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여덟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18 손병희 - 민족대표 33인 중 座長… 3·1운동과 동학농민운동
출생 - 사망
1861. 4. 8. ~ 1922. 5. 19.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 중
서울 강북구와 천도교중앙총부가 9월 30일까지 수유동 근현대사기념관에서 '3·1 운동을 이끈 민족 지도자, 의암 손병희' 특별전을 연다. 손병희(1861~1922) 선생의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 100주기를 맞아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전시이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교육 사업가였던 손 선생은 동학(東學)농민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했다.
"오등(吾等·우리)은 자(玆)에(이에) 아(我·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3·1 운동이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 33인 중 좌장 격 인물이 손병희였다.
그런데 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장소가 요릿집이었다는 사실을 의아해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원래는 발표를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하려 했으나, 태화관으로 바꾼 이유는 이렇다. 손병희 등 민족 대표들은 나중에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선언서 발표 소식을 알게 된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들면 일본 경찰 탄압으로 (많은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거사 전날 급히 장소를 바꿨다." 그렇다고 서울의 잘 알려진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변경하면 일제가 눈치 챌 우려가 컸다. 결국 보안을 위해 요릿집을 택했고, 민족 대표들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들이 태화관에서 거사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선언서를 발표하고 난 뒤에야 경찰을 보내 체포에 나섰다. 태화관이 있던 자리(인사동 태화복지재단)에는 현재 '3·1 독립선언광장'이 만들어져 있다.
손병희는 충북 청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불우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협심이 강했다. 열두 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려고 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을 도우려고 그 돈을 내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동학이 확산하던 때였다. 동학은 평등사상을 내세웠다. 손병희는 21세 때인 1882년(고종 19년) 동학에 입문했고,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을 도우며 동학의 교세 확장에 힘썼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교단 조직의 하나인 북접의 총지휘자로서 항일 구국 활동에 나섰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한 민족이 그들 자신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자"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했다. 여기서 '자결'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1910년 이후 일제 치하에 있던 조선에서도 독립운동 분위기가 높아졌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 주도로 2·8 독립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병희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이며 세계 각국에 독립 청원서를 전달해 우리 민족 독립 열망을 알릴 계획을 마련했다. 또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해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며 비폭력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마침내 천도교·개신교·불교 지도자들이 모여 '민족 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천도교 측 인사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고종 황제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 있어 그 이틀 전인 3월 1일을 거사 날짜로 정했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손병희와 민족 대표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이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들불처럼 전국과 해외로 번져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1919년 한 해 동안 국내외에서 모두 약 1800회 시위가 일어났으며 106만명 이상이 여기에 참여했다고 한다.
체포된 손병희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1920년 10월 보석(保釋·보증금을 받거나 보증인을 세우고 풀어주는 일)으로 출감했다. 1922년 5월 19일 가족과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손병희는 별세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은 실망하지 말고 노력해라. 일본인들 도량으로는 도저히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먹지는 못할 것이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손병희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