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강좌 23강
이번주 디카시 강좌는 김선미 디카시집 『허수아비와 춤』 평설로 대체합니다.
【디카시 강좌】
정 유 지 회장
(부산디카시인협회)
"디카시에 나타나는 천인지(天人地) 사상 : 김선미 디카시집 『허수아비와 춤』을 중심으로 "
디지털 시대에 시詩가 문자예술을 넘어 영상언어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지만, 디지털카메라를 도구로 활용한 시 쓰기는 디카시가 독보적이고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시는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융합예술의 독립 장르인 디카시는 2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디카시의 창시자는 이상옥 교수이다. 또한 2004년 최초의 디카시집 이상옥의 『고성가도(문학의 전당, 2004)』가 출간된 이후, 디카시에 대한 논의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종래의 사진시는 사진과 시를 합성하여 결합한 아날로그 방식이다. 반면에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와 시를 결합한 디지털 방식이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디카시의 등장은 기존의 오프라인에서 출간되던 활자 중심의 출판문화라는 문학의 위기 시대를 돌파할 새로운 카드로 볼 수 있다.
한편, 디카시의 주제를 주역의 천天·인人·지地 삼재三才의 철학을 적용하여 살펴볼 것이다. 천인지 철학 속에는 ‘하늘의 길’, ‘사람의 길’, ‘땅의 길’을 운용하고 있다.
주역의 천天·인人·지地 삼재三才의 철학은 음과 양의 조화로 생성된 자연의 순환과 순리의 원리로 통한다. 마찬가지로 디카시를 창작하는 소재와 주제에 따라, 크게 천天·인人·지地 세 가지의 길을 걷고 있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삼라만상은 우주에 깃든 별(행성)로부터 음과 양의 기운을 받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로 하늘의 길(天道)을 걷는다. 둘째, 음과 양의 조화로 살아가는 사람은 인예의지(仁禮義智)의 원리로 사람의 길(人道)을 걷는다. 셋째, 음과 양의 원리로 청룡과 주작, 백호, 현무는 동남서북(東南西北)을 지키면서 땅의 길(地道)을 걷는다. 이것은 삼라만상의 만물이 ‘생성-성장-소멸’이란 음양의 섭리를 통해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이 순환하는 음양오행설의 원리와 상통한다.
특히 김선미 디카시집 『허수아비와 춤』을 중심으로 '땅의 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땅의 길’은 지리적 공간인 ‘동남서북東南西北’과 통한다. 인仁은 좌청룡을 의미하는 동쪽(東=元)에, 예禮는 남주작을 의미하는 남쪽(南=亨)에, 의義는 우백호를 의미하는 서쪽(西=利)에, 지智는 북현무를 의미하는 북쪽(北=貞)에 해당된다. 사계절 변화와 함께 운용되는 땅의 기운(地靈地氣)과 연계된다.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은 처음 서울 도성을 설계하면서 동남서북 성문에 ‘인예의지仁禮義智’란 글자를 넣었다. 동남서북 대문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숭례문崇禮門’, ‘돈의문敦義門’, ‘소지문炤智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삶을 고즈넉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선미 시인의 디카시 「에덴의 동쪽」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흐도 붓을 꺾고 돌아서고
이백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눈 시릴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 김선미 디카시, 「에덴의 동쪽」 전문
‘에덴의 동쪽’은 가을 녘의 햇살이 어우러진 이상향理想鄕이다. 찬바람만 씽씽 불던 허허벌판의 목벽 위로 담쟁이를 비롯한 만물이 소생하며 자신을 물들이는 풍경의 시적 묘사가 압권이다. 단풍으로 물든 담쟁이 군단이 벽을 넘는 장엄한 대장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 풍경은 엑스타시의 황홀경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움의 극치다. 눈앞에 펼친 황홀한 담쟁이 군단의 군무로 인해 고흐가 그림그리기를 거부하게 만들고, 당 시선詩仙 이백도 더 이상 찬사를 할 수 없는 무아지경無我地境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담아낸다. 정신이 한 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를 말한다. 풍경에 푹 빠져, 눈 시린 곳에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담쟁이 군단은 청룡의 기운으로 목벽을 오르고 있으며, 동시에 백호의 기상으로 오르고 있다. 방향은 ‘에덴의 동쪽’이라 ‘좌청룡’을 뜻하나, 실제 가을의 단풍을 품고 있으므로 ‘우백호’의 기상도 염출할 수 있다.
시인은 붉은 꽃이 핀 「맨드라미」 꽃밭의 향기에 취한다.
붉은 꽃 한송이
환하게 피우기 위해
가을볕 따갑게 쬐고
큼직한 화관 만들어
그대를 기다립니다
- 김선미 디카시, 「맨드라미」 전문
‘맨드라미’는 주로 7월과 8월 사이에 피는 여름꽃이다. 흰색, 붉은색, 황색을 띠며, 9월에 지는 경우도 있다. 꽃말이 뜨거운 사랑이라고 할 정도로, 정열적인 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맨드라미’ 붉은 꽃 한송이, 한송이를 모아 가을볕 아래 시적 화자인 ‘그대’를 위한 화관花冠을 만들어 기다린다는 연모의 정을 노래하고 있다. 기다림의 미학이 담긴 애틋한 노래다. 디카시의 속성은 두 가지가 있다. 대중적 성격의 생활예술이고, 작가적 성격의 고급예술 또는 본격예술을 지향한다. 전자는 날시에 가깝고, 후자는 심층적 수준의 작품성과 가치를 지닌 시인의 시적 언술이다. 김선미 시인의 디카시는 전자와 후자의 중간쯤 위치해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포착과 포획의 미학을 가진 디카시는 집중성과 영감을 통해 극순간 발현시키는 첨단 예술이다. 누구나 디지털카메라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디카시를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디카시를 기획하는 주체가 시인 자신이며, 어떤 주제로 디카시를 창조해야 대중성과 작품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존재다. 디지털카메라 구도를 잡는 것은 기술력이지만, 이를 사전에 어떤 방향의 주제를 가질지 고려하는 작업이 창조적 기획력에 해당된다.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면, ‘맨드라미’는 남녘을 밝히는 꽃이다. 남쪽을 지키는 주작이 깃을 활짝 펴며 한 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있다. ‘맨드라미’는 개화開化의 질서를 창출하며, 붉은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고 있다.
꿀단지를 개방하며, 꿀벌들을 「초대」한다.
얘들아 오늘은 내가 귀빠진 날
와서 맘껏 먹으렴
친환경 밥상이야
- 김선미 디카시, 「초대」 전문
꽃의 은밀한 장소에 꿀단지가 숨겨진 보물창고를 개방하지 마자, 향기에 이끌린 꿀벌들이 날아온다. 연분홍 꽃 대궐에 초대된 꿀벌들을 향해 1인칭 화자의 어조로 맘껏 먹으라고 독려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생일날 꿀 잔칫상을 차려놓고 꿀벌들을 초대한 것임을 일갈한다. 친환경 밥상은 꿀벌들을 위한 천연의 자연꿀임을 밝히는 동심의 어법이 앙증맞다. 시적 화자는 꽃이 되어 꿀벌들을 초대한 것이다. 꽃에게 꿀벌은 참으로 귀한 사랑의 전령사다. 자연수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정원의 꽃밭에 꿀벌이 오지 않으면 인간이 직접 손으로 인공수정을 해줘야 한다. 꿀벌은 꽃을 차별하지 않는다. 꽃마다 다른 독특한 향기를 인정하고, 색깔을 안 따지고, 지역을 안 가리로 동쪽, 남쪽, 서쪽까지 모두를 품는다. 가는 곳마다 꽃가루 선물 한 세트를 남겨두고 온다. 이른바 포용의 화신이 꿀벌이다.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면, 꽃에게 초대된 꿀벌들은 동녘으로부터 남녘, 서녘까지 그 기운을 떨치고 있다. 동쪽의 청룡, 남쪽의 주작, 서쪽의 백호가 지키는 성스런 땅을 넘나들며 사랑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땅의 길은 동남서북을 중심으로 운용된다. 동남서북은 춘하추동의 사계절과 맞닿아 그 기운을 떨친다. 지령지기(地靈之氣)의 신령한 기운은 음양오행설을 뒷받침한다.
디카시는 ‘사이’의 문학이라 규정할 수 있다. ‘사이’는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 비어있는 거리, 공간, 자리이다, 시간적 여유나 겨를이다. ‘사이’는 또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이며,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이’는 그 유사어로 ‘틈’, ‘하이픈(Hyphen)’이 있다. 디카시인은 디지털카메라로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 비어있는 거리, 공간, 자리, 시간적 여유나 겨를 안에서 움직이는 이미지와 영상을 포착한다. 시적 대상을 포획한다. ‘사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본질을 보게 하는 것’이다. ‘현상 너머의 현상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사이’를 현대 디카시의 중요한 시적 장치로 바라본다.
“오늘날 자유는 대개 선택의 자유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코카콜라와 펩시 사이의 선택 아닌가. 진정한 자유란 자유롭게 하는 규칠을 바꿀 자유다. 때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법적 허용 범위를 어겨야 할 때도 있다.”
슬로베니아 출신 ‘사이’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자유론(위대한 수업)>을 통해 남긴 말이다. 지젝은 관점의 ‘사이’를 통해 과거를 재해석하여 선택의지를 피력한다. 지젝은 더 나아가 ‘공간’, ‘시대’로부터 ‘이데올로기’까지 그 속에 잠재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리버티(Liberty)에 대한 개념을 환기시킨다. 변화의 씨앗을 심는다.
디카시에 함유된 ‘사이(틈)’는 기회의 순간이다. 땅의 ‘사이(틈)’를 비집고 들어간 씨앗이 우주를 품는다. 생각의 ‘사이(틈)’를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린다. ‘사이(틈)’에 자릴 차지한 씨앗은 살아갈 공간을 제공받는다. 삼라만상의 존재들에게 ‘사이(틈)’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 ‘사이(틈)’를 통해 빗물이 스며들고, 광합성에 필요한 볕이 들고, 환기에 요긴한 통풍도 된다. 그래서 ‘사이(틈)’는 숨구멍이다. 안식처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이’가 있어야 인간미가 생긴다. 내가 ‘사이(틈)’를 만들어줘야 절친이 생긴다. ‘사이(틈)’로 친구도 들어온다.
디카시는 ‘사이(틈)’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통해 ‘빛으로 그린 언술’과 시인의 서정적 언술 그 ‘사이(틈)’로 주역의 천天인人지地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생생한 우리 사회의 목소리를 재생再生시키고 있다. 인간의 영혼이 빚어내는 내면의 향기가 우러난 깊은 사유를 연결시킨다.
디지털혁명이 낳은 신이 내린 선물, 디카시는 ‘하늘’, ‘사람’, ‘땅’의 메타포를 발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