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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1:12-14(500) “그 후에야 이루어진 기도” 2024. 7. 6
장시간 해외로 운항하는 국제선 비행기이던, 1시간 정도 운항하는 국내선 비행기이던, 비행기를 타게 되면 이륙하기 직전이나 하강하기 직전에 꼭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휴대폰이나 게임기와 같은 전자제품을 모두 끄라’는 말을 합니다. 아마도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하는데 통신상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서 모든 전원을 차단해 달라는 방송을 합니다.
제가 그 동안 필리핀으로 몇 번 집회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필리핀까지 비행시간은 약 4시간 정도입니다.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4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비행하는 도중에 보려고 제가 가진 아이패드에 영화를 몇 편 넣었던 적이 있습니다.
불이 꺼진 컴컴한 기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신나게 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비행기 실내등이 모두 켜지고, 갑자기 승무원이 곁에 서서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승무원이 하는 말은 ‘제가 사용하는 아이패드를 중지하라’는 신호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제가 영화 보는 것에 빠져 있는 사이에 비행기가 이미 하강할 준비를 하였고 “기내에 모든 전자기계를 꺼 달라”고 안내 방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헤드폰 끼고 영화 본다고 그 방송을 무시해 버렸고, 마지막으로 승무원이 기내를 돌아다니며 점검할 때에 내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졸지에 제가 아주 무례한 사람으로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지하철에서 이어폰 쓰고 음악이나 영화 보다가 안내 방송을 놓치고, 내려야 할 곳에 내리지 못하고 지나쳐 내리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주 간단한 일례지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가 더 크면 들어야 되는 더 중요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가 지나치게 크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적인 부분으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에 도취되어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외치는 어떤 소리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만 듣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만 듣고 하늘의 소리를 듣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특히 <기도>를 이야기 할 때에는 더 그렇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아니 대부분의 성도들이 ‘기도는 내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한때 기도의 본질을 알지 못했을 때에 생각했던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내가 들을 때에 하나님은 더 나를 주목해 보신다는 점입니다.
철학자 키엘 케고르도 같은 의미의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도는 나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인데, 많은 사람은 듣지는 않고 자신의 말만 하고 자신의 주장만 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응답받는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착한 기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눅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눅 18: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차이점이 무엇이에요?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철저하게 자기자랑이고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가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기도입니다.
반대로 세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세리의 기도는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자랑이나 보고가 아닙니다. 자기가 다 결정해놓고 하나님께 허락해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서울 연동교회 원로이신 이성희 목사님(부친 이상근목사)이란 분이 계십니다. 비록 교단은 우리와는 다르지만, 이 분이 “기도”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신 내용 중에 너무나 좋은 부분이 있어서 따왔습니다. 현재 학문으로 기도를 비유하여 말할 내용입니다. “기도는 <수학>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한 횟수가 기도의 힘이 아니다. 기도는 <수사학>이 아니므로 웅변 잘하는 것이 기도의 힘이 되지 않는다. 기도는 <음악>이 아니므로 음성의 아름다움이 기도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논리학>이 아니므로 논리 정연한 그 방법이 기도의 힘이 아니다. 마음의 열심, 강청하는 열정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요소이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나요? 내가 기도를 드리기 이전에 어떤 모습과 어떤 자세를 먼저 하나님에게 보여야 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자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이 부분을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왕이 된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가족묘에 이장해 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요나단과 다윗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사울 왕은 살아 생전에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왕이었습니다.
그런 사울 왕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묘에 이장해 주는 다윗의 선한 행실, 이런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깨닫고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진정한 화해 후에 들으시는 기도.
21:12에는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라고 합니다. 14절에는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구절인가 하면, 불레셋과 전쟁을 치르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시신이 객지에 방치된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비참하게 객지에 떠돌고 있는 사울 왕과 요나단의 유해를 정성껏 수습하여서 가족묘에 합장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죽어 버린 사울 왕에게 베풀 수 있는 진정한 화해의 표시입니다. 요즘에 사과를 하든, 용서를 빌든 진정성 얘기를 많이 합니다. 아무리 사과를 거창하게 해도 진정성이 없어 보이면 사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얼마 전에 SBS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모든 국민들의 공분을 산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부산 서면에서 20대 여성을 건장한 남성이 돌려차기로 기절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몹쓸 짓을 해 버립니다. 가해 남성은 국민적 공분을 사게 되어 높은 형량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형량을 줄이고자 사과문을 수십 장 쓰고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에 피해자 여성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대법원인 1심법원보다 더 높은 징역 20년 형을 선고해 버립니다.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 법입니다. 내가 잘못하였고 실수하였다면, 진정성 있는 사과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살펴보십시다. 사울왕은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도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부하들을 시켜서 다윗을 살해하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살인청부업자를 시켜서 다윗을 살해하도록 교사했다는 말입니다. 이토록 다윗에게 사울왕은 악연 중에 악연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감정이 없습니다. 다윗의 부하들마저 나서서 사울을 죽이자고 건의할 때에도,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악연이었던 사울 왕이 죽었습니다. 삼상 31:10에 보면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라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죽어 버린 사울왕과 왕자들의 시체를 성벽에 못 박아 건 이유는, 사울왕의 가문에 수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죽어서도 비참한 수치를 당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 시신을 수거합니다. 그리고는 사울왕의 가족묘지인 <기스의 묘>에 이장을 하면서 사울왕이 안식하도록 모든 배려를 다하는 내용입니다.
사울과 다윗과의 끈질긴 가문의 악연이 다윗의 선행으로 끝나 버립니다. <가문의 악연>이라고 말하면, 옛날 서부영화나 홍콩 무술영화의 단골 주제였습니다. 대부분의 줄거리가 대등소이합니다. 악당들이 가정에 들어와 가족을 다 죽입니다. 이 참상의 와중에 집의 어린 아들 한 명이 도움을 받아 살아납니다.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 본 아들은 절취구심 이를 악물고 심신을 연마합니다. 서부영화라면 총 쏘는 연습을 하고, 중국 무술영화하면 무술을 닦습니다.
그리고는 장성하여 산에서 내려와 원수에게 복수하러 갑니다.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은 원수를 물리칩니다. 서부영화는 복수 후에 말을 타고 황야로 사라지고, 중국 무술영화는 칼을 차고 먼 길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영화는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 가문의 악연이란 언제나 세습되는 갈등입니다. 지금도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바로 가문의 악연입니다. 왜요? 이런 가문의 악연이란 인간사에 흔히 있는 일이고,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삼하 3:1에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합니다. 이 한 구절이 초기 이스라엘의 최고 명문가인 두 가문이 어떤 사이인가를 여실히 말해 줍니다. 사울의 가문과 다윗의 가문이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상극인 사울의 가문과 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불화는 조상의 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조상의 묘, 특히 아버지의 묘를 파헤쳤다고 가정해 보세요. 아마 가장 분노하고 그 사람을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형벌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일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죄인의 시체를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자손들에게 가장 수치스런 벌입니다.
반면에 가문이나 후손에게 가장 큰 호의는 묘소를 잘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유해를 잘 보존해 주는 것은 가장 고마운 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지난 6월에도 한국전쟁 당시에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미국으로 송환해 주겠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유해를 고향땅에 안장하도록 배려한다는 것은 전사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울의 집은 망하고 다윗의 집은 흥하였다고 합니다. 잘 되는 쪽에서, 흥한 쪽에서 망한 쪽을 향하여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해야 합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화해가 됩니다. 다윗 왕은 자신이 먼저 사울 왕의 후손에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는 사울왕과 요나단의 유해를 거두어 사울왕의 가족묘지에 이장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 왕의 사랑과 화해의 모습이었고, 이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고 다윗의 기도를 들어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 후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화해가 가능할 때, 이때 비로소 하나님은 귀를 열고 기도를 들으신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2. 화해를 온전히 실천한 후에 들으시는 기도.
14 하반절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주 중요한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1)행하니라. 2)들으시니라.
1)행하니라- 다윗 왕의 명령을 들은 신하들이 사울과 요나단의 유해를 가두어 가족묘에 이장해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왕의 명령을 따라 다 이행했다는 말입니다.
2)들으시니라 - 온전한 화해를 다윗이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다윗의 기도를 들었다는 말입니다.
“케빈 베이컨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혀 서로를 모르는 두 사람이라도 6.6명을 거치면 연이 닿는다는 학설입니다. 생면부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6단계 만 지나가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만난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실험했습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외국에서는 6.6명을 지나서 만나지만, 우리나라는 혈연과 지연으로 서로 얽힌 부분이 많아서 평균 4단계 만에 연이 닿는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4단계만 거치면 나를 아는 사람이 등장한다니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원수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는 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화해의 당위성을 더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은 입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용서는 입술의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화해는 입이 아니라 행함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행함입니다. 실천을 통하여 진정성이 나타납니다.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마음이 표현됩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단어 하나를 더 넣어야 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해야 힘이다”. 실천하지 않는 앎은 진정한 배움이 아닙니다. 실천이 없는 화해는 하나님이 절대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의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개혁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수시로 의견이 충돌되고,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스위스의 산에 오르고 있을 때, 두 마리의 염소가 매우 좁은 다리 위에서 서로 노려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다리 중간에서 두 마리가 비켜주지 않고 오도 가도 못하고 한 판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머리 박치기 싸움하면 두 마리다 아래로 떨어지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덩치가 크고 쎄게 보이는 염소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납작 엎드립니다. 엎드린 염소보다 왜소해 보이는 다른 염소는 엎드린 염소의 등을 밟고 유유히 다리를 건넙니다. 두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악수를 나눕니다. 염소에게서 겸손과 양보를 배운 것입니다. 이 후에 더 가일층 종교개혁을 힘을 모아 성사를 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 염소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들이 박는 내 고집대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본성으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응답합니다. 가로 막힌 담을 다 허물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더 들으시는 법입니다. 무더위와 장마로 짜증나는 7월이지만, 화해와 용서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큰 복을 받아 누리는 7월의 모든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