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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성당 대구지역 성지순례
2018.3.20.(화요일)
꽃샘추위가 대단한 날
허남술 세바스티아노 기록함
나는 이번이 무거성당이 주관하는 국내 성지순례 중 두 번째 참여이다.
첫 번째는 전주지역이었다. 그때도 배우고 느낀 바가 적지 않았지만 이래저래 기록을 놓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기억에서 달아나기 전에 그 개요라도 기록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한티 순교성지
옆에 자매님이 ‘한티’를 자꾸 ‘살티’라 하신다. 그 옆에서 또 한 자매님이 ‘살티’는 우리 신부님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언양이라고 바로 잡으신다. ‘한티’는 ‘큰 고개’ 혹은 ‘큰 재’일 터인데 ‘살티’는 왜 ‘살티’가 되었는지 베드로 신부님에게 여쭈어 볼 일이다.
한티는 정말 깊고도 큰 재이다. 대구 팔공산 기슭을 한참 돌아들어 산 중턱의 막다른 골목에 난데없이 비까번쩍한 숙소들을 지어 놓았다. 대구교구에서 신자들의 피정을 위해서 지어 놓은 것이란다. 이곳이 한티다.
병인박해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은 많은 교우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옮길 수도 없어서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티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당시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다. 그 중에도 당시 공소 회장이던 조 가를로와 부인 최 바르바라, 동생 조아기 그리고 서태순 베드로의 신원만 밝혀졌고 그 외에는 신원조차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일행은 산 중턱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을 신부님을 필두로 하여 산책했다. 뒤에 따라가는 자매님들은 영문도 모르고 신부님이 십자가의 길을 너무 빨리 하신다며 절을 하는 둥, 기도를 하는 둥, 일처를 놓치고 왔다며 안타까워하는 둥, 그냥 정신없이 따라 가기에 바쁘다.
정말 시간이 한 나절이라도 주어진다면 여기서 천천히 ‘십자가의 길’ 기도도 제대로 올리고 이곳 신부님에게 설명도 듣고 이 공기 좋은 곳에서 느긋이 산책도 즐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마침 이곳에 근무하시는 한 분이 ‘어디서 오셨느냐? 오늘 몇 명이나 오셨느냐?’ 고 묻고 설명을 들을 시간이 있느냐고 하신다.
자매님들은 성지순례 노트에 확인 도장 찍느라 바쁘고, 신부님은 갈 길이 바쁘다며 길을 재촉하기에 바쁘시다.
근간에 이 심심산골에 큰 봄바람이 지나갔는지 수십 년 묵은 아름다리 소나무 등걸이 통째로 부러져 나 뒹굴고 있다. 그런 나무가 눈에 띄는 것만도 수십 그루다. 그 모양이 흡사 모진 박해로 순교한 분들의 모습을 깨우쳐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신나무골 성지
산나무골이 아니고 신나무골이다. 신자들이 나무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여기도 칠곡군이다. 그 중에 지천면이다. 이곳은 한티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중 한티로 피신한 대부분의 신자는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1885년 로베르 신부가 이곳에 사제관을 짓고 정착했다. 이로서 대구지역에 천주교가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었다.
우리는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역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했다. 꽃을 시샘하는 봄바람이 심술을 부렸다. 미사 제구가 후루룩 바람이 날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여러분, 순교한 분들에 비하면 이런 바람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요! 목숨을 걸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마침내는 하나 뿐인 목숨마저 내 놓아야 했던 신앙 선조들의 삶을 되새겨 보는 오늘 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얼마나 좋은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도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의 강론이 꽃샘바람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남산 천주교 타운
대구 남산은 거대한 천주교 타운이다. 여기 대구 가톨릭 대학과 대구 신학대학이 있고, 성모당과 관덕정 순교성지와 오랜 시절 주교좌 성당 역할을 담당한 ‘계산 성당’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여기에 바오로 수녀회도 함께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점심 식사하러 가는 길에 얼핏 본 성직자 묘역이 가슴에 남았다. 언젠가 신부님 강론 중에 나온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라틴어 표석이 박힌 대문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읽을 수도 없고 해석도 불가하니 신부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작은 표석일 뿐이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생명이니 오늘 죽지 않고 내일 죽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라. 목숨이 있는 날까지 다만 최선을 다해 하느님을 공경하고, 교우들을 사랑하라.”는 삶의 지침을 살아계신 성직자들에게 주려고 새겼을 것이다.
내가 감동에 겨워 그 대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박 카타리나 자매님이 묘역을 둘러보고 나오신다. 내가 잘 아는 척하며 그 어려운 라틴어를 금방 해석하니 신통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신다. 남의 속도 모르고...
나는 그걸 사진으로 찍었다. 라틴어는 발음이 단순하니 사진을 보고 읽을 수는 있으려니 하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지금 확인해 보니 역광이라서 까맣다. 하나도 안 보인다. 오히려 다행이다.
성모당(성모님의 집)
성모당은 남산 천주교 타운의 가장 높은 곳에 대구대교구의 제1주보이신 루르드 성모님을 모신 곳이다.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님께서 루르드 성모동굴과 똑 같이 만들어 성모님을 모셨다고 한다. 이로부터 성모 신심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데 성모당이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지금은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국적인 성모 신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나는 부끄럽게도 이날 처음으로 이 성모당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바람불고 추운 날씨에도 각처에서 오신 신자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묵주기도에 여념이 없다.
우리 일행은 촛불을 봉헌하는 것으로 참배를 끝내고 다시 한정된 시간 탓에 관덕정 순교성지를 향해야 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묘연하니 대구 신자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기도를 하려고 올라왔다가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고 한참을 설명하던 자매님이 ‘아무래도 안 되겠심더. 저하고 같이 가입시더’하고 앞장을 서신다. 뒤에 또 한 분은 아예 친구가 온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안내하러 오신 분도 계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해 4월 신부님과 함께하는 ‘스페인 포르투갈 성지 순례길’에 루르드 성모님에게 들렀다. 딱 알맞은 경당에서 은총이 가득한 미사도 봉헌하고, 감동적인 저녁 촛불행렬도 참여하고, 한나절을 족히 기다려 잊지 못할 침수도 하고, 기적수도 마음껏 마셨다. 기적처럼 눈을 씻어 눈병을 낫게 하고, 그 물을 마셔 장염이 나은 효험도 보았다. 여기서 다시 루르드의 성모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남달랐다.
관덕정 순교성지
관덕정은 대구대교구 제2주보이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관덕정은 옛 이름이 관덕당이었다. 무과 시험을 관장하고 훈련시키던 병영이었다. 전국의 순교자들이 많은 수가 이처럼 군대 연병장에서 참수되어 순교에 이르렀다. 이윤일 요한 성인도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다른 순교자 6명과 함께 순교하셨다.
안내를 맡은 분인지 할아버지 교우 한 분이 우리 일행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려고 열정을 보이셨다. 그 분의 말이 재미있다.
“나보다 더 많이 순교의 역사를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보다 더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유해가 안치된 곳에 들어가 직접 알현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기다리느라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은 경북 상주 분으로 잡혀서 떠나올 때 이미 순교할 것을 각오하고 뒷사람들에게 후일을 부탁하고, 죽기 직전에도 칼을 든 망나니에게 엽전이 든 자루를 건네며 ‘내가 이미 황천길에 들어섰으니 돈은 두었다 어디에다 쓰겠소. 이 돈을 드릴 터이니 단칼에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요한 성인의 믿음과 강인한 의지가 하느님 앞에서 길이 빛날 것이다.
계산(桂山) 성당
계산 성당은 1899년에 처음 봉헌된 성당이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성당이란다. 2016년 4월까지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지금은 그 짐을 범어성당으로 넘겼다. 성전의 낡고 오래된 건물에서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오랜 역사의 서기가 느껴진다. 명동성당 설계도에 따라 명동성당을 지은 사람들이 그 규모를 줄여서 지었다고 한다.
성당 건너편의 청라언덕에 높이 솟은 제일교회가 돋보인다. 최근에 지어진 석조 건물로 서양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외양을 하고 있다. 청라언덕은 푸른 담쟁이가 덮인 언덕이란 뜻으로 우리 가곡 ‘동무생각(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으로 유명해진 언덕이다. 대구시가 기획한 관광 상품인 ‘근대路의 여행’ 안내에 따르면 초기 선교사들의 사택이 계명대학이 소재한 이 언덕에 있었는데, 모두 붉은 벽돌집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인상적이어서 청라(靑蘿)언덕이 되었다고 한다. 일명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그 언덕에 보란 듯이 거대한 개신교회를 세웠다. 계산(桂山) 성당의 오랜 뿌리에 저항이라도 하듯 그 자태가 자못 도발적이다.
그래도 계산 성당은 전혀 기죽지 않고 그 품위와 자존을 오롯이 지키고 있다. 계산 성당으로 인해 100년 주교좌성당으로서의 고고한 자태를 대구 교민들은 가슴에 묻고 산다.
성당 내부에는 십자고상 바로 뒤에 성모상을 모신 것이 특이했다. 솔직히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생소함이었다.
복자성당
복자성당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여기서는 신부님께서 직접 설명을 하셨다. 이 세 분이 바로 언양 살티에서 순교한 김영제 베드로와 더불어 간월재 아래 죽림굴에 숨어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분들이었다. 김영제 베드로가 먼저 잡혀 경주 감영과 대구를 거쳐 서울로 이송되니 뒤에 남은 사람들은 여기서는 더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번에는 지금의 경북 산내면 단석산 아래 진목(眞木)리-참나무골-로 숨어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1868년 이곳까지 포졸들이 들이닥쳐 결국 울산 병영의 장대벌에서 세 분은 순교하였다. 처음 이 분들의 묘지가 울산 동천강 가의 지금 병영 순교지 성당 어름에 있던 것을 그 후손들이 찾아 진목리로 모셨고, 대구교구가 주관해 1932년 감천리 교회 묘지를 거쳐, 1973년 시복 시성운동의 일환으로 이곳 복자성당으로 이장을 한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먼저 붙잡혀 간 김영제 베드로는 죽기 직전에 나라에 경사가 있어 요행히 풀려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장독(杖毒)으로 인해 결국 몇 년 살지 못하고 결국 순교하고 만다.
이를 정리하면 병영순교자 성당과 대구의 복자성당 그리고 산내의 진목정은 모두 같은 분들을 모신 성지가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 곳을 정해 성지를 정하라면 당연히 울산 병영이 그 으뜸이 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다.
범어성당
2016년 5월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으로 봉헌된 성당이다. 교구 100주년 기념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성당이다. 그래서 그 건물의 길이가 100m란다. 자연의 언덕을 최대한 살려 지어 우람하고 묵직하면서도 경건하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다.
차에서 내려 바로 2,500석 규모의 대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지하 3층에도 500석 규모의 프란치스코 성전이 있다. 지하 3층인 줄 알았는데 이곳도 한 쪽으로 신자들이 1층처럼 바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있다. 반 지하 건물인 격이다.
그냥 대충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머리를 심하게 파마를 한 형제분 한 분이 헐레벌떡 뛰어 오신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데도 4층으로 잠시 올라가시라고 명령하듯 한다. 실제로 우리 여정은 아직 한 곳이 더 남았고, 어디 적당한 곳을 찾아 ‘십자가의 길’기도도 봉헌할 계획인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4층에서 내려다 본 대성전은 더욱 아름답고 웅장했다. 갈 길이 바쁘신 신부님의 심정을 이분은 전혀 개의치 않고 별 쓸모없는 농담으로 일관했다. 설명을 제대로 들으려면 한 시간 반이라야 한단다. 참다못한 신부님께서 ‘쓸 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요점만 딱딱 얘기하세요.’라고 하신다. 그래도 자신이 하고픈 말을 다 한다. 넉살이 보통이 아니다. 그래도 형제님으로 인해 파이프 오르간이 30억짜리라는 것과 그 우아한 소리를 들으려면 주교님께서 주례하시는 주일 10시 반 미사에 참여하면 된다는 팁을 얻었다.
진목정 성지
단아한 진목 공소를 생각하며 산내면 깊숙한 산골을 오르고 또 오른다. 산골이 끝날 만한 곳에 공소는 간 곳이 없고 웅장한 성당이 우뚝하다. 아직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어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이어간 곳이다. 여기에 묻혔던 세 분 순교자의 유해는 대구 복자성당으로 옮겨 가고 여기는 허묘만 남아 있다. 그래도 그 분들의 믿음의 흔적이 이 골짜기 참나무 하나, 돌 하나에 모두 서려 있어 이곳을 다녀간 신자들은 잠벌까지도 용서 받는 전대사를 받는다고 한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허묘 앞에서 우리 순례단은 신부님을 필두로 주모경을 바치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했다.
이곳 진목정에 순교자의 맑은 영혼 같은 어스름이 3월 하순의 차가운 눈보라에 묻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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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거성당 4번째 국내성지인 대구성지순례지를 하나도 빠트림없이 기록해주시고ᆢ그때그때 느낌까지~~
시간이 흐르면 기억 저편에서 어디를 갔었는지
가물가물 할때가 있는데ᆢ
잊지않게 언제고 볼수있게
홈피에 남겨주신
세바스티아노형제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