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재인은 서울 덕수 상고의 영어선생님으로. 그리고 그의 아내는 강원도 홍천에 있는
내면 고등학교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말부부가 된 둘 사이에 鎬 란 사내아이가 태어났지요.
아내 최영애가 있는 강원도 홍천의 내면이란 고장은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강릉으로
가다보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로 잘 알려진 장평, 봉평과 대화를 지나
속사 IC에서 내려 그기에서 북쪽으로 31번 국도를 타고 운두령(해발 1089미터)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깊은 산골에 있는 고즈녁한 마을입니다.
이 길은 강원도 산골의 때 묻지 않은 속살을 더듬어 가는 험하고도 유난히
아름다운 산길입니다.
제가 가끔 설악을 찾을 때는 원주에서 홍천읍으로 지름길로 가는 행로를 버려두고
일부러 이 길을 택하여 내린천 강변을 따라 가곤 했던 길입니다.
한폭의 그림 같은 이 길을 달리다 보면 지루할 새도 없이 남설악의 원시림이
가득한 미천골, 구룡령을 넘어 어느새 설악이 눈앞에 다가오곤 했지요.
아마도, 주말이면 재인은 아내를 만나기 위해 매번 이 길을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이 효석의 생애와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속의 아름다운 지명들을
스쳐가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을 것이고, 어쩌다 부부가 같이 이 길을 지나갈 때에는
이곳의 목가적인 풍경에 취해 살풋 잠이든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면고등학교 1학년 1반 부 담임이었던 그의 아내는 자상하고 인자한 선생님으로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반 아이들도 모두 다 선생님을 따랐고 그녀의 반원이 되는 것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불의의 사고가 있던 그날,
애초에 재인이 아내가 있는 내면으로 건너오기로 했었지만, 前週에 둘이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으로 서울로 가기 싫다는 아들을 데리고
화해를 겸해서 그녀가 재인이 있는 서울로 상경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 9월 1일 오후 2시 40분 경
재인의 아내와 아들 호가 탄 버스는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62km 지점에서
과속으로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섬강교 교각을 들이박고는 미끄러지며
비로 물이 불어난 강물로 추락했습니다.
버스에 탄 승객 28명 중 24명이 생명을 잃은 대형 사고였지요.
그의 간절한 바램과는 상관없이
재인의 아내와 아들은 주검으로 그에게 돌아왔고, 시신은 여주의 고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지상에서의 그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재인은
유서를 남기고 9월 15일 새벽 두시 경,
병원 뒤를 돌아 깨꽃과 도라지 꽃이 만개한 강둑을 걸어, 남한강 강변의
전신주에 자신의 목을 메었습니다.
그 때 재인의 나이는 서른 셋.
......
무덤 같은 살덩이들이
감히 나를
샛길도 모르는 바보천치라고
빈정대다 잠이 들었다.
캄캄해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어두움에 빛나며
나는 묻노니
그대여 여기는 지금 어디쯤인가
- 장재인 <그대여>-
장호원 인근에 있는 남한강 공원묘지에 그의 유언대로
그와 아내와 아들 이렇게 한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돌에 새긴 그의 비석에는 성경 한 구절이 새겨져 있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주려함이니라.
- 요한복음 3장 16절 -
이처럼 이란 단어가 강한 울림으로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그토록 깊고 깊은 것이었겠지요.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보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지고 지순한 사랑, 가족애 이런 낱말이 메말라 버린 사회에서
한 떨기 붉은 양귀비꽃 처럼 살다 간 시인, 장재인
살아서 한번도 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는 제게 늘 아름다운 시인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첫댓글하세요
글읽고 또 읽었네요 마음이 짠합니다
제 고향 강원도 가고싶네요
이효석님 묘비그곳에서 친구들과 어린시절 보냈는데,,
올해는 한번가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강원도가 교향이시구나 저도 강원도가 제 고향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람도 좋고 산천도 좋고 해서요
숭고한 사랑에 가슴이 져며 오네여**
그렇지요! 요즈음은 숭고한 사랑이 참 천연기념물 처럼 귀한 단어가 되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