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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30:1~5(899)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 2023. 6. 18.
침례교 목사와 선교사로 크게 활동하였던 프랭크 보어햄(F.W. Boreham, 1871-1959) 목사님의 저서 중,‘역사를 변화시킨 말씀(A Text That Changed the Worl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역사를 변화시킨 19명의 그리스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 역사를 변화시킬 정도로 기독교사에 뛰어난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1)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된 마틴 루터, 2)천로역정의 작가 존 번연, 3)청교도 혁명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 4)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였던 존 낙스, 5)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6)인도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캐리, 7)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8)신대륙 개척자 윌리엄 펜, 9)중국에 뼈를 묻은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10)위대한 부흥설교자 조지 휫필드, 11)현대부흥 운동의 아버지 찰스 피니 등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산 사람들입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이며 스코틀랜드 장로교단의 창시자였던 존 낙스(1513~1572)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존 낙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 1513-1546)라는 분이 있습니다. 존 낙스는 위셔트를 두고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죽음의 병 흑사병이 스코틀랜드에 창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위셔트는 흑사병이 만연한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리는 흑사병이 창궐한 마을로 들어가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불굴의 믿음과 용기로 엄청난 재앙 앞에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의 모습은 곧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됩니다.
죽음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위셔트의 이런 모습은 카톨릭 교회에게는 눈에 가시였습니다. 결국 1546년 카톨릭 종교회의에서 위셔트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사진), 성문 건너편 윈드 성벽 아래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사진)
낙스의 기록에 의하면, 위셔트는 자신을 불 태우고자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화형 집행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나는 그대를 용서한다. 친구여, 어서 그대의 할 일을 하게나!”라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화형을 당합니다.
조금도 굴함이 없이 화형을 당했다고 표현하지만, 화형이라는 것이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것이기에 총살형처럼 눈 깜짝할 순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형집행이 아닙니다. 사람을 불로 서서히 태워 죽이는 끔찍한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당당하게 화형 당했다’는 말은 구차하게 살기 위해 생명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고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입니다.
웨셔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죽음 앞에, 고난 앞에, 고통 앞에서 비굴하거나 비참해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귀하게 화형’을 당합니다. 신앙을 지키고자 모든 고난을 감수하였던 위셔트의 이런 모습을 두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본 받고자합니다. 그 결과 위셔트가 화형 당한 자리에 기념탑을 세웁니다.(사진)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조지 위셔트는 뛰어난 인품과 신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지 위셔트의 직분을 이야기 할때에 아무런 직분이 없는 신분이라는 점입니다. 스코틀랜드 종교 지도자였던 존 낙스와 달리 위셔트는 교회로부터 어떠한 직분을 부여받지 아니한 평범한 평신도의 신분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구분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 중에‘평신도(平信徒)’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서 평신도라는 말을 찾아보면 “교직이 없는 일반신도”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집사나 권사, 장로와 같은 직분을 받지 않는 사람을 두고 평신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교회에 처음 나온 초신자,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상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잘못된 오해를 만들기도 합니다.
평신도라는 말의 시작은 목회자와 성도를 구별하기 위한 용어인데, 1세기 말에 클레멘트(Clemens, +97/100)가 헬라어 ‘라이코스’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결단코 평범한 일반적인 성도를 의미하는 평신도라는 말이 낮추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평신도라는 이 말의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 중세 시대부터였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교황과 천주교사제들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평신도를 구분하여 하대(下待)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권한은 오로지 교황과 사제들에게만 주어졌고, 평신도는 그저 교황과 사제로부터 복종을 강요받는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은 평신도의 의미를 부각시켰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만이 중요한 자리인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위치와 신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평신도에게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역할을 부여할 정도로 평신도와의 협력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 저런 직분을 부여 받게 됩니다. 집사로 시작해서 권사와 장로로 나아가게 됩니다. 비록 집사와 권사 장로로 교회의 직분제가 나뉘어지지만, 우리 모두는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다 평신도라는 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게 충성 봉사하고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의 모습입니다.
비록 내가 교회에서 임명한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직분은 섬기고 봉사하라고 나에게 맡겨진 직분이지, 내가 존중을 받고 내가 높아지고 내가 군림하기 위하여 받은 직분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30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모든 성도들이 평신도와 직분자들을 포함한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죄로 인한 고난의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생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헤어 나올 수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3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반절에 보면‘주여. 누가 서리이까(who could stand?)’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사람이 없다는 반어법적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없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로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야 될까요?
1. 주께 부르짖는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1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여기의 ‘부르짖나이다(케라티카)’라는 말은 “도움을 청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어떤 때에 주께 도움을 청하였다고 말하나요? 내가 깊은 곳에 머물 때에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인생이 머무는 깊은 곳은 고난의 시기입니다. 역경의 때입니다. 내 인생이 환난을 당하면서 깊은 심연의 바다에 빠져서 한줄기 빛을 갈망하는 암울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생의 깊은 수렁 속에 내가 원하지 않아도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주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I cry to you, O LORD(오 주여. 내가 당신에게 울었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울었다는 말은 눈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였다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고난의 심연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의 하루 시간 중에서 기도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영적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알고 삼가 각성해야 합니다. 밥을 먹지 아니하면 배가 고픈 것을 알리어서 우리는 때를 맞추어 식사를 합니다. 그래서 몸의 기력을 보호하면서 최상의 컨디션이 되도록 알아서 유지를 시킵니다.
그런데 내가 고난의 심연 한가운데 깊이 빠져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에게 눈물로 부르짖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항상 나누는 말이, “요즈음 성도들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이다 보니 눈물로 기도할 기도제목들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걱정과 근심거리가 없는 행복한 생활이라면,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드려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에게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눈물로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절과 2절에서 연달아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고 고백합니다. “1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절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눈물의 부르짖음, 감사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고 하나님의 사랑과 응답을 이끌어 내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수석 부총재를 지낸 이희돈 (David Lee, 1959-2022)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어머니께서 비행기 표를 끊어 주시고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모아 놓으셨던 쌈짓돈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기대감으로 비행기 안에서 봉투를 열어 보니 돈은 없고 편지 한 장이 있었는데, ‘너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리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후 고난과 고비 역경이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그 후 이희돈 박사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세계무역센터에 들어가 아시아인 최초로 수석 부총재가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 장로님은 항상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이시고, 이 기도로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직장이나 일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릎 꿇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사람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자가 되고자 항상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내가 힘든 시기에 머물고 있다면 더 기도합시다. 힘든 시기로 접어든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면서 기도합니다. 나에게 큰 걱정과 문제거리가 없다고 생각되어진다면,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드려지는 기도를 더 풍성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2. 말씀 안에서 여호와를 기다리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5절,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성도는 어떠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여호와의 응답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정답이 나오는 말씀이 바로 5절 말씀입니다.
시편기자는‘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린다는 말은 ‘내 영혼만 여호와를 기다리고 내 육체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입니다. 내 마음만 하나님을 그리고 사랑하면 되고, 내 육체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로 이 문구를 잘못 이해하거나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원어에 충실한 의미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나니, 내 영혼이 기다리나니(I wait for the LORD, my soul waits)’라는 내용입니다. 내 육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내 영혼이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즉 내 육체와 마음이 모두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온전하고도 올바른 신앙은 ‘육체로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른 부부관계가 바로 이런 말입니다. 법적으로는 남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분명히 법적으로는 부부인데, 서로서로 남남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은 법적 아내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륜이고 간통입니다. 아내도 법적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상태를 가진 부부가 있다면, 올바른 부부의 모습이 아닙니다. 올바른 모습이란 내 몸과 마음이 모두 한사람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고백합니다. “내 몸이 여호와를 기다리고 내 정신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내 마음만 하나님을 믿고, 내 몸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따라가는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특히 하반절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라는 문구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단순하게 주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in his word I put my hope.(그의 말씀에 나의 소망을 두었다)’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내가 가지는 모든 소망을 두고 출발하였다는 고백입니다.
내 소망과 내 희망을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질과 세상의 안락함에 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말씀 속에 내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소망과 희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아니한 소망은 쉽게 무너지게 된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맙시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의 작가로 알려진 아동 문학가 권정생(1937-2007)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이 되어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지만, 너무 가난한 탓에 일직초등학교만 졸업합니다. 이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지만,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위기까지 이르게 됩니다.
5살 무렵 누나로부터 들었던 예수에 대한 것을 생각하여 이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20대에 잠시 부산에 있는 상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했지만, 결핵 때문에 안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안동에 있는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교회 종지기로 살면서 일평생을 보냅니다.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책이 많이 팔려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이라곤 마을 청년들이 지어준 두 평 남짓한 작은 집 한 채가 전부였습니다. 권정생 작가는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돈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죽은 후 책의 인세로 들어오는 돈이 한해에 무려 1억원 가까이 되는데, 전액을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평신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던, 종교인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역경의 순간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