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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선원 정토사
 
 
 
카페 게시글
◈--법문,선사 이야기 스크랩 마음 한번 돌리니 극락이 예 있구나 / 법성스님
행복전선 추천 0 조회 44 08.05.03 15:0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제1부 달이 꽃 그림자를 사랑하여

        어머니 스님

 

나는 아버지 권오봉씨와 어머니 신규씨 사이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 해가 갑인년(1914년)이어서 이름을 갑순이라고 지었다.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언니는 무신년에 태어나서 무순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코 금슬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다.

그 첫째 이유는 어머니가 대를 이을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둘째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연상이라는 데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북도 괴산이다.

그래서 나의 본적이 충북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이천이었다.

내가 철이 들기도 전에 아버지는 수원에서 그리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귀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내 의식이 미치는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은 바로 상귀 시절부터다.
 

아버지는 한의사인 동시에 훈장이셨다.

앉은뱅이도 고친다는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게 나있던 명의로서, 멀리서 당나귀를 몰고 와 아버지를 모셔가던 것을 본 일이 있다.

우리 집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로 매일 분주했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는 하루에 몇 시간씩 마을의 학동들을 가르치셨다.

나는 남복을 입고 다섯 살 때부터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한문 교육을 받았다.

총기가 남다르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한번 배운 것이면 절대 잊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운 것이 후일 경전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순이 언니가 인천의 약대라는 곳으로 시집을 간 것은 그녀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우리 가족은 언니를 시집보낸 직후에 서울로 이사를 왔다.

지금은 후암동을 옛날에는 삼판동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곳에서 지금의 국민학교 과정인 소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서울로 이사 온 직후부터 외도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소실을 얻어 만리동에다 살림을 차렸다.

아들을 낳아 주지 못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차라리 두 집 살림을 할 것이 아니라 시앗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림을 합치지 않고 주로 만리동에서 지냈으며,삼판동의 우리 집에는 아주 이따끔 찾아올 뿐이었다.
 

아침 상에 아버지가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늘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침이 다시 찾아올 수 있게 되기를 고대했다.

나도 이렇게 아버지 없는 자리를 허전해 했는데, 당시 어머니의 내면적 갈등은 더 말할 것 없이 치열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마도 인생에 대한 회의와 허무의 깊은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허무를 불가에 귀의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란 존재는 애물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낳은 자식 중에서 첫딸은 이미 성혼했기에 걸릴 것이 없는데, 어린 내가 딸려 있어 어머니는 훌쩍 출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소학교 5 학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수업이 끝나 교문 밖으로 나가니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너하고 같이 갈 데가 있다."

어머니는 나를 서대문 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옥천동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홍련암으로 데리고 갔다.

그 절에는 홍철우라는 큰스님이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그 스님에게 인사시킨 다음 말했다.
 

"너 이곳에 있거라. 나는 어디 좀 갔다올 데가 있으니까."
 

나는 어머니가 잠깐 근처에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밤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홍련암의 공양주 보살과 함께 자게 되었다. 내가 보살에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 언제 오시는 거예요?"
"좀 오래 걸리실 게야."
"어디를 가셨는데요?"

 "너를 이곳에 맡겨 두고 먼 곳으로 공부하러 떠나셨다. 내가 돌봐줄 테니 너는 걱정말고 이곳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거라.

그러다 보면 어머리를 만나게 되는 날도 있을 거야."
 

그제서야 어머니가 나를 절에다 맡겨 두고 스님이 될 결심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어머니가 나를 버린 것이다. 나는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새벽이 되자 전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대웅전의 뜨락은 아직도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나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아직은 떠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를 절에 맡기고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보따리를 싸놓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이 웬수. 거기 있지 왜 찾아왔어?"
"밖에 내다 버리려면 왜 낳았어요?"
 

그 말을 한 다음 나는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나를 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은 나를 충분히 서럽게 만든 사건이었다. 나는 흐느꼈다.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도 이슬이맺혔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쳐라. 어디 안 가마."

어머니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집을 팔았다.

그리고 나를 절에 맡긴 다음 짐을 싸가지고 출발하려던 차에 나에게 꼬리를 잡힌 것이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떠나려고 했었지만 역시 모질게 떨치고 갈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다시 삼판동의 감나무골에 집 한 채를 샀다.
어머니의 첫번째 출가 시도는 이렇게 해서 실패했다.
 

나의 조부는 아버지를 낳으신 다음 상처를 했다.

그래서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을 때 아버지의 이복 동생인 내 삼촌은 나이는 세 살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 살짜리 시동생을 업어서 길렀다. 그러기에 삼촌은 어머니를 형수라기보다 어머니처럼 대했다.
조부는 고향인 괴산에서 별세했다. 어머니가 서할머니를 모셨다.

서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상귀에 살 때였다.

삼촌은 철이 들면서 가출을 했다. 어디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며 어머니는 시동생의 안부를 늘 걱정하던 터였다.

그 삼촌이 감나무골 삼판동의 우리 집으로 여자를 하나 데리고 나타난 것은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숙모감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어머니는 삼촌 내외를 일년 동안 데리고 살다가 살림을 내주었다.

살림난 지 일년 만에 삼촌은 아들을 얻었다. 내가 삼촌 집에 가서 미역국을 끓여 주며 산모를 돌보았다.
 

나의 동갑내기 숙모는 아들을 낳았는데, 나는 이때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을 나갔기에 외로웠겠지만 나는 형제도 없고,
어머니가 나를 두고 자꾸만 출가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외로운 사춘기를 맞았다.

중학교를 미션스쿨에 다닌 것이 계기가 되어 외로웠던 나는 열렬한 크리스천이 되었다.

어머니에게 나를 버려도 좋으니 제발 스님은 되지 말라고 애원을 했을 만큼 골수 기독교 신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천지간에 외로운 모녀였건만 종교가 다르자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어머니는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했다. 예수교 신자인 나는 어머니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고 몰아붙이곤 했다.

어머니를 교회로 전도시키려 무진 애를 쓸 때면 어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했다.
 

"얘 갑순아,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 내려온 불교라는 좋은 종교가 있는데 너는 왜 서양귀신을 받드는 사람이 되었니? 아무래도 내가 너를 학교에 잘못 보낸 것 같다."
"예수님은 서양 귀신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이란 말이에요"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라니 틀림없는 서양 사람인데 뭘 그래."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주님이시라니까요?"
"말도 안 된다. 동정녀가 어떻게 애를 낳는다고 그러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귀기울이고 다니지 말아라!"
 

어머니는 나에게 전도되기는커녕 나와 나의 신을 싸잡아 매도하고는 했다.

주여, 이 일을 어찌하란 말이옵니까. 나는 교회의 마룻바닥에 엎드려 통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가 두번째 출가를 시도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웬 낯선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 이삿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예요?"
"우리는 새로 이 집에 이사 온 사람들이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네가 갑순인 모양이구나. 네가 돌아오면 주라고 너의 어머니가 맡긴 편지가 있다. 그걸읽어 보면 자세한 내막을 알수 있을 게야."
 

나는 새로운 집주인이 내주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편지에 앞으로는 모든 것을 삼촌과 상의해서 살아가라고 썼다.

 

너도 이제는 철이 들 만큼 들었으니 엄마의 앞길을 막는 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네가 공부를 마치고 시집을 가는 데 드는 비용은 이 집을 팔아 삼촌에게 맡겨 두었으니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절에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기로 했다.
갑순아!
어머니를 원망하기보다 슬기롭게 너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걸어가 수 있기를 빌겠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난 나는 슬프고 기가 막혀서 혼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삼촌을 찾아갔다. 삼촌이 원망스러웠다.
 

"삼촌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알려 주지 않았어요?"
나는 삼촌에게 대들었다.
"네 어머니의 뜻이었다."
"나를 버린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에요."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삼촌 집을 뛰쳐나왔다.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은 느낌이었다.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지향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한강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강물이 굽어쳐 흐르고 있었다. 차라리 그곳에 뛰어들어 죽어 버리자는 생각이 간단없이 내 뇌리를 스쳐 갔다.

나는 한없이 복받치는설움에 정신없이 울고 있었다.
 

이때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놓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삼촌이 서 있었다.

삼촌은 내가집을 뛰쳐나가자 뒤따라왔던 것이다. 삼촌이 나를 돌려 세우며 말했다.
 

"너 강물로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나는 뿌리치며 부르짖었다,
"놔요.  난 죽어 버릴 거예요."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서 집으로 가자."
"싫어요."
"이러면 못쓴다. 내가 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테니까 집으로 같이 가자."
 

나는 삼촌이 어머니가 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어머니를 사탄의 품에서 구원하여 나에게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삼촌이었던 것이다.

삼촌의 마음을 움직여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면 나는 죽지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부터 학교도 가지 않고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굶으니까 병이 난 것이지만, 병이 나서 먹을 수가 없는 것으로 보이도록 이불을 싸 덮고 누워 버렸다.
나는 결사적이었다. 이러다간 애 죽는다고 판단한 삼촌은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내가 다 죽게 생겼다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는 아무리 독한 마음을 품고 산으로 올라갔지만 다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사탄의 품에서 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머니를 전도시키지 못하면 언젠가는 다시 절로 달아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동원했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 2 년이 지나도록 전도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처음 미션스쿨에 다닌 것이 계기였지만

우리 나라가 일제의식민지였던 시대적 상황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주체 사상 고양에 기독교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물론 나는 독립운동에 관여할 만큼 대단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나라를 잃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련 운동의 모태가 된 기독교에 차츰 깊이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또 하나, 이때까지도 이 땅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 여권이 수탈되는 운명의 굴레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기독교는 여권 신장과 개인의 존엄을 일깨우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우국지사나 신여성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데 대해 나는 고무되고 매료당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남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여자들과,

일본에 의해 억눌려 있는 우리나라에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신앙이라고 굳게 믿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내 나이 열아홉 살이 되었다.

나는 그해 10 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어머니 곁을 떠났다.

어머니를 전도시키지 못하고 시집을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모녀는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

누구든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고, 딸이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없겠지만

우리 모녀 사이는 좀 특별했다.
 

아버지와 의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출가하여 정진하기가 소원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당신이 하고 싶었던 대로 진작에 스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출가를 막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나에게 사랑을 쏟을 수 있었기에 사는 보람을 느꼈던 분이다. 나는 어머니의 전부였다.
 

나는 어머니 없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우리 두 모녀가 충분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결국 그 돈은 아버지가 상귀에서 번 것이겠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잘 늘리고 축내지 않았기에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부처님께 빼앗기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했으며,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다.
 

우리 모녀의 그 시절을 추억할 때면 어머니가 깊은 밤 소리없이 흘리던 눈물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한 많은 이 땅의 여인이었다.

남존여비와 칠거지악의 악습이 채 사라지지 않은 여명기를 살아낸 분이었다.

어머니가 불교라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없었다면 그야말로 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다 가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선택한 종교를 훨씬 뒤에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긴 아품의 세월

중매로 만난 나의 남편은 강덕근이었다. 시집은 시흥의 새점이라는 곳이었다.

그는 오남매의 맏이었고, 그 집안의 장손이었다.

적당한 키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관옥 같은인물의 미남자였다.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일하여 수입도 만만찮았다.
 

10 월에 결혼식을 올려 겨우 두 달이 꿈결처럼 흐른 그해 섣달 중순께의 일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저녁 지을 쌀을 씻다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친구분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 묻은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갑순이 보아라.
모든 것이 낯선 시집살이에 어려움이 많을 줄 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서러움의 날을 참고 지내다 보면 여자의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줄 안다.
부디 시부모 공경 잘하고, 지아비 뜻을 받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빌겠다.
뜻하지 않은 내 편지를 받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줄 안다.

그러면 본론을 꺼내기로 하겠다.

갑순아, 놀라지 말거라. 얼마 전에 너의 어머니께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어머니가 진작에 출가를 하고 싶어했다는 것은 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 때문에 출가 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었느니라.
이제 네가 임자를 만나 혼인을 했으니 너의 어머니로서는 어머니된 도리는 다 했다고 여겼다.

그러니 미루어 왔던 입산 수도를 단행해도 되리라는 것이 당신의 뜻이었다.

물론 너로서는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 좋으리라 여기겠지만 너도 이제는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해 주어야 할 줄로 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지 않도록 미리 알려 주라는 것이 너의 어머니 분부였다.

너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친정 나들이를 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편지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적혀 이었다 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돌아가셨다는 말보다 더 심한 충격을 주었다.
기어이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 놓고 삭발위승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편지를 읽다가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쌀을 담아 놓았던 그릇 위로 쓰러졌다.
 

손아래 시누이가 부엌으로 들어오다가 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아래로, 붙임성이 있고 성품이 싹싹했다.

마음이 고와 늘 나를 감싸 주던 아가씨였다는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황급히 달려왔다.
"언니, 왜 그래요?"
시집살이가 무섭기는 무서웠던지 그 경황 중에도 쌀을 엎지른 것이 걱정되었다.
"어떡하죠, 쌀을 엎질러서?"
"괜찮아, 언니. 엄마가 뭐라고 하면 내가 그런 것이라고 할게."
 

속없는 여자 같으면 시어머니에게 일러 야단을 맞도록 할 텐데 이런 식으로 나를 감싸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시누이는 엎질러진 쌀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언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많이 놀란 것 같아요. 밥은 내가 지을 테니까 방에 들어가서 좀 누워요."
 

나는 도저히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치기 때문이었다.

숨이 차고, 목에서는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골이 쑤시다 못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시누이의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쓰고 누웠다.

그로부터 나는 내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긴 어둠의 터널에 버려지고 말았다.
 

온몸이 용광로 속에 처넣어진 쇳덩이처럼 달아오르더니, 3 일째되는 날부터 열이 좀
내리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물에 빠진 솜뭉치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갑자기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죽 한 숟갈을 넘겨도 배가 뒤틀리며 요동을 치다가 신물과 함께 올려 버리는 것이었다.
 

결코 쉽게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날 수 있는 병이 아닌 것 같았다.

동네의 양의사도 다녀갔고, 용하다는 한의사를 불러다가 진맥을 짚고 첩약을 달여 먹어 보았지만 차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젊은 새댁이 느닷없이 병이 나 누워 있으니 그 신랑되는 이의 당황함과 시부모들의 걱정은 매우 컸다.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은지 몇 달쯤 지났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짧은 겨울해가 진 뒤여서 사위가 어둠에 묻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동네 아이 하나가 나를 찾아와서 슬며시 말을 전해 주었다.
"밖에 누가 찾아오셨어요."

"나를?"
"네. 집 식구들 모르게 살짝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가 보세요."
 

시집 식구들 모르게 나를 불러낸 사람이라면. 어머니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내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툭툭하게 걸쳐 입었다.

때는 엄동설한이어서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는 매서운 추위가 몰려와 있었다.
 

대문 밖을 나서자 벌써 골목에는 한치 앞의 분별이 서지 않는 칠흑 같은 그믐밤의 어둠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려니까 어둠 속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의 "나다."하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친친 두른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갑게 말했다.
 

"왜 오셨어요?"
"네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가려고, 좀 어떠니?"
"어머니 때문에 난 병이에요."
"그러면 못써요. 사람이 왜 그리 용렬한고. 의젓하지 못하고."
"......."
"갑순아,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지성껏 외거라. 관세음보살을 외면 병이 나을 수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시려거든 어서 가세요. 저는 죽어도 사탄에는 빠지지 않겠어요."
"부처님은 의사의 왕이란다. 내 말을 흘려듣지 말고 관세음보살에게 지성껏 매달리면 네 병을 고쳐 주실 거야."
"또 그런 말씀을."
 

어머니는 무슨 말씀인가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무셨다. 나를 보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말씀했다.
 

"그럼, 난 간다."
 

어머니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놓듯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가다가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바람은 매서웠다. 나뭇가지의 울부짖는 소리가 메마르게 들려왔다.
 

어머니는 이렇게 병든 딸을 보러 찾아왔다가 집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불러내어 잠깐 얼굴만 본 다음 부엉이 울던 그 밤에 걸어서 관악산의 상불암까지 갔을 터였다.
그곳은 새점에서 눈 쌓인 산길로 이십 리가 넘었다.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고행의 밤길을 걸어갔을까. 나의 무사 회복을 당신이 믿는 관세음보살에게 빌었겠지.

염불을 외며 산짐승이 곧 달려들 것 같은 무서움을 잊었을 것이다.

나는 먼 길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언 몸을 녹이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드리지도 못했다.

시집식구들의 눈이 어머니나 나나 다같이 무서웠고,

승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또한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다.

지금 같으면 친정 어머니가 밤에 남의 눈을 피해 병든 딸을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다녀간 후에 나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남편은 아무래도 집에서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나를 서울의 의전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전병원은 지금의 육군병원으로 당시에는 가장 큰 병원이었다.

의사는 급성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소피를 보려고 하면 요도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주사를 맞은 다음 용을 쓰며 억지로 힘을 주어야 피같이 새빨간 오줌이 한 종기턱이나 나올 뿐이었다.

신장염과 동시에 오줌소태가 된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의사들은 나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심장의 고동이 일정하지 않고 늘 불규칙하게 툭툭툭 뛰다가 벌렁벌렁 숨이 목으로 차오른다.
심하면 숨이 목에 닿으면서 2 분 가량 멈추는 것이었다. 이것을 심장경막증이라고 했다.

강심제를 놓고 마사지를 하면서 부산을 떠는 가운데 매번 아슬아슬하게 절명의 고비를 넘기고는 했다.

손발을 자칫 잘못 움직여도 일단 멎었던 벌렁거림이 요동을 치며 일어나기 때문에 절대 안정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누워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발병 이후 늘 두꺼운 이불을 쌓아 놓고 기댄
상태로 지냈다.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신장염에 오줌소태가 겹치듯 심장병에 심장경막증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것이었다.
 

기관지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해소 천식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딸국질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항상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기침을 한번 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글깡글깡 가래 끓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입원실 밖의 복도에서도 들릴정도였다.

나중에 퇴원을 했을 땐 방안에서 나는 소리가 담 밖으로까지 흘러나가, 길 가던사람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방앗간의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심장이 뛸 때 목에서 가래가 같이 끓다가 심장 뛰는 것이 가라앉으면 가래도 동시에 스르르 잦아들고는 했다.
숨이 목으로 차오르면서 심하게 가래까지 끓게 되면 숨이 막히고

온몸이 금세 파열해 버릴 것처럼 답답해지기 때문에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마구 쥐어뜯기도 했다.

회오리처럼 또는 폭풍처럼 한바탕의 분탕질이 지나가고 나면 잡히는 것이 없어

방바닥을 마구 헤집었던 내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들어 있기 일수였다.
 

 병원에 입원할 때는 없었던 증상인데, 입원하고 있던 중에 복막염과 위장병이 생겼다.
온몸이 신장염으로 인해 부어 있지만 특히 배가 소복히 부어오르는 증상이 생겼는데, 복막염 탓이라고 했다.
 

독한 약과 주사를 맞게 되면서부터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늘 더부룩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속앓이가 일어나면서 가슴을 한 바퀴씩 요동을 치며 틀어제치는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면 창자까지 덩달아 꾸불텅거리며 홰를 쳤다.
 

속앓이가 치밀고, 심장의 고동이 툭툭툭 뛰다가 가래가 목구멍으로 숨가쁘게 솟아오르고,
경막이 막히면서 뚝 숨이 꺼졌다가 막혔던 것이 터지면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악순환이
반복 되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특히 한달 중에 월경 때가 되면 더했다. 월경불순도 그러기에 나를 초죽음로 몰아넣는 지독한 병 중 하나였다.

거기다가 편두통이 있었다.

앞골만 패는 것이 아니라 뒷골도 패고, 앞뒤로 골이 패는 가운데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압박 상태로 빠져든다.

귀에서는 늘 도랑물이 흐르는 것처럼 괄괄괄 소리를 냈다.

기가 허해서 그러는 것이려니 했는데 그것도 이비인후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귓병의 일종이었다.
바늘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몸의 여기저기를 콕콕 쑤시는 것 같은 신경통 증세도
나타났다.

바늘 하나로 몸을 찔러도 견딜 수가 없는 법인데 여러 개로 마구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은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릴 것이다.

처음에는 몸 전체가 마구 쑤시기 시작하더니 기일이 경과하면서 양 무릎이 집중적으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그것을 관절염이라고 했다.
신경통과 관절염이 또 합병증이 된 것이다.
 

피가 얼굴로 한꺼번에 몰리는 것 같은가 하면 화끈거리기 시작하고 골이 패다가,

온몸에 이어 무릎을 특히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식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상기병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발병 이후 하루도 편한 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이불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었는가 하면 악몽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혼수상태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잠을 이루려고 애를 쓸수록 잠은 더 멀리 달아나고 눈만 벌겋게 충혈되었다.

수면제의 힘을 빌려 간신히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 눈을 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숙면을 하지 못하니 내 병세는 호전될 수가 없었다.
 

내가 앓게 된 병은 모두 열네 가지였다. 의사 한 사람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몇 명의 전문의들이 함께 매달렸지만 조금도 차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더욱 증세가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의사들은 나를 불치병과 난치병을 함께 앓고 있는 환자로 분류해 놓았다.
 

그들은 병을 고치러 병원에 왔다가 치료되기는커녕 하루가 지나고 나면 없던 병이 생기는 식으로

여려 병을 동시다발적으로 앓게 된 나를 연구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죽은 뒤에 신체를 병원측에 양도한다는 조건하에 무료로 시술을 해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의사들은 내가 소생하여 퇴원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나 자신도 병이 나아 집으로 돌아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엄청난 병원비를 남편에게 부담시키느니 나를 실험용으로 내놓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다 죽어가는 몸뚱인데다가, 두 달도 채 함께 살지 못한 처지라 부부의 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병이나 자기에게 골칫덩어리가 되어 줄 뿐인데도,

그는 나를 끔찍이 위하며 소생하기를 애타게 기원했다. 민망하고 눈물이 저절로 날 만큼 고마울 따름이었다.
 

절대로 연구 대상이 되어 줄 수 없다고 밝혔는데도 보호자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일본인 의사들이 대거 몰려왔다.

그들은 나를 병원 내의 소강당으로 데리고 갔다.

여러 분야의 의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앞에 놓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 의사가 내 신체 부위를 이곳저곳 가리키며 수십 명의 레지던트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피해를 덜 주기 위해 나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제공하고 무료 시술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막상 이리 되고 보니 윤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치욕스러웠다.

죽은 뒤에는 죽었으니까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안 남편은 의사들의 처사에 분개하면서 병원을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사들은 워낙 많은 병을 동시에 앓고 있기 때문에 여러 의사들이 한꺼번에 모여 치료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했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펄펄 뛰는 그에게 애원했다.
"퇴원시켜 주세요. 죽어도 집에 가서 죽고 싶어요."
그는 애처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병원에 입원한 지 몇 달 만에 퇴원을 하고 말았다.

병이 낫기는커녕 중환자가 되어 돌아온 나를 시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맞아들였다.

퇴원한 후에도 집 근처의 양의사가 내 주치의가 되어 보살폈으며, 용하다는 한의사를 모두 불러 치료케 했지만
차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한 중에도 가물거리는 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곧 죽을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가물거리며 살아있었다.
 

남의 집안 장손에게 시집을 와서 원하는 자식을 낳아 주지는 못할망정 젊디 젊은 나이에 제 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누워 있으니,

어쩌다 시어머니의 땅이 꺼지는 한숨 소리라도 듣게 되면 차라리 모진 마음 먹고 자진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앓아 누워 있는 중에도 세월의 흐름은 한치의 유예가 없어서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화사했다.
 

시할머니가 내 방으로 들어오시며 말씀했다.
"아가, 밖에는 지금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젊은 네가 방에만 누워 있으니 이게 무슨 변고니?"
"......"
시할머니는 애써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과일 좀 먹어 보렴. 이것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시할머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문 밖을 나서면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있고, 나무들이잎새를 내어 푸르게 약진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봄이 되면 차도가 좀있으려니 했는데 봄이 되어도 병세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아 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슬펐다.
시할머니가 방에 나간 후부터 나는 내 설움에 겨워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울었던지 얼굴이 퉁퉁부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내 부운 얼굴을 보더니 그길로 시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시어머니에게 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는 마음이 편해야 병이 낫는 건데 집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시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얘, 나는 오늘 바빠서 그 방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런 나한테 무슨 소리를 했느냐고 따지는 게냐?"
 

그가 폭탄선언을 했다.
"살림을 나야겠습니다."
"뭐야?"
"살림나는 것을 병원에 입원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십시오."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밖에 있다가도 병이 나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야 하는 법이거늘."
"글쎄, 저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않으면 병이 안 나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그는 그길로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시어머니가 내 방으로 오셨다.
"네 남편이 왜 저러니?"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도 답했다.
"모르겠어요."
시어머니는 퉁퉁 부어오른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네 얼굴이 이 모양이라 저러는 것 같구나. 낮에 무슨 일이 있었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머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었니? 제발 집안 좀 편하자."
 

나는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그길로 나가서 우리가 살림을 날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는 변호사 사무장으로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일정 때인데도 자가용을 타고 다닌 사람이었다.
 

그가 밤늦게 돌아와서 말했다.
"역전 앞에 가게가 셋 딸린 큰 집을 사 버렸소. 가게에서 나오는 세만 해도 살림 꾸려 나갈 돈은 될게요."
"난 이사 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환자고, 나는 당신의 보호자야. 환자는 보호자의 말만 따르면 되는 거요.

당신이 아무래도 시할머니, 시어머니 계신 집에서는 누워 있기조차 불편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진작에 살림을 나려고 생각하면서도 미루어 왔는데 더는 안 되겠어."
 

남편이 박박 우기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시부모들도 그의 서슬에 못마땅해하면서도 끝내만류하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살았던 새점에서 시흥 역정으로 살림을 났다.
 

당시 무순이 언니에게 열세 살자리 딸이 있었다. 나는 그 조카를 불러다가 내 병구완을 하게 했다.

미상불, 층층시하의 시집에 살 때보다는 마음이 좀 편했다.

남편은 집에 딸린 가게를 시계포와 양복점, 이발소로 빌려주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끔찍했다.

살림을 나서 살게 되고부터 그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면 차에 과자며 사탕, 인형을 비롯하여 장난감들을 잔뜩 사오고는 했다

과자를 먹어 보라고 권하며, 내 앞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동원했다.

그 당시 과자나 장난감들은 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귀했고, 가격으로 쳐도 말할 수 없이 비쌌다.

시어머니는 새점에서 역전 앞의 우리 집에 다녀가실 때면 늘 그를 못마땅했다.
 

하루는 그가 백원을 주고 으리으리하게 번쩍거리는 양복장을 백화점에서 사들여 왔다.
쌀 한 가마 값이 6 원밖에 안 하던 때이니 백원이면 쌀 16 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시어머니는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살림을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며 혀를 찼다.

그는 시어머니의 눈총을 웃음으로 태연히 받아넘겼다.
 

"저 사람에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살림 느는 재미라도 느끼라고 한 일이니 어머님은 아무 말씀 마십시오."
 

그는 불가 식으로 말하면 전생에 나에게 많은 빚을 졌던 사람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자기를 위해 밥 한 그릇 변변히 지어 주지 못나는 나를 이렇게 끔찍이도 위했으니 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어른들은 내가 오랫동안 앓아 누워 있으니 아무래도 소생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소생을 한다고 해도 대 이을 아들을 낳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나도 이러다가 죽지 싶었고, 주위의 누구도 내가 살아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의사로부터 불치병이라는 선고를 받은 나는 사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니 부모들로서는 그에게 소실을 얻어주어 자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시부모들이 계신 새점으로 불려갔다가 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무엇 때문에 불려갔었다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새점에 사는 이웃집 아낙이 역전에 나왔다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나를 위로한 다음 말했다.
 

"새댁은 병이 나서 그렇지, 남편 복 하나는 있는 여자라니까요."
"왜요?"
"새댁의 시부모님이 신랑에게 새장가를 들이겠다고 요새 난리예요. 시집을 오겠다는 사람도 구했어요.

그런데 정작 신랑이 펄펄 뛰면서 마누라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사람의 도리로서 그럴 수는 없다고 말도 못 꺼내게 한다군요."
 

나는 그제야 그 이가 새점에 불려가 장가를 들라는 압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같으면 아무리 환자라고 해도 사람이 살아 있는데 장가를 들이겠다는 시부모는 없을 테고,

아내가 살아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내가 살아나지 못하여 죽는다고 가정하면 이만한 자리가 쉽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 중에서는 딸을 내주겠다고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로부터 그런 압력을 받아도,

내가 죽으면 몰라도 살아 있는 한은 시앗을 보아서 환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해줄 수는 없다며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배운 것이 많고 능력이 있어 돈도 잘 벌고, 나만성했다면 남부러울 것이 없을 사람인데 장가 한번 잘못 들었다가

좋은 시절을 그렇게 다 보내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참으로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유난히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다.

기왕에 살아나지도 못할 바에야 정을 완전히 떼어 놓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아닌게 아니라 시어머니는 노상 그가 쓸데없는 것을 사들인다고 핀잔인데, 내가 꼬 시켜서 그러는 것
같은 자격지심도 들었다.

나는 그에게 필요도 없는 것을 사들고 들어온다고 심하게 양탈을 부리고는 했다.

남편에 대한 거부가 도에 지나쳤던가 보다. 누워 있는 주제에 남편을 타박하는 내가 눈에 거슬렸던지 시삼촌댁이 혀를 찼다.
 

"내가 보기에 네가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옆에 있던 그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환자예요. 자기 몸이 괴롭다 보니까 그러는 겁니다. 지나친 것이 아니에요."
 

삼촌댁은 그를 좀 모자란 것이 아니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를 위해 정을 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한 그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좀체로 소생할 기미가 없었다.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확실히 절대 안정을 취하면 좀 나았고 심화를 끓이면 내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에 대해 평소보다 극도로 신경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나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진 적이 있었다.

퇴근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던 그가 내 병세가 갑자기 더 악화된 것을 발견하고 급히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가지고 온 주사약은 한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급히 녹여 나에게 주사를 놓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잠시 헐떡거리며 숨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번엔 방이 빙그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물을 좀 마시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 대접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물 대접을 집으려고 바라보니 그것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로 보였다가 세 개로도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껴 옷을 쥐어뜯으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래도 내가 그 밤을 못 넘기고 세상을 뜨려나 보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급히 시부모가 있는 새점으로 사람을 보내어 일이 나게 생겼다는 것을 알리는 한편, 다시 의사를 불러왔다.

왕진 온 의사는 주사 맞은 것이 부작용이 났다며 새로운 처방을 했지만 나는 좀체로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새점으로부터 시부모뿐만 아니라 대소간의 집안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는 이번이야말로 죽게 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마치 간질병 환자처럼 발작을 계속하던 나는 어느 순간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내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섯 개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나는 그것을 하늘 나라의 어디메쯤에 있는 무슨 기둥이려니 여겨 부지불식간에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라고는 하지만 모기 소리처럼 흘러나왔을 것이다.
 

"아이구 무서워!"
내 말소리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말을 하는구나. 나를 알아보겠니? 정신이 좀 나느냐?"
 

의식은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희미하게 보이던 남편과 시어머니의 얼굴이 차츰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섯 개의 기둥이 발가락이었을음 알았다. 시어머니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나가 미음을 끓여 왔다.
 

"이것 좀 먹어 보겠니?"
 

이제는 하다하다가 발작까지 했는가 싶어 민망하고, 자신이 참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과 시집 식구들은 나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터였다.

시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는 내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솟구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염라대왕 앞까지 거의 다 갔다가 되돌아왔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면서도 다시 뽀시락거리며 되살아나 오욕스러운 생명을 연명하는 것이다.
 

이 무렵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그저 밤이 주는 휴식 속에 불면 없이 빠져들었다가 상큼하고 신선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차려 놓고 남편과 마주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아니면 아침이 돌아오기 전에 차라리 세상을 떠나 있고 싶을 뿐이었다.

출근하는 그를 위해 아침상을 마련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 되어 나를 짓이기곤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나는 그렇게 7 년을 앓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0년이 되었다.
그해 9 월의 일이었다.

그날도 남편은 평소와 같이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다되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타고 온 차에서 자기 스스로 내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서야 내렸다.

출근할 때 멀쩡하던 사람이 업혀서 집안으로 들어오니, 나는 내 몸이 아파 경황 없는 중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함께 온 사무실 직원이 설명했다.
"저녁에 회식을 했거든요. 대구매운탕을 드셨는데 체한 것 같습니다. 혼자 가시게 할 수 없어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대구탕을 먹고 체했다는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의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식중독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픈 사람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 집으로 오면 어떻게 해요?"
"사무장님이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대로 집에 있도록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람을 시켜 새점의 시부모에게 연락을 하는 한편 의사를 불렀다.
왕진을 온 동네의 의사는 응급처치를 한 다음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병명을 얘기해 주지 않았지만 분명 식중독은 아닌 것같다.
 

그는 이튿날 아침 일찍 내가 입원했던 서울의 의전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래도 그 병원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종합병원이었다.

내가 내 몸을 못 다스리니 이런 위급한 중에도 그를 따라 병원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못해 서러웠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 가고 나자 갑자기 신경을 쓴 탓인지 속앓이가 치밀고, 심장이불규칙하게 뛰다가 턱까지 막혀 오고,

가래가 끓고, 골이 쏟아질 듯 지끈거렸다.

온몸은 바늘로 마구 짓쑤시는 것 같았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내 코가 열자나 빠졌으니 그이를걱정하고 있을 여가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열흘이 흘렀다.
 

나는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젖먹던 힘까지 다해 딱 한 번 병원으로 면회를 갔다.

열흘 만에 보는 그의 몰골은 나보다도 더 참혹했다. 그에게 내려진 병명은 급성 신장염이었다.

그가 일하는 사무실의 변호사가 급히 손을 써서, 일본 본토로부터 좋다는 약을 공수해다가 투약하고,

의사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병은 워낙 질이 나쁜 악성이어서 급속도로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그 스스로도 살아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남편은 죽을 바에야 집에 가서 죽겠다며 퇴원을 고집했다.

결국,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효험도 얻지 못하고 사경을 해매는 지경에 이르러 다시 집으로 실려 왔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에 그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 죽는 것은 괜찮은데 저 사람이 불쌍해서 어쩔꼬."
 

그는 나를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때까지 우리는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혼한 지 두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내가 병이 들었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내가 소생하기를 바랐지만 죽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본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그 때까지 나는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아니었으니 자기가 죽고 나면 상속도 받지 못하게 될 거라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나면 부모님들이 저 사람을 새점으로 데리고 가려 할 걸세. 저 사람을 나도없는 시집에서 살게 할 수는 없어.

이 집에서 사는 날까지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네.그것이 내 뜻이었다고 우리부모님들에게 좀 전해 주게."
 

친구 중에 한 명이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어떻게 하든 살 생각을 해야지."
 

그 하루 뒤였다. 환자 부부가 같은 방에 있을 수가 없어 그는 다른 방에 누워 있었다.간병하고 있던 시어머니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얘야!"
 

나는 시어머니의 비명 소리를 듣고 몸을 가신히 추스렸다. 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들자 없던 힘이 났다.

억지로 남편이 누워 있던 방으로 오니 시어머니가 아들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단지를 하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급히 장도리를 찾아 문지방에 내 손가락을 올려놓고 내리쳤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그의 입안으로 넣자 그가 눈꺼풀을 치떴다.

이 순간 나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시체에 피를 묻히면 안 되는데."
 

시어머니는 아들이 되살아날 수 없다고 보고 피를 묻히지 못하도록 까무라쳐 있는 나를 다른 방으로 옮기게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이를 어쩔까. 남편이 찾아요!"
 

나는 나를 깨운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남편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그의 눈이 허공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찾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동자는 허공을 한 바퀴 맴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서더니 스르르 눈꺼풀이 닫혔다. 그에게서 영혼이 떠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나는 그의 절명 직후에 다시 졸도를 했다.

7 년을 곧 죽을 듯이 앓던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그는 겨우 보름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해서,

이내 불귀의 객이 되어 연히 이승을 떠나간 것이었다.

이런 황망한 일은 천지간에 다시 없을 것이다.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가 되어 졸도를 해 버렸으니 마음놓고 울어 보지도 못했다.
 

나는 나중에, 시어머니가 내 단지한 피를 끝까지 그에게 먹이지 못하도록 밀쳐낸 것이 한이 되었다.

그는 분명 눈을 감았다가 피를 받아 먹고 눈을 떴었다. 의식을 되찾고 한참을  견디다가 이승을 하직했다.

피를 좀더 많이 받아 마셨다면 소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허긴 그건 내 안타까운 소망이었을 뿐 계속 했어도 별수 없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때 단지를 했던 내 손가락은 영원히 회복이 되지 않은 채 상처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엄연히 결혼을 했던 여자인데도 호적상으로는 처녀로 돼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귀의할 때도 호적상으로는 처녀였고, 지금도 호적은 깨꿋하다.

내게 사연이 적잖게 있으리라 여긴 사람들도 호적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초로 이 글을 통해 내 숨겨두었던 지난날의 비망록을 들춰 내보인 것이다.

쓸데없는 짖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책을 하면서도

이승에서 맺었던 인연의 한 줄기를 풀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향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놔 봤다.
 

내가 죽고 그가 살아났다면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긴 죽은 사람은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겠지만.

몸이 성한 여인에게도 남편이 세상을 뜬 슬픔은 망극할 것인데 의지 할 곳없던 병든 나를 애지중지 여기며 거둬 준 남편이 홀연 떠나가니 나의 슬픔은 하늘이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졸도를 했다가 의식이 돌아오면 단장의 오열로 토했고, 그러다가 다시 졸도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그런 중에 상여에 실려 우리가 살았던 역전 앞의 집을 떠나  산으로 갔다. 그리고 땅에 묻혔다.
 

나는 상복을 입기는 했지만 그의 산소가 만들어지고 있는 산까지 따라가 볼 기력도 었다.

사람들은 줄초상이 나지 않은 것만도 천우신조라고들 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고 나자 새점의 시부모가 예상대로 나에게 말했다.
 

"너 혼자 여기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니 새점으로 들어가서 우리와 같이 살도록 하자."
 

신랑 잡아먹은 죄인으로 자처하고 있던 터에 층층시하의 시댁으로 들어가서 무슨 면목으로 살아갈 것인가.

나는 도살장으로 내몰리는 축생을 떠올렸다.

그러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던 나로서는 눈물만 흘릴 뿐 항명할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가 세간들을 우마차에 내다 싣고 있었다. 이때 죽은 남편의 친구들이 몰려왔다.
그중 한 사람이 시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르신, 이렇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시아버지는 눈을 치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럼 환자를 혼자 버려두란 말이더냐?"
"아버님은 환자를 위한다고 하지만 고인은 아주머니가 이곳에 살 수 있도록 아버님께 말씀드려 달라는 유언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미망인을 고인의 뜻대로 살게 해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리 애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부모 입장에서는 환자를 이곳에 그냥 둘 수 없네."
 

남편도 없는 시집으로 끌고 가는 것이 환자인 나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친구들의의견과,

부득불 새점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시어른들의 생각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친구들 중 한 사람이 근처 지서의 일본인 주임을 불러왔다.
 

나가다라는 이름의 그 지서 주임은 우리와 안면이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전후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그가 말했다.
 

"죽은 사람이라도 영혼이 있습니다. 고인의 뜻을 어겨서는 안 돼요."
 

시아버지는 선뜻 대항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가다는 말을 이었다.
 

"혼인신고가 안 되었어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미망인은 남편이 남긴 재산을 얼마든지 상속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남편 재산의 상속을 원하십니까?"
 

남편은 상당히 많은 토지를 매입해 둔 바 있었다.

나가다는 내가 원하면 그 모두를 내앞으로 상속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죄인인 나로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중환자인 주제에 재산을 탐내 시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해드릴 수는 없었다.
 

"땅은 필요 없어요."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짐은 원하신단 말씀이군요?"
 

나는 시댁으로 들어가 살 자신이 없었다. 사는 날까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 부분만은 죄를 짓는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내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결국 남편이 남긴 모든 재산 중에서 나는 집만 갖고 나머지는 다 시부모님께 드린다는선에서 해결이 났다.

나가다는 집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강조한 다음 미망인의 마음을 더이상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시부모님에게 다짐을 두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상청으로 들어가 대성통곡을 했다.
 

"이 집에 있는 것 중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다 가져가세요."

시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네가 그리 말해 주니 조금은 덜 섭섭하구나."
 

그가 백화점에서 사들였던 양복장은 그 당시 일본인 고관대작이나 가지고 있는 값비싼 것이었다.

또한 그는 수십 벌의 양복을 남겼다. 모두 새것이었다.

그밖에도 우리 집에는  그가 장만했던 값나가는 세간이 적잖았다.
 

 나는 다시 진심으로 말했다.
"어머님, 저는 집만 있으면 됐지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양복장도 가져가시고 옷들도 시동생들이 입을 수 있도록 해주시면 그이도 좋아할 거예요."
 

시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 어차피 살림이 있어야 너도 살 테니 모두 이곳에 그냥 두고쓰거라.

아들 보듯 두고 보게 옷이나 한 벌 가져가겠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지만 일단 한 사람이 세상을 뜨고 나면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재산 상속을 비롯해, 인간 관계의 재편 작업을 새로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도 슬픈 일이다.
   

    흔적조차 없어져라.

사람들은 나를 두고 팔자가 기구한 여자라고 했다.

열아홉에 결혼해서 두 달 만에 병이들고, 7 년을 앓아 누워 있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떴으니 기구하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딸을 둔 어머니의 심중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내 어머니는 속세의 인연을 다 끊고 불문에 귀의한 스님이었지만

불행에 빠진 딸의 소식을 듣고는 산중에서 정진에만 몰두하고 있을 수는 없었나 보다.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시댁에 살 때는 나를 밖으로 불러내어 잠깐 보고 돌아서 갔었는데,
이번에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간곡히 말했다.
 

"얘야,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의 고를 지고 태어났다. 잠시 멀물렀다가 가는 이승의 삶이란 헛되고 허망한 것이니라.

우리는 각자 노력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정진을 해야 한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삼독을 여의고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다."
 

어머니의 손길은 반가웠지만 어머니의 말까지는 수용할 수 없었다.

내가 병이 난 것은 어머니 탓이 아니라 내 운명 탓이라 생각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어머니를 미워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집했던 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종교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부처님을 믿는 것만도 참을 수 없는데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마세요."
"참으로 우매하구나!"
"......."
"깨닫기 위해 정진하라고 권하지는 않겠지만 관세음보살을 염해라.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하시다.

중생이 고에 빠졌을때 지성으로 그 이름을 외면 발원하면 나타나시어 자비의 손길을 펼쳐 주신다고 했어."
"관세음보살을 데려오세요. 내 앞에 데려다 놓으면 믿을게요."
"그런 너는 네가 믿는 예수를 내 앞에 모셔다 보여 줄 수가 있다는 말이니?"
 

나는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수를 믿지만 그 예수를 어머니 앞에 모셔다 보여 줄 수는 물론 없었다.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이때 같은 논리로, 어머니가 나에게 관세음보살을 보여 주지 못하지만 관세음보살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 생각은 없었다.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 내 입장에서 보면 부처니 관세음보살이니 하는 것은 마귀나 잡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나름대로 자기 때문에 내가 병마의 제물이 되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병고에서 구해 줄 수 있는 분은 부처님뿐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가 그렇게 싫어해도 만나기만 하면 관세음보살께 빌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환자였기에 어머니의 설득이나 종교 논쟁은 치열하게 불꽃을 튀길 수는 없었다.

우선은 내가 너무 기력이 없어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고, 어머니의 입장에서는내가 싫어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 눈치를 보아 가며 말을 꺼냈다가 내가 발작이라도 일으킬라치면 한숨과 더불어 종교를 떠난 일상적인 모녀 관계로 돌아가 나를 보살펴 주고는 했다.
 

분명한 것은 이 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신이 필요하던 때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절대자의 구원을 애타게 간구하면서도 교회에 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처지였기에 누구의 부축을 받는다고 해도 교회까지 갈 수가 없었다.

젖먹던 힘까지 쏟아 겨우 간다고 해도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성경책을 볼 여력도 안됐다.

교우들이 심방을 와서 기도를 해주고 찬송가를 불러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오랫동안 마주하고 있을 만큼의 건강도 나에게는 허락돼 있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간구할 뿐이었다.
 

애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쉽게 실망하지 않았다.

성령을 믿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의 사제인 최덕준 스님이 나를 찾아온 것은 해가 바뀐 늦봄의 일이었다.

덕준 스님은 어머니보다 좀더 고압적으로 나를 설득했다.

그렇지만 그 앞에서 어머니에게 하듯 불교를 마구 이단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덕준 스님은 어려운 상대였다.

나는 순진하여 그분을 내치지도 못했다. 덕준 스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도 실은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였어요. 우리 어머니는 전도사고.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서 극락원이라는 절에 같이 한번 놀러가 보자는 거야. 상도동 고개에 있던 절이야.

그곳에는 양나 큰스님이라는 고명한 분이 계셨어요. 친구를 따라가서 양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을 내게 되었던 거야. 결국 머리까지 깎게 되었어."
"..........."
"나나 갑순이나 예수도 부처님도 본 일이 없어요. 다만 그 내용을 보고 믿는 것인데,
기독교보다는 불교의 내용이 더 우월하고 심오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
"갑순이가 생각하듯 부처님이 마귀 잡신이라면 절대로 수천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경배 대상이 될 수는 없었을 거야. 갑순이도 믿어 보면 위대하고 심오하다는 것을 알게 돼요."
"............"
"너의 어머니는 너 때문에 승려도 속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 옆에서보기에 딱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은 정진을 하고 싶으신데 병들어 있는 너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거야.

네 어머니는 법당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칠성각이나 명부전 어느 곳을가더라도 그저 우리 딸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하고 계신단다.

네가 어머니 정성을 안다면 실오라기처럼 붙어 있는 목숨을 빨리 끝장내든가 아니면 불교를 믿든가 해야 하는 것이 딸된 도리가 아닐까?"
 

사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끝장을 내고 싶었다. 살아서 영화를 보게 될 날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끝장을 내야 하는 것일까.
 

"저도 끝장을 내고 싶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끝장내고 싶다는 생각이 확실하다면 그 방법은 내가 알려줄게."
 

죽고 싶다면 죽는 방법은 당신이 가르쳐 준다는 뜻이었다. 덕준 스님은 병들어 골골하느니 어서 죽어라,

어머니를 위해서도 죽어버리라는 매정한 말을 태연히 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끝장 내고 싶어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지. 내 말 잘 들어요. 나는 곧 희방사라는 곳으로 갈 거야.

거기 가서 기도를드리려고 하는데 회향 때를 맞춰 희방사로 나를 찾아오면 거기서 끝장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실은 덕준 스님도 나처럼 불치병은 아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전도사인 자기 어머니와의 갈등은 상상했던 것보다 치열했던 것 같았다.

마가 끼어서 늘 골골 앓는다는 것이 덕준 스님 자신의 표현이었다.

스님은 물 맑고 공기 좋은 희방사로 가서 특별히 기도를 하려는 참이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희방사라는 곳이 어디 있는데요?"
"중앙선을 타고 가다가, 단야을 지나면 희방 역이 나와요. 그역에서 내리면 희방사는 쉽게 찾을 수가 있어."
"거기까지 어떻게 가요? 가다가 죽을지도 모른는데."
"맹추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가다가 죽으면 그것도 끝장을 낸 게 되는 거야. 끝장을 낸다면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느냐는 말이 나와?"
"............."
"죽지 않고 희방사까지 나를 찾아오면 거기서 내가 진짜로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야. 나를 찾아오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죽음보다 못한 오욕의 삶을 언제가지나 질질 끌고갈 수는 없다는 확고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객사를 하더라도 시신만은 누군가 거둬 줄것이고, 집에 있다가 죽는다고 해서 객사하는 것보다 나을 것도 없는 것이 내 신세였다.
남편은 세상을 떴고 딸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희방사로 가기로 한 전날 밤 어머니 스님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불공드릴 때 필요한 진수를 장만해 왔다.

나는 나대로 간호사 한 명을 사고 독일제 주사약을 상비약으로 준비했다.

그 약을 맞으면 피오줌을 한 종기턱은 눌 수 있게 된다.

몸이 붓고 따갑고 아프며 쑤셔서 소피를 볼 수 없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서울행 기차를 타는 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서울 역에서 내려 인력거를 이용하여 청량리 역으로 가 희방사행 기차표를 끊었다.

청량리 역에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오느라고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쇠잔한 몸을 대합실 의자에 기대었다가 살포시 잠이 들었다.
 

기차 출발 시간이 임박하여 잠들었던 나를 깨우는 바람에 숨이 일어났다.

심장이 툭툭툭 뛰다가 벌렁거렸다. 숨이 헐떡이며 목으로 차오르자 심하게 가래가 끓기 시작했다.

나는 자지러졌다. 곧 숨이 넘어가며 절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 끝장이 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간호사가 급히 강심제 주사를 놓고 마사지를 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 덕분으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숨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차를 탈 수 있었다.

희방 역까지 가는 동안 서너 번 더 그런 고비를 맞았지만 역시 끝장이 나지는 않았다.
 

희방 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머니는 지게꾼을 한 사람 불러왔다.

지게꾼은 허름한 바지저고리를 입은 봉두난발의 떠꺼머리 총각이였다.

그는 지독히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희방은 물이 맑기로 전국에서도 이름난 곳이었다. 그런 곳에 살면서도 어째서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지게에 올라탔다. 한 손으로는 목발을 잡았다.

지게꾼이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파도를 타고 있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창자가 뒤틀리며 요동을 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조금만 참으라며 지게꾼에게 빨리 가도록 재촉했다.
 

걸음을 빨리 옮겨 놓으니 더욱더 출렁거렸다. 이제야말로 숨이 턱에 와서 헉헉 차며 곧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지게 위에서 끝장이 나도록 운명지어 있었단 말인가.

끝장이 나는 순간을 고통 속에서 기다리며 이를 앙시물었다. 그러나 지게 위에서도 끝장은 나지 않았다.
 

희방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하늘이 빼꼼히 올려다보이는 심산 유곡에 있었다.

장마가 지면 물이 넘쳐 탁발을 못 나가고 굶어야 한다는 오지였다.
희방사를 감싸 안고 있는 산속에는 옛날부터 호랑이가 산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호랑이와 희방사에 얽힌 전설을 덕준 스님이 들려주었다.

 

옛날에 한 선객이 이곳에서 움막을 짓고 참선에 정진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움막의 기적문 밖에서 호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산중에서 배가 고파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나타난 것이라면 그까짓 거적문쯤은 얼마든지 밀치고 들어와 자신을 물어갈 일인데,

문 밖에서 울음소리만 내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선객을 거적문을 들췄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선객이 호랑이에게 물었다.
 

"배가 고파서 날 잡아먹으로 왔느냐?"
호랑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객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느냐?"
 

호랑이는 말은 못 하고 아가리만 떡 벌린 채 선객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선객은 아무래도 호랑이 아가리에 무엇이 걸렸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을 밝히고 호랑이 아가리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목구멍에 무엇이 걸려 있었다. 손을 집어 넣어 빼내고 보니 은비녀였다.
 

선객은 호랑이가 아녀자를 잡아먹다가 머리에 찔렀던 은비녀가 목구멍에 걸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찌 사람을 해쳤느냐.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라."
 

호랑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산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이튿날 저녁이었다. 선객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거적문 밖에 쿵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밖으로 나가 보니 아리따운 처녀 하나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선객은 급히 처녀를 움막 안으로 안아다가 눕힌 다음 맥을 짚어 보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뛰고 있었다. 물을 먹이고 간병을 하자 처녀는 의식을 되찾았다.
처녀가 물었다.
 

"이곳이 어디옵니까?"
"희방골 산중인데 어이 처녀의 몸으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렇다면 분명 소녀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옵니까?"
"그렇소이다."
"소녀는 이 고을 원님의 여식으로서 밤에 머리를 감으려고 하던 중 호랑이 한 마리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기절했습니다. 깨어 보니 이곳에 누워 있군요."
 

선객은 호랑이가 목에 걸린 은비녀를 뽑아 준 은혜를 갚는답시고 처녀를 물어다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님이라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우매한 호랑이가 또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선객은 날이 밝자 동헌으로 갔다.
 

이때 영주 고을 원님은 사랑하는 딸이 호랑이에 물려갔다는 말을 듣고 놀라 사람들을 풀어 산중을 수색하고 있었다.

황망중에 딸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자 그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딸의 생명을 구해 준 선객에게 물었다.
 

"선사가 내 딸을 살려 주셨구려. 은혜를 갚고 싶으니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보십시오."
 

선객은 말했다.
 

"특별히 보살펴 드린 것도 없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딸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 선사의 덕분인데 너무 사양치 마시고 말씀을 해주십시오."
"정 그러하시다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빈도가 거하고 있는 움막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탁발을 나갈 수가 없습니다. 개울에 다리를 하나 놔 준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당장 그리 하겠습니다."
 

원은 선객이 머무는 움막으로 가려면 건너야 하는 개울에 구리로 만든 보은의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움막을 헐고 그곳에 절을 짓는 불사까지 후원을 했다.

그 절이 지금의 희방사라는 것이 덕준 스님의 말이었다.

 

우리는 다리 건너편의 요사채에서 머물게 되었다. 때마침 여름이어서 심산 육곡에서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은 맑았다.

그것을 떠 마시면 내장까지 다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물이 좋은 곳이었다.

호랑이가 아직도 희방골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물이 좋아 여기서 정양을 하면 웬만한 병은 이내 나을 듯한 느낌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끝장이 나지 않았으니 나는 천상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의 사제스님으로부터 끝장을 내는 비법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덕준 스님은 내가 도착한 날,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끝장이 난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고는

여기까지 온 이상 절대로 자기 말에 따라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기도를 드리는 거야. 실은 끝장내는 방법은 내가 아니라 부처님이 알려 주실 거니까.
의사 중의 의사여서 못 고치는 병이 없는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면,

네가 죽을 때가 아니면 병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끝장을 내게 해주실 거고,

명이 다했으면 빨리 데려가는 것으로 끝장을 내게 해주실 거야."
 

당시 희방사 주지는 대처승이었다.

덕준 스님이 기도를 드리는 값으로 3 원을 내놓았더니 주지는 불전이 적은 것을 탓하여 매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3원은 이때 시세로 쌀 반 가마 값이었다. 나는 쌀 두 가마 값인 12 원을 냈다.
 

덕준 스님은 제일 먼저 나를 개울가로 데리고 갔다. 맑고 시린 물이 지천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스님은 그릇을 내주며 말했다.
 

"부처님께 바칠 다기물을 떠라."
 

나는 덕준 스님이 시키는 대로 물 한 그릇을 떴다.
 

"다기물은 절대로 땅에 놓아서는 안 된다. 그대로 법당까지 들고 가야 한는 것이야."
 

나는 물론 내 스스로 걸어다닐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다기물 그릇을 들고 이번에는 법당으로 인도되었다.

다기물 그릇을 부처님 앞에 내려놓자 나에게 촛불을 켜도록 했다.
 

"지금부터 기도를 해라."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덕준 스님이 백팔 염주를 내주며 말했다.
"이것을 한 알 한 알씩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외는 것이 기도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한 알을 돌릴 때마다 한 번씩 관세음보살을 외는 거야. 그렇게 열 번을 돌리면 천념이 된다. 천념이 되면 기도를 끝내거라."
 

그런 다음 덕준 스님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우리는 나갑시다."
어머니는 몸도 못 추스리는 나를 법당에 두고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나 보다.
 

"아무래도 옆에서 봐 주어야겠어."
"스스로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니 놔두고 우리는 갑시다."
 

사제 스님은 어머니 스님의 손목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법당에 혼자버려졌다.

끝장을 내기로 결심한 때문이었는지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부처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지그시 반쯤 감은 눈, 척 늘어진 두툼한 귓밥을 골똘히 살폈다. 구리로 만든 조각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생명이 깃들여 있을 것 같지 않은 구리 조각품에게 끝장을 내게 해달라고 빈다고 해서 정말로 끝장이 나게 될까?

아무튼 우선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처님께 물었다. 정말 부처님이 계시는 겁니까? 계시다면 나를 얼른 죽게 하든지 병이 나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끝장을 내지 않고 이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부처님을 보았다.

부처님은 빙그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무심중에 염주를 한 알 돌리며 나직이 '관세음보살' 하고 내뱉었다.
그것은 어색하고 낯선 음성이 되어 내 귀에 들려왔다. 두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셋, 넷,다섯번째로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관세음보살 소리가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천념을 했다.
 

두번째 기도 때부터는 방에서 나가는 것부터 나 혼자 하라고 덕준 스님이 말했다.

나는 스스로 걸어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에, 흙이 묻지 않도록 땅에다가 포대기 자루를 깔아뭉기적거리며 기어서 개울가로 갔다.

뭉기적거려서 조금식 움직이는 방법은 철저한 사투였다.
다기물을 떠 법당까지 가지고 오는동안 절반이 엎질러지는 것이었다.
 

하루의 첫 예불은 새벽 3 시에 시작한다.

그러고 오전 10 시와 오후 3 시, 저녁 7 시.이렇게 하루에 네 차례씩의 기도가 진행되었다.

이상한 것은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숨이 가쁘기는 했지만 요동을 치며 치밀어오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름이어서 절의 축대 구멍마다에 뱀이 숨어 있다가 혀를 날름거리며 스르르 내 곁을 지나가기가 일쑤였다.

뱀에 물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이따금 나를 두렵게 했지만, 이래 끝나나 저래 끝나나 끝장만 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자 공포도 사라졌다.
 

네 차례의 기도 중에서 새벽 3 시에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밖은 깜깜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올 듯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호랑이가 어흥하고 달려들 것 같았다.
 

지금 같아선 죽으면 죽었지 몸도 못 가누면서 뭉기적거리며 다기물을 떠서 법당으로가고,

관세음보살을 천념식 외는 사투를 벌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때는 아직 순진했고, 8년째 죽음보다 더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다 보니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아무쪼록 끝내자는 생각만 들 때였다.

기도는 죽음을 재촉하는 처절한 몸짓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새벽 기도에서 천념을 마쳐도 여전히 어둠이 사위를 감싸고 있던 기억이 난다.

방으로 돌아와 보면 어머니와 사제 스님은 그곳에 없었다.
 

두 분은 내가 법당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산신각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드렸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뭉기적거리며 기어가는 나를 몰래 지켜보며 얼마나 울었을 것인가.
 

나도 울었다. 물 그릇을 땅에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들고 가면서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그리고 내 신세가 스스로 생각해도 불쌍하여 소리 없이 울기도하고, 때로는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여러 번의 울음 중에서 이틀째 되던 날 부처님앞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주룩주룩 흘린 뜨거운 눈물은 내가 생각해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울음이었다.

그 동안 나는 어느 순간부터 부처님께 하소연을 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다기물을 올려놓고,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른 다음, 관세음보살을 외우다가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다.

 

'부처님, 부처님이 계시다면 얼른 좀 끝내 주십시오.' 내 몸에서 땀이 비오듯 했다.

나는 하소연을 하다가 법당 마룻바닥에 머리를 대고 오열을 토했다.

콧마루가 시큰해져 왔다.

내가 이렇게 울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울면서 부처님에게 매달렸던 그 순간이 부처님의 품안에 안겨지던 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3 일이 흘러갔다. 그 3 일은 내게 있어서 병들어 앓았던 8 년 세월과도 맞먹는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8 년 같은 3 일이 지나가자 덕준 스님이 말했다.
 

 "회향은 내가 해주지."
 

스님은 일꾼들을 시켜 과일과 나물들을 장만하고 산자와 떡을 비롯한 음식을 조촐하게 마련했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스님은 구병 시식을 했다. 목탁 소리와 낭랑한 염불 소리가 내 귓전으로 들어와 가슴을 울렸다.

나는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외웠다.

 

회향을 마친 날 저녁이었다.

 

나는 나즈막한 잔디밭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중년 부인과 딱 맞닥뜨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부인은 기품이 있었다.
부인은 나에게 작은 주전자를 내주며 위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것을 가지고 저기 가서 물 좀 떠 오거라."
 

부인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번듯한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나는 부인으로부터 주전자를 받아 들고 그 기와집으로 향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수도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비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대청마루에 여인 두 명이 앉아 옷감을 마주잡고 다리미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물을 좀 뜨려고 하는데 수도가 고장났군요."
 

두 여인 중에서 나이가 좀더 들어 보이는 부인이 후원 쪽으로 돌아가 보라고 했다.

그 말에 따라 후원으로 돌아가니 반달형의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 연못의 중앙에서는 맑은물이 퐁퐁 솟구치고 있었다.

나는 연못가의 바위에 올라가 엎드려서 주전자로 가득 물을 떴다.

이내 내가 올라서 있던 바위가 갑자기 흔들 했다. 나는 펄쩍 뛰어내리면서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갈증을 말끔히 씻어 주는 감수로와도 같았다. 물을 실컷 마시고 난 나는 뒤늦게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이쿠, 떠 오라고 했는데."
 

소리를 치다가 번쩍 눈을 떠 보니 꿈이었다. 어머니 스님과 덕준 스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물었다.
 

"떠 오라고 했는데라고 소리를 치던데 무슨 말이니?"
"꿈에 어떤 부인을 만났어요. 그 부인이 물을 떠다 달라고 했는데 그만 내가 그 물을 마셔 버렸지 뭐예요."
 

덕준 스님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물을 마셨단 말이지?"
"네."
"아이구 이제 우리 갑순이 병은 다 나았다. 관세음보살이 약수를 먹게 해주셨으니 병 다 나았어요!"
 

내가 꿈에 만났던 중년 부인이 관세음보살이었단 말인가. 덕준 스님이 물었다.
 

"좀 달라진 것 없니?'
"글쎄요."

 "우선 너는 지금 누워서 잠을 잤단 말이야."
 

나는 그때까지도 이부자리를 깔고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늘 이불과 베개를 받치고 등을 기댄 자세로 가사 상태와 같은 잠에 잠깐잠깐 빠져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저녁은 달랐다는 것을 덕준 스님이 일깨워 준 것이었다.
 

기대어 있던 내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잠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숨이 벌렁거리며 일어나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고 껄덕거리다가 자지러지는 터라 어머니
스님은 나를 깨워 바로 앉히려 했다.

그것을 덕준 스님이 좀 지켜보자고 만류했다고 한다.
 

다리를 뻗고 잠이 들었어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꿈에 관세음보살을 만나 약수를 얻어 마셨으니 병이 나았으리라는 것이 덕준 스님의 말이었다.

우선은 누워서잤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엄지발가락을 당겨 보았다.

지금까지는 엄지발가락만 움직여도 배가 깜짝깜짝 놀랄 만큼 당겼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슬그머니 벽에 의지하여 일어나서 몇 발자국 걸어도 배가 요동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앞골도 뒷골도 패지 않았다. 팔다리도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온몸을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 또한 거짓말처럼 나아 있었다.

나는 부르짖었다.
 

"어머니 병이 나은 것 같아요!"
"정말이냐?"
"보세요. 우선 그르렁거리던 거친 숨소리가 안 들리잖아요."
"아이구,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어머니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관세음보살을 연달아 외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내 볼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덕준 스님도 함께 울었다.
병이 나은 것이었다.

다만 소변을 못 보아 배꼽 밑이 아직도 부어올라 있을 뿐이었다.그런 내가 실로 8 년 만에 요의를 느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머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그 절의 화장실은 요사채에서 멀리 떨어져 개울가에 위치해 있었다. 밖은 어두웠다.

나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로 갔다.

어머니는 나를 화장실에 두고 급히 방으로 돌아와 덕준 스님과 함께 법당으로 올라갔다.
 

나는 독일제 이뇨제를 맞지 않고도 요의를 느낀 것이 신기했다.

기적은 내가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는 순간에 또 한 번 일어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소변을 본 일이 없는데 막혔던 둑이 터지며 물이 범람하듯 일시에 소변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터져 나가는 힘이 어찌나 세던지 오장육부가 함께 딸려 나가는 것 같았다. 팽팽하게 부워 있던 배가 쪼글쪼글해졌다.

나는 8 년 만에 시원스럽게 소피를 보고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 주저앉고 말았다.

탈진하여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나는 이 순간에 누구의 말을 듣지 않고도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처님이야말로 의사 중의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

관세음 보살의 도력이 장하다는 것도 체험했다. 나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 앉아 눈물을 철철 흘렸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흐른 것일까.

어머니가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갑순아, 갑순아!"

내가 대답했다.
"네, 어머니!"
 

화장실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타났다.
 

"아이구, 무사했구나. 나는 네가 또 잘못되지 않았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기도를 드리고 방에 돌아와 보니 당연히 화장실에서 와 있을 줄 알았던 내가 보이지않자

어머니는 나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변고를 당한 것이 아닌가 사색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무사하니 다행이다. 어서 방으로 가자!"
 

어머니가 등을 돌려댔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혔다. 내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소피 뒤에 부기가 빠진 내 몰골은 피골이 상접하여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
허전하고 헛헛했다. 방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나를 내려놓고 곧바로 부엌으로 가서 이음을 쑤어 왔다.

구수한 미음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병든 이래 식욕을 느껴 보기도 처음이었다.
 

과일즙과 죽, 미역국 따위들로 몸조리를 하고 나자 없던 원기가 살아나며 누구의 부축이 없어도 혼자 걸을 수가 있었다.

내 병은 희방사에서 일시소멸하는 기적과 더불어 나았다.

한 사람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을 동시에 앓은 예가 흔치 않으려니와

그많던 병을 일시에 소멸하는 부처님의 기적을 입기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지게에 실려 올라갔던 희방사를 사흘 기도 후에 내 발로 걸어서 내려왔다면 누가 쉽게 믿으려 하겠는가.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하자 그 존재를 부정했던 지난 과오를 참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 스님은 천수경을 독송하라고 일러주셨다.

천수경을 독송하던 중 참회계에 이르자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아득히 먼 옛날부터 내가 지은 모든 악업
크고 작은 그것 모두 탐진치로 생기었고
몸과 입과 뜻을 따라 무명으로 지었기에
나는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살생중죄금일참회 투도중죄금일참회
사음중죄금일참회 망어중죄금일참회
기어중죄금일참회 양설중죄금일참회
제구중죄금일참회 탐애중죄금일참회
진애중죄금일참회 치암중죄금일참회
 

살생한 죄, 도적질한 죄, 사음한 죄, 거짓말한 죄, 발림말한 죄, 이간질한 죄, 나쁜 말한
죄, 탐애한 죄, 성낸 죄, 우치한 죄를 오늘 참회합니다.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백겁 천겁 쌓인 죄업
한 생각에 없어져서
마른 풀을 불태운 듯
흔적조차 없어져라

 

죄무자성종심항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죄의 자성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마음 한번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도 업도 없어지고 마음 또한 공하여라
이것을 이름하여 참 참회일세.

 

나는 천수경을 난생 처음 독송해 보았다. 내 가슴에 청량한 기운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이때 희방사에는 경상도 영주 땅에서 왔다는 몇 명의 유복한 보살들이 묵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기적 같은 소생을 보고 말했다.
 

"너무너무 신기한 일입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이렇게 장한 줄은 몰랐습니다.

절 아래 차가 있으니 함께 타고 우리 집에 가서 며칠만 묵어가시지요. 스님들께 좋은 법문을 청해 듣기를 원합니다."
 

바쁜 일상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보살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큰 여관을 경영하고 있던 한 보살이 내 몸조리를 위해 갖은 영양식을 만들어 대접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속인이었기에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

사골을 푹 고아 만든 곰국을 먹으면서 조리를 하자 건강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어머니 스님과 덕준 스님이 보살들에게 답례로 법문을 들려주었다.

나는 집을 떠난 지 열흘 만에 기적을 체험하고 건강한 몸이 되어 시흥으로 귀가했다.
   

     해방이 되기까지

관세음보살의 기적을 체험한 나로서는 치열한 정신 갈등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앉으나 서나 관세음보살을 한 번만 더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간절히 하고 지냈다.

내 염원에 응답하듯 관세음보살은 꿈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었다.

막 피어나는 뭉게구름사이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반신을 나타내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나는 꿈에도 간절하게 절을 하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었다.

어느 때는 하늘에서 연등을 타고 관세음보살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때도 있었다.

나는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확연히 믿었다. 관세음보살은 나를 우선 병고에서 구원해 주었다.

내가 그토록 열렬히 믿었던 예수는 끝내 나를 외면했지만 관세음보살이 나를 구원해 준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병이 났던 것도 부처님을 믿으려는 어머니를 결사적으로 말린 것에 대한 벌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그리고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법도 모르고 드린 3 일 기도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었겠는가.

3 일간의 내 기도는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스님은 내가 앓고 있는 8 년 동안 자나깨나, 어느 도량에 들어서나 오직 나를 낫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수억만 번도 더 빌었다.

부처님이 그런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을 외면하지 않은 결과로 내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좀던 빨리 귀의 기도를 했다면 훨씬 먼저 자비의 손길을 펴주었겠지만

우매하여 고집을 피우는 동안 외면하다가 덕준 스님의 끝장을 내라는 말에 따라

희방사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니 어머니 공덕을 보아 나를 병고에서 일시에 구원해 주는 은덕을 내려준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부처님께 경배드리고 어머니의 은공에 갑음할 따름이다.
나는 진심으로 어머니 스님에게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살아났어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이제는 부처님이 위대하시다는 걸 믿을 수 있겠니?"
"네."
"왜 진작에 내 말을 믿지 않았니?"
".............."
"네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기독교가 독립운동이나 여권신장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너무 쉽게 버리도록 만들고 있어."
"............."
"가령 기독교 신앙에 빠져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신여성들을 보거라.

어떻게 됐니? 종래의 남성우월주의에 반기를 든 것까지는 좋지만 기존 가치관과의 충돌에서

혼란에 빠져 비극을 자초한 여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질 않느냐?'
"..............."
"모름지기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 모시기를 거부한 것만으로도 기독교 신앙의 병폐는 적지 않을 것이야.

빛나는 문화 유산과 전통과 기존의 가치관을 헌신작처럼 내동댕이치고도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으리라 여긴다면 이 얼마나 큰 배덕이란 말이냐."
 

나는 어머니가 날카로운 비판력과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이의 없이 공감했다. 불교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어머니 스님은 여러 권의 경전을 주었다.
 

그 경전을 읽을 때면 꼭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러나 경 읽기를 마치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부처님이 내 옆에 계시다 가신 게 아닐까?
 

나는 병이 낫자 남편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

남편은 새집을 짓겠다며 건축가로 하여금 설계도를 만들게 하던 중 갑자기 병이 나 불귀의 객이 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시집을 와 아내 노릇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 그의 유지를 받드는 것으로 죄갚음을하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젊은 과수댁이었던 나는 달리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할 일이 없으니 낮잠을 자게 되고, 늦게 일어나 아침 수저를 뜨다 보면 밥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저녁에 자연 늦게 자게 되고, 다시 아침에는 또 느지막이 기상하게 되는 악순환이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늦잠을 자도 거리낄 것이 없는 생활이 결코 행복한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이 때 알았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아침식시를준비하는 주부로서의 삶이 나에게는 단절되고 말았지만,

햇살이 창문 사이로 들어와 길게 늘어져 있을 때 무료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나태한 생활에서만은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집을 짓는 것으로 내 생활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집을 짓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목수들 다루기가 어려웠다.

칠촌에 양자 빌듯 빌어가면서 간신히 모양을 갖추고 대들보를 올려놓았을 때였다. 서까래를 보고는 감탄했다.
 

"여자가 참 장하시요. 이렇게 멋진 집을 어찌 짓는단 말이오."
 

대들보가 장정 아름으로도 한 아름이 너끈히 되는 재목으로 만들어졌으니, 근동에서는 나만큼 좋게 집을 짓는 사람이 없었다.

연약한 여자가 기념비적 공사를 벌인다고 하여 노인은 나를 극구 칭찬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노인이 대들보를 찬찬히 올려다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기 저곳을 좀 보십시오. 대들보가 무너지려고 하는 것 아니오?"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닌게 아니라 대들보 밑의 고임목이 튕겨 부러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목수를 찾았다.

도목수도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서까래까지 걸려 있어서 대들보를 다시 내렸다가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장간으로 급히 사람을 보내어 대들보 고임목에 박을 심을 만들어 오도록 했다.

무쇠심을 박은 것으로 휜 것을 바로잡자 대들보는 붕괴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노인이 아니었다면 미처 집을 다 짓기도 전에 붕괴되는 낭패를 당할 뻔했다.

부처님이 노인을 보내어 나를 도왔다고 생각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합장을 하고 중얼거렸다.
 

"나무관세음보살!"
 

우여곡절 끝에 번듯한 집을지었지만 나는 그 집에서 얼마 살아 보지는 못했다.

날로 횡포를 더해 가던 침략자 일본인들은 이 땅의 여자들에게도 수탈의 손길을 뻗쳐 왔다.
곳곳에서 여자들을 정신대로 잡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정신대에 동원되는 여자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녀도 있었지만 특히 젊은 과수댁이 제일 만만한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했다.
 

급히 새로 지은 집을 싼 값에 처분해 버리고 나는 내 병을 고쳤던 희방사 근처의 풍기로 가서 숨어 버렸다.

풍기의 급계동은 물이 맑고 인심이 좋은 고장이어서 난을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1942 년도의 일이었다.
 

나는 금계동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살았다. 혈혈단신인 나로서는 소일거리가 문제였다.
논밭을 사서 농사도 지어 보았고, 닭을 몇천 수 길렀다. 농삿일이든 닭기르는 일이든 나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사는 상렬이라는 청년을 일꾼으로 구했다.
 

나는 이 무렵 기르고 있던 닭을 거의 매일 한 마리씩 잡아먹었다. 몸을 보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닭 이외에 마땅히 육식으로 취할 고기가 그리 많지 않던 때이기도 했다.

게다가 병을 고친 직후에는 비교적 육식을 즐기는 편이었다.
 

누군가 닭을 잡을 때 목을 쳐서 공중에 거구로 매달아 놓으면 피가 싹 빠져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방법대로 해보니 정말 비린내가 나지 않아서 먹기에 좋았다.

닭을 죽여도 이렇게 잔인하게 죽였으니 그 죄업이 적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나는 산마루에 올라 있었다.

마주 바라보이는 산꼭대기에 사람의 손바닥 수천 개가 가지런히 잘려서 곧추 서 있었다.

갑자기 그 손바닥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손바닥에 사로잡히면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산비탈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뛰어가다 보니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고개를 드니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다른 곳을 향해 또 뛰어갔다. 그쪽에도 철조망이 나의 앞을막아섰다.

어느 틈엔가 나는 철조망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그렇게 갇혀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고, 갇혀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이때 철조망 문이 열리며 그림에서나 봄직한, 머리에 뿔이 돋은 험상?은 도깨비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철조망 때문에 달아나지도 못하고 구석에 모여 공포에 떨며 쭈그리고 앉았다.

도깨비들은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물을 펄펄 끓였다.

도깨비 놈이 우리 중 누군가를 잡고 팔을 비틀었다. 팔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도깨비들은 팔을 끓는 물에 집어 넣었다가 꺼내어 맛나게 먹어 치웠다.

발목을 잡고 비틀면 발 하나가 우지끈 부러졌다. 발도 그렇게 물에 튀겨서 먹어 치웠다.
 

 나는 도깨비 손에 잡힐까 봐 더욱 웅키린 채 도깨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시선이 마주쳤다.

그 도깨비는 자기가 먹으려던 사람의 팔을 내 입으로 확 쑤셔 넣으며 말했다.
 

"옛다, 너나 먹어라!"
 

나는 깜작 놀라 비명을 지르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가위에 눌린 가슴은 의식을 되찾고도 오랫동안 벌렁거렸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악몽을 꾼 것이려니 여겼을 뿐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마루로 나오는데 일꾼으로 데리고 있던 상렬이라는 아이가 닭장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닭장으로 들어간 상렬은 닭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닭들은 갑자기 푸득거리며 철망 쪽으로 달아났다.

상렬이 달려들자 닭들은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상렬과 닭의 공방전은 치열했다.

닭은 푸드득거리며 단달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이때 상렬이 닭을 잡는 모습이 간밤에 내가 도깨비에게 쫓기던 모양과 너무도 흡사한 데 놀랐다.

나는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상렬아, 상렬아!"
"왜요?"
"이리로 빨리 와 봐."
 

상렬은 닭 잡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는가 보다고 생각하여 닭장에서 나와 마루 아래로 뛰어왔다.
 

"닭 잡지 말아라."
"아니 왜요?"
"시키는 대로만 해."
 

상렬은 왜 갑자기 주인 마님이 변덕이 생겼을까를 가름해 보는 눈치였다.
 

"너 오늘 닭들을 모두 장에 내다 팔고 오너라. 앞으로는 안 기르겠다."
 

나는 그를 납득시키기 위해 길게 설명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부처님의 은공으로 병을 고친 내가 어리석게도 살생을 밥먹듯 저질러 왔던 것이다.

그러니 현몽을 해주실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이날 몇 번이고 천수경을 반복하여 독송했다.
 

나는 물론 이때까지 출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차츰 육식을 삼갔다.

불가피하여 살생하더라도 가려서 할 일이고, 가급적 살생을 금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보살로 있을 때부터 점차 불교 계율에 따라 생활하기 시작했다.

꿈을 통해 살생을 금하라는 가르침을 내려주셨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어기면 큰 인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여겼다.
 

해방 직전에 이곳 시골 민초들의 생활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릿고개를 넘다보면 굶어 죽는 사람이 꼭 한두 명 나올 때였다.

나는 농사를 지어도 혼자 먹으면 그만이어서 이웃들에게 나눠 줄 수 있었다.

이들에 비해서는 내가 재벌이었다. 집을 싸게 팔았어도 그 돈이 적잖았고, 그밖에도 달리 간수 한 돈이 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황이 들어 사람들의 얼굴이 부어오르는 것을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말먹이 수수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농사를 지어 거둔 보리며 잡곡들을 광에서 꺼내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곡식을 받아 간 사람 중에서 옷만 바꿔 입고 다시 나타나 받아가려는 이가 적잖았다.

나는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네들끼리 알아보고 싸움을 벌였다.

골고루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구황하지 못하는 것이 되레 민망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다. 나도 그들이 좋았다. 훈훈한 정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비록 침략자 일본인들의 가렴주구는 참혹했지만, 겨레의 앞날은 참담했지만, 그리고 청상과부인 내미래도 암담했지만,

나는 풍기라는 곳에서 이렇게 그 어려웠던 때를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민족하에 있어서 새로운 변혁을 가져온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나는 이런 전환점을 맞이하며 내 인생에 있어서도 어떤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한 결과,
시골에서 지을 줄도 모르는 농사를 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까지를 나는 내 인생의 여명기로 치부한다.

성장과 결혼, 8 년의 투병 생활로 이어지는 긴 세월 동안 풍상을 적잖이 겪었지만

아직도 내 여명기에 처해 있다고 분류하는 것은 인생의 아침이 더 멀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나는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밤이 주는 휴식에 동참하여 단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짧은 여름밤을 동지 섣달의 그것처럼 길고 지루하게 보내며 악몽에 시달리다가 보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것은 갈증처럼, 혹은 불 같은 정념처럼 우리를 목마르게 만드는 무엇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8 년동안 나는 광휘로운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스며드는 방에서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에 가족과 마주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침을 맞게 되기를 염원했다.
 

건강하던 남편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떴는데, 살아나지 못한다고 했던 나는 일시소멸의 은덕을 입어 회생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남편이 살았다면 혼자 허허로운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고통만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싱그럽고 눈부신 그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신선한 공기가 있고, 상큼하면서도 오붓한 행복이 있는 그런 아침은 영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제1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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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5.06 14:57

    첫댓글 가슴 가득 슬픔이 공감이 되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으로 사람사는 모습이 이러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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