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문화탐방 자료(2023. 7. 18)
1. 청주 청남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대청댐 부근에 있는 대통령 전용별장으로 1980년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이 대청호 일대의 경관에 매료되어 중부권에 별장의 필요성이 논의되었고, 주변 환경과 지리적 요건이 잘 맞아 경호실장에 의해 1983년 6월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완공되었다. ‘청남대(淸南臺)’는 충청북도 청주시 대청댐 부근 1,825,647㎡(약 55만 3천 평)의 면적에 지어진 전용별장으로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83년 조성 당시에는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빈관 개념으로 '영춘재(迎春齎)'란 이름으로 준공되었다가 이후 '86년도 7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현재의 청남대로 개칭된 것이다.
이곳은 내륙의 바다인 대청호반을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실 수 있는 장소이다. 대통령들의 온기가 담겨있는 본관 및 별관, 대통령 기념관, 오각정, 골프장, 양어장, 초가정, 하늘정원, 음악분수, 산책길(14km) 등은 찾는 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다.
충북 청주 청남대
역대 대통령들은 여름휴가나 명절 휴가 등 매년 4~5회, 많게는 7~8회씩 이용하여 20여 년간 총 88회 방문 471일을 청남대에서 보냈다고 한다. 국내의 대통령별장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진해를 비롯해 모두 다섯 군데(강원 고성 화진포, 제주시, 경남 진해, 거제시 저도 청해대, 충북 청주 청남대)가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모두 폐쇄하고 이곳 청남대 한 곳만을 남겨 두었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 대통령별장
경남 거제 저도 대통령별장(청해대)
경남 진해 대통령별장
제주 대통령별장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 대통령에게 커다란 결단이 요구될 때가 많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정운영의 중대한 고비에서 청남대에 머물며, 정국 구상하였고, 이때 내린 결단으로 역사를 뒤바꿔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청남대 구상』이다. 그 밖에 역대 대통령들은 청남대에서 다양한 인사들과 회동하며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한편, 여러 국빈을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청남대는 휴양 중에도 항상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을 갖춤은 물론, 대청호 상수원 보호를 위해 최고의 수질 정화 시스템을 구축·운영하였다. 또한, 청남대가 별장으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국가 1급 경호 시설로 청와대에서 관리하고, 4중의 경계철책과 대통령경호실의 지휘를 받는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338 경비대가 청남대를 경비를 수행하여 베일에 싸여 있다가 2003년 4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양함으로서 비로소 20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이 부대가 운용하던 참호와 초소 등도 일부 남아있어 아직도 관람 시 볼 수 있다.
청남대는 지난 20년간 여섯 분의 대통령께서 휴식과 함께 국정을 구상하시던 곳이기도 하면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국내 유일의 대통령별장이다. 2003년 개방 이후 매년 평균 80만 명 이상 방문하여 총 1,300만 명(2022.12.31)이 넘는 많은 분이 찾아 명실상부한 세계적 대통령 테마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청남대는 국민에 대한 애정과 국가 발전을 위한 고민의 흔적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내륙의 바다 대청호반을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실 수 있는 장소이다. 대통령들의 온기가 담겨있는 본관 및 별관, 대통령 기념관, 오각정, 골프장, 양어장, 초가정, 하늘정원, 음악분수, 산책길(14km) 등은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남대의 대표적인 축제인 '영춘제'와 '국화축제'를 비롯해, 사계(四季)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조경수와 야생화 등은 환상적인 자연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2.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청주 문의문화재단지는 대청댐 건설이 확정되자, 1992년부터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총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에 청주 시내 유형·무형 문화재 등을 수집 전시함으로써 인류문명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조상의 삶과 얼을 되살리기를 배우기 위한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단지 내에는 인근의 고인돌이 모두 이전되어 있고 문의현의 관아 객사 건물인 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이 이전 복원되었으며 수몰 지역의 민가와 서길덕 효자각, 임진왜란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1592년(선조 25) 8월 17일 충청도 금산 전투에서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한 김선복 충신각 및 문의지역에 있던 옛 비석도 함께 이전되었다. 옛 조상들의 생활풍습을 알기 위하여 양반가옥, 주막집, 토담집, 대장간, 성곽 등이 고증을 거쳐 건립되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 대왕 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인 영조대왕의 가봉(加封)할 때의 모든 사실을 기록한 문서인 영조태실가봉의궤를 비롯하여 군내에서 수집한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과 백제부터 근대까지 기와를 시대별로 분류한 기와 전시관이 있다.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배치도
이밖에도 이곳 문의에 오면 10분 거리 이내에 청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양성산 등산로, 작은용굴 분수대, 쾌적한 드라이브 코스인 청남대 도로, 청소년들의 체력단련장인 청소년 수련관과 충북지역 작가들로 구성된 예술인촌이 조성되어 있어『문의에 오면 문화가 보인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지역이다.
3. 청주 가로수길 ‘맑은 고을’ 청주(淸州)는 충북의 중심도시로, 충청도라는 이름도 충주와 청주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청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 줄기 무심천은 청주의 숨통이다. 이 무심천을 따라 조성된 청주 가로수길은 복대동 가경천 죽천교부터 석소동 경부고속국도 나들목까지의 길을 가리키며 총 길이는 6.3km이다. 이 가로수길에는 1948년 식재된 1,5백여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길을 따라 심겨 있어 마치 터널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는 드라마 '모래시계'와 영화 '만추'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청주 가로수길
4. 청주 중앙공원
4. 청주 중앙공원 임산자원이나 관광자원 보호 차원의 국/도립공원과 달리, 주거지 근린공원은 공중의 보건과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이라 할 남문로2가에 서 있는 용두사 터 철 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중앙공원은 청주시의 한가운데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공원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서린 압각수(鴨脚樹)와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인 정곡루(正鵠樓], 그리고 망선루(望仙樓)가 있다. 병마절도사 영문인 정곡루는 목조 2층의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으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청주 중앙공원 정곡루
그 앞에는 1천 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 압각수와 의병장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를 기리는 비와 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한봉수의 송공비,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의병장 박춘무의 비 및 서원 향약비 등이 있다. 청주 시내 중심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시민을 위한 각종 음악회와 발표회가 열린다. 공원 안에 1,000년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충북기념물)와 목조 2층 누각인 병마절도사 영문(충북유형문화재), 조헌전장기적비(충북유형문화재), 척화비(충북기념물) 등 유적이 많다.
청주 중앙공원
여기서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의 전설을 조금 부언하고자 한다. 이 은행나무의 잎사귀가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며, 고려말 공양왕 때 윤 이와 이 초가 이성계 일파를 없애기 위해 중국 명나라로 가서 이성계가 공양왕과 함께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이색·정지·이숭인·권근 등이 청주 옥사에 갇히고 문초를 받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큰 홍수가 났다. 이때 옥에 갇힌 죄수들은 옥사 객관 앞에 있던 은행나무에 올라가 모두 목숨을 건졌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이 특별교서를 내려 모두 방면했다는 일화에는, 간계에 굴하지 않는 충신의 기개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숨은 뜻이 내포돼있다. 이 은행나무가 바로 그 압각수(鴨脚樹)다.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 압각수
5.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은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명암동)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속박물관으로 선사시대 이래 충북지방의 문화재를 한곳에 모아 보존 전시함으로써 이 지방문화의 중심기관이 되고자 1982년에 착공하여 1987년에 완공하였다.
국립청주박물관
이 박물관의 터는 전부 42,000여 평으로 이 지방 출신인 곽응종(1903.5~ 1987.3)옹이 기증하였고, 박물관에는 국보가 1점 있는 등 국가 지정 문화재가 4점 있다. 이 박물관은 1979년 1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였고, 착공은 3년 후에서야 이뤄졌는데, 10.26 사건 등 긴박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예산 집행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청주박물관 부지 기증자 곽응종 공적비
국립청주박물관은 중원지역의 문화유산 수집과 보존관리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함양하고 문화유적의 조사연구, 유물의 전시, 사회교육 기능을 통하여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하고 민족문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다.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2004년 10월 8일 문을 연 청명관은 어린이박물관과 기획전시실, 첨단 영상시설이 갖추어진 강당 등 이용자들에게 더욱 다채로운 문화생활의 기회와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은 우리나라의 근대 대표적 건축가 故 김수근 선생께서 설계한 한국 현대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우암산 동쪽 기슭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 삼았다고 한다. 건축가 김수근 (1931~1986)은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도 예술임을 증명해 보였다.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 여겼던 김수근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매력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근대 건축가의 거장 이수근
6. 운보의 집(보조코스) 운보 김기창(蕓甫 金基昶) 화백은 해방 이후 지속해서 한국화의 현대화를 모색한 한국 화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추상화의 경향을 보이는 작품을 제작했고, 1970년대에는 민화를 재해석해 독자적인 바보 화풍을 구축해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되기도 하였다.
운보 화백은 1913년 2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0년 승동(勝洞)보통학교에 입학 후 장티푸스를 앓으며 고열로 청력을 잃고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았다. 언어 장애도 있었으나 후에 구화를 배워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모친 한윤명 여사는 아들 김기창에게 손수 한글과 산수(算數)를 가르쳤으며, 그가 미술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 1930년 보통학교 졸업 후, 구한말 어진화가(御眞畫家)로 명성이 높았던 김은호(金殷鎬) 화백의 화숙으로 보냈다. 김기창은 김은호 화백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서 일제에 동조하는 활동을 했으나, 광복을 맞아 호를 '운포(蕓圃)'의 '포(圃)'자에서 '口'이 빠진 '운보(蕓甫)'로 바꾸었다. 이에 관해 전통과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지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무도(板上跳舞)'로 첫 입선을 한 뒤 연달아 입선하다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4년 연속으로 특선을 받아 추천작가가 되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친일 미술 전시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조선남화연맹전(朝鮮南畵聯盟展)', '애국 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에 참여하고, 강제 징집을 독려하는 연재물인 '님의 부르심을 받고'에 삽화를 그리는 등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에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 시기에는 김기창은 김은호 화백의 영향을 받은 채색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1946년에 한국화가 박래현(朴崍賢)과 결혼했고, 동양화단의 향후 진로를 모색하며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와 '미술운동과 대중문화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후 '자유 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군산으로 피난을 가 작품활동을 했으며, 1954년에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자리를 잡았다. 1955년부터는 홍익대학교 시간강사로 교육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2년부터 1974년까지는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냈다.
청주 운보의 집
1976년 박래현이 타계한 후에는 부부전 대신 개인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미술계 원로로서 은관문화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장애인복지에 관한 관심으로 1979년 한국 농아복지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직을 맡았으며, 1984년에는 청각장애인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했다. 1984년 충청북도 청원시에 '운보의 집'을 지어 거주하면서 주로 작품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2001년 1월 23일 사망하였고,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 1950년대 김기창 화백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하나는 '복덕방(1953-1955)'과 같이 정감 있는 거리 풍속을 서양 입체주의를 연상시켜 평면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김기창 화백의 '복덕방'
다른 하나는 '군마도(群馬圖)'처럼 비교적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졌으나 대담한 묵법으로 율동감을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기창 화백의 ‘군마도’
또, 1952년에는 조선을 배경으로 하여 토착화시킨 '예수의 생애' 연작(총 30편)을 제작했다.
김기창 화백 ’예수의 생애‘
그리고, 1960년대에는 추상화 단계의 동양화를 제작했다. '태양을 먹은 새(1968)'는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기창 화백의 ‘태양을 먹은 새(1968)
이외에도 1973년부터 세종대왕, 을지문덕, 김정호 등 위인 영정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만 원권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이 이에 해당한다.
김기창 화백이 그린 만원권 지폐의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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