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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의 길 12코스 제1부
어수정-숭의전-잠두봉-아미타사입구-
왕순례묘-아미교-마전삼거리-당포성-
마전분교-유엔군화장장시설-배울마을-
마동로삼거리-배울교-임진강주상절리-
임진강둔치-작은이끼폭포-임진강제방
20250312
1.코스 소개 : 두루누비
1)코스개요
- 숭의전지부터 군남홍수조절지(두루미테마파크)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두루미 서식지 등 DMZ 생태계를 엿볼 수 있는 길이다.
- 임진강 주상절리 등 지질학적 가치가 뛰어난 풍경이 가득한 코스다.
2)관광포인트
- 아로마 허브 체험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즐길거리를 갖춘 테마공원, 허브빌리지
- 임진강 본류의 홍수조절 능력 확보를 위해 건립된 단일목적댐, 군남홍수조절지
- 두루미 대체 서식지를 조성해 DMZ 일대의 생태계를 관찰하고 보호하는 공간, 두루미테마파크
- 27만 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철원평강용암대지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임진강주상절리
3)여행정보(주의사항)
- 약 500m의 갓길이 있는 왕복 2차로의 교량을 건너야 하는 구간이 있어 여행객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 우천 시 통행 불가 지역 있으므로 우회로로 이용해야 한다.
- 주요 경로 : 숭의전지 2.2Km 연천 당포성 3.2Km 동이리주상절리 4.6Km 임진교 6.2Km 군남홍수조절지
- 길이 16.2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보통
- 시점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3
대중교통) 연천역 앞에서 70번 버스 이용, 숭의전 하차
- 종점 :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솔너머길 65-2
대중교통) 연천공영버스터미널 > 연천역정류장 55-60번버스 승차 > 선곡리회관 하차
2.숭의전·당포성 역사와 임진강 주상절리 경관
제1부 : 날이 찌푸려 음산한 기분이 든다. 음산함을 달래며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아미리(峨嵋里) 숭의전 버스정류소 옆 평화누리길 연천구간 안내도 앞에서 DMZ 평화의 길 12코스 탐방을 출발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과 홍살문을 통과하여 숭의전(崇義殿)으로 올라간다. 숭의전 건물 담장 옆 오랜 수령의 느티나무가 아름드리 줄기 위로 꼬불한 가지들을 하늘에 뻗치고 있고, 그 앞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숭의전을 지키는 당산나무 신목(神木)이다. 긴 세월, 숭의전이 사라진 뒤에도 이곳을 꿋꿋이 지키며 세월의 풍파와 역사의 고통을 이겨낸 당산나무의 상흔이 뿌리 위 줄기에 남아 탐방객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이 신목과 같은 650년 수령의 또 한 그루 느티나무는 숭의전 앞 임진강 벼랑에서 숭의전을 지키고 있다. 숭의전 설명안내판 맞은편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 옆에는 숭의전과 관련한 내용들을 적은 게시판 10개가 전시되어 있어, 숭의전의 여러 관련 사항들을 파악할 수 있다.
1392년 10월 13일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 있었던 마전군(麻田郡)의 앙암사에 두게 함으로써 고려 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개경에서 마전(麻田)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1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종 대에 이르러서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前朝)의 사당에는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 대에 이르러 허물어져 가는 사당을 고져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 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소 숭의전(崇義殿)이라 불리게 되었다. 숭의전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다. 1971년 그 터를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고 1972년부터 복원 건립하여 1986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숭의사가 위치한 연천의 마전(麻田)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임진강변의 궁벽하고 외딴 시골마을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祖江)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鄭希良, 1469~1502)이 마전(麻田)의 한 객관에 머물며 남신 시에 숭의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적막한 마전군(麻田郡)/ 어느 때 관아를 지었나/ 무너진 담에 푸른 풀이 더북하고/ 부서진 벽에 파란 이끼 끼었네 (중략) 태수는 공무가 없어서/ 거문고 타는 동헌이 대낮에도 한가하다 寂寞麻田郡(적막마전군) 何年館宇開(하년관우개) 頹垣靑遍草(퇴원청편초) 壞壁綠生苔(괴벽록생태) (중략) 太守無公事(태수무공사) 琴軒盡日遲(금헌진일지)" 그런데 현재 숭의사는 연천군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숭의전 동쪽에 벼랑을 이룬 낮은 봉우리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숭의전 앞을 지나 평화누리길 문주를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 오른쪽 벼랑의 전망대에서 임진강과 건너편 미산면 삼화리를 전망한다. 임진강 건너 삼화리에서 이곳을 보면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보인다 하여 이 벼랑을 잠두봉(蠶頭峰)이라고 이른다. 전망대에 숭의전 건립과 관련된 '썩은소'의 전설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망국의 비애가 담긴 전설이 슬프다. 고려 왕조는 쇠닻줄이 썩듯 망했다. 고려 왕조 충신들의 전설 '썩은소' 설명이 불분명하여 썩은소의 의미와 장소가 분명하지 않다. 썩은소는 '썩은 쇠밧줄'이라는 뜻과 함께 '쇠밧줄이 썩은 소(沼)'라는 의미로 읽히며, 그 위치는 잠두봉 동쪽 미산면 동이리, 한탄강과 임진강이 합수하는 지점 아래에 있다고 한다.
잠두봉이 유명한 것은 암각문 때문이다. 임진강의 침식작용으로 잠두봉이 임진강에 면한 곳은 수직절벽이 생겨났는데, 이곳에 칠언절구 한 수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한시는 마전군(麻田郡) 군수였던 한문홍(韓文洪, 1736~1792)이 1789년(정조13년)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시로 지어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새긴 것이다. "숭의전을 지은 지가 4백년이 되었는데/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있구나/ 지난 세월 만월추(滿月秋)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麗組祠宮四百秋(여조사궁사백추) 誰敎木石更新修(수교목석경신수) 江山豈識興亡恨(강산기식흥망한) 依舊蠶頭出碧流(의구잠두출벽류) 往歲傷心滿月秋(왕세상심만월추) 如今爲郡廟宮修(여금위군묘궁수) 聖祖更乞麗牲石(성조경걸려생석) 留與澄波萬古流(류여징파만고류)" - 한문홍(韓文洪)의 '重作崇義殿(중작숭의전, 숭의전을 중수하고)'
잠두봉에서 나와 아미산 능선을 따라가다가 아미산 기슭의 아미타사 법당 입구의 민가에서 숭의전로로 내려간다. 숭의전로 남쪽에 숭의전 초대(初代) 숭의전사(崇義殿使)를 지낸 왕순례(미상~1485년)의 묘가 있다. 묘는 1988년 주변 도로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하며, 나지막한 봉분과 함께 묘비와 최근에 건립한 망주석 1쌍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왕순례 묘를 살피고 숭의전로를 따라 미산면 아미리 지역을 통과한다. 아미산을 오른쪽에 두고 임진강변의 캠핑장, 게스트하우스촌, 연천비경 펜션을 지나 아미교를 건너 미산면 아미리에서 마전리로 넘어간다. 마전리 원형교차로를 지나 마전리삼거리에서 마동로를 따라 고구려 기마무사의 수렵도가 그려진 대전차 방호벽을 지나서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 북쪽 벼랑에 자리한 당포성(堂浦城)이 오른쪽에 있다.
마동로 당포성 입구에서 평화의 길을 이탈하여 당포성으로 올라갔다. 넓은 광장에 연천군과 당포성을 홍보하는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보름달과 초승달, 별들이 당포성 동쪽 광장에 내려 앉아 탐방객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대형 초승달 조형물 언덕 오른쪽 평지에 정사각형 당포성 조형물에 그려진 보름달에 "달하 달하, 연천 달하"가 적혀 있고, 그 뒤에는 오색별 조형물들이 팔랑팔랑 반짝인다. "달님이시여, 연천 달님이시여, 이 세상을 광명으로 비쳐 주소서. 오색의 별들이여, 평화의 빛으로 이 땅을 이끌어 주소서."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도 쟁탈의 격전지요, 접경의 요새지인 연천 당포성에 광명과 평화의 빛이 넘실거린다. 그 절정의 풍경은 당포성 동벽 위의 '나 홀로 나무'라고 명명된 홀로 선 팽나무일 것이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천이 합수하는 삼각형 절벽에 자리하여 남벽은 임진강 벼랑, 북벽은 당개천 벼랑으로, 남벽과 북벽은 자연 성벽이고, 오직 동벽만을 축성하여 이루어진 성이다. 그 동벽 위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 팽나무 한 그루가 식재되어 있는데, 세간에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당포성(堂浦城)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 벼랑에 있는 고구려의 성이다. 허목(1595~1682)의 『기언별집(記言別集)』에 “마전(麻田)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진루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叢祠)가 있고, 그 앞의 물가를 당포라고 한다. 큰물이 흘러 나루 길로 통한다. 麻田前岸江壁上有古 壘 今其上爲叢祠 其前浦曰堂浦 大水則津路所通”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세웠지만, 한강 이북으로 진출한 신라가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허목의 기록을 통하여, 당포성은 그 당시 이미 허물어진 상태였다. 300여 년이 흐른 1994년에 존재가 드러났고 발굴이 시작됐다. 당포성 북쪽에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마전현이 자리하고 있어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 고구려의 성으로서 축성되었지만,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 최적의 성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개경에 도읍하고, 조선 왕조가 한양에 자리한 이후로 당포성은 그 지리적 요충지로서 가치를 잃었을 것이다.
당포성에서 마동로로 내려와 평화의 길을 따라간다. '아! 고구려 땅'임을 표나게 내세운 당포성쉼터 음식점을 지난다. 지난 시절 한길에는 포플러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난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포플러나무들이 즐비한 곳에 왕산초등학교 마전분교(旺山初等學校 麻田分校)가 위치하고 있는데, 가슴 아프게도 폐교하였다. 마전분교는 설립 후 약 11년간 분교로 운영되다 폐교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곳의 아이들은 지금 어느 학교로 가는가? 지난 시절 버스가 일으키고 간 흙먼지가 자욱한 포플러 가로수의 한길을 따라 학교에 다닌 시절이 기억난다. 더 어린 시절, 장을 보러가는 어머니를 따라 포플러나무 한길을 걸어간 추억이 떠올라 눈시울이 자욱해진다.
미강서원지(湄江書院址) 입구를 지난다. 미강서원(湄江書院)은 1691년(숙종 17)에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6~168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693년 ‘湄江(미강)’이라고 사액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6·25사변으로 소실되어 1970년 다시 설단하고 단비(壇碑)를 세웠으나,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미강서원지(湄江書院址) 표지판을 보니 이곳에서1.7km 지점에 미강서원 터가 있다고 하는데, 그곳은 임진강이 한탄강을 합수하는 지점 아래쪽으로, 아마도 그 어름에 임진강 '썩은소'가 있을 것이다. 썩은소에서 돌배의 쇠닻줄은 썩어서 돌배는 잠두봉으로 내려갔다.
임진강변으로 나가는 미강서원터 입구를 지나면 그 맞은편에 유엔군 화장장시설이 100m 거리에 보인다. 멀고 먼 이국 땅 전쟁터에서 죽은 유엔군 병사들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변했던 곳이다. 병사의 가족들이 유골함을 받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유엔군 화장장시설이 국가등록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되었다는 사실 이전에 그 아픔이 가슴에 파고든다. 상황은 다르지만 유치진의 희곡 '토막'에서 일본으로 돈 벌러간 아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죽어서, 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 병사가 적국의 총탄을 맞고 죽어서, 그리고 멀고먼 대한민국 공사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어서, 그 유골함이 가족의 품에 안기는 모습은 모두에게 통곡할 고통이다. 병사의 시신이 타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현장의 굴뚝을 바라보며 고통과 추모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평화의 길을 따라간다. 이런 역사적 고통의 현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데, 전쟁 무기를 확산하고 냉전과 현 체제를 강화하는 소리가 드높다.
마동로 군부대 입구에 '동이리(東梨里)배울마을' 대형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일대가 배울마을로 이곳의 지형이 큰 돛단배 형상이라고 한다. 배울은 머리와 산의 뜻으로 쓰였던 '받'이 변한 '배'와 골짜기의 뜻인 ‘울'이 합하여 ‘배울'로 불리다가 한자로 옮기면서 ‘이동(梨洞)'과 ‘주동(舟洞)'이 되어 ‘큰 돛단배의 형국' 또는 ‘배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마을 유래 풀이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평화의 길은 마동로 동이리삼거리에서 남쪽 마동로196번길을 따라 연천군 전곡읍 임진강 방향으로 이어간다. 배울마을 밭에서는 농민들과 공무원들이 들깻단을 파쇄기로 분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파쇄된 들깻단은 퇴비로 활용되는데 밭에 인산 성분을 보충하여 농사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마동로196번길의 배울교를 건너면 앞쪽에는 국도 제37호선 동서로가 동이대교로 이어지고, 평화의 길은 동이교차로 직전에서 왼쪽 임진강주상절리 관광센터 신축현장 방향으로 꺾어 들녘으로 나간다. 천년초 재배&가공 '임진강 자연농장' 앞을 지나 임진강 제방 북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현수교인 동이대교의 교각이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임진강 합수지점을 살피기 위해 둑방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동이대교가 앞을 가로막아 임진강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강주상절리로 이어지는 이 길은 평화롭다. 이 길 끝에 임진강주상절리가 펼쳐지고 임진강주상절리 관광센터 신축공사장이 있다.
임진강주상절리는 군남면 남계리 임진강 벼랑에 형성되어 있다. 이 주상절리를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변에서 감상하기에 동이리주상절리라고도 부른다. 군남면 남계리는 임진강과 한탄강에 에워싸여 있는 반도이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합수하는 남계리 도감포에서 임진강 북쪽으로 형성된 임진강 주상절리에서는 넓은 용암대지와 더불어 다양한 모양의 주상절리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동이리에서 건너편 군남면 남계리 임진강 벼랑을 살핀다. 설명에 의하면 주상절리(柱狀節理)가 25m 높이로, 길이 2km에 걸쳐 자연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주상절리는 10만∼27만 년 전 한탄강을 따라 흘러온 용암이 임진강을 만나 역류해 생성된 것이다. 이곳에서 한탄강 지질공원의 가장 큰 특징인 현무암 주상절리를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을이면 돌단풍이 주상절리 절벽을 붉게 물들여 '임진적벽'이라 불리는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 빛이 감도는 절벽일 뿐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신록의 봄날이나 단풍의 가을날에 이곳에 와야 절경의 임진적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강 동이리제방을 따라 금골산을 가늠하며 임진강 둔치 방향으로 이어간다. 둔치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 넓지 않은 밭에서 농군들이 봄농사를 시작했다. 그 풍경을 보니, 연천 출신의 시인 김상용(1902~1951)의 시가 입에 맴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새참 먹을 때 밭갈이 할 수 있을 정도의 '한참갈이' 작은 밭을 농사지으며 욕심 없이 안분지족하는 삶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그는 죽어서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시 '향수'에서, 그는 왜 "있지도 않은 고향"이라고 했을까? 그때 당시에 이곳 고향 땅이 38선 북쪽이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서 그랬을까? "인적 끊긴 산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 김상용의 '향수' 전문. 평화로움 속에 짙은 슬픔이 느껴진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이 구절을 표현할 때의 시인의 고통이 솟아오른다.
제방의 들녘에서 임진강 둔치로 내려갔다. 임진강은 서쪽 연천군 미산면과 동쪽 연천군 군남면 사이를 굽이돌아 동이리와 남계리 사이로 흘러온다. 남계리 임진강 주상절리대 용암대지 위에는 펜션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풍경은 장욱진 화가의 그림, 높은 절벽 위의 농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을 헤치기보다는 낭만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설들은 임진강 서쪽 미산면 동이리 금굴산 자락을 내려보고, 탐방객은 이 시설물들이 윗자리를 차지한 군남면 남계리 주상절리 병풍을 올려본다. 남계리 주상절리에 주목하며 둔치길을 걷다가 걷고 있는 바로 옆 금굴산 벼랑으로 눈길을 돌렸다. 동이리 금굴산 벼랑 기슭에 푸른 이끼군락지가 활짝 펼쳐져 있다. 아름다움에 감격하였다. 빙설(冰雪)이 녹은 물이 이끼군락을 타고 떨어진다. 작은 이끼폭포다. 거대한 지리산 이끼폭포에 견줄 수 없지만 맑은 물이 푸른 이끼를 타고 흘러내리는 이끼폭포는 앙증스럽게 귀엽다.
둔치길을 따라 임진강을 올라간다. 서쪽 미산면 우정리에서 황공천이 임진강에 합수하고, 동쪽 황지리에서 죽대천이 임진강에 합수하여 임진강 폭은 넓어지고 드넓은 둔치를 형성하는데, 물억새와 버드나무들이 넓게 자라고 있다. 행정구역으로 살피면 서쪽의 미산면 우정리와 동이리, 동쪽의 황지리와 남계리, 이 네 지역이 맞닿아 있는 임진강 지역이다. 임진강 둔치 들녘에는 들개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다. 무엇을 먹으려고 하는 걸까? 죽은 철새를 물어 뜯는 것일까? 둔치길에서 출입문을 통과하여 제방으로 올라가면 평화누리길 문주가 맞이한다. 임진강의 명승 주상절리를 지나왔는데, 계절과 음침한 날씨 탓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절경의 임진강변을 걸었음에 감사하며, 추억을 반추할 그날을 기약한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8.5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28분
(휴식 시간 46분 포함)
숭의전 버스정류소 옆의 경기둘레길&평화누리길 연천구간 안내도에 DMZ 평화의 길 12코스 방문인증 QR코드가 붙어 있다.
DMZ 평화의 길 12코스는 고려 태조 왕건이 물을 마신 우물인 어수정(御水井)에서 숭의전 홍살문을 통과하여 올라간다.
평화누리길 11코스 안내판 뒤에 숭의전 당산나무, 오른쪽에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이 있다.
DMZ 평화의 길과 평화누리길은 임진교까지 동행하다가 평화의 길은 임진교를 건너 임진강 동안을 따라가고, 평화누리길은 임진강 서안을 따라가서 북삼교를 건너서 평화의 길과 재회한다.
평화누리길 11코스(19km, 5시간 20분 소요) : 고려역사가 숨쉬는 숭의전에서 시작하여 임진강 중상류에 형성되어 있는 수직형 주상절리의 절경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야생화와 돌단풍이 가을에는 갈대길이 조성되어 다양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숭의전(崇義殿)을 지키는 신목(神木)인 수령 650년이 넘는 당산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숭의전 입구에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 그 앞에 숭의전 설명안내판, 앞쪽에 수령 650년의 느티나무가 숭의전을 지킨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시킨 4명의 왕들과 고려 중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조선 초기 처음 사당이 건립되어, 1451년(문종1)에 숭의전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후로 숭의전의 관리와 전례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졌다. 숭의전의 설치 배경에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서 역대 시조의 의례체계를 정비한 과정과 더불어 고려 왕족 및 고려 유민 등에 대한 회유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숭의전 건립 이래 수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숭의전 복원은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수년에 걸쳐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숭의전 대제가 이어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옛 왕조의 영광과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숭의전(崇義殿) 뜰 서쪽에 숭의전(崇義殿) 관련 여러 설명안내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부터 전시 제목을 살핀다. 1.숭의전이란? 2.숭의전 건물의 배치 3.숭의전의 연혁 4.왜 연천의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5.고려 왕족의 수난사 6.숭의전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 7.숭의전 대제 모시는 모습 8.숭의전 복원 과정 9.사진으로 보는 숭의전 10.숭의전 잠두봉 암각문
강 건너 삼화리에서 이곳을 보았을 때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잠두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임진강의 침식작용으로 잠두봉이 임진강에 면한 곳은 수직절벽이 생겨났는데, 어떻게 새겼는지 이곳에는 칠언절구 한 수가 남아 있다. 이 칠언절구는 1789년(정조13년) 마전군수였던 한문홍(韓文洪)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시로 지어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새겨 두었다.
重作崇義殿(중작숭의전, 숭의전을 중수하고) : 숭의전을 지은 지가 4백년이 되었는데/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있구나/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麗組祠宮四百秋(여조사궁사백추) 誰敎木石更新修(수교목석경신수) 江山豈識興亡恨(강산기식흥망한) 依舊蠶頭出碧流(의구잠두출벽류) 往歲傷心滿月秋(왕세상심만월추) 如今爲郡廟宮修(여금위군묘궁수) 聖祖更乞麗牲石(성조경걸려생석) 留與澄波萬古流(류여징파만고류)
국가사적 제223호 숭의전(崇義殿)은 조선시대에 고려의 왕을 봉사(奉祀)하던 종묘(宗廟)로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 4왕과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묘전이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을 비롯하여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島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 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 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숭의전(崇義殿) :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正殿) ●이안청(移安廳) : 숭의전의 청소 및 공사 시에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위패를 옮겨 모실 때는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를 올려 고유례(告由禮)를 행함) ●배신청(陪臣廳) : 고려 16공의 위패를 모신 곳 ●전사청(典祀廳) :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수령 650년이 넘는 느티나무 앞에 보호수 안내판, 느티나무 전설 안내판, '숭의전' 시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1.숭의전 :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고려에서 조선을 지나/ 아직도 입시 중인 신하들// 나라는 사라져 어디에 있나/ 개성은 길이 막히고/ 잠두봉 아래 임진강만 흐르는데// 대문 앞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 아직도 희망이 남아/ 솔부엉이 부부 새끼 둘 품었다// 부엉부엉 연천 하늘을 날아/ 철조망을 넘고 시간을 건너/ 비단 배 넘치는 벽란도로 가려나//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 시인 전윤호作<봄날의 서재 中>
2.고려 왕실을 지키는 느티나무 : 이 느티나무는 조선 문종 2년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으로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잠두봉 올라가는 길에 평화누리길 11코스 문주가 조성되어 있고, 그 앞에 경기둘레길 10코스 스탬프함과 이정목, 경기둘레길 연천구간 설명안내판, DMZ 평화의 길 이정목과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경기둘레길 연천구간 장남교~숭의전지 17km,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임진강 연천 9코스 : 금강산 가는 길목에 우뚝하게 솟아있는 고대산(832m) 줄기를 누비는 노선이다. 걸음을 시작하는 곳은 신탄리역이다. 2012년 11월 백마고지역이 개통되기 전까지 경원선 철도중단점이었다. 고대산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임도로 접어든다. 임도는 해발 300m에서 500m 사이로 유순하게 이어진다. 널찍한 흙길과 울창한 숲길이 계속된다. 시야가 터지는 곳에서 만나는 시원시원한 풍광은 고대산이 보내는 선물이다. 세상일 잠시 내려놓고 구름에 달 가듯 걸을 수 있다.
연천 숭의전지 : 숭의전은 조선시대 건립된 사당으로 고려의 4왕(태조·현종·문종·원종)과 공신 16명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의전 정전을 비롯하여 이안청, 배신청, 전사청 그리고 재실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73년부터 1986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매년 춘추계 대제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고려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연천 당포성 : 당포성(堂浦城)은 고구려 시대 축조된 석축성이다. 임진강 약 13m 높이의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 위에 있는 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이는 임진강·한탄강 북쪽에서 발견되는 연천 고구려 3대 성(城)의 공통된 특징으로 삼각형의 평면 형태와 주상절리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한 호로고루 및 은대리성과 매우 유사하다./ 임진강 주상절리 :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곳에서 임진강 상류 쪽으로 수킬로미터의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이 마치 병풍을 쳐 놓은 듯 펼쳐져 있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의 대표적인 지질명소로서 지질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생태적 가치가 뛰어나다. 가을이면 돌단풍이 붉게 물들어 예로부터 임진적벽(臨津赤壁)으로 불려왔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평화의 길 12코스 숭의전지~군남홍수조절지(두루미테마파크), 18.22km : 숭의전지부터 군남홍수조절지(두루미테마파크)까지 연결되는 연천 12코스는 평화누리길 11코스를 활용하는 구간이며 물리적 난도는 보통에 해당함/ 임진강 중상류 주상절리, 야생화군락을 따라 이루어진 코스임/ 약500m의 갓길 있는 왕복2차로의 교량을 건너야 하는 구간이 있어 이용자의 유의가 필요함/ 시점부인 숭의전지는 연천군의 대표 역사문화자원이며, 그 외 DMZ 생태환경을 볼 수 있는 두루미테마파크, 허브빌리지 등을 경유함.
평화누리길 11코스 임진적벽길 문주를 통과해 올라와 오른쪽에 있는 잠두봉 전망대로 향한다.
전설을 읽어보면 썩은 소의 의미와 장소가 분명하지 않다. '쇠밧줄이 썩은' 소(沼)는 잠두봉 동쪽 미산면 동이리에 있다.
이곳의 지형이 임진강 건너에서 바라보면 마치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보인다 하여 잠두봉(누에머리蠶頭)이라고 부른다. 잠두봉에는 숭의전의 건립과 관련된 썩은소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왕족인 왕씨들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뜻있는 왕씨 몇 사람이 태조 왕건의 신위를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돌로 배를 만들어 싣고 예성강 입구에서 바다로 띄워 보냈다. 바다로 나간 돌배는 임진강을 거슬러 황해도 안악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강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동이리의 한 절벽에 이르자 이 배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는데 왕씨 후손들은 배를 쇠로 만든 닻줄에 매달아 놓고 주위에서 왕의 신위를 모실만한 장소를 찾다 날이 저물어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 보니 배는 사라지고 배를 묶어 두었던 쇠닻줄은 모두 썩어 없어져 버렸다. 크게 놀란 왕씨 후손들은 잃어버린 돌배를 애타게 찾으며 강을 따라 내려오다 누에머리 절벽 아래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라 여긴 후손들은 절벽 위에 사당을 짓고 태조의 신위를 모신 후 숭의전이라 이름하기로 하였다. 지금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가라앉은 돌배가 물속에 비쳐 보인다고 한다.
임진강이 백학면 구미리 방향으로 흐르고, 중앙 뒤에 높이 142m 약대산(藥大山), 오른쪽에 능골천의 배수문이 가늠된다.
임진강이 당포성을 거쳐 삼화교 아래를 통과해 아미산(峨嵋山)과 잠두봉(蠶頭峰) 아래로 흘러온다.
잠두봉 전망대에서 잠두봉과 건너편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를 조망한다. 잠두봉 아래는 깊은 소(沼)를 이룬다. 이 절벽 아래 바위면에 한문홍(韓文洪)이 지은 칠언절구 '重作崇義殿(중작숭의전, 숭의전을 중수하고)'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잠두봉 전망대에서 전망을 마치고 아미산으로 오르다가 잠두봉을 뒤돌아본다.
오른쪽에 아미타사 법당이 있고, 평화의 길은 왼쪽 민가 마당을 통과해 '숭의전로'로 내려간다.
산길에서 민가 마당을 통과해 민가를 뒤돌아본다. 아미타사는 마당 왼쪽으로 내려간다.
민가의 마당을 통과하여 앞에 보이는 '숭의전로'로 내려간다.
숭의전로 왼쪽에 평화의 길 이정목과 아미타사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 왕순례 묘(王循禮 墓)가 있다.
초대(初代) 숭의전사(崇義殿使)를 지낸 왕순례(미상~1485년)의 묘이다. 왕순례는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의 먼 후손으로 본명은 왕우지(王牛知)이다. 왕순례는 고려 멸망 이후 지금의 충남 공주에 숨어살다가 문종 (文宗)대인 1451년 숭의전의 제사를 배향할 왕씨의 후손을 찾았을 때 관에 알려진 인물이다. 왕명에 따라 '순례(循禮)'라는 이름과 함께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고, 숭의전사로 임명되어 숭의전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한동안 실전(失傳)되었던 묘는 1988년 주변 도로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나지막한 봉분과 함께 석물로는 묘표와 최근에 건립한 망주석 1쌍이 있다. 묘표 앞면과 뒷면에 쓰여 있는 문자를 통해 이 묘가 숭의전사 왕순례 묘라는 것과 148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순례 묘(王循禮 墓)를 살피고 숭의전로(崇義殿路) 보도를 따라 고개를 넘어 미산면 마전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숭의전로 고개를 넘어 임진강변으로 내려간다. 왼쪽 컨테이너 건물은 토목&건축 사업소인 듯.
토목&건축 사업소 큰두렁쉼터의 사업 사명이 시구(詩句)로 표지판에 적혀 있다. "바람결에 흐터진 안개비 한 톨 한 톨 모아 두렁에/ 큰 물결 되어 산천초목에 알알이 되어 흐르는구나"
숭의전로를 따라 내려가며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삼화교를 조망한다. 아래에는 게스트하우스와 캠핑장이 있다.
임진강 건너편은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 지역이고, 중앙 뒤 파주시 적성면에 감악산이 솟아 있다.
캠핑장에서 임진강 잠두봉과 전망대를 조망한다. 오른쪽 앞은 아미산, 중앙 뒤에 약대산이 솟아 있다.
캠핑장을 지나 숭의전로 보도를 따라 아미리 게스트하우스촌으로 이어간다.
숭의전로 남쪽, 임진강 북쪽 언덕에 연천비경 펜션이 자리하고 있다.
연천군 미산면(嵋山面) 아미리와 마전리의 경계를 이루는 아미교 건너편에 마전리 마을이 자리한다.
연천군 미산면(嵋山面) 아미리에서 아미교를 건너 미산면 마전리(麻田里)로 넘어간다.
숭의전로는 원형교차로에서 끝나고 청정로가 이어진다. 원형교차로에서 숭의전로 진입로 입구에 '황제의 혼이 깃든 마을 아미2리 숭의전' 표석이 세워져 있고, 평화의 길은 원형교차로의 어삼로 횡단보도를 건너 청정로를 따라 이어간다.
원형교차로에서 파주시 적성면 어유지리와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를 잇는 어삼로의 삼화교 방향을 바라본다. 삼화교는 임진강을 가로질러 미산면 마전리와 삼화리를 잇는다. 평화의 길은 어삼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청정로를 따라간다.
마전리 원형교차로에서 어삼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청정로를 따라 앞에 보이는 마전리삼거리로 이어간다. 마전리삼거리 왼쪽에 마전리마을회관이 보인다.
왼쪽은 연천·전곡 방향의 청정로, 평화의 길은 오른쪽 미산면 동이리 방향의 마동로를 따라간다.
미산면(嵋山面) 마전리(麻田里)와 동이리(東梨里)를 잇는 마동로(麻東路)를 따라간다. 오른쪽에 당포성이 보인다.
마동로에 설치되어 있는 대전차 방호벽(對戰車防護壁)에 고구려 기마무사의 사냥 장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마동로의 대전차 방호벽(對戰車防護壁)에 고구려 기마무사의 수렵도(狩獵圖) 장면을 그려 고구려의 기상을 드러낸다.
마동로를 따라 미산면 마전리에서 동이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평화의 길을 벗어나 오른쪽 당포성에 다녀온다.
임진강 언덕으로 올라오니 당포성 입구에 광장이 조성되고 별과 달 조형물이 꾸며져 있다.
당포성 앞에 연천 당포성(漣川 堂浦城) 안내도와 설명안내판 2개가 설치되어 있다.
1.연천 당포성(漣川 堂浦城)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성이다.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은 절벽이기 때문에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로 연결되어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나머지 한 면(동쪽)에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내부를 성으로 사용하였다. 한강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후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았는데,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 보루 등 10여 개의 고구려 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당포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면서 강물의 흐름이 느려져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으로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포성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축조되었지만 신라가 점령한 후에는 성벽을 고쳐 쌓아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2.당포성은 고구려시대 임진강변에 돌로 쌓은 평지성이다. 당포성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의 침식작용으로 높은 수직 절벽이 끊어진 지점에 구축되어 있다. 임진강의 물길이 만들어낸 수km에 달하는 수직절벽은 현무암 주상절리로 되어 있는데, 높이 20여m에 달해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평지로 연결된 부분만을 돌로 쌓았는데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점은 연천 일대 고구려 성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당포성 남쪽 성벽인 주상절리 절벽은 다양한 주상절리의 모양과 함께 하천의 침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당포성 밖에서 당포성을 바라본다. 당포성 남쪽은 임진강, 북쪽은 당개천이 흘러 임진강에 합수한다. 그래서 당포성은 남벽과 북벽은 자연 성벽, 서쪽은 꼭지점을 이루어 동벽만을 축성하였다. 동벽 전망대 옆의 홀로 선 나무는 명품으로 사랑받는다.
당포성 전망대 올라가는 입구에 당포성 동벽 설명안내판과 동벽 관련 사진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당포성 동벽(堂浦城 東壁)은 성내로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면을 차단하는 방어시설이다. 성의 규모는 높이 6m, 폭 31m, 길이 50m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성벽으로 보이지만 석성을 쌓기 전에 먼저 점토를 다져 쌓은 후 그 외면에 석성을 쌓아올린 토심석축의 구조이다. 중심 성벽이 받게 되는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3단의 보축성벽을 쌓았으며 성벽 앞에는 폭 6m, 깊이 3m의 구덩이(潢)를 파서 적이 쉽게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동벽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된 수직의 기둥홈(柱洞)이 관찰되는데, 중국 집안의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평양의 대성산성 등 고구려의 산성들에서 확인된 바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당포성 동벽에서는 수직의 기둥홈이 하부의 확과 세트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는 성벽의 훼손 및 붕괴 위험이 있어 흙을 덮고 잔디를 식재하여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 설명안내판
당포성 북벽 아래로는 당개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 성벽을 이루고 오른쪽 동벽만을 축성하였다. 뒤에 마전리 마을이 보인다.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麻田里)는 본래 마전군 군내면 월곡리(月谷里) 지역으로 마전군의 관아가 있어 '마전읍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월곡리를 마전리로 개명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시켰다. 달골(月谷洞), 외딴말(獨村), 향교말(校村)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달골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마전군이 있었을 때 무당들이 신령을 모시고 받들던 부군당이 있었다 한다. 외딴말은 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다. 향교말은 달골 동쪽에 있던 마을로 마전향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두산백과
당포성 북벽은 당개천이 흘러 임진강으로 합수하고, 왼쪽 남벽은 임진강이 흘러 자연 성벽을 이룬다. 그래서 당포성은 동벽만을 축성하여 성 내부는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포성 남벽은 임진강이 흐르는 자연 성벽이다. 북쪽의 당개천이 뒤의 삼화교 아래 당포나루에서 임진강에 합수하여 당포성 내부는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뒤에 아미산 맨 왼쪽 뒤에 잠두봉 전망대가 가늠된다.
미산면 동이리 당포성 남벽 건너편 미산면 삼화리 임진강 남벽도 주상절리를 이룬 듯. 왼쪽 맨 뒤에 파주의 감악산이 보인다.
미산면 동이리 당포성 남벽 건너편 삼화리의 임진강 남벽도 주상절리를 이룬 듯. 위쪽 임진강에 '썩은소(沼)'가 있으며, 오른쪽 맨 뒤에 파주의 감악산이 솟아 있다.
당포성 동벽 전망대에서 성 밖 동쪽을 바라본다. 앞 둔덕은 고려시대 건물이 있었던 터이며 뒤쪽에 넓은 뜰을 조성하였다.
당포성 동벽(堂浦城 東壁) 전망대 옆의 홀로 선 나무는 명품이다. 수종은 팽나무라고 한다.
당포성 외부 광장에 별과 달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초승달 조형물 안에 동벽 위의 '나 홀로 팽나무'를 담았다.
당포성 탐방안내소와 화장실 옆으로 당포성 출입로가 있다.
마동로의 당포성 출입구로 나가 마동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출입구에 댑싸리들이 조성되어 있다.
마동로의 당포성 출입구 앞에 '아! 고구려 땅 당포성쉼터' 음식점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폐업한 것 같다.
마동로를 따라 당포성쉼터를 지나오면 마동로 북쪽 산기슭에 왕산초등학교 마전분교가 있다.
왕산초등학교 마전분교(旺山初等學校 麻田分校)는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597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마전분교는 1979년 11월 30일 3개 교실과 숙직실, 화장실, 창고 등을 준공한 후 1980년 3월 12일 왕산국민학교 마전분교로 개교하였다. 마전분교는 설립 후 약 11년간 분교로 운영되다 폐교된 역사가 짧은 학교다. 학교 운영 중 2채의 관사가 지어졌는데 1983년 7월과 1985년 6월에 준공됐는데 1985년에 지어진 관사는 대통령 하사금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운영 당시 총 9회에 걸쳐 11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폐교 당시에는 남자 8명과 여자 19명 총 27명이 왕산초등학교에 편입되어 수업했다. 졸업생까지 합해 3학급 33명의 학생과 4명의 교직원이 근무했었다. 마전분교는 11년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학교 규모도 설립부터 폐교시까지 변함없이 3개 학급의 교사건물을 유지했으며 지금도 건물은 크게 변함없이 유지 활용되고 있었다. 현재 학교건물은 계절학교(하절기)로 임대 활용되고 있었다. 무용과 미술은 물론 밴드와 대학생 동아리(풍물패) 등에서 활용한다고 한다. 학교 건물이 크게 변한 점이 없어 다행스러웠으며 주변이 군사시설 보호구역이기 때문에 별다른 개발여지는 없어 보였다. - 경기도교육정보기록원 2007.10.05.
당포성에서 나와 고구려쉼터 음식점 앞을 거쳐 포플러나무들이 줄지어선 왕산초등학교 마전분교 앞을 지나왔다.
마동로 남쪽에 동이리훈련장 표지판 옆에 미강서원지(湄江書院址) 1.7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미강서원(湄江書院)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허목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691년(숙종 1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허목(許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3년 ‘湄江(미강)’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당시 사우만 철거되어 위패는 그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으며, 강당과 재실은 보호되어 있었다. 6·25사변으로 소실되어 1970년 다시 설단하고 단비(壇碑)를 세웠다. 현재까지 복원은 하지 못하였으나 매년 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만여 평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미강서원지(湄江書院址) 입구를 지나면 유엔군 화장장시설 100m를 알리는 표지판이 마동로 북쪽 길가에 보인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 앞으로 직접 가서 살피지 못하고 입구에서 굴뚝만 보고 그냥 지나간다.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있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전사자들을 화장하기 위해 건립하여 휴전 직후까지도 사용한 화장 시설이다. 2008년 10월 1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벽과 지붕이 훼손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화장장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주변의 돌을 이용하여 막돌 허튼층쌓기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유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유엔군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시설로 가치가 있다. - 위키백과
유엔군 화장장 시설 앞을 지나고 그 남쪽에 태양광시설이 설치된 축산농장을 지나 마동로를 계속 따라간다.
군부대 입구에 동이리 배울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평화의 길은 마동로를 따라 동이리 배울마을로 이어간다.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東梨里)는 본래 마전군 군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부리(中部里), 동부리(東部里), 이동리(梨東里)를 병합하고 '동이리'라 하여 미산면에 편입되었다. 1개의 행정리 3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굴산(金窟山, 金堀山)과 임진강의 큰 여울인 밤여울(栗灘)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동부리(東部里), 큰배울 등이 있다. 큰배울은 동이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지형이 큰 돛단배 형상으로 산 안쪽의 마을이라는 뜻이 있는 지명이다. 6·25전쟁 전에는 개성 왕씨(開城 王氏) 8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마전군 때에는 군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마을이었다. 동부리는 큰배울 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 두산백과
마동로 왼쪽에 '생활이 예술인 수국꽃마을'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길 오른쪽에 양돈 진전농장이 있다.
왼쪽은 마동로의 동이리 마을 종점이고, 평화의 길은 오른쪽 마동로196번길을 따라 전곡·적성 방향으로 이어간다.
마동로196번길을 따라 동이대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앞쪽에 국도 제37호선이 보인다. 군남홍수조절지 14.7km 지점이다.
마동로196번길의 배울교를 건너 미산면 동이리 배울마을을 통과하여 동이대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큰배울은 동이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이곳의 지형이 큰 돛단배 형상이라고 한다. 산 안쪽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배울은 그 뿌리가 머리와 산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 ‘받'에서 나온 것으로, ‘받'은 ‘박', ‘백', ‘배' 등으로 음이 변해 왔다. ‘배'와 ‘골짜기'의 뜻인 ‘울'이 합하여 ‘배울'로 불리던 것이,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옮기면서 ‘이동(梨洞)'과 ‘주동(舟洞)'이 되어 ‘큰 돛단배의 형국이라서…' 또는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라는 풀이를 낳게 되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개성 왕씨(開城王氏) 8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마전군 당시 군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마을이었다. - 연천군청
평화누리길 순환코스와 평화의 길 표지판, 평화누리길 임진적벽길 순환코스 안내판이 전신주에 매달려 있다.
임진적벽길 순환코스, 8,3km, 총 2시간 50분 소요 : 임진적벽길 순환코스는 연천군 동이리 주상절리를 주변으로 걷는 순환코스이다. 주상절리는 27만년 전 화산폭발로 인해 용암이 흘러 생긴 것으로 임진강과 한탄강의 여러 주상절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해질녘 햇빛이 직접 비추면 주상절리 전체가 황금색으로 변해 절경을 보여준다.
마동로196번길은 임진강 앞에서 끝나고, 동서를 달리는 국도 제37호선 동서로가 임진강을 가로지른다. 평화의 길은 앞쪽에서 왼쪽으로 꺾어 임진강 주상절리 관광센터 신축현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마동로196번길을 따라 앞의 임진강 자연농장 앞을 거쳐 임진강 주상절리 관광센터 신축현장으로 이어간다.
마동로196번길을 따라 천년초를 재배하고 가공판매하는 임진강자연농장 앞을 지나간다. 중앙 뒤에 금굴산이 보인다.
높이 195.7m 금굴산(金窟山, 金堀山)은 미산면 동이리와 우정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쇠파리산, 미두산(尾頭山), 봉화산(峰火山)으로도 불린다.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금광과 철광이 개발되었으며, 그때 채굴로 인하여 산 내부가 텅 비어 있어 ‘공굴산'으로도 불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마전군편에는 ‘미두산(尾頭山)'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대홍수로 인하여 온천지가 물바다였는데 산 정상만이 소 등에 앉은 쇠파리만큼 남았다 하여 ‘쇠파리산'이라는 별칭과 함께, 고려시대에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봉화산'이라고도 불린다. - 연천군청
동이대교 교각이 솟아 있고, 임진강을 건너는 현수교 동이대교가 미산면 동이리와 군남면 남계리를 잇는다. 임진강 주상절리 입구 왼쪽에 임진강 주상절리 관광센터 건립공사가 진행 중이다.
위에는 동이대교, 그 오른쪽에 수상레저 카약체험 매표소가 있다. 임진강 아래 왼쪽 뒤에 한탄강을 건너는 남계대교가 전곡읍 마포리와 군남면 남계리를 잇는다. 임진강이 한탄강을 합수하는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임진강에 도감포(都監浦)가 있다고 한다.
도감포[都監浦, 陶哥湄, 陶家湄, 甕岩灘] : 남계리 남쪽,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던 포구 마을. 옛 지리지나 여러 기행문에는, 이곳 합수머리에서 임진강을 따라 전곡읍 마포리 지역에 넓게 펼쳐진 꽃답벌과 미산면 동이리 썩은소 앞의 강폭이 좁아지는 지점까지의 지형이 항아리의 형태와 닮았다 하여 '독안이[壺內]' 또는 '호구협(壺口峽)'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항아리와 닮았다고 하는 지형 안에 있는 도감포의 원래 의미는 '항아리 형태의 지형 안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독안개[壺內浦]' 또는 '독안이'로 불리던 것이 '도감', '독암'으로 음이 변하여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도감포' 외에 여러 한자 명칭으로 표현되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임진강을 따라 올라온 새우젓, 소금 배들이 정박하며 연천 지역에서 생산되었던 곡물, 땔감, 도자기 등을 물물교환하던 큰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에는 제주 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 연천군청
군남면 남계리 임진강 절벽에 2km에 걸쳐 병풍처럼 주상절리가 형성되어 있다. 이 주상절리를 미산면 동이리 지역에서 감상할 수 있다. 왼쪽에 임진강 주상절리 관광센터 신축현장이 있으며, 평화의 길은 임진강 제방길을 따라간다.
왼쪽에 화장실, 오른쪽에 쉼터정자가 있다. 오른쪽 뒤의 산은 금굴산(金窟山, 金堀山)이다.
임진강 주상절리 전망대에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는 재인폭포, 백의리총, 아우라지 베개용암, 좌상바위, 동막리 응회암, 차탄천 주상절리, 은대리 판상절리와 습곡구조, 전곡리 유적(토층), 임진강 주상절리, 당포성 주상절리가 포함된다고 한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은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주상절리와 폭포 등이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게 펼쳐진 현무암 협곡지역으로 지질명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무암 주상절리는 바닷가에 나타나지만 이곳의 현무암 주상절리는 강 주변에서 볼 수 있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이다. 또한 이곳은 한반도의 형성과정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질시대의 암석들도 볼 수 있어 한반도의 지질교과서로 알려져 있다./ 지질공원이란 특별한 지구과학적 중요성·희귀성, 또는 아름다움과 교육적 가치를 지닌 지역으로서 생태·고고·역사 그리고 문화적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는 특정한 지역을 포함한다.
임진강 주상절리,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4-1 : 임진강 주상절리는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임진강 상류 쪽에 위치한다. 한탄강 지질공원의 가장 큰 특징인 현무암 주상절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높이 25m, 길이 2km에 걸쳐 자연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또한 예로부터 가을이면 돌단풍이 주상절리 절벽을 붉게 물들여 "임진적벽"이라 불리며 널리 알려져 왔다. 이곳에 발달한 주상절리는 옛 한탄강을 따라 흐르던 용암 중 일부가 임진강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임진강 주상절리에서는 넓은 용암대지와 더불어 다양한 모양의 주상절리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상절리(柱狀節理)란 기둥 모양의 암석이 촘촘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을 말한다. 뜨거운 용암이 지표면을 따라 흐르며 점차 식는 과정에서 수축하여 규칙적인 틈이 생겨나는데 이 틈을 절리라고 한다. 이 절리를 따라 비나 눈 등 수분이 스며들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침식과 풍화가 계속되면 결국 절리를 따라 현무암 덩어리가 하나 둘 떨어져 나가 높이가 다른 돌기둥이 생긴다.
오른쪽에 임진강주상절리 관광센터 신축공사장, 중앙에 동이대교, 맨 뒤에 임진강과 한탄강 합수지의 남계대교와 도감포가 보인다. 임진강주상절리관광센터는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로, 공사 기간은 2025년 6월 26일까지라고 하는데 완공은 어려울 듯.
전망대에서 임진강 제방을 따라가다가 앞쪽 주택 앞에서 임진강 둔치로 내려간다. 왼쪽 뒤에 금굴산이 이어진다.
임진강 제방길에서 임진강 둔치로 내려가, 임진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수직 절벽, 주상절리를 더 가까이서 살핀다.
건너편 군남면 남계리 임진강 절벽에 주상절리(柱狀節理)가 25m 높이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주상절리는 10만∼27만 년 전 한탄강을 따라 흘러온 용암이 임진강을 만나 역류해 생성된 것이라고 한다.
임진강 주상절리는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임진강 상류 쪽으로 높이 25m, 길이 2km에 걸쳐 자연병풍처럼 펼쳐진다. 이곳에서 한탄강 지질공원의 가장 큰 특징인 현무암 주상절리를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을이면 돌단풍이 주상절리 절벽을 붉게 물들여 '임진적벽'이라 불리는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 둔치길을 따라가며 임진강 남쪽의 군남면 남계리 지역의 임진강 주상절리를 살핀다. 주상절리대 위에 레저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2020년 7월 7일, 한탄강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승인됐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은 제주도, 청송, 무등산에 이어 국내에서 4번째로 지정된 세계지질공원이자, 2015년 12월 환경부로부터 제7호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된 국내 최초의 강을 중심으로 한 지질공원이다. 유네스코에서 인정받은 지역은 한탄강이 흐르는 경기도 포천시와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 일대이며, 총 26곳의 지질명소가 등재되었다. 그 중 경기도 연천군 소재지로는 당포성, 임진강 주상절리, 은대리 판상절리와 습곡구조, 차탄천 주상절리, 전곡리 유적 토층, 좌상바위, 아우라지 베개용암, 재인폭포, 백의리층, 동막골 응회암이 있다. - 연천군공식블로그
금골산 자락 임진강 둔치길에서는 금골산 벼랑의 낙석을 주의하라는 안내판이 몇 곳 세워져 있다.
금골산 벼랑의 현무암도 침식과 풍화 작용에 의하여 구멍이 나 있거나 절리 현상처럼 각진 모습도 보인다.
금골산 벼랑의 이끼군락지에서 눈이 녹은 물이 떨어져 작은 이끼폭포를 이룬다.
임진강 주상절리 북쪽 끝 남계리 주상절리대에 여러 레저 시설물들이 자리한다.
동쪽 연천군 군남면과 서쪽 미산면 지역 사이로 임진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오고 있다.
건너편 오른쪽은 군남면 남계리, 중앙 위쪽은 군남면 황지리 지역이다. 중앙 왼쪽 임진강변에 물빛캠핑장이 있으며, 그 왼쪽에서 죽대천이 임진강에 합수하는 듯.
임진강 서쪽 둔치길을 따라 미산면 동이리 지역을 통과한다. 맨 오른쪽 건너편의 물빛캠핑장과 죽대천을 가늠한다.
미산면 동이리에서 우정리로 넘어왔다. 임진강 서쪽 둔치길에서 출입문을 통과해 임진강 제방으로 올라간다.
임진강 제방 출입구 역할을 하는 평화누리길 11코스 임진적벽길 문주를 통과하여 제방으로 올라간다.
임진강 제방 출입구 '평화누리길 11코스 임진적벽길 문주' 옆에 평화누리길 스토리텔링 안내판과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군남홍수조절지 11.1km 지점이다. 임진강 건너편 군남면 남계리 지역의 임진강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용암과 시간이 빚은 조각품인 주상절리와 함께하는 전쟁과 평화이야기 : 높이 40m, 길이 1.5km에 이르는 동이리 주상절리는,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 이곳에서 자리를 폈다. 불길에 휩싸였던 견고한 화상의 흔적은 신비한 조각품이 되어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양한 절경을 만들어 낸다. 동이리 주상절리와 마주 보고 있는 야트막한 금굴산은 한국전쟁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51년 4월 22일부터 30일까지 영국군 제29여단에 소속된 벨기에 룩셈부르크 대대가 중공군 제19 병단(북한군 제1군단 배속(配屬))과 혈전을 벌였다. 이곳을 목숨을 걸고 잘 방어함으로써 중공군의 돌파를 3일간이나 저지하여 유타(Utah)선과 와이오밍선으로 진출한 미 제1군단의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영평천남안의 캔자스 선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평화누리길 문주 앞에서 임진강 제방길을 따라 미산면 우정리 들녘을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