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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Keith Richards - The Rolling Stones
Keith Richards는 무려 41년간 Rolling Stones에서 활동하면서, 마치 S.O.S.의 타전 음을 연상시키는 불분명한 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과 격렬한 파워 코드 진행이 돋보였던 ‘Start Me Up’, 그리고 ‘Jumpin' Jack Flash’ 등을 통해 록 계에 회자(膾炙)되는 불멸의 기타 리프들을 선보였다. 또한 1972년작(作)이자 Rolling Stones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걸작 [Exile on Main St.] 등의 기념비적인 앨범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Keith Richards는 탁월한 테크닉을 자랑하는 기타리스트는 아니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심플했으며, 어린 시절 우상들이었던 Chuck Berry와 Muddy Waters, 그리고 Howlin' Wolf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연장선상적인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영국 Dartford에서 태어난 Keith Richards는 16세 때 Technical College로부터 퇴학당하게 된다. 이후 어릴 적 친구들인 Mick Jagger, R&B에 심취해 있던 Brian Jones 등과 함께 “Little Boy Blue” 혹은 “Blue Boys” 등의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62년 베이스 주자인 Bill Wyman과 드러머 Charlie Watts를 영입하여, 마침내 록 계에 불멸의 족적(足跡)을 남기게 되는 위대한 밴드 Rolling Stones를 결성하게 된다. Keith Richards는 록 스타로서는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지만,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견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9. Jimmy Page - Led Zeppelin
197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Led Zeppelin을 능가하는 밴드는 없었으며, 또한 Led Zeppelin의 창시자이자 선장이었던 Jimmy Page가 유일한 기타의 신(神)이었다. 제왕으로서의 장엄한 무게와 권위 있는 테크닉, 그리고 이국적 경지에 도달한 Jimmy Page의 작곡과 연주 실력은 Led Zeppelin이 8번 째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Dazed and Confused’에서 녹슨 듯 낮게 으르렁거리는 Jimmy Page의 솔로는 바이올린 활로 연주된 것이다. 이후 그들의 4번째 앨범인 [Led Zeppelin Ⅳ]에서 리드미컬한 멜로디와 날렵한 톤 감각이 살아있는 솔로를 통해 Led Zeppelin을 언급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고전 ’Stairway to Heaven'을 선보인다. Jimmy Page는 Led Zeppelin의 사운드를 만드는 데 있어서 과거의 경험과 영감을 바탕으로 하였다. 1960년대 초, 중반 Jimmy Page는 런던의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Kinks, Everly Brothers 등과 함께 작업을 하였으며, 또한 John Mayall과 후일 Velvet Underground의 보컬리스트가 되는 Nico와 작업을 하기고 하였다. 그리고 Led Zeppelin을 결성하기 전인 1968년 여름 런던에서 Jimmy Page는 보컬리스트 Robert Plant, 드러머 John Bonham, 그리고 베이시스트 John Paul Jones와 함께 Yardbirds의 리드 기타리스트로서의 마지막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8. Ry Cooder
Ry Cooder의 손에서 기타는 타임머신이 된다. 10대 시절인 1960년 무렵 기타를 시작한 이래로 Ry Cooder는 초창기의 Bottleneck Blues를 비롯하여 Country, Vintage Jazz, Hawaiian Guitar, Bohemian Folk 음악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스타일을 통해 복고풍 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Ry Cooder는 1960년 무렵 Taj Mahal과 함께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면서 음악을 시작하였다. 이후 Captain Beefheart의 Magic Band를 거친 Ry Cooder는 [Paradise and Lunch]나 [Chicken Skin Music]같은 포크 성향의 솔로 앨범들을 통해 특유의 슬라이드 기타 솜씨를 선보이게 된다. 그리고 Ry Cooder는 위대한 밴드 Rolling Stones의 세션으로 활동하던 시절인 1969년 Keith Richards에게 Rock & Roll 역사상 가장 중요한 레슨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이른바 “5현 오픈 G Blues Tuning”을 전수하게 된다. 그리고 Keith Richards는 이를 이용해 완벽에 가까웠던 걸작들인 [Beggars Banquet], [Let It Bleed], [Exile on Main St.] 앨범들에서 경이적인 리프들을 노출하게 된다. 또한 Ry Cooder는 Rolling Stones의 ‘Love in Vain'이나 Robert Newman의 ’Let's Burn Down the Cornfield' 등에서 만돌린(Mandolin)연주를 선보이는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접어들어 Ry Cooder는 영화음악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이후 Ry Cooder는 아프리카 기타리스트인 Ali Farka Toure와 함께 1994년 Talking Timbuktu의 음악적 작업을 같이하였으며, 또한 최근에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쿠바의 Buena Vista Social Club 성공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등 음악에 대한 끝없는 실험정신과 탐구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7. Stevie Ray Vaughan
“텍사스의 자존심”이란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렸던 거장 Steve Ray Vaughan은 1983년 데뷔 앨범 [Texas Flood]를 통해 눈이 부실 정도의 현란한 Fender Stratocaster 솜씨를 선보이며 음악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2년까지 Steve Ray Vaughan의 명성은 Jimi Hendrix의 사이키델릭함과 Lonnie Mack의 펑키함에 영향을 받은 텍사스의 클럽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2년 유명한 “Montreux Jazz Festival”에서의 연주를 통해 David Bowie의 눈에 띄게 되며, 곧 David Bowie의 앨범 [Let's Dance]에 참여하며 전성기를 질주하게 된다. 그리고 Steve Ray Vaughan이 함께했던 밴드 Double Trouble는 명실 공히 무적(無敵)의 밴드로 1980년대를 풍미하게 된다. 그러나 1990년 8월 27일, 그의 절친한 음악 동료들이었던 Jimmie, Eric Clapton, Buddy Guy, Jeff Healey, 그리고 Robert Cray와 함께 공연을 마친 후 돌아가던 헬리콥터가 위스콘신(Wisconsin)주(州)의 이스트 트로이(East Troy)에 떨어지면서, 텍사스의 떠오르는 희망이었던 Steve Ray Vaughan은 불과 35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6. Chuck Berry
만약 Chuck Berry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Rock & Roll 기타는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Country 음악과 시카고 블루스의 전통을 계승한 스타카토 주법과 더블 스트링 연주는 Chuck Berry의 전매특허이자, 그의 대표적인 테크닉이 되었다. Chuck Berry는 1955년 Chess Records 데뷔작이었던 'Maybellene'을 포함하여, 이후 약 10여 년간 걸작들인 'Roll Over Beethoven', 'Rock and Roll Music', 그리고 'Johnny B. Goode'를 포함하여 24곡이 넘는 작품들에서 예의 다이내믹한 사운드 효과들을 선보이게 된다. 1926년 캘리포니아 주(州 ) 산호세(San Jose)에서 태어난 Chuck Berry는 10대 무렵부터 기타를 배웠다. 그러나 'Maybellene'으로 스타덤에 오르기 전에는 도둑질 등의 사고로 학교에서 징계를 받기도 하였으며, 1960년 무렵에는 2년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비록 1972년에 발매한 'My Ding-a-Ling'이 Chuck Berry의 유일한 No. 1 싱글 이지만, 그는 Rock & Roll 기타계의 명실상부한 첫 거장(巨匠)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5. Robert Johnson
Robert Johnson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제왕이었으며, 가장 미국적인 보이스를 가졌던 뮤지션이었다. 또한 거장들인 Eric Clapton과 Keith Richards, 그리고 Jack White를 포함한 수 많은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였다. Robert Johnson이 1936~37년 사이에 발표한 29곡은 현대 블루스 음악과 록 음악의 초석(礎石)이 되었다. 'Cross Road Blues', 'Sweet Home Chicago', 'I Believe I'll Dust My Broom' 등의 히트 곡들은 모두 전통적인 소스들을 받아들여 재창조해낸 곡들이다. 미시시피 빈민층의 아들로 태어났던 Robert Johnson은 그의 음악을 통해 그가 겪었던 배고픔과 가난, 방황, 그리고 흑인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불합리 함들과 당시 남부(南部)에 남아있던 노예 제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마치 바로 눈앞에서 겪은 것처럼 느껴진다.” 라는 Eric Clapton의 말처럼 Robert Johnson의 음악에 잘 녹아있다. Robert Johnson 기타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의 기타 재능을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전설이 떠돌 정도로 탁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음악에는 확실히 악마적 숭배 요소가 있었지만, 그의 앨범들은 언제나 숨 막힐 정도의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과 정교한 테크닉이 녹아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천재들이 그러하듯 Robert Johnson 역시 1938년 불과 27세의 나이로 질투심에 눈이 먼 정부(情婦)에게 독살 당하였다. 이후 1958년에 발매 된 Robert Johnson의 Box Set 앨범이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사후 Robert Johnson은 그 업적을 평가받게 된다.
4. Eric Clapton
1965년 누군가가 런던의 지하철 벽에 "Eric Clapton은 신(神)이다"라고 처음 써 놓았을 무렵, 영국 Repley 출신으로 자신의 첫 메이저 밴드였던 Yardbirds로부터 최근의 John Mayall Bluesbreakers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음반을 발매했던 Eric Patrick Clapton은 단지 15세에 기타를 시작한 20세 청년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미 이때 Eric Clapton은 향후 40여 년간 수 많은 팬들을 한결같이 충격과 경악으로 몰고 갔던 즉흥적인 연주 센스를 담은 탁월한 솔로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1963~65년 수퍼 밴드 Yardbirds에서 활동할 당시 Eric Clapton의 애칭은 아이러니컬하게도 “Slowhand”였다. 2001년 Rolling Stone지(誌)와의 인터뷰에서 Eric Clapton은 "흔히 말하는 느림은 파워풀함을 경제적으로 지속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심지어 15분이 넘는 Cream과의 연주에서도 Eric Clapton의 솔로는 단지 명확한 선율과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멜로디를 표현해 내는 데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70년 Derek & the Dominos에서 작업했던 명작 ‘Layla’ 이후 Eric Clapton은 후속 솔로 앨범들을 통해 Singer & Songwriter로서의 열망을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명작들로 공인받고 있는 1974년작(作) [461 Ocean Boulevard]앨범과 1983년작(作) [Money and Cigarettes]앨범에서 보여주었던 적절한 힘의 안배에 의한 유연하기 이를 데 없는 기타 솔로는 Eric Clapton을 기타의 신(神) 반열의 제일 첫 자리에 위치하게 만들었다.
3. B. B. King
스스로를 “블루스 음악의 전도사”라 칭하며, 지금 까지도 끝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B. B. King. 그러나 가끔씩 우리는 그가 얼마나 혁신적인 기타리스트였는지를 쉽게 잊어버린다. 1951년 혜성같이 등장하여 음악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Three O' Clock Blues"에서 컨트리 블루스와 일렉트릭, 그리고 재즈에 대한 B. B. King의 순수한 열정을 만날 수 있다. 그의 물 흐르는 듯 유연한 기타는 거장 T-Bone Walker에게서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치 실제로 여성이 흐느끼고 있는 듯한 감동을 주었던 걸작 'Lucille'에서 B. B. King이 노출한 벤딩과 비브라토는 B. B. King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테크닉과 연주 스타일은 역시 거장 이었던 Buddy Guy에게서 “B. B. King 이전의 모든 이들은 기타를 어쿠스틱처럼 연주했다,”라는 평을 이끌어내며, 향후 블루스 기타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는 위대한 시작이었다. B. B. King은 미시시피주(州)의 델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1948년 23세가 되던 해에 멤피스(Memphis)로 나와 그 곳에서 WDIA의 라디오 진행을 하며, 유명세와 함께 'Beale Street Blues Boy' 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당시 B. B. King은 독특하게도 블루스의 전자 음향 접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컨트리 블루스 음악과 감성적인 가스펠음악, 그리고 부드럽고 정갈한 재즈와의 조화를 이끌어내게 된다. B. B. King이 1950년대에 남긴 걸작들인 ‘Every Day I Have the Blues’, ‘Sweet Little Angel’, ‘You Upset Me Baby’ 등은 유연함과 터프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으며, 완벽에 가까웠던 1965년작(作) [Live at the Regal]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금까지 녹음된 블루스 기타 앨범 중 최고의 명반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B. B. King은 여전히 건재하다. B. B. King은 지금도 타이트한 일정의 투어를 소화해내고 있으며, 녹슬지 않은 기타 실력을 통해 Eric Clapton과 함께 한 근작 앨범 [Riding With the King]으로 거장(巨匠)의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2. Duane Allman - Allman Brothers Band
Duane Allman은 Wilson Pickeet의 1969년작(作) ‘Hey Jude'의 커버와 1970년 Eric Clapton과 Derek and the Dominos가 함께 했던 걸작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 등의 명반들에 참여하여 리드 기타와 빼어난 슬라이드 기타 솜씨를 선보이며, 이 앨범들 성공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9년 싱어이자, 건반주자였던 동생 Gregg Allman과 함께, 록 계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는 되는 밴드 Allman Brothers Band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Duane Allman은 Allman Brothers Band 라이브의 고전으로 불리는 ’Whipping Post'에서 세컨드 기타리스트인 Dickey Bettsdhk와 함께 환상의 싸이코 델릭 재즈 인터 플레이를 노출하게 된다. 또한 Muddy Waters나 Blind Willie McTell의 커버 등을 통해 Allman Brothers Band의 외연을 넓히게 된다. 비록 Duane Allman과 Gregg Allman은 1960년부터 함께 연주를 해왔었지만, Duane Allman은 Allman Brothers Band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을 몰랐었다. Duane Allman의 유일한 인터뷰였던 1971년 Rolling Stone지(誌)와의 인터뷰에서 Duane Allmand은 자신이 처음으로 마스터 하려고 했던 곡이 McTell의 ‘Statesboro Blues’ 였다고 털어놓았었다. 그리고 Allman Brothers Band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들의 세 번째 앨범 [At Fillmore East] 앨범에 대해서 Duane Allman은 이 앨범은 자신이 얼마나 발전하였고, 또 얼마나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앨범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Fillmore East 공연 8개월 후인 1971년 10월 Duane Allman은 밴드의 주(主) 활동무대였던 조지아(Georgia)주(州)의 Marcon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롤링스톤지 선정 기타 아티스트 1위
나는 Jimi Hendrix를 단지 영화나 음반으로만 접하고, 그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서 슬픔을 느낀다. 왜냐하면 살아생전의 Jimi Hendrix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 버릴 수 있는 일종의 연금술사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공연 내내 사람들이 LSD(마약의 일종)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Jimi Hendrix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에 의해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Jimi Hendrix의 이러한 면은 애초부터 LSD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Jimi Hendrix의 연주는 언제나 엄청난 굉음을 동반하였지만, 그러나 또한 놀라울 정도로 서정적이며 정교하였다. Jimi Hendrix는 Eric Clapton이 수 십 년간 무던히 애쓰고 있는 진정한 블루스 기타 사운드와, Syd Barrett과 Pete Townshend의 사운드를 혼합한 듯 한 혹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U2의 절규하는 듯한 모던 사운드를 잇는 가교(架橋)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두 파트를 천재적인 재능을 통해 빛나게 연결하고 있다. 또한 단지 앨범을 듣는 것 만 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그의 공연은 Jimi Hendrix의 천재성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Jimi Hendrix는 공연 시 연주 중간에 왼손을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곤 했는데, 이러한 액션은 사람들에게 마치 Jimi Hendrix라는 기타리스트가 이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음악 또한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사운드가 아니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Jimi Hendrix의 연주에 대해 "나는 술이나 마약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환상적인 연주로 인해 주위가 모두 환각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Jimi Hendrix는 먼지 투성 이었다. 그의 낡은 옷은 언제나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며칠간 도망 다닌 듯한 지저분한 옛날 군용 재킷을 입은 그가 무대를 향해 다가가는 갈 때에도 어느 누구도 Jimi Hendrix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Jimi Hendrix가 무대에서 내려올 때에는 수 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그를 주목하였으며, 그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자 곧 그녀들은 Jimi Hendrix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무대위에서의 Jimi Hendrix는 대단히 에로틱하다. 그리고 남자의 눈으로 봐도 그는 Mick Jagger처럼 매우 에로틱하다. 물론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저급한 본능에 기인한 그런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그 남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즉 그의 한 부분이 되어 그가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정신적인 욕망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은 Johnny Rotten도 그러하였고, Kurt Cobain도 그러하였다. Jimi Hendrix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친절하며 상냥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불안정하기고 하였다. 만약 나처럼 운이 좋아 공연 후 몇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면, 에너지로 충만한 Jimi Hendrix의 흥분된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쾌락에 탐닉하는 그를 보고 안타까움을 느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Jimi Hendrix는 삶의 마지막 무렵에 과도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Jimi Hendrix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대단히 슬프다.
Jimi Hendrix에게는 시기심이나, 질투심 혹은 그에 근접하는 감정도 가질 수 없다. Eric Clapton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 자신이 Jimi Hendrix와 필적(匹敵)한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Eric Clapton은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 그리고 조금 과장된 추측을 하는 것 같지만 이는 사실이다. 언젠가 런던 St. James의 Scotch에서 Jimi Hendrix의 공연을 보고 나와서 Eric Clapton과 나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조용히 서서 Jimi Hendrix의 엄청난 파워에 감탄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었다.
이후 나는 Jimi Hendrix를 Saville Theatre에서 세 네 번 더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날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기타에 불을 지른 날이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은 흔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Jimi Hendrix는 기타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다음날 Jimi Hendrix는 숯처럼 검게 타버린 그 기타를 들고 여전히 연주를 하였다. 나는 Jimi Hendrix가 나를 놀려대며 “기타를 불 속에 던져서 확실히 부셨어야 했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곧장 그가 기타를 부수는 것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고, 난 만약 기타를 부수려면 모든 부분 부분을 완벽하게 파괴해서, 다시는 수리할 수 없도록 제대로 부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그의 기타를 부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나를 Jimi Hendrix는 마치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응시하였었다.
Jimi Hendrix가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하다가, 나는 돌연 도둑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예술 학교 시절 작은 밴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나름대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던 계획과 청사진들, 그리고 멋진 팝송도 있었다. 몇몇 노래들은 물론 좋았지만, 대부분의 노래들은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으며, 우리는 남들이 비웃으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그리고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했었다. 기타를 부수고 멋지게 걸어 나가는 것에 대해 혹자는 “웃기지 말라고 해. 그런 것들은 쓸모없는 짓일 뿐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이 진정한 펑크 의식의 시작이었고, Jimi Hendrix는 적절한 시기에 완벽한 음악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Jimi Hendrix는 일렉트릭 기타를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었다. 일렉 기타는 항상 위험하며, 분노를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John Lee Hooker가 마이크를 기타에 구겨 넣었을 때, 일렉 기타는 마치 분노한 것처럼 매우 위험한 사운드를 냈다. 그리고 1950년대 초의 Ricky Nelson, Everly Brothers와 함께했던 James Burton이나, Booker T와 함께했던 Steve Cropper와 같이 내쉬빌(Nashville)의 영향을 받은 록 아티스트들은 일반적인 아름다운 6현 어쿠스틱 기타와 비교했을 때, 얇은 쇳소리나 혹은 다소 날카로운 소리들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또한 수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Elvis Presley의 초기 작품들 중 'Hound Dog'과 같이 Elvis Presley이 자신이 직접 일렉 기타를 연주한 곡들에서의 기타 사운드는 듣기 좋지만은 않다. 그리고 거장들이었던 Muddy Waters나 Buddy Guy, 그리고 Albert King과 같은 초기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의 사운드도 귀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Jimi Hendrix는 이러한 일렉 기타의 사운드를 거슬림 없는 진정 아름다운 사운드로 만들어내었다.
-하나두 틀린말이 없네여...하나같이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이네여
다음번에는 장르별루 순위를 매겨보려구합니다.....
처음여러분들도 참여해주세여....처음 식구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뮤지션은 누군지 궁금하기두하고 같이 듣고 공유하는 것도 좋겠져~~~~이상 Doors 였습니다...
첫댓글 Doors 님 말씀대로 다같이 참여하고 공부할수있는 문화마당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가슴에 꼭꼭 들어오네요,,고맙습니다/ 공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