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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
눅1:16~17
오늘 본문은 교회와 이 시대를 조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갑자기 천사가 자식 없는 부부에게 찾아와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라고 소개합니다.
천사가 바로 이 부부에게 찾아와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이름은 요한으로 지어라!” 그를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할 것이다. 주 앞에서 큰 자이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너무 놀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돌아오게 하다”라는 의미는 주요한 포인트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핵심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책무에 주요한 요소입니다. 둘로 압축해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복귀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돌리다”, “바꾸다”입니다.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복귀입니다. 자신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는 즉시 가던 길을 멈추고 반대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죄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닫고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인간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같은 차원에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하며 강권하는 전도 행위를 터부시 합니다. 너무 강제적이며 극성스럽다고 하며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사회가 거부하는 경향이 조성되다보니 이 같은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회가 적극적인 전도행위에 소극적인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각 자 교회들을 바라보십시오. 혼자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교회 찾아 와서 예배드리는 자가 많은가요? 지극히 소수입니다. 이는 구원이 더디게 진행되고 영혼 구원을 방임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성경은 인간 스스로는 구원에 도달 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부분 누군가를 통해서 부르십니다. 구약에도 노아를 통해서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멈출 수 없고, 스스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기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주님의 지상명령으로 성도의 실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먼저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입니다. 이 때 심령은 호흡, 숨, 기운으로써 영의 기질입니다. 바로 성령에 붙잡힌바 된 영입니다. 영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차고 넘치는 충만의 상태로써 심령입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떤 상태에서 진행을 해야 하는지를 잘 지적해 주는 내용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서 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변화 된 심령으로 해야 만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능력입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안 될 것 같은 문제가 가능하게 되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열정, 노력 등으로 이루어지는 과학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을 위한 능력을 말합니다. 엘리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엘리아의 갑절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풍부, 풍성, 권능, 강력입니다. 영적인 풍성, 풍부, 권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적적인 능력의 문제는 종교적 돈벌이로 전락되었고, 선정적으로 선동하듯이 너무 값싼 복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소위 장사 하는 이적놀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대부분의 흐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적 이적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적입니다.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종하도록 하는 이적이어야 하고 능력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이적이 판을 치고 사람이나 인간적인 요소가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는 신앙의 기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다음의 조건은, “주 앞에 와야” 합니다.
왜? 주님 앞에 와야 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 온대로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자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예비하는 자로 통칭 됩니다.
우리가 아마존 같은 거대한 숲으로 구성 되어 있는 밀림 지대를 들어갈 때 맨 앞 선 사람이 칼자루 하나를 들고 길을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독충들이나 뱀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크고 작은 가시에 찔리거나 억센 나뭇가지들에 부딪히면서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비교적 편하게 따라 갑니다. 이것은 길을 열어가는 사람의 희생입니다.
기러기들은 기억자 형을 하며 앞을 향해서 날아갑니다. 기억자 맨 꼭지점에서 날개 짓을 하는 기러기의 위치는 그야말로 험난한 위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바람을 가장 먼저 받아서 그것을 감당하며 앞으로 행진을 하는 대형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종결 되고 신약시대로 나아오는 대 전환점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시대적으로 얼마나 사람들이 강퍅해 져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법도, 질서도, 선지자와 제사장도 없이 혼란이 주도하던 시대가 막바지에 치달아 오르던 시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악하고 강해지면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져가고 사회는 불법이 성행해져 갑니다. 부정부패가 난무해집니다. 이때 사람이 불안해 지면서 사회에 까닭모를 공포심이 조성되고 부정적인 시각들이 강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하시던 시대적 상황이 그랬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메시아를 예고해 주었지만 이스라엘의 형편은 메시아를 환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세례요한이 주님 바로 앞에 와서 메시아의 길을 선언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악해져 있던 이스라엘 사회 안에 주님의 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전제 조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전제 조건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영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는 영의 사람들 말입니다. 엘리야의 영과 동일한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나는 이적적인 능력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서 돈 벌이, 혹은 자신이 유명해지는 종교적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이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야 하며, 이것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에 있어서 전제조건이라면, 그 다음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를 통해서 나타나는 변화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 사람, 그 가정, 그 사회, 그 나라 안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의 증거, 혹은 실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1.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신앙의 계승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바르고 온전해 진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로 전이 되는 신앙의 계승입니다. 신앙이 복원되고, 정상화 된 그 관계가 아들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부자 관계입니다.
신앙의 유전적 관계를 의미함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앙의 계대 잇기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앙의 계대 잇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이어가는 이 계보 역사야 말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변화의 내용에 첫 번 째 요소입니다.
다음은 가정의 회복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고 정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가정의 천국 상태입니다. 헌데 요즘 시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대립으로 치닫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갈라지게 하는 성질이 강하게 작용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UFO 교주라는 사람이 십계명을 만들어서 세계에 유포를 했습니다. 거기 3계명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전 세계 청소년들로 하여금 “아버지 권위를 불신하고 대들도록 조장하라!” 입니다. 세계 각 나라 모든 사회 각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가르치도록 조장(助長)하는 것을 조성(造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인간이나 가정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질서가 확립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질서입니다. 거룩한 질서입니다.
복음을 통한 성령의 강렬한 유전 인자가 신앙으로 바로 세워진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 그대로 전이 되게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순리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가정은 아버지의 권위가 정상이 되는 가정입니다. 지극히 건강한 신앙의 계대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회복 된 가정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 올 때 일어나는 변화적 현상입니다.
2.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이는 반항적인 자의 경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항적인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이 제멋대로입니다. 난폭하고, 파괴적이고, 무지막지 합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경향을 불순종으로 소개합니다. 하와와 아담이 맨 처음으로 저지른 반항의 기질입니다. 이것을 타락의 기질이라 말합니다.
불순종, 대립, 반역의 기질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사랑에 대해서 잘 말하고 사랑을 잘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반항 기질은 끝까지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항기질입니다. 한 때는 선으로 가장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죽는 순간으로 다가 갈수록 반역 기질로 나타납니다.
인간적으로는 최대한 부드럽게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변질되어 가는 반역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인생을 마감합니다. 신앙의 정도에서 떠나는 노년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반역기질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멀어져서 불법을 행하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를 성경은 강퍅한 심령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로의 마음’을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 같이 굳은 심령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교만하게 제멋대로 하는 강퍅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의 심령은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인의 슬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슬기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삶의 지혜로 연결해서 설명하는데 그칩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기독교가 제대로 힘을 펼치지도 못하고 일어서다 사라지는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의 슬기는 양심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통찰력입니다. 도덕적으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입니다. 도덕적이다 할 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속에서 선과 악의 구별을 통해서 죄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양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양심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양심에 의해서 개혁을 단행했고, 끝까지 이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습니다. 이 양심이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 통로입니다. 이 양심을 통해서 자연 속에서, 사회도덕이나 인간들이 내놓는 사상적 원리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편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정확하게 인도하고 답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특별 계시로 자신을 우리 성도들에게 자세하게 보여 주셨고, 결국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인간의 양심이 환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는데 양심의 문제가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비추는 양심을 통해서 우리의 언행이나 삶이 통찰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이러한 인간들이 되도록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여 받아들이면 그 영혼의 양심이 하나님께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발전하고 반응하는 지혜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심적 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고 그 가운데서 발전되어 가능 영적 훈련입니다. 이것을 도덕적으로 흥미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정을 두고 관심을 기우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순종, 복종, 관계라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신앙 양심의 반응기질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께 대한 ‘선한 마음’, ‘유들유들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는 예배자들’로 만든 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동족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다른 민족 안에 구원받을 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양심들이 살아나고,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하게 반응하는 양심들이 되도록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국어로는 ‘카오 진’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의인의 슬기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멀어지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멀어지고, 굳어지고, 강해지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소개합니까? 강퍅한 마음, 돌 같이 굳은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점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지다, 굳어지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중국말로 “一步一步跟石头一样的心(이부 이부 건 쓰토우 이양더 신)”입니다. 이것은 점점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점점 괜찮다고 느껴지고, 그러다 점점 스스로 마음을 놓으면서 안심하고,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돌처럼 굳어지는 마음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불순종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리는 돌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멀어지는 자가 아니라 가까워지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입니다. 설교를 통해서든, 기도를 통해서든, 복음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슬기입니다. 2016년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고, 우리 한국교회 안에 이 같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정말 그렇습니다. 2015년 개신교 신도수가 17만이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합동측만 해서 13만이 줄었습니다. 요 근자에 합동이 손상을 입는 사건들이 많이 터졌습니다.
그럼 왜, 우리 개신교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양심의 사람들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위한 사람들이 없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 같은데 진정한 주님의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빌립보서 2:21에서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한탄조로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세워진 우리 모두는 목적이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까? “주를 위하여 세워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까? 복음 전파의 목적입니다. 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까? 주를 위하여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왜, 내가 교사로 세워졌습니까? 왜, 내가 집사로 세워졌습니까? 왜, 내가 성가대로 세워졌습니까? 주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준비하리라”라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본래 예비하다 차원의 준비입니다. 이것은 사역 동사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비시키다”, “준비시키다”라는 성질로 주를 위하여 세우는데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예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주를 위하여 준비 된 자들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입니까? 오늘 이것은 말씀의 주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시대는 자신의 신선도를 높이려는 차원에서 목회직을 덜 중요한 듯한 발언들을 하는 목회자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기 영합에 부합하는 정치적 발언입니다. 그렇게 주장하거나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이 꼭! 특별한 사람인 냥 상품화 시키는 종교적 인기몰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목회직 자체를 매우 귀하고 주요한 핵심적 위치임을 줄기차게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 같은 인물들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는 이 목회직을 죽이려 하는 기운들이 태동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인 이유가 아니라 기존 목사들의 행위가 잘 못 되었음을 이유로 해서 적용시키려 합니다. 성경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들 때문에 교회 환경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교회 영권이 죽고 인권이 강해짐으로 교회가 그 사회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힘을 가져오지 못하는 현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덩달아서 사회가 옛 죄악의 사회로 돌아가는 혼란의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가랴’와 ‘엘리사벳’ 같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가문이었습니다. 절차에 따라서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주를 위하여 준비하게 될 사람들을 세우는 인물인 세례요한이 출생 한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할 사람들을 준비하는 사람들, 우리가 지금 주님께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할 때, 이들이 다음을 이어서 주님을 맞이할 사람들을 준비해 가는 것입니다. 누가 이 같은 역할을 하며 이들을 가리켜서 뭐라고 합니까?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두 구절은 오늘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면전의식으로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흠이 없는 삶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성도의 최고의 헌신적 삶으로써 하나님의 면전 의식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로 다가오는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면전에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안정 된 자세를 말합니다. 이는 원어에서 전치사 “엔(en)”이란 의미인데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이 없는 안정 된 신앙 자세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생 동안 성결과 의와 두려움이 없는 삶의 자세로 ‘신앙의 안정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를 행전에서는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 면전에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는 성도들, 바로 이 같은 자들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자들을 준비해야 하는 ‘사가랴’와 같은 종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 기반은 이 같은 종들을 배제하는 시대가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반면에 성경의 지적대로 삯군들을 세우는 불법의 힘이 주도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비난하는 힘에 끌려 다니는 스스로 신앙의 모순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말씀이 귀합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선교지 새벽 기도 후 말씀을 묵상하면서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접하는 여러분들의 심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데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입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심령은 영성을 말하는데 성령에게 붙들린바 된 영입니다. 능력은 이적적인 힘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신앙의 계보가 이어지고, 화목한 가정의 회복 된 역사가 진행됩니다. 다음은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강퍅한 자들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들유들한 마음들로 변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들을 준비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로 나오는 것은 주를 위하여 세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나를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처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오늘 지상교회 안에 주어진 절대적 사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헌데 대 다수 교회들이 이 같은 영적 배경을 가지고 교회를 우상화 하고, 목회자 자신의 영달이나 성도들의 감투싸움의 현장을 만들어가는 일 때문에 선교나 전도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혹은 세상 어떤 성질들이 목적을 추구하는 교회 전도 문제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나 전도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되는 교회적 현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해야 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통곡하며 온전한 교회적 현실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교회의 영권이 회복되는 역사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진정한 교회 부흥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써 바로 세워지는 성경적 힘이 주도하는 진정한 교회적 환경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올 한 해 동안에 강렬하게 일어 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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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