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공 종중과 보상금 투자착오
안동 권씨(安東權氏) 시조후 18세 안양공(安襄公) 화산군(花山君) 휘 반(攀)의 정계 은퇴 후 정사(精舍)와 부조묘(不祧廟)가 청계산 능안에 있었다. 서울 용인간 고속화도로가 생기면서 청계산 능안에 있던 종중 토지가 수용되어 보상받은 보상금으로 동탄에 재투자를 한 것이 결정을 잘못내린 것 같다. 능안은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으로 옛날에는 광주군 청계산 월천(月川) 금토리로 안동권씨의 집성촌중의 하나다. 금토리는 둔퇴리(遁退谷 里)라고도 불렀다.
안양공 휘(諱) 반(1419-1472 9/25. 54세)은 자는 자룡(子龍)이며 호는 무진정(無盡亭)이다. 파조 10대 휘 수평(守平)의 7대손이며, 일가에 9봉군(九封君)을 이룬 국제(菊齊) 문정공(文正公) 13세 휘 보(溥)의 5대손이며, 대제학으로 전문형에 최초로 등재한 16세 양촌(陽村) 문충공(文忠公) 휘 근(近)의 손자다. 증 영의정으로 권씨의 정점을 이룬 지제(止齊) 문경공(文景公) 휘 제(踶)의 3남이다. 정난 일등공신 권람의 동생이다.
안양공 휘 반은 1455년 세조1년에 윤충경절좌익이등공신(輪忠勁節佐翼二等功臣)이 되었다.
1459년 세조5년 검지중추원사일때는 당상관으로서 왕명을 받아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져 예문관제학을 제수 받았다. 공조참판에서 한성부윤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 부사에서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461년 세조7년에 형조참판, 공조참판으로 재임하다 1462년에는 재차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강원 충청감사를 연임하였다.
1466년에는 가정대부(嘉靖大夫)로서 예조참판겸 예문관제학이 되었고 경기도 병마절도사겸 개성 부윤이 되었다.
1467년 세조13연말에 정계를 은퇴하고 광주 월천의 청계산 밑에 무진정(無盡亭)이란 정사(精舍)를 짖고 소요하니 당시 49세였다.
당대의 명사가 이 무진정에 찾아와 풍류도 즐기며 후학도 배출 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도 여기 와서 시를 짓고 최항(崔恒)이나 박원형(朴元亨)이 여기에서 지은 시가 동문선(東文選)에 올라있다.
이 동문선에 휘 반의 등거제무이루(登巨濟撫夷樓)와 동래해운대시(東萊海雲臺詩)가 올라있다. 이는 1464년 9월 세조10년에 경상도 군적사겸 경차관으로 나가 있을 때 지은 시다. 이 외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는 안동부 모은루기(安東府慕恩樓記)와 산음현의 환아정 판액(換鵝亭板額)과 청파극담(靑坡劇談)에 나오는 영천관위 차호정 하륜운시(次浩亭河崙韻詩) 등을 남겼다.
장남인 충훈부 도사 휘 괄(佸)이 21세에 상을 당해 장지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세조가 광주 월천 청계산하에 토지를 하사하며 사패문(賜牌文)을 내렸다. 사패문은 황황충신혁혁대부오국공신권반련이사급치표지지(煌煌忠臣爀爀大夫吾國功臣權攀憐而賜給置標之地) 다.
안양공이 개성유수 시절에 5대조인 국제 문정공의 개산(介山) 능묘(陵墓)를 개봉축하였다. 공이 1472년 성종3년 9월 25일(음) 향년 54세로 임종하니 국가에서 안양(安襄公)으로 증시(贈諡)하고 부천지은(不遷之恩)을 내렸다. 묘소는 판문점 개산능 임좌원(壬坐原) 국제공 묘하(墓下)에 안치하고, 부인인 영선현부인문화유씨(永善縣夫人文化柳氏)도 공과 합장하였다.
안양공의 부조묘(不祧廟)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388 능안에 양촌 휘 근의 부조묘 옆에 있다.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는 특전이 부조지전(不祧之典)이며 이 부조지전으로 건립한 사당이 부조묘이다.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神主)는 사당(祠堂)에서 물러내어 땅에 묻음으로서 사당의 제사는 끝내고 묘제(墓祭)로 제사를 지내지만 부천지위의 신주는 계속하여 사당에서 기제사(忌祭祀)를 모신다.
부천지위(不遷之位)란 영원히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국왕이 명령한 제사다.
안양공 유허비(遺墟碑)는 윤충경절좌익공신 가정대부 예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화산군 (輪忠勁節佐翼功臣嘉靖大夫禮曹參判兼藝文館提學花山君) 으로 생극면 방축리 공의 부조묘 앞에 있다.
안양공 종친회는 안양공 휘 반(攀), 안양공의 아들 도사공 휘 괄(佸), 도사공의 아들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목사공 휘 우(愚), 3대의 선산을 관리하고 숭조사상을 배양하고 종친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세워진 종친회다.
이 안양공 종친회에서 성남시 금토동 토지 보상금 746,133,282원을 2007년 11월 26일 수령하였다. 이 보상금은 용인과 서울간 고속도로 부지로 금토동에 있는 토지가 수용되어 보상을 받은 것이다. 이 보상금을 종중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를 의논하여 결정 한 것이 동탄에 있는 상가를 분양계약한 것이다.
2007년 12월 24일 동탄에 있는 오피스 타워 2층 3호, 69.44평, 전용면적 34.55평을 6억 9천에 계약하고 계약금 2억7천6백만 원을 지급하였다. 2008년 3월 31일 중도금 1억 3천 8백만원을 지급하고 10월에 잔금 2억7천6백만원을 지급해야하는데 현재 현금이 8천만원이 부족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잔금을 내야한단다. 보상금에서 양도세 9천6백을 내고 기타 비용을 쓰니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피스타워는 이제 완공하였는데 이 큰 빌딩에 입주한 상가가 없고 공실만 있다. 근처에 높은 빌딩도 많은데 모두가 유령같이 상가는 형성되지 않고 유령건물 같은 느낌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모기지론에 금융 불황으로 나라의 존립자체가 흔들리고 있는데 서울에서 떨어진 경기 화성의 통탄에 많은 사람이 입주하여 상가가 활성화 된다는 것은 한참후의 일이다.
상가를 계약할 당시 계획으로는 보증금 1억에 월세 4백만원은 무난하다고 믿고 계약했으나 금년 중반에는 월 3백 지금 년말에는 월 2백만원에도 입주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부족한 금액을 전세 보증금으로 대처할 요량이었으면 상가 입주가 안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오피스타워 상가에서 보증금은 책임진다는 약속을 받으면 이런 은행대출의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종단운영은 전통적인 고전적 방법을 고수해야지 예측 불가능한 경영기법을 도입해서는 지금과 같은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상가계약도 종중의 재산이 아니고 개인이 자기 재산으로 계약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문제가 발생됐다고 생각되면 즉시 손해 보지 않게 여러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종중에서는 회의한다고 노인네들이 모여 자구책을 찾으나 이미 늪으로 빠진 발은 쉽게 뺄 수가 없는 것이다.
첫댓글 도사공 휘 괄(佸)은 휘 활(佸) 임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