에는 미칠수 없음을 이른 것이지 제사의 이름이 아니네,
宋나라 유학자들이 비로소 義로서 새로운 예를 일으킨 것이네 이에 대해서는 예경 및 선유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2, 高祖까지 四代奉祀를 하는 理由
누구든지 자기의 직계조상은 자기를 존재하게 한 근원 이므로 그 조상이 돌아가시면 슬퍼하고 근신하여 상복을 입는 것이 인정일 것이다
그른데 인간의 수명으로 보아 사람이 죽을때의 자손으로
가장 아래자손이 고(玄)손자가 된다 20세에 아들, 40세에 손자, 60세에 증손자, 80세에 고손자,를 볼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상복]은 고손자가 입는 상복까지만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부모는 생전에 나를 가장 귀여워 해주신 어른인데 어떻게 고조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을수 있겠는가 ?
어떤 사람은 “그럼 고조부모라도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될것”이라 말한다 만일 자기를 본 조상만 제사 지낸다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遺腹子는 그 아버지가 자기를 보지 못했으니까 아버지의 제사도 지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예절이란 획일성이 있어야 한다 최고 가능선이 생전에 고손자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고조부모까지 4대봉사를 해야 합리적인 것이다
미루어 볼 때 [가정의례준칙]에서 조부모까지 2대 봉사만 하도록 정한 것은 합리적인 논거가 없이 덮어놓고 제사의 회수를 줄이기 위한 것이 였으니 자기의 존재를 근본에 보답하는 효도사상과 맞지않은 것이다
요사이 만혼풍조가 있어 생전에 고손자를 보기가 어려울 줄로 알았는데 인간의 평균수명이 연장되어 역시 고손자를 볼수 있고 또한 조혼 만혼에 관계없이 인간의 생리적 생식기능으로 보아 충분히 고손자는 볼수 있으므로
[기일제사]는 계속하여 고조부모까지 4대봉사를 해야 한다
3, 기일제사에 배우자를 함께 지내는 이유
[기일제사]는 조상이 돌아 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 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는 아버지만 제사를 지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는 어머니만 제사지내야 이치에 맞는 기일제사인데 왜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제사지내는 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기일제사에는 그날 돌아가신 조상만 제사지내는 것은[禮의 正則]이고 배우자를 함께 지내는 것은 부부는 同格이라는 데서 출발하는“人情”인 것이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도 아버지의 생신에는 어머니도 함께즐겹게 해 드리니까
돌아가셔서 지내는 제사도 부부는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는 인정에서 나온다(禮出於情)”는 말이 이런 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沙溪曰〕,忌日幷祭考妣,雖非朱子意,我朝先賢嘗行之,栗谷亦曰祭兩位,於心爲安云,〕[사계선생말씀]에 기일에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는 것이 비록 주자의 뜻은 아니나 우리나라의 선현들께서 일찍이 그렇게 행하였으며 율곡역시 말하기를 “두위를 아울러 제사지내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다”하였네,
◎〔晦齋曰〕,按文公家禮,忌日只設一位,程氏祭禮,忌日配考妣,二家之禮不同,蓋只設一位,禮之正也,配祭考妣,禮之本於人情者也,若以事死如事生,鋪莚設同几之意推之,禮之本於情者,亦有所不能己也,〕[회재 이언적]이 이르기를”살펴보건데 [文公]의 『家禮』를 보면 기일에는 단지 한신위만을 설치해 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고 [程氏]의 『祭禮』를 보면 기일에는 고비를 함께 배향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두 禮家의 說이 같지 않다
대개 한신위만 설치하는 것이 “正禮”이고 고비의 신위를 함께 배향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人情”에 근본을 둔 것이다
만약 죽은이를 섬기기를 산사람 섬기듯이 하고 자리를 펼때에 궤(几)를 같이 놓는다는 뜻으로 미루어 보면 인정에 근본하는 예도 역시 그만둘수 없는 점이 있다“ 하였다,
◎〔退溪曰〕,忌日合祭,古無此禮,但吾家自前合祭之,今不敢輕議,[퇴계]가 말하기를 “기일에 두분의 신위를 합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옛날에는 그런 예가 없었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전부터 합하여 제사 지냈으니 지금 와서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다”(疑禮問解에서)
(연천향교 박동일(원우)조사정리)
◎; TV의 男女아나운서 ,上下기준을 먼저 정해야
【문】의례문답 = 4
TV를 보면 남녀아나운서가 시청자가 보았을 때 [男左女右]로 앉았습 니다 그것은 지방이나 신주에 신위를 쓰는것과 같은 위치인데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上同-)
【답】매우 좋은 지적입니다
현재 TV에서 남녀아나운서가 함께 앉는 위치가 맞는가 틀리는가는
아나운서가 上席(웃어른)인가 시청자가 上석(웃어른)인가를 먼저 결정 해야 판단 할수 있습니다
만일 시청자를 웃어른(上席)으로 본다면 上석인 左인 東쪽에 남자 ,右 인 西쪽에 여자아나운서가 앉는 현재의 위치가 맞는 것이고 반대로 아나운서를 웃어른(上席)으로 본다면 귀하의 지적과 같이 아나운서는 사자의 위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실천예절 3-232-4324년-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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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