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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갈라디아서6장11~18절
제목 : 할례의 흔적, 예수의 흔적
오늘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빗나간 선동과 바울의 복음적 열정이 대조됩니다. 바울은 할례가 아니라 주 안에서 새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하며,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편지 전체에 대한 결론을 맺습니다.(11-18).
지금 까지는 바울은 구술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관습대로 그는 필기자의 손에서 팬을 취하여 개인적인 추신을 적어 넣습니다.
보통 이것은 위조편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서명을 첨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살후3:17)
때로는 마지막 권면이나 은총의 말을 몇 마디 적어 넣기도 합니다.
*살후3:17~18절에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 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 지어다”
1. 육체를 자랑하는 거짓 교사(11~13절)
1) 바울은 친필로 마지막 몇 문장을 씁니다(11절).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본절은 '큰'('펠리코이스')와 '쓴'('에그랖사')의 시제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펠리코이스'를 '긴' 또는 '많은' 등의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이 지금까지 쓴 많은 내용의 편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2) '펠리코이스'가 시각적으로 '큰'을 의미한다고 볼 경우 바울이 쓴 글씨체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바울이 오랜 여행 기간 동안의 박해와 노동으로 인하여 적당한 글씨체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호소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3) 혹자는 바울이 글쓰는 사람에게 대신 쓰도록 하고 바울은 자신의 서명만 스스로 했다는 점(고전 16:21~24.;골 4:18;살후3:17)에 착안하여 본 구절에서 바울 자신이 직접 쓰는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바울 자신이 본서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직접 펜을 들었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특별히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글자로 쓴 것은
“사람들의 눈을 끌고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얼마나 강조하는 지 보라”는 의도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강조하려 했을 까요?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주요 주제들을 강조합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과 유대주의 자들을 대조하며,
그들이 나타내는 두 가지 종교 체계를 대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2) 외적인가 내적인가(12~13절)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첫째 질문은 외적인가 내적인가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외적인가 내적인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외적 의식의 종교가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종교입니다.
(1) 유대주의 자들은 외적인 할례에 집중했습니다(12절).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유대주의 자들은 자신이 “할례를 받은”사람들이고,
“할례를 받게”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때로 “할례당”이라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행15:1절“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① 그래서 그들은 구원이 오직 믿음에 의한 것임을 부인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했을까요?
바울은 그들이 “육체의 모양을 내려”했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외적 육체적 과시를 하려 했습니다.
②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한 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합니다.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때문입니다(Boice).
②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전파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효력을 증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할례의 정당성(正當性)을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모양을 내다'('유프로소페사이)는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입니다.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관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할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눅 2:21)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 받게 했던(행 16:3)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본절의 '육체'는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자만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 받은 한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로서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 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합니다.
(2) 육체로 자랑하려 하였습니다(13절).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로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그것을 대단히 중대한 의식으로 격상시켜,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외적이고 신체적인 시술이
영혼의 구원을 확보하거나 구원의 불가결한 조건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명백하게 우스광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세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세례로 인해 중생한다는 교리를 가르치는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세례는 중요합니다.
할례가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주셨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세례를 주셨습니다.
세례는 할례가 그랬던 것처럼, 언약의 일원이라는 표시입니다.
하지만 세례와 할례는 둘 다, 그것들이 아무리 위대하고 신령한 진리를 상징한다 해도, 그 자체는 외적이고 육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구원의 불가결한 수단으로 확대하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가?
15절은 그 답을 말해 줍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할례를 받았는가(세례를 받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거듭나서 지금 새로운 피조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할례와 현재의 세례는 이에 대한 외적 표적이며 인간적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상징했습니다(롬2:29)
마찬가지로, 물 세례는 성령 세례를 상징합니다.
할례와 세례는 “육체”의 일, 사람들이 수행하는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의식들입니다.
새 창조는 성령으로 탄생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수행하시는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기적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종교를 피상적이고 외적인 과시로 전략시켰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신령한 내적 종교로 다시 부르시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사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주전8세기와 7세기,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 이사야29:13절을 보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한탄하셨을 때 이스라엘이 저지른 큰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을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셔서,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막7:6,7).
실로 타락한 인간이 진정하고 내적이고 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외적인 의식들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쉽고 편안한 대체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외적인 것들은 새로운 창조나 신생과 비하면 거의 주요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은 차지할 자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입술을 통해 표현될 필요가 있으며,
종교에서 내적이고 영적인 것은 외적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내적 실제가 결여되어 있으면 외적 형식들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3) 인간적인가 신적인가(13~16절)
두 번째 질문은 기독교의 본질이 인간적인가 신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인가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에 집중하면서 두 번째 실수를 했습니다.
할례는 외적이고 육체적인 의식일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시행하는 인간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할례는
종교적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킬 의무를 부과합니다.
유대주의 자들은 행15:5절에서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들은 사람의 구원이 그것(할례)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구원의 길에 대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죄사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는 인간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할례)로 시작하여,
더 많은 인간의 행위(율법에대한 순종)로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에 강경하게 도전을 가합니다.
그는 심지어 유대주의자들의 동기를 비난하고,
그들의 허세에 도전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구원이 율법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여전히 공로적 행위를 주장하는가?
바울의 대답은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는 것”(12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무엇이 있기에 세상을 화나게 하고,
그들을 선동하여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갈3:13)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대단히 불쾌한 몇 가지 진리를 말해 줍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운 저주아래 있는 죄인이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지신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길로는 거기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선행에 의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이었다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갈2:21).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여기에 있다.
내가 지고 있는 것은 너의 죄며,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너의 저주다.
내가 지불하고 있는 것은 너의 빛이며,
내가 죽고 있는 것은 너의 죽음이다”.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지키지 아니하고'('우데 퓌랏수신')은 고의적인 율법 파기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 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12절).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했습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사람들이었습니다.
2. 십자가를 자랑하는 바울(14~16절)
1)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14절).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유대주의자들은 편안한 환상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피합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를 건설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라 자신의 공로에 근거해서 구원을 받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복음임을 확고히 믿는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을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십자가만을 자랑합니까?
그는 십자가만이 사람을 새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거에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습니다.
무정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율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그를 새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를 스케일이 크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사랑이 많고 눈물이 많은 목자로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이방인들을 변화시켜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를 체험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고,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고자,
고난의 길을 자원하여 걸어갔습니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2)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15절).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5:6;고전 7:19).
바울이 앞 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전황입니다.
이 말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지으심을 받은'('크티시스')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피조물'을 뜻하는 '크티스마'(약 1:18)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크티시스'는 본절에서 '새로'의 헬라어 '카이네'와 함께 쓰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강조합니다(엡 2:10).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성도는 현재의 삶 속에 미래에 이루게 될 종말의 삶을 도입하며 살아갑니다.
3) 새 규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16절)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는 바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새 언약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이처럼 본절에서는 본서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한편 '행하는'('스토이케수신')은 '행렬에 맞추어 나가다', '규칙을 굳게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스토이케오'의 미래 직설법으로 5:25에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의미할 때 사용된 것처럼 새 규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새 언약의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축복은
본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참된 이스라엘 족속이 될수 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음을 믿어 순종하게 된 자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곧 '약속의 자녀'를 말합니다(롬 9:7).
(2) '평강'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평강'('에이레네')는 5:22에 제시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축복과 행복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는뎨(눅2:14) 본절에서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함축합니다.
한편 '긍휼'('엘레오스')는 구약의 '헤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은혜'등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큰 은혜를 가리킵니다.
특히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을 정한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무리들에게도 같은 축복 속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 인사(17~18절)
1)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괴롭게'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합니다(마26:10; 눅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 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 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 내기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 '흔적'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
(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 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행 20:24).
2)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합니다(18절).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형제들에게 거룩한 인사를 함으로 시작했던(1:2)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 구원을 함축 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으로서 그들의 구원이 자의적인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증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메타 투 프뉴마토스)라고 표현한 것은 외형적인 모양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내적인 존재 전체에 영향을 끼치길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할레를 주장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기피합니다(11~13절).
그들에게 ‘할레’는 십자가로 인한 박해와 일상의 헌신을 피하는 수단입니다.
그들은 한 번의 할례로 만족할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없습니다.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붙잡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갖가지 종교 행위들이 우리 마음의 변화나 말씀 순종을 대신하다면나도 외모만 꾸미는 할례자일 뿐입니다.
2) 바울의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14절).
그에게는 물려받은 것이나 노력해서 얻어낸 자랑거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견주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십자가를 동시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미 쓸모없다고 결론 내린 세상의 헛된 자랑거리를 얻으려고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고 있진 않습니까?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합니다(14~16절).
그 공동체에서는 할례여부나 출신이 척도가 될 수 없고, 어떤 차별도 우열도 없습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곳에는 경쟁과 질투가 가득하지만, 십자가를 자랑하는 공동체에는 평화가 넘칩니다.
서로 견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내 자랑이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를 만듭니까?
4)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17절).
바울의 생애를 추적하면, 예수의 사도로 섬기며 얻게 된 박해의 상흔이 가득합니다.
수치스러운 흉터가 아니라 예수의 남은 고난을 채우다가 얻은 훈장입니다.
내 삶에도 십자가를 따라 순종하다가 세상이 준 고난의 흔적,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신 흔적(5:22)이 있습니까?
주님은 그 흔적으로 내 삶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5) 바울의 마지막 말은 은혜입니다(18절).
통상적인 인사이지만 은혜의 능력에서 벗어나려는(1:6,5:4)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은혜를 떠나서는 주님과의 만남도, 나의 변화된 삶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주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