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의 고백8_SF소설,연재,배신감,인간종,몹쓸인간,희망없음,야생닭,적대적,양계장탈출,정체성,침묵,찬반투표,정적,반대표

케이지에 인간 닭이 들어왔다며 앞장서 분노하던 파란의 모습이 생생했다. 발로는 파란이 인간 닭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차가운 감정은 분명 배신감이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정말 몰랐을까 파란이? 어떻게 자기 태생을 몰라?“아아악~~~~~~~~~~~!!!”파란은 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실체가 뭔지 몰라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속속들이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자신이 닭들을 괴롭히다 못해 무수히 살육한 인간 종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노랑에게도 속 시원히 터놓을 수 없는 인간인 게 더 답답해서 서러웠다. 금방 파란의 눈이 충혈 되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맞은편에서 파란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노랑이 가만히 말을 건넸다. “파란, 우리 여기 뜨자. 살 길은 이 길 밖에 없어.”“내가 불쌍해 보여? 노랑, 난 너와 다르다고. 네 동족을 괴롭히고 죽인 몹쓸 인간이 바로 나래.”“그래, 인간이라고 쳐. 그래도 우린 친구였잖아.”노랑이 파란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여긴 희망이 없어, 파란. 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고. 며칠이라도 야생 닭으로 살고 싶어. 도망치자. 발로, 너도 같이 갈 거지?”“미쳤어? 파란을 어떻게 믿어? 역겹다고!”일말의 반박도 할 수 없는 파란의 심정은 갈가리 찢겼다. 발로처럼 노골적으로 쏘아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가 파란에게 적대적이었다. 노랑의 충격이 제일 컸다. 둘은 눈빛만 봐도 이해할 만큼 마음이 통하고 서로를 아꼈다. 가끔 옳다 그르다는 시시비비로 기분 상할 때도 있지만, 노랑에게 중요한 것은 파란이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파란의 정체성이 닭이든 인간이든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지금 상황에서는 인간 종이란 사실을 수용할 수 없는 파란이나 파란이 인간 종이란 사실에 충격 받은 동료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 마음을 추스르고 나면 응당 양계장 탈출을 고려할 거라고 노랑은 기대했다. 며칠이 지나도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참다못한 노랑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우듯 경쾌하게 운을 뗐다.“아아아, 잘들 주무셨나요? 관절은 시큰거리며 욱신거려도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떴습니다. 톡 까놓고 태생을 모르는 파란이 잘못입니까. 파란이 우리를 위해 의리를 지킨 것을 생각해야죠. 음, 진짜 본론을 말할게요. 우리, 여기서 비참하게 죽느니 죽을 각오로 도망칩시다. 며칠 침묵하셨으니 웬만큼 생각해 보셨을 겁니다. 이제 찬반투표로 빠르게 결정하십시다. 케이지에 머리를 내밀면 찬성, 반대면 케이지를 흔드세요. 근데 케이지를 마구 흔들어대면 다들 위험해진다는 건 아시죠? 양계장주가 개입하는 건 되도록 피합시다. 하하핫.”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사료가 공급될 때처럼 일제히 케이지에 머리를 내미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다행히 반대 표식인 케이지를 흔드는 소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