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숙종비 인현왕후
누명 쓰고 쫓겨나면서도 자비심 잃지 않았던 인욕보살
희빈 장씨 중상모략으로
억울하게 폐위돼 쫓겨나
궁궐 안팎서 눈물로 한탄
“인간이 장수하고 단명함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왕후는 그 드높은 덕(德)에도 명이 짧았으니
그 이치가 어찌 이리도 냉혹한가.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도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왕후께서는 험하고도 위태로운 사태를 몸소 겪으시고도
품위와 덕을 잃지 않으셨다.
옥과 같은 행실에는 허물이 없었고 죽은 뒤 그 가치가 더욱 드러나니
신하와 백성이 진실로 찬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이조판서 이여)
숙종 27년(1701) 8월14일. 인현왕후 민씨가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35세. 당시로서도 이른 죽음이었다.
왕후를 떠나보낸 숙종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숙종은 친히 왕후의 행록을 지어 덕행을 기렸으며
이조판서 이여가 그 후기를 지어 바치며 왕의 슬픔을 위로했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왕이 과도히 슬퍼하시며
난간을 두드리고 하늘을 우러러 방성통곡하시니
용안에 눈물이 비 오듯 흘러 용포가 물 부은 것 같이 젖었다”고 전한다.
인현왕후의 죽음에 슬퍼한 것은 비단 왕실 뿐만이 아니었다.
온 나라가 애도의 물결에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녀들이 서로 머리를 부딪혀 왕후의 뒤를 따르고자 했고,
마을마다 곡성이 진동하여 귀신이 우는 듯했다.
조정과 만백성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 했으며
그 슬픔이 깊은 산속의 험한 골짜기에까지 이르렀다.” (인현왕후전)
왕과 조정 신하들은 물론이고 궁녀와 산골짜기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왕후의 죽음에 탄식하고 슬퍼했던 것이다.
하물며 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비통해 했다니
그 슬픔의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인현왕후가 조선의 국모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죽음에 뒤따른 깊은 애도는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다.
더욱이 인현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한 왕비였다.
유교이념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에서
왕의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는 것은 왕비로서 치명적인 결격사유였다.
그럼에도 인현왕후는
왕과 조정에서부터 민초들까지 널리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조선 19대 왕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또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듯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인현왕후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즉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조선시대 손꼽히는 유명인물로 수차례 드라마로도 제작됐으며,
대체로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탐하는 악녀로 그려진다.
인현왕후는 바로 이 장희빈과 숙종을 사이에 둔 연적인 동시에
그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은 온갖 교태와 계략으로 숙종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또한 인현왕후를 중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결국 숙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죄 없는 인현왕후를 폐서인하도록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시대 손꼽히는 악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숙종이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숙종 21년 5월2일의 기록이다.
폐비의 이유는 인현왕후가 투기로 인해 간특한 계략을 꾸몄다는 것.
그러나 사관은 기록에 이례적으로 사견을 달아 숙종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장희빈의 계략에 넘어간 왕의 어리석음을 에둘러 비난한다.
“삼가 살펴 보건데 중궁이 왕후의 자리에 오른 10년간
후궁의 투기와 이간이 있어 폐출의 액운을 당했다.
그러나 왕비의 언동에 한 가지도 지적할 만한 잘못이 없으며
그 행실에도 결함이 없음은 신하와 백성이 모두 알았다.”
억울하게 폐비 전교를 받았음에도 인현왕후는 담담했다.
폐비 소식을 듣고 입궁한 공주들이 눈물 흘리고 슬퍼할 때도
오히려 “화와 복이 하늘에 있거늘 누구를 탓하겠는가”라며 주위를 위로했다.
평온한 안색에서 원망과 분노, 슬픔의 기색도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 그녀라고 없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사대부의 여식으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일찍이 나라의 국모 자리에 올랐던 그녀이기에
가장 고통스런 순간마저도 감정을 절제해야 했던 것이다.
친정의 사당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비통한 눈물을 쏟아냈다고 하니
담담함 이면에 숨겨진 그 속내가 더욱 가슴 저린다.
왕후의 옷을 벗고 무명옷으로 갈아입은 인현왕후는
궁녀들이 눈물로 배웅하는 가운데 흰 가마를 타고 궐을 나섰다.
왕후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은 백성들이 지켰다.
선비와 유생들이 곡을 하며 뒤를 따라 넓은 길을 가득 메웠다.
한 유생은 폐비 전교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 가던 중 목숨을 잃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민심에 주눅들 장희빈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형왕후가 폐서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후의 빈자리를 꿰찼다.
중인인 아버지와 여종인 어머니를 둔 신분적 한계를 넘어선
파격적인 왕후 책봉이었다.
충신들의 반발도 숙종의 결단을 막지 못했다.
청암사서 3년간 기도하는 삶
원망·고통도 불심으로 극복
5년 뒤 복위…자애로움 칭송
한순간에 서인으로 전락한 인현왕후로써는 속된 말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씨가 희빈의 직위를 받은 것조차 인현왕후의 배려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과거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몹시 미워해 그녀가 숙종의 총애를 받자 친가로 내쫓았다.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해 주상을 꾀기 시작하면
국가의 화가 됨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이 사실을 알고 명성왕후에게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민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미안한 일로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고 청했다.
명성왕후는 “내전이 그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끝내 허락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며느리인 인현왕후의 온화한 성품을 지극히 아꼈던만큼,
장희빈이라는 존재가 훗날 고충이 될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시어머니의 강경한 뜻에도 장희빈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에게 장희빈을 불러들일 것은 재차 권했고
이에 그녀는 궁궐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장희빈에 대한 궐내 인식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실록만 보더라도 장희빈에 대한 비판적인 기록이 적지 않다.
임금이 장희빈을 희롱하려 하자 인현왕후에게 뛰어 들어와 기색을 살피는가 하면
시키는 모든 일에 교만한 기색으로 공손함이 없었다는 등의 갖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현왕후는 희빈을 미워하거나 벌로 다스리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자식이 없음을 염려해 장희빈을 위한 약을 내렸으며
희빈이 원자를 잉태하자 크게 기뻐하며 직위를 내릴 것을 권했다고 한다.
또한 희빈이 낳은 원자를
자식과 같이 아껴 인현왕후를 친모보다 더 각별히 따랐을 정도였다.
장희빈을 향한 배려가 이와 같았음에도
‘투기’를 이유로 왕후자리를 박탈당했으니, 그 원통함이 오죽했을까.
그러나 인현왕후는 달랐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고고한 품성을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폐서인의 이유를 본인의 부덕에 돌리고 속죄와 참회의 삶을 살았다.
갈수록 표독해지는 장희빈에 지친 왕이 그녀를 다시 부르고자 할 때,
인현왕후는 안국동 사가에서 아름다운 옷과 음식을 꺼리고
찬방에서 잠자기를 피하지 않았으며 마당에 풀조차 베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고 한다.
죄 없이 쫓겨난 설움에 빠져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으며
원망하는 마음도 일체 비치지 않았다. 오직 왕실에 누를 끼친 것에 대해
스스로 참회하며 인욕의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남다른 면모,
그 이면에는 바로 깊은 불심이 있었다.
홀로 감내하기 힘든 크나큰 고통 속에서
부처님께 의지해 고난을 극복할 원동력을 찾았던 것이다.
그녀는 서인이 된 채 첩첩산중의
김천 청암사에 몸을 의탁해 3년간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인현왕후가 어떤 인연으로 청암사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심적 고통을 내려놓고자 부단히 애썼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비로운 부처님만이 그녀의 속내를 알고 다독여줬을 터다.
그녀가 청암사에 머물며 복위를 발원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적지 않다.
궐을 떠나 서인으로 살았던 5년의 시간은 어찌됐던 그녀에겐
홀로 감내하기 어려운 인고의 시절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에 남겨진 그녀의 남다른 성품에 비추어 보건데
인현왕후는 아마도 자신의 복위보다
모든 욕망을 내려놓는 수행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대어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
또한 그로인한 고통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희빈을 향한 원망의 마음조차 비워내지 않았을까.
어쩌면 신분의 한계가 있었기에 더욱 권력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희빈을 가슴깊이 이해하고 그 죄마저도 용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현왕후를 다시 찾은 숙종은 그녀의 태도에 깊이 탄복하고,
진심어린 친필편지로 복위를 명한다.
폐위됐던 왕후의 복위는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인현왕후 역시 5년간 치러야 했던 고통의 세월만큼 부쩍 성장했다.
그녀는 궁궐로 돌아온 후에도 지난 과거를 일체 내색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인정스럽고 자애로운 태도로 분별없는 사랑을 베풀어 궐 안팎으로
그에 대한 칭송이 높았다.
아마도 인현왕후는 이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수행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녀가 병환이 깊어 죽음을 앞두자 시녀들에게 향을 피우도록 하고
몸을 정갈히 한 채 마지막 인사를 남긴 것조차
마치 생사를 초월한 고승의 마지막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아무런 죄 없이 한순간에 폐서인됐다가 다시 왕후의 자리로 돌아온 인현왕후.
그녀는 역사상 유례없는 격동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다.
극단적인 변화의 소용돌이로 점철된 삶 속에서
인생사 희로애락(喜怒愛樂)을
가장 극심하게 겪었던 비운의 왕비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희로애락의 굴레를 남다른 불심과 성품으로 뛰어넘었던
그녀의 삶은 ‘비운’이라는 세속적 표현에 매몰시키기엔 아쉬움이 많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모진 세상의 풍파 속에도
인욕 바라밀을 실천한 진정한 보살이 아니었을까.
2013. 05. 11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