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이 죽었고, 이후 핍박의 강도가 더 강해졌으며 신자들이 이를 피해 흩어져 교회가 축소되었으니 세상 힘이 승리한 듯하나 결코 그렇지 않다. 흩어진 자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해 복음이 확장되었으며, 남은 사도들은 세상 말로 ‘정예 멤버’만 남았으니 오히려 더욱 분명한 색깔로 어떠한 희생도 각오할 기세가 된다.
복음 전파 사명의 말씀 중에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는 말씀이 유명한데, 말씀이 실현처럼 사마리아에는 빌립이라는 인물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파하였다. 빌립의 사마리아에서의 선교활동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사도들이 와서 빌립과 역할을 이어받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령이 임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은 왜 그렇게 하셨나? 충실히 복음을 전파하던 빌립의 시대에는 왜 성령이 임하지 않았나? 사도라는 직분 때문일까? 빌립의 가치나 평가를 낮추려는 의도였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확장’, ‘질서’, ‘위대한 순종’, ‘도전과 응전’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먼저 ‘확장’이다, 사도들이 사마리아라는 선입견을 가진 지역과 민족에게 접근함으로써 그들을 품으려는 ‘화해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은 철벽같은 적계심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복음은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가 화합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의 사마리아 입성과 사역의 인수가 설명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질서’ 측면이다. 일반 신도인 빌립의 일을 사도들이 마무리하는 양태이다. 사도들의 사역이 일반 신자의 사역보다 우월해서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교회가 그 사역을 공식적으로 ‘보증’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직분을 너무 과대 또는 너무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혹시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먼저 스스로 교만해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은 직분에 메이지는 않지만, 질서를 존중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본질은 형식에 담는다.’라는 말씀이 갑자기 떠오른다.
세 번째는, ‘위대한 순종’이다. 빌립이 인간적으로는 억울하거나 힘겹게 여겨질 수 있는 새로운 임지로 불만 없이 떠나는 모습에서, 그의 사역이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일을 한다는 사람에게서 있을 수 있는 내밀한 공명심이나 기득권 주장 등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하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사람과 하나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꾼이 되는 사람이 있다. 빌립은 전자의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전과 응전’이다. 본문에 마술사 시몬이 나온다. 그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었지만 사도들의 특별한 능력을 탐했고 돈으로 그것을 사려했다. 그가 가진 영적 능력과 돈 등으로 그는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일을 추구했다. 이러한 시몬의 마음을 파악한 베드로가 그에게 가혹하게 대한다. 그는 결국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매우 위험한 인물로 전락한다. 우리도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우리에 대한 비난에 예민하기보다 우리에게 그들이 지적하는 것들이 유효한가, 실제로 고칠 것이 있는가가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그들의 비난을 그저 우리를 점검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여기면 된다.
말주변이 없지만 선교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화가 고흐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선교회로부터 겨우 탄광지역으로 사역지를 받았다. 그런데 말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자 몸소 막장에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사랑을 실천한다. 나중에 누추한 고흐의 외적 모습을 본 선교회는 그가 교회의 체면을 깎고 있다고 판단하여 선교 자격을 박탈한다. 고흐는 슬픈 그의 감정을 아름다운 전경 속에서도 유일하게 빛을 내지 않는 교회를 표현한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그림으로 표현하다. 또한 본훼퍼의 찬양, ‘선한 능력으로’는 그의 온몸으로의 복음 실천이 반영된 은혜로운 찬양이다. 세상에는 노골적으로 ‘돈, 쾌락,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내밀하게 세상의 그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시몬과 같은 사람도,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들의 사역에 충실하는 빌립, 사도, 고흐, 본훼퍼와 같은 사람도 존재한다. 너, ‘000!’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