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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出征)8
조정의 8만 대군은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으로 명명되어 중경에서 출정식을 마치고 천호를 건너 용야(容野) 평원에 집결했다. 천원대원수로 제수된 마동치(馬同治)는 처음으로 통칭 천원군의 장령들을 한곳에 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천원대원수 마동치요.”
―대원수를 뵈옵니다!
굴강한 인상의 마동치는 장군들의 복창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 결정한 대로 갑주(甲州)를 거쳐 그곳에서 앙신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소. 그러나 중간 집결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으니 제장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
“마 원수께 황군 소장(小將) 오산(吳珊)이 아룁니다. 원주와 갑주는 관도가 잘 닦여 있습니다. 또한 갑주에서 2만이 출병했다 하니 저희 천원군은 갑주에서 앙신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포란산(抱卵山)에 일단 집결한 뒤 거기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앙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포란산이라…. 다른 의견 있으시오?”
중간 집결지는 쉽게 결정되었지만 문제는 군의 편제였다. 평안천원군의 병력은 서병, 금군, 그리고 황군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 군의 편제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원주 조정에 속해 있는 금군과 황군은 똑같은 편제를 사용하였으나 금군 쪽 직급이 황군보다 높다는 것이 문제였고, 서병들을 기준으로 하면 더욱 혼란했다. 백호문의 경우를 보아도 병력은 겨우 6천 조금 넘는데 참장이 다스리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오장(伍長) 직급을 가진 자가 황군 쪽에서는 10인 미만의 졸(卒)을 거느리고 있지만 금군에서 5인 미만이었다. 십장(什長)은 황군이 30인, 금군이 10인이었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금군 참장인 라혼은 1만 2천을 거느려야 했다. 실제 백호수문금군 6천의 머릿수는 7천의 황군을 거느린 참령보다 적었다. 금군과 황군의 직위는 모두 조정에서 품신되었기에 함부로 건드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서병들의 직급까지 끼어들면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이제 모두 다가 천원군이오. 그러니 직급 가지고 싸울 일이 아니오.”
“대원수님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함부로 건드릴 수도, 그렇다고 서로 익숙지도 않은데 서병들을 금군 밑에 두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서병의 편제를 황군과 맞추고 금군은 별동대로 운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쪽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라혼은 저들이 직급을 가지고 문제 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병과 황군이 하나로 합쳐 운영되면 서제의 사람인 대원수 마동치에 의해 2만 마군(馬軍)으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이 서제 쪽에 완전히 귀속될 것이 뻔했다. 상경의 금군들은 보군 1만 4천, 마군 6천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독립된 별동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지만, 보군으로 구성된 서병과 마군으로 구성된 황군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보병이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기병이 위태롭고, 기병을 가지지 못한 보병은 그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갑주의 3만 서병(鼠兵)이 더해지면 천원군은 서병의 세력이 될 공산이 컸다. 그런 그들의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금군대장군인 대장(大將) 금영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군대장께서는 어찌 생각하오?”
“서로 차이가 있으니 따로 운영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것은 상관없습니다만, 군마 1천필 정도만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군마를? 그리하지요.”
“감사합니다.”
마동치는 2만 황군이 서병이 되었기에 금영월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것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자 명일 아침에 진군하기로 하고 장령들은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라혼도 별말 하지 않고 막사를 빠져나와 자신의 막사로 향하다가 금영월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려 세웠다.
“라혼 참장!”
“금 대장님!”
“마원수가 우리 금군을 별동대로 삼았듯이 나도 자네의 백호대를 따로 운영하려 하네. 그러나 백호대는 전원이 보군이니 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야. 자네가 직접 가서 아까 내가 마 원수에게 요구한 군마 1천필로 기병을 편성하게. 백호문의 금군들은 기마술도 훈련한다고 들었으니 가능하겠지?”
“문제없습니다.”
“좋아!”
2만 금군은 현무문의 기병 6천과 보병 2천, 주작문과 청룡문에서 각각 보병 3천씩 하여 6천, 그리고 백호문의 6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작대와 청룡대는 금영월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지만 백호대는 처음부터 독립된 곳이기 때문에 백호대가 따로 운영될 거라는 것쯤은 라혼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라혼은 백호문의 백호둔을 토귀에게 맡기고 토금전장(土金錢莊)의 명의로 흑막 제평에서 군마 6천필을 이미 구해놓고 있었다. 백호대의 군사들은 이미 전원이 기마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장에서 기병으로 써먹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단순히 말을 타는 것과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군이 앙신성에 들어서기까지 족히 넉 달은 걸릴 것이므로 라혼은 그 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자면 본대와 다른 길로 최종 집결지인 갑주와 앙신성의 경계에 있는 포란산까지 가야 했다.
“이런, 망할! 금군에게 이따위 일이나 시키려고 별동대네 뭐네 하며 만든 건가?”
주작대의 대장인 정령 상초(狀初)는 그 특유의 고리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별동대라고 이름 붙은 2만 금군에게 내려진 첫 번째 임무는 군수 물자 수송이었다.
“고정하게. 그것은 아주 중한 임무일세. 고금을 통틀어 배고픈 군대는 힘을 쓰지 못하는 법일세.”
“하지만 대장님….”
“그만!”
금영월은 계속 불만을 토해낼 기세를 보이는 상초의 말을 끊고 무거운 어투로 말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분란을 일으킬 만한 발언을 하는 짓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조정의 싸움을 여기까지 끌어들여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조정의 일은 조정의 일, 이제부터 우리는 금군이 아니라 천원군이야.”
라혼은 그렇게 말하는 금영월 또한 그리 속이 편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자 수송은 저희 백호대에서 맡겠습니다.”
“라혼 참장이 그리 말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괜찮겠소?”
“어차피 원주를 지나 갑주로 가는 길입니다. 원주와 갑주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곳이니 백호대의 병력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수송해야 할 물자대부분이 화살과 병장기 같은 전장에서나 쓸 물자들이니 그저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금영월은 백호대장 라혼의 뜻을 받아들여 백호대에 물자 수송을 전담시켰다. 보급 물자들은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으면 그뿐이기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고 가벼운 차림으로 말을 타고 가면 포란산까지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나머지 시간은 백호대를 훈련시키는 데 보내면 되었다. 라혼은 천원군이 떠나고 만 하루 뒤에 상경에 모인 물자 전부를 인수받아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고 제평에서 사들인 군마를 백호대에 지급했다. 백호대의 금군들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짐수레와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물론 일반 병졸들과 달리 깨어 있는 문관들은 무슨 수를 썼는지 몹시 궁금해했으나 지은 죄(?)가 있어 감히 묻지 못했다.
라혼은 백호대를 천원군 본대와는 다른 길을 통해 포란산으로 병(兵)을 몰아 생각했던 것보다 늦은 17일 만에 포란산과 하루 거리에 있는 계골곡(谿汨谷)에 도착했다. 계골곡은 무림 방파 중 한곳으로 흑도에 속하는 무리들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주군, 이곳이 바로 계골곡입니다. 한 몇 달 숨어 지내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좋은 곳이다. 만력, 곡주에게 이곳을 잠시 빌린다고 전해라!”
“존명!”
라혼의 명을 받은 만력은 백호영의 무사들을 데리고 곡(谷) 안으로 진입했다. 계골곡 입구엔 출입자사(出入者死)라는 섬뜩한 경고 문구가 있었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만력이 아니었다. 라혼은 낭인 무사 출신인 백호영 무사들의 의견에 따라 이곳을 점거할 생각이었다. 이곳에 있는 흑도 무리들은 기껏해야 5백명이 넘지 않았기에 아무 문제 없었다. 이미 백호영의 1천명 무사들의 실력은 개개인이 일류 고수 수준을 상회하고 있었으니 무림 방파로 치면 능히 천하를 오시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만력과 웅장모, 초강남 등 백호십일걸이라 일컬어지는 무사들의 수준은 이미 절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순수하게 무력만 따진다면 천하제일성 철혈사자성과 자웅을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다 강시지존의 강시 군단과 아직도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백호나한까지 가세하면 계골곡의 흑도 무리를 상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
“뭐야! 백호나한이 왔다고?”
“토벌군인가?”
“아닙니다. 사자로 온 조산투귀의 말로는 이곳에 잠시 머물겠답니다.”
계골곡은 난데없는 군졸들의 출현으로 발칵 뒤집혔다. 보통 군졸들이 그러면 콧방귀도 안 뀔 일이었지만 상대는 강시지존을 패퇴시킨 백호나한이었다.
“이런 망할!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거늘…. 백호나한은 그런 불문율도 모르는가?”
“하지만 때가 좋지 않습니다. 저들을 거부했다가 백호나한이 자신의 무공을 믿고 소란을 피우면 자칫 인세로 오인받아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8만 대군에 의해 토벌될 수도 있습니다.”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의 계골곡주 백변귀천(百變鬼擅) 호요각(狐曜慤)은 귀찮은 불청객 때문에 골치가 아파왔다. 돌아가는 꼴로 보아 안방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데 그저 힘없이 물러서기에는 무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 얼마나 머문다고 하던가?”
“본군이 포란산에 들 때까지랍니다, 곡주”
“본군는 지금 어디 있는데?”
“듣기로 원주 조올성쯤 있을 겁니다.”
“이런 망할! 느려터진 관군이 이곳까지 오는 데만도 100일은 쉽게 넘길 것인데, 그때까지 있겠다고?”
호요각은 일단 사신으로 온 조산투귀를 만나보기로 했다.
“백호영의 만력이 계골곡주를 뵈오.”
변덕이 하루에도 백번 변하다고 하여 백변귀천(百變鬼擅)이란 별호를 가진 호요각은 만력의 기도를 읽고 내심 긴장했다. 만력은 물론 그를 호위하듯 양쪽에 서 있는 무사들의 기세도 그리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귀장의 요구는 들었소만, 관과 무림은 우물물과 강물처럼 서로 넘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시오?”
“모르오!”
―꿈틀.
호요각은 만력의 말에 이것은 양해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굴복하라는 뜻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만력의 말에는 그저 웃으며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호 장군과 강시지존 흑산자께서는 조용한 해결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바요.”
“흑산자? 가, 강시지존이 같이 왔다는 말이오?”
강시지존은 절대 홀로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철강시가 같이 있다는 말인데, 백호나한과 흑산자의 강시 군단이라면 저렇듯 뻣뻣하게 나와도 할 말 없는 전력이었다. 그래서 결국 속이 쓰리지만 겉으론 함박미소를 머금고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천하십이지존 중 한 분이 본 곡을 방문하셨는데, 제가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계골곡에 온 것을 환영하오.”
“곡주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호요각은 곡의 주요 인사를 이끌고 곡의 입구까지 마중 나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계골곡 곡주 되는 호요각이라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흑산자 노선배님.”
“으음!”
호요각은 선풍도골에 흑의장포를 차려입은 이자가 진짜 강시지존인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말을 탄 청의에 백면서생 같은 자는 그 유명한 백호나한이라 하고 따르는 무리 또한 갑주를 입지 않고 각자 가벼운 무복에 병장기가 따로따로였다. 이건 관군이라기보다는 강호 무림의 무리들 같았다.
“혹시, 상경 백호문을 지키는 백호나한이….”
“접니다.”
역시 청의공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곡주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조정에서 하는 일인데, 당연히 협조를 해야죠.”
라혼은 계골곡주 호요각을 따라 곡 안으로 들어섰다. 계골곡은 입구가 하나뿐이고 좁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이곳이라면 좀 비좁긴 하지만 4천~5천은 한꺼번에 훈련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장모, 강남. 백호영을 이끌고 지금 매복하고 있는 놈들을 제압해라!
웅장모와 초강남은 갑작스러운 명에 당황했지만 이내 조용히 후위로 빠지며 양쪽으로 흩어졌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다른 백호영의 무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란 걸 느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한편, 호요각은 그들의 수상한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했다.
“곡주!”
“말씀하시지요.”
“미안하지만 이곳이 무척 탐나오. 그러니 계골곡을 내게 주시오.”
“무, 무슨…?”
호요각은 반반하게 생긴 백호나한이 하는 말을 일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표현할 수 없는 황당함에 겨우 정신을 차려 뭐라 반응할 무렵, 전신을 검은 갑주로 감싼 군사들이 자신과 계골곡의 인사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가, 강시 군단!?”
“모석, 고우. 백호대를 이끌고 지금 즉시 곡 전체를 장악한다. 백호영이 선봉이다.”
“존명!”
―우아~!
모석은 전 병력이 계골곡 내로 진입을 끝낸 순간 떨어진 라혼의 명에 내심 당황스러우면서도 민첩하게 병사들을 지휘하며 진형을 갖추고 내곡(內谷)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그러나 황당하기로 따지면, 예를 다하며 마중까지 나온 계골곡주 백변귀천 호요각과 곡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뭐가? 소금 밀매에 강도, 살인, 부녀자 납치, 인신매매 등등…. 열거하자면 관군으로서 언제든 토벌할 수 있지 않은가?”
라혼은 실제로 계골곡이 그랬는지는 알 순 없었지만 대부분의 흑도 세력들이 호구지책으로 삼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라혼은 자신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굳은 그들의 모습으로 봐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증좌, 증좌를 대시오.”
호요각의 분노에 찬 노성에 라혼은 턱을 긁으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증좌라? 그냥 솔직히 말하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차지하려고 이러는 것뿐이었다.”
“그, 그런….”
호요각은 백호나한의 ‘가지고 싶어서 뺏는다’는 너무도 당당한 말에 불쾌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우린 어찌할 셈이오?”
“글쎄? 아직 결정한 바 없다. 흑사, 흑사라면 이럴 때 어찌하시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고수 축에 드는 인물들이니 이대로 강시로 만들면 좋겠는데….”
흑사(黑師)라 불린 강시지존 흑산자의 말에 계골곡의 고수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을 포위한 강시들을 둘러보고 한기가 오는 듯 부르르 떨었다.
***
갑주(甲州) 남부에는 하나의 거대한 문파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고창골문(高唱骨門). 갑주가 갑주라 부르기 이전 고창성이라 부르던 시절부터 500년 간 항상 그 자리를 지키던 위대한 가문. 그러나 500년 성세는 과거의 유산이 되고 서제가의 서씨들과의 400여 년 간 대립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서제가는 그 뛰어난 재능으로 갑주 무림을 제패했고, 고창골문의 골씨(骨氏)들은 이제 서제가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나 서제가가 사실상 지배하는 갑주 무림이었지만 서제가는 관(官)에 속하여 천하 무림은 고창골문을 여전히 갑주제일가로 쳐주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편액이 가문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골문(骨門)’이란 글자가 고문체로 새겨진 편액이 인상 깊은 대문이 열리며 일단의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골(骨)자를 새긴 백의 무복 차림의 30여 명 무사들은 말을 몰아 어디론가 떠나가고, 대문 앞은 먼지만 남아 바람에 휘날렸다. 얼마 후 다시 두 명의 소년들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땅을 쓸기 시작했다.
“약형아, 오늘 윗분들이 굉장히 허둥대던데 이유를 아냐?”
“아, 그거! 개굴산인가 개구리곡인가 하는 곳을 정체 불명의 무리들이 점거해서 난리도 아닌가 봐!”
“계골곡을 말하는 거구나. 근데 왜 계골곡의 일을 우리 골문이 신경써야 하는 거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앙신에서 후려의 강무세가가 세운 후선과 서가 놈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잖냐. 그래서 서가 놈들이 무림에 관심 가질 틈이 없는 사이 갑주를 넘보는 세력이 한두 군데여야 말이지. 그런데 우리로서도 만만치 않은 계골곡을 수상한 무리가 소리 소문 없이 점거했으니 문제지.”
“소리 소문 없이?”
“응, 소리 소문 없이!”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
약형이라 불린 소년은 친구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상당한 수준의 신법을 구사하는 고수가 골문을 찾았다.
“어서 오시오. 풍 대협.”
“골가주를 뵈오.”
갑주를 대표하는 절정 고수 중 하나인 신풍협(迅風俠) 풍고(豊高)를 맞는 고창골문의 당금 가주 파옥지(破玉指) 골상찬(骨相贊)의 태도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골문의 가주를 대하는 풍고의 또한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주, 계골곡 무리들의 무공 수위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제가 마태 그 친구와 접근을 시도하려 했지만 계골곡 외곽에서부터 발각되어 그들과 드잡이질을 벌였는데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개개인이 능히 강호 일류 고수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어 나와 마태는 불과 열 명을 패퇴시키지 못하고 마태는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아니, 섬도신영이 다쳤단 말씀이십니까?”
골상찬은 신풍협 풍고의 섬도신영(閃刀新迎) 소마태(蘇摩態)가 다쳤다는 말에 놀라 다시 물었다. 풍고와 소마태는 갑주 지역이 자랑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단 열 명으로 제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골상찬이 알고 있기로, 그들의 수는 5천~6천이 넘는 다고 들었으니….
“가주께서 걱정할 정도로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수삼 일 요양하면 나을 상처입니다. 이곳에 같이 오지 않은 이유는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계골곡과 가까운 곳에 머물며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이거 제가 두 분을 고생시켰군요.”
“아닙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면 저는 오히려 가주님을 원망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허허허허허….”
한동안 서로 호탕하게 웃은 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분위기를 바꾼 뒤 골상찬이 먼저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일단의 무리들이 남하한다고 하여, 지금 강무세가가 벌이고 있는 전쟁에 투입될 조정의 군사들이 아닌가 생각했소이다. 그들의 최초 종적이 원주에서 갑주로 들어서는 길목 중 하나인 대언벌이었기 때문이었소.”
“으음.”
“그리고 그들은 빠르게 남하하여 앙신성을 넘으려다가 계골곡을 점거한 것이오. 내 계산이 맞는다면, 벌써 한 달 동안 그곳에 숨어 외부로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소. 조정의 군사들이라면 성시(成市)에 주둔할 것이지만 그들은 성시가 아닌 계골곡에 틀어박혔소.”
“혹시 인세의 무리들이 아닐까요?”
“나도 풍 대협의 생각과 같소. 당금 무림에 수천의 무리들을 운용할 수 있는 곳은 철사성과 절대쌍교, 삼보 정도일 것이오.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갑주는 서제가들이 관과 무림에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곳이오. 그런 서제가에 반기를 드는 곳은 오직 인세의 무리들뿐이오.”
“간악한 마세들이 갑주에 손을 뻗치다니….”
인세는 인세천하를 외치는 강호의 협(俠)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인세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 마세(魔世)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파의 제자를 수인(獸人)이라 하여 참살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호형호제하던 사형제의 머리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타파에도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인의 천하가 지속된 지 벌써 400년이었다. 이름 있는 명문 대파엔 빠짐없이 수인제자들이 있었고 수인으로 십삼인가 문파 조사전에 모셔진 고인들도 많아 당금에 와서는 십삼인가(十三人家)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니 수인들을 모두 잡아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인세의 무리는 세상에 편협하기 그지없는 자들로 비쳤다.
***
계골곡을 완전히 장악한 라혼은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이미 금군으로서 훈련도가 높았기 때문에 마상 무술과 말을 타고 진형을 유지하며 싸우는 기병 훈련을 중심으로 병사들을 조련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훈련이 잘되고 있습니다.”
라혼은 모석의 중간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그보다 요새 귀찮은 것들이 얼쩡거리는데 뭐 하는 것들이지?”
“장군, 그들은 섬도신영 소마태와 신풍협 풍고입니다. 아마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는 골문가주의 부탁을 받고 장군과 군사들의 정체를 캐기 위해 접근했을 겁니다.”
라혼은 계골곡 곡주의 말을 듣고 턱을 긁적였다. 계골곡주는 강자를 따르는 흑도인답게 백호나한의 권유에 두말없이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산 채로 강시를 만들겠다는 협박 비슷한 것이 그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라혼은 그들이 항복하자 그들을 딱히 가두거나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백호대의 존재를 숨기라는 명령만 했을 뿐이었다. 비밀을 지키는 일은 흑도인 계골곡 사람들에게 별문제가 없었고, 백호대라는 군사들이 지난 한 달 동안 계골곡에 머물면서 계골곡의 양식을 축낸 바도 없었다.
“장모!”
“예, 주군.”
“다시 그들이 오면 우리가 조정의 군사들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입 다물라고 해!”
“알겠습니다.”
“주군, 우리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고학의 물음에 라혼은 씩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누구 말마따나 관과 무림은 강물과 우물물 같은 관계지. 우리가 조정의 군사라고 밝히면 예의 주시는 하겠지만 파고들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조정의 군사들이라는 것은 숨길 이유가 없지만 백호대라는 것까지 그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면 어찌하실 겁니까?”
“잡아서 강시나 만들고 말지 뭐.”
고학은 여태껏 잘 안다고 여겼던 주군에 대해 이제 아무런 판단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순리를 따르던 주군이 자신과 백호문의 수장들이 한 충성 맹세 이후 인격이 변한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산 사람을 생으로 강시를 만들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주공이 아니었다.
“고학.”
“예, 주군.”
“의심하지 마라.”
“예?”
“네가 말한 천명을 받게 되면 내 손에 얼마니 많은 피를 묻혀야 하는지 아는가?”
“….”
“어떠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 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 일이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너는 그 생명을 끊는 데 명분을 따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죽음에도 명분을 따지지 않는다.”
“주군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고학은 자신이 풀어선 안 되는 봉인을 푼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다. 주군이 새로운 왕도를 세울 인물로 알았건만 패도를 좇는 인물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여전히 침울함을 숨기지 못하는 고학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원래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라혼이 생각하기에 고학은 충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길’과 어긋난 길을 가려 하는 주군을 목숨 걸고 막으려 하는 충신이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었다. 특히나 난세엔 더욱 그렇다. 나쁜 것이 오히려 좋게 되고 좋게 해보려는 것이 오히려 나쁘게 되는 것이 바로 난세였다. 그런 점에서 고학은 난세형 인간이 아니었다.
***
사두 마차가 관도변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보기 드문, 아니 가히 경국지색의 선이 뚜렷한 미녀가 가만히 달리는 마차 밖 풍경을 감상하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아가씨, 곧 곡에 도착합니다.”
“알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마차는 계골곡 입구에 들어섰다.
“멈추시오!”
―히~히히힝!
마부는 곡구(谷口)에 전에 없던 목책을 일별하고, 앞을 막아선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을 쏘아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웬 놈이냐?”
“그러는 댁은 어디서 온 누구시오?”
“이놈, 가만 보아하니 신참인 모양인데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하는구나. 마차에 타신 분은 네 주인의 금지옥엽이시다.”
“주군은 딸이 없으신데? 잠시 기다리시오.”
“이런, 건방진!”
―휘익~!
―헉!
마부는 건방진 신참을 손봐줄 요량으로 내공을 실어 말채찍을 휘둘렀는데 남루한 차림의 청년은 오히려 말채찍을 잡아채 끌어당겨 마부가 오히려 땅에 나뒹굴게 했다. 그리고 어느새 사내의 검이 목을 겨누었다.
“어째 흑도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말보다 손이 더 빠를까?”
남루한 차림의 청년 모만(模蔓)이 그동안 계골곡에 머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흑도인들은 말보다 손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서로 힘의 고하를 보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
“호곡주의 따님이 왔다고 합니다, 표 참위님.”
모만의 말을 들은 백호십일걸 중 한 명인 표홀도(飄忽刀) 표상치(豹常治)는 뒤에다 손짓을 해 누군가를 불렀다.
“맞는가?”
“맞습니다.”
“들어가시오.”
표상치는 표범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모습으로 간단한 질문만 하고 뒤로 물러섰다.
―덜컥!
그러나 갑자기 마차 문이 열리면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천상의 홍의 미녀가 앙칼지게 말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관군이오.”
“관군? 네놈들이 본녀를 기망하려는 것이냐? 이곳이 어딘데 조정의 개 따위가 설친단 말이냐?”
“자세한 것은 안에서 알아보시고, 어서 지나가시오. 그래야 우리도 좀 쉬지.”
“아가씨, 그렇게 하십시오. 자세한 사정은 곡주님께 듣는 것이 나을 겁니다.”
홍염미호(紅艶美狐) 호요요(狐曜曜)는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자의 무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흥, 호골조(狐骨爪)!”
호요요가 다짜고짜 날카롭기 그지없는 손톱으로 쓸어오자 표상치는 표홀신보(飄忽神步)를 펼치며 뒤로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가느다란 세도(細刀)를 표홀도라는 별호와 어울리게 표홀하게 쓸어갔다. 호요요는 상대가 내공을 도(刀)에 주입해서 그 기운이 밖으로 나오는 도경(刀勁)을 구사하자 놀라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상대는 절대 아버지 호요각 밑이 아닌 몇 수 위의 절정 고수였던 것이다.
표상치는 홍의 미녀가 뒤로 물러서 더 이상 덤벼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뽑아든 세도를 집어넣고는 말했다.
“이제 되었으면 그만 들어가시오.”
홍염미호 호요요는 상대의 귀찮은 듯한 말투에도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호요요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감히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흑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콧방귀를 뀌며 말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흥!”
계골곡 안으로 들어선 호요요는 마차 밖에서 대규모 기병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수천 마리의 말들이 서로 뒤엉키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령을 전달하는 북소리와 징소리, 말 울음소리, 군사들의 함성 소리에 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세상에…. 도대체가?”
호요요는 내곡(內谷)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인 계골곡주 호요각을 찾았다.
“오~! 우리 요요 왔느냐?”
“아버지,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에요? 어째서 곡 입구에 그런 고수가 지키고 있고, 외곡의 그 군사들은 뭐란 말이에요?”
“아아, 그것 말이냐?”
호요요는 아버지의 설명이 계속될 때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현명하던―아니, 교활하던― 아버지가 길들여진 여우 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우리 안방을 차지한 그들을 그대로 두고 볼 셈이세요?”
“에휴~! 상대는 천하의 강시지존에 그를 제압했다는 백호나한이다. 게다가 너도 손속을 겨루어봤지 않느냐. 그런 초고수가 자그마치 열 명이나 더 있고 강호에 나서면 당장 일류 고수 소릴 들을 고수만 1천이 넘는다. 그리고 5천의 정병들이 훈련하는 걸 너도 봤지 않느냐?”
호요요는 기가 빠진 아버지의 모습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다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가만! 백호나한은 천하의 호색한이라 들었는데, 지금 그의 수청을 누가 들고 있어요?”
“수청? 수청 드는 계집은 따로 없는 것 같던데?”
“그래요. 전장에 나가는 길이니 참는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쉽지.”
“요요야, 설마 너 또….”
호요각은 딸 호요요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 욕심이 있다. 그러나 라혼은 다섯 가지 욕심에서 벗어났다. 라혼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자지 않아도 되며 황금에 대한 욕심도 없다. 역사를 바꾸는 영웅이 되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욕 또한 없었다.
먹지 않아도 되지만 먹는 이유는 먹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자지 않아도 되지만 자는 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고, 재산을 아끼고 벌어들이는 이유는 재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중경 청인성 호궁에서 출정 의식을 치르고 집을 떠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라혼은 먹거나 잠을 자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집이라고 생각한 곳 이외의 어떤 장소에서도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라혼은 계골곡에 따로 거처를 두지 않고 밤새도록 곡을 경계하는 백호대 군사들을 살폈다. 대장이 항상 살펴서 그런지 백호대 군사들의 경계 태세는 엄중하기 그지없었다.
“충!”
곡 내부에서 보초를 서던 군사가 어두운 곳에 쪼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라혼이 다가서자 그는 후닥닥 자신의 위치에 와서 아무것도 아닌 양 경례했다. 그러나 그 정도 어둠은 라혼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두운 곳이었지만 안색을 살필 수 있을 정도였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는가?”
“아,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이 허옇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어딘지 이상해 보여 라혼은 그를 진맥했다.
“울혈이로군. 옷을 벗어보게!”
라혼은 전신에 붉고 푸른 멍이 가득한 그의 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비수로 쨌다. 그곳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라혼은 흡성대법의 흡혈결(吸血訣) 요결로 군사의 혈맥 안에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어혈을 뽑아내고 신성력으로 울혈을 치료하기 위해 일부러 낸 자상(刺傷)을 치료했다.
“어떤가?”
“가, 감사합니다. 주군!”
어상지(漁常池)는 보초를 소홀히 한 것을 가지고 책망할 줄 알았던 주군이 직접 자신을 치료해주자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록 백호대, 아니 백호문에 들어와 다른 곳에서는 하지 않던 고된 훈련을 받았지만 한 달마다 꼬박꼬박 주는 봉록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말을 타고 싸우는 훈련을 하기 때문에 낙마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주 달려오는 상대의 천으로 감싼 창에 맞기도 했다. 그것은 두 다리를 땅에 두고 싸우는 것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어상지는 이렇게 상처를 입고 고생하고는 있지만 전쟁터에서 창 든 보병으로 싸우는 것보다 말 탄 기병으로 싸우는 것이 살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장령들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여 묵묵히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대부분의 백호대 군사들 생각과 일치할 것이다. 어상지는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해지자 그저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읍(揖)을 할 뿐이었다.
“치료는 했지만 그래도 쉬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지. 이제 그만 들어가 쉬게.”
“아닙니다. 제가 쉬면 동료들이 고생합니다. 이제 괜찮아졌으니 제 몫은 하고 나서 쉬겠습니다.”
라혼은 그의 말에 기특함을 느끼고 에텔 스페이스에서 지필묵을 꺼내 그 자리에서 몇 자 적어주었다.
“이것을 자네 상급자에게 보여주고 내일 하루 푹 쉬도록 하게! 이것은 명령이네!”
“존명!”
라혼은 어상지와 그의 동료들에게 몇 마디 격려를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 아직 잠을 이루지 않았을 흑산자에게 갔다. 흑산자는 죽은 자의 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였지만 더불어 훌륭한 의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훈련 중에 입은 타박상이나 골절상이대부분인 환자들을 돌보는 의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원래 흑산자라면 그들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 하지 않겠지만 은섬충 때문에 라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에게서 가끔 은섬충에 벗어나려는 시도를 발견하곤 했다. 천하십이지존이란 명성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흑사, 이제 좀 쉬시오.”
“아니요, 주공! 원래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라오. 그런데 주공은 상경을 떠나온 후부터 자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 몸이 상하면 어찌하시려오?”
“저도 충분히 쉬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전에 제가 말했던 것은 알아보셨습니까?”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없었소.”
“흐음, 그래요?”
라혼은 서쪽 시드그람의 마법학으로 여러 가지 마법 도구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 마법 재료가 없었다. 여인천궁의 문선자 오단예와 이야기하며 이곳의 선술(仙術), 법술(法術), 도술(道術), 환술(幻術), 영환술(靈幻術) 등 수많은 술법(術法)의 존재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서쪽 대륙의 마법에 그것과 상통(相通)함을 느꼈으나 오단예가 알고 있는 것은 기초적인 것뿐이었다. 그런데 강시지존 흑산자는 네크로맨시(Necromancy)의 대가인 최고의 영환술사(靈幻術士)였던 것이다. 그리고 흑산자는 여러 가지 술법에도 능통하며 그 분야에 박학다식했다. 서쪽 시드그람 대륙뿐만 아니라 이 차원의 드래곤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라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흑사가 알고 있는 술법의 지식과 비교해 나갔다. 개념이 틀린 것도 있었고 완전히 다른 주문도 있었지만 문제는 마법 재료였다. 마법 개념은 생각이 다르므로 그럴 수도 있지만 물질은 다르게 부르고 있어도 같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물(水)이 서쪽에서 물(水)이라면 이곳에서도 물(水)이기에 이쪽에도 분명 세계의 넘쳐나는 마나 에너지에 잘 반응하는 금속 마나 메탈(Mana metal)인 미스릴(Mithril), 세라믹, 오리하르콘(Oriharcone), 아다만타이트(Adamantite) 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마장기(魔壯機) 탈로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서쪽 시드그람에서는 라혼이 카마르게나에서 얻은 마나 물질들이 있어 여러 가지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었고, 드워프들과 동맹을 맺어 계속 마나 물질을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마법보다는 무공(武功)이란 특이한 것이 발달한 이곳에선 그런 것들을 구하기는커녕 지금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부터 연구해야 했다. 만년한철(萬年寒鐵)이란 특이한 금속의 존재를 알았으나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마나 메탈이었다. 곤옥(崑玉)이란 것도 찾아냈지만 이것 또한 서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질이었다. 이 점을 보면 시드그람에는 있고 이곳에 없는 것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할 무언가는 있으니 방법 또한 있을 것이다. 시드그람에서도 귀한 것들이 이곳이라고 길바닥에 굴러다니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주공이 말한 탈로스랑 골렘을 만들기에는 너무 부족할지 모르지만 귀장을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소.”
“그렇기는 하지만 급할 것은 없으니 천천히 합시다. 솔직히 귀장은 흑사의 천강강시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지는 것이니….”
“하지만 만드는 수고로움은 훨씬 덜하니 어떤 면에서 보면 더욱 위력적이지요.”
흑산자는 라혼의 원래 생각인 메탈 시터(Metal seater) 마장기(魔壯機)보다 네크론(Necrons)인 귀장(鬼將)에 더 호기심을 보였다. 아마도 대가인 자신이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에 더 호기심을 갖는 것은 당연할지 모르나 아무래도 시신(屍身)을 가지고 장난치는 일은 금기시되는 일인지라 라혼에겐 부담되는 일이었다. 원래 있던 107구의 철강시들을 사용하는 것은 납득할지 모르겠지만 새로 만드는 것은 인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인심(人心)이 무엇인 줄 아는 라혼이 하기에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지금은 귀장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있더라도 지금 라혼이 써먹기에는 그 위력이 너무나 막강했다.
“어쨌거나 주공이 생각한 것을 만들려면, 제가 알고 있는 것만으론 어림없소. 그러니 이번에 의백성에 은거한 친우에게 한번 다녀와야겠소.”
“뜻대로 하십시오.”
“이번에 백호대가 이곳을 떠나면 나도 의백성으로 가겠소. 100구의 철강시는 주공의 뜻대로 사용하시구려.”
라혼은 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돌렸다. 아직도 흑사와 라혼은 서로 나눌 것이 많았기 때문에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쉼 없는 라혼의 일과에 당황한 것은 다름 아닌 계골곡주 호요각의 딸 홍염미호(紅艶美狐) 호요요(狐曜曜)였다.
“아유~! 이 인간은 언제 혼자 있는 거야!”
계골곡을 위해 또 호기심에 라혼에게 접근하려던 호요요는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혼자 있지도 않은 그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우습게도 계골곡을 빼앗은 백호나한은 원 주인인 아버지 호요각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그의 수하로 있는 고학이라는 문관이 신경을 써줄 뿐 낮에는 군사들을 훈련하는 데 심력을 쏟고, 밤에는 자지도 않고 돌아다니니 아무리 자유분방한 그녀였지만 여인의 몸인 호요요가 백호나한과 얼굴 맞댈 틈이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훈련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는지 사흘간 군사들의 훈련을 쉰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그에 때맞춰 호요요는 아버지 호요각에게 말해 대대적인 연회를 준비하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것이 백호나한과 뜻이 맞았는지 백호나한이 소 30두와 돼지 100두 그리고, 훈련 중 다친 말 십이두를 내놓았다. 거기에 호요각이 술을 내놓고 외부에서 몇 명의 숙수(熟手)를 초빙해 고기를 구웠다.
“정말 대단한 위용이다. 내 이렇듯 절도 있는 정병들을 본 일이 없는데, 곧 먹고 마실 연회가 가까워옴에도 기강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니….”
“요 대협, 그럼 저들은 무사들이 아니라는 겁니까?”
“쉿! 말조심하게. 이곳은 호굴이야!”
“죄송합니다.”
“자네 말대로 저들은 무사라기보다 군병이야! 하지만 곳곳에 무사의 날카로운 예기를 풍기는 자들이 있고, 또 몇몇은 절대 자네나 나의 아래가 아니야!”
“천하에 그렇게 많은 무사들이 군병들과 함께하는 곳은 인세뿐인데, 그들은 역시 인세의 무리들이었군요.”
“아니네,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네. 좀더 두고 보세.”
노인과 중년 사내는 실어온 야채들을 내려놓으며 예사롭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제껏 계골곡(谿汨谷)과 가장 가까운 성읍(城邑)인 영금부(映金府)에 머물며 계골곡의 동태를 살피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연회를 준비키 위해 숙수를 초빙한다는 말을 듣고 숙수를 돕는 일꾼으로 위장하여 곡의 내부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보게들, 어서어서 하게. 오늘까지 마무리하고 여길 떠나야 한단 말일세.”
“예, 예 알겠습니다요.”
그들은 자신들을 데리고 와준 숙수의 말에 허리를 굽실거리는 시늉을 하며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에게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야채를 빠르게 다듬기 시작했다. 노인과 중년 사내는 자기 둘이 하는 것보다 오히려 배는 빠르게 야채를 다듬는 그의 손놀림을 유심히 살피더니 요 대협이라 불린 노인이 넌지시 물었다.
“고 숙수의 도제인가?”
“아닙니다.”
“그럼 계골곡인(谿汨谷人)인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확인한 노인은 이채를 띠며 다시 물었다.
“그럼 자네는?”
“조정의 군사입니다.”
“조정? 아니, 조정의 군사들이 왜 계골곡에 있는가?”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말하는 사이 라혼은 야채들을 모두 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훈련을 쉬게 되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라혼은 예전에 불목하니 일을 하던 생각이 나 주방으로 갔다. 그러나 주방의 전쟁터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비교적 한가하게 야채를 다듬는 이곳에 자릴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일하는 두 노장(老壯)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을 보니 요새 주위를 얼쩡거린다던 고창골문의 무사들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약 두 달 후면 백호대는 이곳을 떠날 것이고 그 후에는 백호대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때문에 괜히 지금 이들과 드잡이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라혼은 얼른 일을 마무리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계속 수고하십시오.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그런가?”
“일을 도와줘서 고마웠네.”
라혼은 백호십일걸 중 하나인 양엽구(良獵狗) 구만혁(狗巒赫) 참위에게 그들을 조용히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백호대의 군사들은 오랜만에 허리띠를 풀고 양껏 먹고 마셨다. 라혼은 계골곡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특별히 만든 요리들을 맛보고 술을 마셨다. 그동안 전형적인 흑도인들이었던 계골곡인들은 알게 모르게 백호대에 시비를 걸었었다. 그러나 백호영의 무사들에게 깨지고 나서는 마음으로 승복하게 되었다. 이미 머릿수로도 실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안 그들은 이젠 섣불리 헛수작 부리지 않았다.
“장군, 오늘에서야 이런 자릴 마련하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내 오늘 장군에게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습니다.”
주흥이 어느 정도 무르익을 무렵, 호요각이 나서며 운을 떼었다. 그리고 라혼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손뼉을 쳤다.
―짝짝!
그러자 방울을 단 여인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딸랑~! 따르르릉~!
옥구슬과 금빛과 은빛을 반짝이며 추는 미녀의 춤은 장부의 혼백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미녀가 추는 춤이 색정적이기 그지없는 열락환희무(悅樂歡喜舞)였던 것이다. 두 달 동안 여인이라곤 구경조차 못한 사내들 앞에서 출 춤이 아니었다. 라혼은 금녀의 춤을 보고 금군대장 금영월에게 백호대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보검을 빼들고 박자에 맞춰 검신을 튕겼다.
―땅~! 따당~!
맑은 검명(劍鳴)이 울리자 미녀의 색정적인 춤을 멍한 눈으로 보던 군사들이 저마다 정신을 차렸지만 그것은 미봉책이었다. 미녀는 춤이 끝나자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맺힌 모습 그대로 라혼에게 날아갈 듯 절을 하고 다가와 술을 따랐다.
“장군, 어떠십니까? 저의 불민한 여식입니다.”
“딸이 미인이로군.”
“허허허, 강호의 친구들이 홍염미호라 부르고 있지요. 뭐 하느냐! 어서 장군 옆에 앉거라!”
“소녀, 요요라 하옵니다. 천하영웅인 장군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요요는 자연스럽게 백호나한의 옆자리에 앉아 아까와는 다른 조신한 모습으로 백호나한의 술 시중을 들었다. 라혼은 그런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치근대지도 않고 그렇다고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미소와 은연중 여인을 배려하는 태도에 오히려 호요요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멀리서 볼 때 절세 미장부인 백호나한의 또 다른 별호가 왜 옥면나한인지 알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대하자 얼굴을 못 마주칠 정도였다.
‘아잉, 몰라! 이건 내가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당하는 것 같잖아.’
호요요는 지근 거리에서 보는 백호나한이란 사내의 매력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제껏 많은 남자를 겪어보았건만 이런 사내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호요요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금껏 그녀는 자신이 유혹하지 못할 사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었다.
“장군, 소녀는 피곤해서 이제 그만 들어가보렵니다.”
“그러시겠소? 그럼 어서 들어가 쉬시오.”
호요요는 자리에서 상큼하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짐짓 현기증이 나는 양 머리에 손을 얹고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아~!”
“….”
그러자 백호나한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받쳐드는 것이 아닌가? 호요요는 약간 실망하면서도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우리 요요가 장군에게 반한 모양이오.”
“그렇군. 그럼 실례하겠소!”
“하하하, 그러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라혼은 백호대 장교들의 부러움 섞인 야유를 들으며 호요요를 안다시피 하여 연회가 열리는 계골곡의 내곡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호요요의 침실까지 거침없이 들어가 침상에 그녀를 뉘었다.
“슬립(Sleep)!”
라혼은 호요요를 침상에 눕히고 잠든척하는 그녀를 [슬립Sleep : 잠] 주문으로 진짜 재우고 다시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아니, 벌써…?”
“뭘 말인가?”
“아니, 미녀는 어찌하시고 이렇게 또 나오셨습니까?”
“그녀는 방으로 데려가 재웠네. 거친 사내들만 있는 곳에서 긴장을 했는지 무척 피곤해하더군. 자, 뭐 하나. 술이나 마시게. 모레까지 쉬고 나서는 다시 갑옷을 입고 훈련해야 할 테니….”
백호대의 장교들은 주군이 호요각의 딸이라는 미녀를 안고 가기에 그것을 안주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주군이 잠시 소피 보고 올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오자 의아한 듯 물었지만 주군의 대답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너무 미약했다. 사실 라혼은 호요요가 색정적이기 그지없는 열락환희무를 출 때부터 백호대 군사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어서 빨리 그녀가 이곳에서 사라져주었으면 했다. 가뜩이나 모레까지 쉬게 해준다고 약속한 마당에 배불리 먹은데다 여인에 굶주린 늑대들 앞에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살찐 양 같은 색기(色氣) 넘치는 미녀가 있는 꼴은 가히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요 대협, 계골곡주 백변귀천 호요각이 살아 있답니다.”
“뭐라?”
비성일지홍(飛星一指紅) 요타(料打)는 추혼수사(追魂秀士) 보섭진(步涉進)의 말에 의문성을 토했다.
“그럼 이 무리들이 진정 조정의 군사들이란 말인가?”
“그건 모르지만, 인세가 아닐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호요각은 수인인데 그를 살려두고, 오늘 잔치도 그가 열어준 것이라면 그 청년의 말대로 조정의 군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정의 군사가 영금부에 머물지 않고 이곳을 점거했을까?”
“요즘 조정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합니다. 서제와 천림왕이 서로 대립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서제가가 다스리는 갑주에 세력을 심어두는 것도 좋을 듯한데….”
“아닐세. 그렇게 보기에는 이들의 전력이 너무 엄청나 게다가 이들은 거의 대놓고 이곳을 점거하고 있어. 전혀 숨어 있으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달까? 아까 그 젊은이도 자기 스스로 외부인인 우리들에게 조정의 군사라고 대놓고 말했네. 그것은 뭘 의미할까?”
“만천과해!”
“음.”
요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은 드러내고 실제는 감추어 적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만천과해(滿天過海)의 계(計)였다. 아마도 호요각도 그들에게 속고 있으리라….
“가세. 이들이 연회를 하는 걸 보니 거사가 머지않았음을 의미하네. 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손을 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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