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그 날의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3월의 마지막 날이라서, '4월'을 맞는 편지글을 하나 더 썼는데,
그만큼 기로의 둔터니에서의 생활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다양하고 즐거웠다는(글 쓸 거리가 많다는) 뜻일 수 있었고, 본인도 의욕에 충만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4월을 시작하며...
3 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그리고 4 월 들어 첫 새벽입니다.
자다가 일어나(세 시) 벽에 4 월의 달력을 해 붙였습니다.
산골에서의 한 달이 갔다는, 그리고 이제 새로운 달이라는 공식적인 직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벽에 하나 둘 늘어나는 내 조그만 드로잉들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얘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서도 바빴습니다. 정말 바쁘기 짝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상황을 표현해보고 싶어 애를 썼고, 또 시골 생활을 즐기느라 시간을 쪼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심에서의 생활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바쁜 나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 생활이라고, 아직은 봄이 오기 전의 어설픈 시기라고,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를 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내 앞에 놓여진, 서울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많았고, 그렇다고 그런 일을 내팽개치는 성격이 아닌 나는 서울에서처럼 멍청히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다 보니 무척 바빴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정말, 요즘들어 허투로 보낸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내가 왜 이리 바쁘지?' 하는 물음을 혼자 던져보곤 했습니다.
허다 못해, 마당을 고른다던지, 풀을 뽑아준다던지, 아궁이에 한 시간 쯤 군불을 지피는 것도 시간에 쫓겨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밖에 나가서도 군불을 지필 나무토막이라도 주워와야 하는 생활이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서울에서의 정적인 생활에서 확 동적인 생활로 바뀐 듯합니다.
몸을 놀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최소한 밥을 해 먹거나 화장실에 가는 일마저도, 이집저집(통나무 집)을 왔다갔다해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보니,
'행복했다.' 는 생각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내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어제, 호수에 배를 띄어놓고 노젓는 연습을 하면서,
'나는 지금 행복의 절정 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아까움이 같이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 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내가 사는 집에 매화 향을 가득 담고 있어서, 어딜 나갔다 오다가도...'아, 이 냄새!' 하고 호흡을 길게 하면서,내가 꽃 향기에 이렇게 좋아하다니, 거기다가 호수에서 배까지 타고...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이 보다 더한 행복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더 이상의 행복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대만족이니까요.
그래서 이는 '아까움' 말입니다.
그 소중한 것이,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는......
아, 돌이켜 보면,
이른 아침, 개를 데리고 호숫가로 산책을 하는 것도, 매화 꽃 아래서 스케치북을 펼치는 일도, 마루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일도, 밭에다 씨앗을 뿌리는 일도, 이웃에게 간단한 야채를 얻어 먹는 일도...... 행복이었습니다.
지금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웬일인지 상당히 센 바람이 휭휭 불고 있습니다.
바람 소리가 첫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문득,
'저 부는 바람에 매화가 무사할까?' 하는 조바심이 납니다.
이제 피기 시작했는데, 만발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데...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런 생각하는 것마저도 행복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이 행복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뒤 돌아서면...
문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내가 짊어진 빚이 나를 행복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도... 느낍니다.
나에게 주어진 한계 시간은 다가오는데, 나는 세상 일 다 잊고서 무방비 상태로 이렇게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마치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글쎄요. 줄 위에 있는 곡예사는 행복할까요?
그 상태에만 몰입하면 분명 행복할 겁니다. 어쩌면, 행복마저도 못 느끼는 상태여야만 할 겁니다.
'혹시, 떨어지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면 할수록, 줄에서 떨어질 확률은 더 높아지니... 그저 신들린 듯 줄 위에서 자신을 잊고 줄에 몸을 맡기는 일이 곡예사의 행복일 겁니다.
그렇담, 나도 기왕에 주어진 행복, 맘껏 누려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 일은 다 잊어버리고?
거기에 내 문제가 있습니다.
3 . 31
바람 불고 스산한 날씨로 4월이 시작되었다.
어제까지의 좋았던 날씨는 4월의 첫날 새벽부터 바람이 불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스산해서, 기로는 선뜻 밖에 나가지지가 않았다.
사실은 새벽 세 시도 되기 전에 일어났다가,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다시 한 시간 정도 잠을 잤는데도 머릿속이 멍한 게... 여전히 깨끗하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더 나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람 소리가 세서,
'이제 피기 시작한 매화가 다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 7시가 넘어가면서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뒤안으로 가 보니, 다행히 그렇게 불던 바람에 매화는 많이 흩날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바닥에는 어느새 희끗희끗 매화 꽃잎이 떨어져 있어서, 마음을 안타깝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제 보다 많은 꽃망울을 터트린 것 같기도 했다.
'허기야 이제 피기 시작한 것들이라, 그리 쉽게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든, 다 자기 살길은 있게 마련이니까... 꽃이 피기도 전에 바람에 다 날려버리면 너무 허무할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하긴 했지만,
아직도 자지 않는 바람이 보통 센 게 아니다 보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오늘도 격을 앞세워 아침 산책을 했다. 바람이 불어선지 시야는 깨끗했지만 하늘엔 구름이 잔뜩 덮여있었다.
비가 오려나?
새벽에 인터넷으로 본 일기예보엔 비소식은 없었는데......
잘은 몰라도, 이러다 '봄 가뭄'이 들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가 잦아 짜증을 냈는데, 내가 상추씨를 뿌려놓고 비를 기다리자 이상하게 그 때부터 날씨가 건조해지면서 비가 오질 않고 있다.
오전엔 아깝다는 생각에, 매화 아래에 한참을 서서 향을 맡기도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어디 매화 향을 맡으며 살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 맘껏 맡아나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 드센 바람은 통나무집에 기대 세워놓은 솟대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머위 잎을 뜯어 데쳐먹으라는 산장집 할머니와, 쌈으로 싸먹어도 된다던 며칠 전 김선생님 전화의 말대로 한 움큼의 머위를 뜯어와 통나무집에서 씻고 있었는데, 문득, 커다란 유리창 너머의 솟대 기둥이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어? 안 돼!"하고 혼자서 소리를 치며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이 집 주위엔 솟대를 하려고 옮겨온 나무들이 제법 있어서, 조금 전에 그 옆을 걸어오면서도 모르고 지나쳐왔던 것이다.
우선 새 모양을 찾아보니, 머리 부분과 목 몸통이 다 분리되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부러지거나 꺾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 다행이다." 나는 혼잣말은 물론 한숨까지 짓고 있었다.
'근데, 바람이 얼마나 셌으면 나무를 쓰러트렸을까?' 하면서, 새 모양을 주워 '夢想?'의 마루로 가져왔는데,
이제 마당도 웬만큼 골라졌고, 솟대의 기둥도 많이 말랐을 테니,
상범이 오는 날 힘을 합해서 쉼터 부근에 세우기로 했다.
점심 무렵이 되면서 서서히 바람은 자고, 날씨는 더워졌다.
정상적인 기온인지 이상기온인지는 몰라도, 요 며칠과는 기온 차이가 보통 나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추운 것 보다는 따뜻한 게 훨씬 낫다. 여기 내려온 초기에 추위 때문에 너무 고생했던 게, 지금도 몸을 움츠리게 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매화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날씨가 나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다.
통나무집에서 점심을 먹고 '夢想?'에 돌아오자, 격이 나를 반겼다.
그렇지만 난 조금 냉정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격은 내가 밥을 줄 걸로 알고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나는 개에게 밥을 주지 않기로 했다.
어제 형과 통화를 했는데, 한 번 밥을 주면 싹싹 핥아 남기는 일이 없게끔, 하루에 한 끼만 주는 버릇을 들여놓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주인에게도 또 개에게도 좋다고 해서.
그래서 오늘부터는 저녁에 밥을 한 끼 주려고 점심에 생긴 먹이도 일부러 모아 놓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만 해도 안타까워서 점심과 저녁에 번갈아 밥을 주었더니, 개는 아예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아... 내내 밥그릇의 음식이 보기에 흉하기까지 했었다.
'허기야, 나도 너를 먹이려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단다. 물론 큰 부담이랄 것까진 없겠지만, 지금 내 형편엔 쌀도 떨어져 가는데, 늘 한 사람 분의 밥을 더 해야 되고, 평소보다 더 동물성을 챙겨먹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단다. 아무튼, 내 상황과 네 상황을 맞춰보자. 너는 화려하지 않은 주인을 만나, 먹는 것도 화려할 수는 없다. 앞으론 그저 소박하고 깨끗한 식생활을 해야만 한다. 물론 내가 웬만큼은 챙겨주겠지만, 포식하는 건 어려울 거다......'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도 배를 탔다. 그런데 오늘은 격을 데리고 탔다.
개는 처음엔 배에 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개 줄을 노를 꼽는 철근에 묶고 배를 저어가니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것이 다 산장아저씨에게 배워서, 그대로 답습해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몇 년 전에 해 두었던 거니까.
어쨌거나 노젓는 기술도,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건 사실이다.
그렇긴 해도 아직은 노를 균형 있게 젓지 못해서, 배가 빙빙 돌거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배를 타고 노를 저으려는데 '夢想?'으로 반장이 들어가는 게 보여,
"나 여기 있어요!" 소리를 치니, 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바로 내릴 수는 없어서 한 바퀴 노를 저은 뒤, 내려서 갔다.
반장은 세탁기 에프터서비스 전화번호를 가져왔던 것으로,
반장이 전화를 거니,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그래도 이상이 있으면 전화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장과 함께 통나무집에 가서 세탁기 점검을 해봐도,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夢想?'에 돌아와 다시 매화나무 아래로 가서 향기를 맡았다.
어제보다 눈에 띄게 많이 피어난 나무는, 언뜻... 하얗게 덩어리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쪽 밭에서 산장집 할머니가 밭을 매고 계셔서,
"할머니, 그 너른 밭을 다 매시려면 너무 힘들잖아요? 조금씩만 하세요." 하자,
"그렇다고 어떻게 밭을 놀려?"하셨다.
"그래도 혼자서 그 많은 밭을 다 하시기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우리 아들네들도 날더러, 일 좀 그만 하라고 하는데, 않고는 못 배겨요."
"그래도 힘들잖아요."
"아니, 이런 일을 죽 해 와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어..."
그렇게 할머니와 도란도란 얘기를 했다.
내 시골 생활은 이렇게, 달을 넘어 하루하루 이어져간다.
4 . 1
어두워지면서, 생각 보다는 빨리 정읍의 김 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산장 집 아이의 이름을 네 개나 새롭게 지었다며, 그 중 맘에 드는 걸로 고르면 될 거라고 했다.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반시간도 넘게 통화를 했다. 특히 김 선생님은 혼자 사는 기로의 건강에 대해 신경을 써 가며, 주변에 나는 야채와 나물 등을 잘 뜯어 먹기만 해도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고... 이런저런 먹는 풀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전화를 끊은 뒤, 기로는 바로 산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일단 한자(漢字)는 나중에 이름이 정해진 뒤 자신이 직접 써서 주기로 하고(어차피 박 만석이 한자를 받아 쓸 수 없을 터라서), 이름 네 개만 전화상으로 알려주었다.
마침, 김 순임이 전주에 가기 직전이어서, 그 이름을 가지고 전주에 돌아가서 가족끼리 상의를 해도 좋을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 아홉 시가 넘어가는데도 고즈넉했다.
호수는 잔잔했고, 마을도 조용하기만 했다.
기로는 슬그머니 배를 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격을 데리고 호수로 나갔다.
그런데 어제와는 달리 격은 배로 껑충 뛰어 올라타기까지 하는 거 아닌가.
'어? 이놈 봐라! 어쩌면 개가 나보다 더 배에 쉽게 적응하는 것 같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곤 서서히 노를 저어 호수가로 거슬러 올라갔다.
반장집 뒤까지 갔는데, 조그만 바위절벽도 있어서 경치가 제법 좋았다.
원래는 오늘까지 이 쪽 편에서 오가다가 내일에나 호수를 건너려고 했지만, 어쩐지 건너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 한 번 건너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배를 탄지 사흘 만의 시도였다.
어려움 없이 호수를 건넜다.
그런데 건너편은 호수 이쪽보다 경사가 급해서 바위도 많았다. 마을에서 멀리 보던 것과 직접 가까이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많았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절벽도 험했고 나무들도 상상외로 컸다.
그리고 군데군데 분홍색의 진달래도 꽃을 피우고 있어서,
''夢想?'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봄은 왔나보다. 아니, 이미 기온은 봄을 넘어선 느낌이다. 요 며칠......' 하는 생각도 하면서, 호숫가로 천천히 노를 젓는데 격이 끙끙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물로 뛰어들 자세를 취하기도 해서, 기로가 깜짝 놀라,
"가만히 있어!" 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동안 기로가 건너고 싶어했던 반대편 언덕에 배를 대기까지 했다.
그러자 개가 먼저 뭍에 뛰어 내렸다.
여기 역시 수몰지역이라, 옛날에는 한 산의 능선이었을 완만한 사구 같은 언덕이었는데,
거기엔 해 묵은 풀만 누렇게 말라있었다.
기로는 바위에 걸터앉아 호수 건너편의 둔터니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은 조용하고 아담했다.
'내일은 카메라를 가져오리라......'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도 격은 끙끙댔다.
'얘가 배 타는 게 싫은가? 아니면, 멀미라도 하는 건가? 개에게 바람을 쐬어주고 싶어서 태웠을 뿐인데, 지가 싫다면 , 굳이 그렇게 해줄 일이 없는데...... 어제는 정읍의 김 선생님과 통화 중에, 개를 태우고 배를 탔다는 내 말에,
"그 집 개는, 이름이 '격'이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신선팔자'네!" 하셔서, 웃기도 했는데......' 하면서 호수를 건너 왔다.
아침을 계란 후라이 하나로 대충 때웠더니 배가 고팠다.
그래서 이리저리 둘러 봐도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어서, 밥이라도 해 먹자며 쌀을 물에 담갔다.
쌀이 물에 부는 사이에 기로는 호숫가로 내려가 돌미나리를 조금 뜯어왔다.
어제 전화 통화 중에, 김선생님이 돌미나리를 깨끗이 씻어 생으로 먹으면 좋다고 했던 조언을 따랐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피를 맑게 해준다는 말에, 기로는 앞으론 자주 돌미나리를 뜯어다 생으로 먹으리라 다짐까지 해 둔 상태였다.
'근데, 상추는 언제나 날까? 비가 와야 하는데, 내내 날이 덥고 건조하기만 하니......'
아침을 먹고 기로가 세탁기 에프터서비스에 전화를 거니, 점심이 지난 뒤 담당직원이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점심 넘어 온다던 직원은 점심 전에 도착했다.
그가 세탁기를 점검해 보더니,
기로의 세탁기의 물이 빠져나가지 않는 이유는,
뚜껑이 없어서(이사 오면서 이음새가 깨져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탈수'할 때 어린아이들에게 위험이 있기 때문에 뚜껑이 덮어진 상태여야만 제대로 작동을 하게 된다는데, 그 부분에 이상이 있다 보니 정상 작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로는 이미 뚜껑의 한 부분이 깨져 있어서, 아예 뚜껑을 벗겨놓은 상태로 세탁을 했던 것인데,
그러면 얼마간은 진행이 되다가 신호음만 내고 작동을 멈춰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또 그 직원이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해줘서(뚜껑을 바꾸려면 9만 원선은 들 거라며, 그가 이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알려주기에),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별 이상 없이 빨래를 해 입을 수는 있게 되었다.
더구나 그 일까지 해 준 그 직원이 하도 친절하기에, 기로는,
"커피라도 한 잔 끓여드릴까요?" 하고 물었는데,
"아직 점심을 먹기 전이라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그는 웃으며 돌아갔다.
'아이, 어쨌거나... 다행이다. 이제 빨래는 해 입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그가 알려준 대로 시험을 해 보느라 빨래를 했고, 밖에 내다 널고 있는데,
"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 만석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이리 좀 와 봐."
"알았습니다. 곧 갑니다."
아주 간단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는데,
보나 마나 어젯밤 김 선생님으로부터 온 아들 이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일 터였다.
그래서 기로는,
'빨래를 다 널고 갈까?' 하다가, 혹시 다른 급한 일일 수도 있어서... 바로 서둘러 산장 집으로 가 보니,
"애들이 이름을 정혔다고 허는고만. ‘종혁’이가 좋디야..." 하면서,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으며 기로를 바라보았다.
"아, 잘 됐네요. 박 종혁.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하자,
"그런 거 같여?" 하고 묻는 박 만석은, 마치 자신의 이름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소 쑥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곧 어디론가 숨어버릴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로가,
"예, 붙여 보니 괜찮은데요?" 하면서, "그럼.. 언제 전주 법원에 가서 신고를 하지요?" 하고 묻자,
"내일 가까?" 하며, 오히려 기로의 의향을 다시 묻는 것이었다.
"그러시든지요..." 하며,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하자,
"아니, 왔는디, 그냥 갈라고? 밥 먹고 가..." 하며 아예 기로의 손을 꼭 잡는 것이었다.
'아이, 이 양반이 왜 이러시나?' 생각은 했지만,
"아니요. 지금 빨래를 해서 널다가 왔기 때문에, 가봐야 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미 집에 점심 먹을 준비를 다 해 놓은 상태라 오늘은 안 됩니다." 하면서 기로가 손을 풀면서 바쁜 듯 돌아서자,
"그려? 그러믄... 알어서 혀. 근디, 어쩠든 고맙고만..." 하고 인사하는 걸 잊지는 않았다.
"예... 근데, 저도 뭔가를 해 드려야지요... 맨날 얻어먹기만 해서 되나요?" 하면서, 얼른 산장 집을 나왔다.
이미 차 몇 대의 손님으로 식당이 바쁜 상황이기도 해서 자리를 피해주자는 계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기예보로는, 요즘이 이상고온현상이라고 했다.
4 월 말 기온이나 될 법한 날씨가 계속이어지고 있다는데... 추위에 움츠려있던 기로에겐 좋은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고온 건조한 기후 자체가 좋은 건 아닐 것이었다.
아무튼 기로에겐 추위가 사라져서, 생활하는 데 여러 가지 면이 느긋한 상황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후가 제법 깊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군불을 때기엔 조금 이른 것 같다는 판단으로... 기로는 매화나무 아래에 가서 스케치를 하기로 했다.
그냥 꽃만 보고 즐겨도 되겠지만, 그러고 넘기기에는 아무래도 아까운 것 같아... 그 아름다운 모습을 스케치로라도 담아두기 위함이었다.
물론,
'동양화가도 아닌데, 무슨 매환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매화를 동양화로만 그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고, 그저 간단하게 연필로 스케치를 한 소묘식의 드로잉도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기로가 '夢想?' 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변화된 모습' 중의 하나일 수 있었다.
허기야, 기로가 서울에 살면서는... 그러니까 평생을 살아오면서, 꽃 그림을 몇 번이나 그려보았던가?
일 년에 하나? 아니면 3-4 년에 하나?
그러던 기로가 이젠 날마다 꽃 아래에 가서 꽃을 마주하면서 직접 스케치를 하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로는 여기까지 와서, 모든 작품마다에 자기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물론 꽃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화가처럼 모든 작품을 꽃을 넣어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 역시 아니었지만.
물론 한 두 가지거나 송이의 꽃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건 꽃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 있는 뭔가 재미있는 요소를 찾아보기 위함이었지, 꽃의 아름다움만을 강조한 보기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신축성있게 하고 싶고, 자유롭게 갖자는 의미가 컸다는 것이다.
어차피 시골에 와서 살고 있는 상황이니, 자신에게 닥치는 많은 자연적인 요소에 관심을 가져보자는 의미가 컸기 때문에... 그렇게 꽃을 그리고 싶으면 꽃도 그리고, 풀도 그리고... 그러다 보면 또 그 안에서도 뭔가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매화를 그리려고 올라갈 때마다 뒷집 개들의 짖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느긋하게 그릴 수 없는 게 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화 향기는 역시 그윽했다.
'아, 매화가... 이번 주말이 절정일 것 같다. 저 남녘에선 벚꽃도 만발했다는데, 여기는 이제서 봄꽃들이 피어난다. 그래, 봄이 오면 저 호수 건너 앞산이 울긋불긋해진다고 하니, 봄 색깔의 향연에 젖어도 보자... 이미 저 언덕 같은 곳엔 버드나무 싹이 노랑에서 연두로 하루가 다르게 색을 짙게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만 봐도, 이젠 누가 뭐래도 봄이다......' 하고도 있었다.
그리고 내려와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 메뉴는 닭 육수에다 넣은 떡국이었다. 맛이 썩 좋았다.
물론 격을 염두에 둔 식사이기도 했는데, 그 국물에다 점심에 지어놓은 밥을 말아 주니,
개는 밥그릇을 싹싹 핥아 비워먹는 것이었다.
'그래, 형이 저렇게 밥을 주라고 했지?'
개 밥그릇이 깨끗한 것에 만족한 기로는, 발을 씻고 방에 들어가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런데 하모니카를 불면서 졸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제 유화도 해야 할 텐데... 시간을 내서 흙 작업도 하고 싶고... 참으로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한정돼 있는 것 같다. 어째, 요즘은 하루가 짧기만 하다......'
그랬다.
요즘 기로는 저녁을 먹은 뒤로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졸곤 했다.
아무래도 낮에 활동양이 많다보니(그러고서도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또 밤에도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아니라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그런데 잘은 몰라도, 여기 공기가 좋아선지 아니면 새로 시작한 ‘요로법’ 때문인지(계속 진행 중)... 별로 피곤함을 못 느끼며 살고 있다. 그리고 어쩐지 몸이 가뿐한 느낌이다......' 할 정도로, 기로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일이기도 했다.
둔터니 마을에 내려 와 지낸 한 달 여.
처음엔 고생만 한다고 불평이 많았고, 그대로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런저런 일에 적응을 해 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요즘 기로의 '夢想?' 생활은 만족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