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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2~16(321) 푯대를 향해 달려 가는 성도 2022. 6. 26.
독서광으로 알려진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나를 울게 한 가장 감동적인 책’이라며 개인 블로그에 한 권의 책을 추천했었습니다. 폐암 선고를 받고 죽어가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말하는 신경과 의사 폴 칼라티니(Paul Kalanithi)의 ‘숨결이 바람이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의사 칼라티니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예일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수재였습니다. 모교의 교수와 수백만 달러의 연봉이 기다리는 연구원을 보장받은 직후 폐암 4기 선고를 받게 됩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상황에서 수련의 과정을 끝까지 마치고, 혹독한 항암 치료 중에도 시험관 아기를 통해서 딸까지 가지게 됩니다. 아내가 “아이에게 작별을 얘기하는 것이 당신의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인생은 아니다. 죽음이 당장 목전에 있더라도 계속 자신의 길을 가는 그것이 삶’이라고 답변합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라는 제목은 책에 나오는 구절에서 인용했습니다.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숨결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된다.”결국 그는 38살의 나이에 온 가족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칼라티니는 7년의 수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항암치료를 동시에 받고 견디어 냅니다. 그는 포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이 오고 남들은 불가능하다는 말로서 포기하라고 말하였지만, 칼라티니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사망의 그림자가 코 앞에 와 있는 상황 속에서도 푯대를 향해 달려 나가는 모습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정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폴 칼라티니의 짧은 생의 모습이지만,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 보게 만듭니다. 믿음 안에서 많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 것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듭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계속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완전한 사람(perfect person)이 되었기에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전진해야 한다’
‘내가 허물과 실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처럼 부족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가 죄 씻음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되었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닮아 가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12절에 나오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구절입니다. ‘온전히 이루다’는 원어의 뜻은 “본래 그 목적에 도달한”이라는 뜻입니다. 즉 온전히 이루었다는 말은 ‘성숙한 신앙’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고로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말은 내가 가진 신앙이 완전하고 성숙된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나에게서는 자랑할 만한 신앙이 아직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연약하고 부족한 신앙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달려 나가고자 한다는 각오와 결단이 12절 말씀입니다. 12절 다시 보십시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이제 이 말씀의 뜻이 이해되시지요.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된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본질적 모습입니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몸인지라 우리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미성숙합니다. 실수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서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계속 추구해야 합니다. 늘 순종하는 모습으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늘 기도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해야 합니다. 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생활에 임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모습과 행동들이 바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온전히 이루는 모습은 과연 어떠해야 합니까?
1. 예수께 잡힌 바 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이 말은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귀담아 새겨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간혹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데, 무리해서 열심히 봉사하거나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고서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성경의 진리가 있으니 천국만 가면 되기 때문에, 시간과 물질 바치면서 충성할 필요 없다는 극단적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얻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은 몸이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것을 위하여 지금도 앞으로 달려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올바르고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지속적이고도 꾸준한 헌신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한 두번 충성은 다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충성과 헌신을 귀찮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헌신과 충성을 스트레스라고 여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12절의 ‘잡힌 바(카텔렘프덴)’는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어닙니다. 절대 오해해서 안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잡아서 자신의 형상을 닮은 꼴로 만들어 나갑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잡혀 있는 그 완전한 모습을 향해 달려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에게 붙잡힌 바 되어야 합니다. 돈에 붙잡히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성욕에 붙잡히게 되면 짐슴보다 더한 존재로 추락해 버립니다. 명예와 관력에 사로잡힌 자들을 보십시오. 권력을 위해서라면 빤한 거짓말과 추잡한 중상모략도 서스럼 없이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사람들에게 추잡하고 더럽다고 욕을 얻어 먹는 것입니다.
물질에 사로잡히고, 돈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야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며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로 잡힌 바 되는 성숙한 신앙을 이루시기 축원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로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인간이 가진 자아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물질적 자아 : 물질적 가치로 자기를 평가하면서 사는 존재를 말합니다. 내가 가진 것, 혹은 내 몸의 가치로 평가 받는 것인데 물질로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가장 원초적인 자아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자 앞에서는 비굴하고 나보다 덜 가진 자 앞에서 군림하려는 사람들의 자아입니다.
2)사회적 자아 : ‘누구의 친구냐, 누구의 자녀냐, 어느 회사 사장이냐 그리고 어디 출신이냐, 어떠한 학위를 가졌느냐?’하는 사회적 관계와 역할에 따라서 평가하는데 이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이런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매우 피곤한 인생입니다.
3)영적 자아 : 사람을 외모나 소유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모습으로 판단을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얼마나 말씀에 근거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가? 이것을 살피는 것으로 가장 바람직한 자아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연관시킨다면,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에게만 사로 잡혀야 합니다. 정욕에 사로잡혀서 이생의 욕망만 바라보며 좇아가는 헛된 삶이 되어서 안 됩니다. 몇 년을 신앙생활 했느냐,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냐? 내가 교회 안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인가? 이런 판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사로잡혀 있는지를 먼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온전한 푯대를 세우고 달려가야 합니다.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의 ‘푯대’는 목표를 말합니다. 영어로 쉽게 말하면 goal입니다. 대한민국의 손흥민 선수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신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축구가 어떤 운동이에요? 공 하나를 가지고 22명이 치열하게 운동장에서 겨루는 것이 축구시합입니다.
축구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뒹굴고 자빠집니다. 열심히 공을 몰고 가서 상대방 골대 안에서 공을 집어넣어 점수를 득점합니다. 그때에 아나운서는 goal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골키퍼가 지키고 있는 곳을 골대라고 말합니다. 모두 목표와 연관되어져 있는 단어입니다.
필사적으로 공을 몰고 가는 선수는 상대방 골대 안에 공을 넣어야 목표가 달성됩니다. 지키고 있는 수비수들은 철벽방어를 하면서 상대방 공격수가 자신의 골대 안으로 골을 넣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씁니다. 잘 막아야 하는 것이 수비수와 골키퍼의 목표가 됩니다.
14절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창세전에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달려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불러서 인생의 경주에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고로 모든 성도는 맡은 바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성실하게 푯대를 향해 달려 나가면 됩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달려가는 천국의 목표는 다 같이 동일하지만,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푯대와 목표는 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더 건강해 지려는 목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정이 더 행복해지려는 목표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야망이 목표일 수 있습니다. 그 목표가 돈이 되던, 건강이 되던, 잘못된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의 목표가 잘못된 것이지,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세상의 목표를 인간의 꿈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목표도 중요하듯이 신앙의 목표 또한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 대상자를 물색하여 전도를 하는 것, 이 또한 하나님 안에서 가져야 하는 개개인의 목표가 됩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항상 부름의 상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Alexandros the Great)의 어린 시절을 가르쳤던 가정교사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였습니다. 하루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물었습니다. “왕자께서 임금이 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희랍을 통일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 “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 때쯤이면 죽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자의 눈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으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 후에 알렉산더 대왕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다니며 “목표 없는 인생은 가치가 없다”는 어릴 적에 들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훈을 항상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 안에서 올바른 목표를 세우고 주님에게 기도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일구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2022년 상반기 6개월을 마무리하는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여러분들의 목표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목표가 있다면, 다시 재수정하여서 하반기에는 더 알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부름의 상급을 온전히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16절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는 내용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모두 함께 출발했지만,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처하고 있는 상황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는 일이 더 잘 풀린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년초 보다 일이 더 꼬인 분도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가 처한 각자의 현실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단계에 내가 도달해 있던지, 우리 모두는 주님을 믿으면서 각자의 길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교하면 초라해지고 서글퍼집니다. 바울이 던진 말처럼 어떤 단계에 있든지 그 단계에서 주님의 손을 잡고 행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통해서 2022년 하반기에도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고사 성어 가운데 구맹주산(狗猛酒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狗(개 구) 猛(사나울 맹) 酒(술 주) 酸(실 산)을 써서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유래는 이러합니다. 송나라 어느 주막에 술을 만들어 파는 장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절했으며 술 빚는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서 견줄 자가 인근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너무나 잘 빚어 놓아서 명품으로 인정 받는 술이 잘 팔리지가 않습니다. 만들어 놓은 술은 팔리지 않아서 시어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고민을 하던 그는 지혜자 양천을 찾아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술이 있는데 왜 장사가 안 됩니까?” 양천 왈 “혹시 당신네, 주막의 개가 무서운 게 아니요?” “개가 무서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개가 무서운 것과 술이 팔리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막을 지키는 개가 너무 사납게 짖어대는 바람에 손님들이 들어갈 수 없고, 아이들이 부모의 심부름을 받아도 개가 무서워 들어갈 수 없으니, 최고의 술을 준비해 놓고도 사나운 개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 것이요!”
무슨 의미를 담은 말인가요? 현대적 해석을 해 봅시다. 아무리 주인이 친절하고 그 식당의 음식이 맛있어도 종업원이 불친절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말씀이 좋은 교회라도, 성도들의 불친절한 행동, 상처를 주는 말,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교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자신을 돌아 봅시다. 혹여 내가 자신도 모르게 사나운 개, 즉 구맹(狗猛)의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신앙의 목표를 세우고 달려 나가는 다른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고 은혜의 마음으로 충성하는 목표로 달려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