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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여행 30일간의 아름다운 추억
D-8 : 잉카 최후의 항전지 오얀타이탐보 탐방
감사말씀
오늘은 남미 페루에서 8일째 날인 2017. 3. 20(월)입니다. 소중한 분들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 그리고 소중한 이야기를 잊어 버리지 않고 오래 오래 간직하고자 여기 일기장으로 기술해 봅니다. 저의 일기장 내용은 개인적인 감정과 주관적인 느낌을 기술하였기에 아마 여러분들과 견해가 다른 점도 많기 때문에 분명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함께 했던 분들께 저의 이 소감문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20일 農心居士 올림
어제의 주요 관광내용
♣ 어제는 이른 새벽 4시 30분에 숙소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소재의 Tambo Inn Machupicchu Hostal를 나와 Am 5시 30분, 마추픽추행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마추픽추의 광장을 지나 먼저 와이나픽추의 정상을 등정했습니다. 와이나픽추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가파랐지만 이 높은 산 정상에 잉카제국의 훌륭한 유적지가 조성된 것에 놀랐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정말 불가사이한 일이었습니다. 와이나픽추에서 내려다 본 마추픽추의 전경은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 와이나픽추에 정상에 올랐고 다시 마추픽추의 광장 앞까지 하산하는데는 약 5시간이 소요 되었지만, 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마추픽추의 약 200여개의 잉카 유적지를 다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태양신전을 비롯한 해시계 인티와타나, 콘돌 신전과 감옥, 왕녀의 궁전, 파수꾼 전망대, 계단식 밭 등을 둘러보았고, 특히 태양의 문과 잉카 브릿지까지 탐방 할 수 있어서 아주 많이 행복했습니다.
♣ 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가운데 Pm 1시 30분경 마추픽추에서 운영되는 관광버스로 시내로 내려왔고, 이어 늦은 점심식사를 한 후, 숙소에 맡겨둔 짐을 챙겨 Pm 4시경에 열차를 탔고 약 2시간 후인 Pm 6시쯔음 오얀타이탐보에 도착했습니다.
♣ 벌써 어둑 어둑한 저녁 시간이 되었지요. 비가 내린 후라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마치 쏟아 질 듯 너무도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성공적인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 탐방 성공을 자축하는 조촐한 저녁 파티를 오얀타이탐보의 식당에서 개최하였지요.
오늘의 일정표
아침 산책을 겸한 새벽시장 보기
숙소인 오얀타이탐보의 Intitambo Hotel의 2층에서 내려다 본 오얀타이탐보 유적지이 전경입니다.
♣ 오얀타이 탐보(Ollantay Tambo)는 쿠스코에서 88km 거리에 성스러운 계곡 중심에 있는 잉카문며의 유적과 그 이전의 전설이 혼재하는 곳입니다. 오얀타이 탐보란 ‘오얀타이란? 옛날 이곳의 지배자였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인물 꾸라까(Curaca)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탐보란 케추아어로 ’여관‘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오얀타이 마을은 잉카 시대의 계획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 어제 와이나픽추의 정상까지 등정을 했고 또 마추픽추의 유적지 일대를 탐방하느라 종일 걸어 다녔고 또 열차로 이곳 오얀타이 마을까지 오는 등 육체적으로 많이 피곤했을 터인데도 여행의 기쁨과 기대감 때문인지 오늘도 아침 새벽 6시경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습니다.
♣ 해뜨기 30분전을 군대있을 때 BMNT라고 했었는데, 그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어둑한 새벽길 마을을 한번 둘러 보러 나왔습니다. 가을이기에 새벽공기가 싸늘 할 것 같았는데, 섭씨 20℃ 정도로 반팔 T셔츠로도 견딜만 했습니다. 집의 담장도 또 바닥도 온통 돌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돌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주 규칙적으로 바둑판처럼 잘 짜여있는 골목길은 미로와 같았기에 특색있는 집의 대문을 기억하면서 걸었습니다.
♣ 골목길에서 놀란 것은 비교적 넓은 길은 수로가 아주 잘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집집마다 문 앞에 흐르는 수로(도랑)가 잘 발달되어 있어 생활이 참 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골목길 수로가 잉카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사실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전 폭우가 많이 내렸던 닷인지 골목길 수로에는 물이 콸~콸~ 소리내며 잘 흐르고 있었습니다. 잉카 시대에 설치한 관개 수로와 하수도가 지금도 잘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잉카시대에는 농사용으로 해시계에 의한 일력의 절기도 가능하고 파종과 수확 시기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잉카인들은 자연과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가운데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DNA를 지닌 우수한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 골목길들이 바르고 곧은데 똑 같은 넓이의 땅으로 나뉘어져 있고, 일정한 공간에는 높은 담으로 경계를 쌓고 그 안에서는 여러 세대가 함께 산 흔적이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지금도 외부의 담들은 옛날 잉카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담으로 쌓은 담벼락의 대문은 직사각형으로 옛 잉카시대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 오얀타이 집들은 쿠스코와 마찬가지로 잉카시대의 초석 위에 세워졌는데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산비탈에는 6개의 거석을 세워 놓은 불가사의한 ‘태양의 신전’이라는 잉카 유적이 존재합니다. 오얀타이 탐보 마을 주변은 험준한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들이 둘러 싸여 있는데 그 한가운데로 우르밤바 江이 급물살을 이루며 마을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오얀타이 탐보는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길(Camino del Inca) 90km의 중간에 위치하여 많은 관광객과 산을 타는 트레킹 족들에게 준비와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는 마을로서 비교적 숙박 시설과 음식점 그리고 편의시설이 많은 곳이라 합니다.
오얀타이탐보의 새벽시장
♣ 안데스(Andes)는 남아메리가 서쪽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지구에서 가장 긴 산맥입니다. 총길이가 7,000km에 이르며 6,000m가 넘는 고봉들이 50여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지요. 오얀타이탐보 마을의 주변 역시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들이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잉카제국의 옛수도인 쿠스코가 가깝기에 쿠스코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에는 수많은 잉카 유적지가 있습니다.
♣ 오얀타이탐보는 쿠스코를 가는 길목인 동시에 특히 남미를 대표하는 상징인 마추픽추(Machu Picchu)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계로 대부분 이곳에서 열차를 타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마추픽추로 가기에 항상 관광객이 붐비는 지역임과 동시에 또한 잉카제국의 망코 2세가 마지막 항쟁하던 지역으로 이곳에도 잉카의 거대한 유적지가 있는 관계로 남미 마추픽추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이곳을 반드시 거치게 되지요.
♣ Am 6시경 혼자 오얀타이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뒤늦게 숙소에서 마을구경을 나온 일행들과 합류하여 이번에는 반찬꺼리를 비롯해 과일 등을 구입하려고 새벽시장에 나섰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들이 별로 없었지만 우리들은 시장 앞의 노점상과 상가건물 지하에 형성된 큰 마트에서 이것 저것 생필품을 구입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사는 곳은 왜 이리도 다 똑같은지… 먹거리를 한보따리 들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 Am 6시 45분, 시장을 비롯해 마을일대를 둘러보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잉카시대의 유물들을 21세기인 현재에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잉카문명을 예찬했습니다.
마추픽추의 태양의 신전보다 더 거대한 규모에 놀라다.
♣ 아침식사 시간엔 호텔에서 제공하는 빵과 치즈, 햄 등에 곁들여 시장에서 구입해온 현지의 신선한 과일과 각종 채소로 셀러드로 만들어 먹어 보았는데, 간만에 우리식의 아주 새로운 음식 맛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숙소 옥상에서 다함께 모여 모닝 커피를 즐긴 후, 오늘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여행용 짐을 싼후 Am 8시 30분, 잉카 유적지인 ‘오얀타이탐보의 태양신전으로 向했습니다.
♣ 오얀타이탐보의 태양의 신전까지는 도보로도 20여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대절한 관광버스로 그곳에 갔다가 곧바로 현지에서 쿠스코로 떠날 예정인바, 대절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얀타이 마을 중심부의 교차로에서 쇼핑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거 Am 9시에 도착한 버스에 승차했지요.
♣ 오얀타이 마을에서 버스로 불과 5분만에 태양의 신전 앞에 도착했습니다. 숙소 2층에서도 거대한 오얀타이탐보 유적지를 조망할 수 있었지만, 정작 현장에 도착하여 그 규모를 보곤 그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실로 엄청한 규모의 시설이었습니다. 산 전체가 돌담으로 쌓여있고 계단식 밭을 지나 산에 오르면 그 정상에는 태양신전이 있었습니다. 잉카인들은 왜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신전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거대한 바위들을 어떻게 산꼭데기까지 운반했을까? 그리고 계단식의 돌담을 쌓은 곳에는 완전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농경지를 조성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의문점은 산 하단부 넓은 광장지역에 귀족과 왕의 거쳐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아 전투를 위한 시설이 아닌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이곳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혈전을 펼쳤다는데…
♣ 그런데 그 의문은 잠시 후에야 풀렸습니다. 즉 평시에는 울타리쳐진 병영과 같은 평지에서 기거하다가 전시에는 산으로 올라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오얀타이 마을에서는 일반 잉카 인디오들이 거주했고, 이 유적지 안에는 귀족와 왕족만이 거주하였을 것이고, 계단식 영농장은 일반 인디오들이 농장관리를 하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계단식 논에도 수로를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과학적인 방법을 쓴 것이었습니다. 연중 강우량이 비교적 적은 가뭄이 심한 곳이기게 예부터 잉카인들은 물관리는 정말 철저히 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사시사철 물이 나는 수로를 만들다니…
♣ 가파른 계단을 타고 산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또한번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곳의 태양의 신전은 마추픽추의 태양의 신전보다도 더 거대하고 웅장했습니다. 이곳 산 봉우리에 까지 어떻게 이런 거대한 1개만 해도 수십톤의 무게인 것을 산꼭데기까지 옮겼을까? 그들은 오직 태양의 신 앞에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받치면 태양의 신이 그들을 굽어 보살펴 준다고 믿었나 봅니다. 그러기에 악을 쓰고 이런 거대한 신전을 조성했나봅니다. 그런데 거대한 태양신전은 조성하다가 중간에 스톱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정복자가 처들어왔기에 중간에 태양의 신전을 쌓다가 중단한 것이었습니다.
♣ 잉카제국의 인디오들은 위 거대한 돌을 태양의 신 제단으로 쌓았고, 여기에 아마도 금으로 장식하려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금으로 장식했던 것을 스페인 정복자들이 모두 갖고 갖고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태양의 신 제단에는 금장식을 했었으니깐요. 우리들은 거대한 태양의 신전 제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때마침 멕시코에서 이곳으로 관광을 온 한무리의 남녀 젊은이들과 함께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들 멕시코 젊은이들도 우리가 코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반가워했습니다. 아마도 K-팝의 영향일 것 같았습니다. 그 효과가 큰 것을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며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오얀타이탐보 유적지는 1536년 잉카황제로 등극한 망코 2세가 이끄는 잉카 군대가 쿠스코를 공격한 후 이곳으로 이동하였는데, 그들을 뒤쫓아온 피사로(Francisco Pizarro :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으며,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의 건설자임)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와 벌인 전투에서 잉카 인디오들이 크게 승리를 했던 곳이라 알려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결국 방어진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잉카군대는 스페인의 공격에 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마추픽추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곳 유적지 태양의 신전이 위치한 상단부에는 마치 성벽을 쌓은 것 처럼 敵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또한 전투 중에는 敵軍의 동향을 살피는 관측소와 경계초소 역할 까지 했던 곳이라는 것은 설치된 시설물과 현장 구조로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누군가 페인트를 잘못 뿌려놓은 것 같은 이곳 방어벽에서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약 1시간 정도 오얀타이탐보 유적지 ‘태양의 신전’과 그 일대를 둘러 본 후 천천히 하산을 시도했습니다. 하산 길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농경지의 옆길을 따라 내려습니다. 태양의 신전으로 올라갈 때는 가파른 계단이었지만 내려오는 길은 비교적 넓었습니다. 그때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채석장에서 큰 돌을 산봉우리의 태양의 신전을 짓는 곳까지 옮기려면 산아래 채석장에서 밧줄로 그리고 바닥에 지렛대와 둥근 나무통을 깔고 암석을 끌어야했기에 통로가 넓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았지요.
♣ 이 태양의 신전을 만드는데는 우리의 새마을운동처럼 ‘자조. 자립. 협동’으로 똘똘뭉쳐 조성된 것은 아닐 것 같았습니다. 거대한 암석을 옮기는 공사 중에는 많은 안전사고도 발생되는 등 잉카의 인디오들이 얼마나 많은 노동착취를 당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잉카제국의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노동착취와 태양의 신전에 바치는 인간 재물 등이 어쩌면 결국 잉카멸망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 산 봉우리 태양의 신전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바라본 오얀타이 마을전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마을 건너편의 큰 산 중턱에는 식량창고(곡식창고)의 모습도 보였는데, 관광 가이드의 말(言)에 의하면 그 산의 형태는 잉카왕의 얼굴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 오얀타이탐보에서 쿠스코까지는 도로가 잘 연결되어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코 2세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학정과 가족에게 까지 치욕을 보인 스페인 정복자의 굴욕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한 후, 1536년 그들 부족을 이끌고 쿠스코를 공격한 후에 이곳으로 이동해 왔는데 당시 오얀타이탐보 중심지 마을에는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고 특히 잉카 지배층들이 현 유적지에 많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잉카인들은 오래 전부터 물이 풍부한 평지 위에 수로를 설치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또 가파른 산비탈을 이용하여 건설한 17개의 계단식 경작지에까지도 바위를 뚫고 관계 수로를 설치해 농작물을 재배했습니다. 그리고 한편 적의 침입에 대비해 산봉우리 근처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그들이 믿는 절대神인 태양신에게 제를 올리는 거대한 ‘태양의 신전’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곳 오얀타이탐보 유적지의 모든 시설은 마치 마추픽추와 쿠스코 주변의 여러 잉카 유적지를 섞어 놓은 듯했습니다.
♣ 오얀타이탐보에는 가장 유명한 것은 거대한 태양의 신전이지만, 그외 방어용 요새, 17계단의 경작지, 농산물 저장 창고 등을 비롯해 관계 수로시설이 아주 잘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주의 목욕탕이 눈낄을 끌었습니다. 넓은 계단식 영농장에는 알파카(alpaca)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주변에는 활짝핀 이름모를 꽃들이 서로의 자태를 뽐내는 전경은 그저 한폭의 그림 같은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스페인이 페루를 정복 하였을 당시 이곳을 찾았던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은 17개의 계단식 경작지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꽃과 거대한 돌로 만든 성벽과 계단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오얀타이탐보를 평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얀타이 탐보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미에 들어오기 이전에 잉카人들이 두려워 했던 인근지역의 안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던 요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것은 스페인 정복자의 대빵인 피사로(Francisco Pizarro : 잉카 제국을 정복, 리마의 건설자)가 허수아비로 세웠던 ‘망코 잉카(망코 2세)’가 그동안 스페인의 속임수에 말려 이용당했던 것을 눈치채고 탈출에 성공한 후, 자신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다가 패하여 쿠스코를 버리고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와 자리를 잡고 저항운동을 펼쳤을 때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피사로가 이끄는 불과 200명도 안되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의해 10만명 이상이던 아타우알파 황제의 잉카군대는 몇방의 총소리에 놀라 무너지고 말았고 잉카황제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이 사건을 계기로 잉카제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정말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스페인군은 그의 동생 투팍 우알파를 왕으로 세웠으나 2개월만에 사망하였고, 다시 17세 나이의 어린동생인 망코 유판기(Manco Inca Yupanqui)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망코 2세이지요. 스페인군에 의해 황제가된 망코 2세는 스페인군의 도움으로 내부이 반대세력과 외부의 적대적 부족들을 정리하고 옛 잉카제국의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고, 정복자들에 대해서 상당히 신뢰감을 갖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 그러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새로운 도시 리마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후, 그의 어린 동생들인 곤살로와 후안으로부터 재물과 여자를 약탈 당하였고, 심지어 황후를 비롯한 부인들까지 온갖 시련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탈출을 결심하였으나 오히려 들켜서 감금 당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큰 수모를 당하게 되는데, 1536년 2월 피사로 가문의 둘째인 에르난도가 스페인에 머물다가 잉카로 다시 돌아온 후 그동안 납치 감금되었던 망코 2세와 부인들을 석방하고 사과하는 등 황제로 대우합니다. 하여 망코 2세는 다시금 민심을 수습하고 잉카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나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하여 결국 스페인 점령지인 쿠스코를 탈출하여 성스러운 계곡의 오얀타이탐보를 근거지로 저항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우리일행은 약 2시간 30분간, 잉카제국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던 저항본부인 오얀타이탐보 요새의 유적지를 돌아본 후, Am 11시경 유적지 정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Bus에 올랐습니다. 유적지 입구에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원주민과 악기를 연주하는 늙은 인디오 원주민의 처량한 모습을 보면서 화려한 아니 위대한 잉카문명을 지닌 그 잉카의 후예들이 오늘날 많이 가난하게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오얀타이탐보에서 쿠스코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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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일행은 이틀전 마추픽추와 오얀타이탐보를 탐방하기 위해 하룻밤만 묵고 떠나왔던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다시금 되돌아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제는 해발고도가 4,335m에 이르는 라라야 언덕을 넘어 가야 하므로 조금은 고소증에 대한 염려가 되었습니다. 왠지 아직까지도 감기기운이 계속되는 걸루 보아 고소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어떻든 우리가 탄 버스는 계곡에 콸~콸~ 소리내어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힘차게 달렸습니다.
♣ 오얀타이탐보를 출발한지 채 10분도 안되는 시각, 깊은 계곡에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강물은 아마도 며칠전 비가 많이 왔던 탓일 것입니다만, 이 아름다운 계곡을 보면서 문뜩 잉카시대 망코 2세가 쿠스코에서 탈출하여 본거지를 이곳 오얀타이탐보에 잡고 흩어졌던 부족들을 규합해 전열을 가다듬고 저항운동을 펼칠 때, 스페인軍을 이끌고 공격해 온, 에르난도(피사로의 둘째 동생)가 이끄는 70명의 기병들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 지형상으로 볼 때 어쩌면 바로 이 지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당시 오얀타이탐보에서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스페인軍이 퇴각하는 퇴로를 유적지와 마을 사이를 흐르는 빠따깐차 江의 상류를 막아 댐을 터트려 물에 휩쓸려가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마치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처럼 말입니다. 이 승리로 망코 잉카의 투쟁 역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으로 기세가 등등 했지만 결국은 칠레 원정 후 돌아온 ‘알마그로’의 대규묘 병력 앞에는 제대로 저항을 못하고 깊은 정글 빌카밤바 (Vilcabamba)라는 곳으로 많은 보물과 황금을 갖고 탈출했지요. 그래서 훗날 많은 탐험가들이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이로 인해 마추픽추가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 잠시후 잠계곡 옆의 가파른 절벽에 햇볕에 반짝이는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 버스는 잠시 정차를 했지요. 바로 이곳은 그 유명한 ‘허니문 호텔’이었습니다. 얼마전 우리나라 EBS 방송에도 방영된 바 있어 더욱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젊은 신혼부부가 절벽에 밧줄을 타고 오르는 호텔인데, 신혼부부가 뭣 때문에 그런 쌩고생을 할까? 의아했는데, 놀랍게도 이 절벽 허니문 호텔은 반드시 예약해야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고 그 비용도 1박에 200~300$(달러)로 페루에서는 가장 비싼 호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꼰데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무료 이용권을 주거나 또는 이용하면 꽁짜일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금을 100$ 준다고 해도 이용이 불가능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페루인들은 어쩌면 보물찾기 술레잡기 하듯 이 호텔의 설립을 빌카밤바(Vilcabamba)에서 착상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그라도 계곡을 지나 라라야 언덕의 대평원에 펼쳐진 대 파노라마 풍경에 반하다.
♣ 계곡 절벽에 번쩍이는 캡술형태의 허니문 호텔을 지나 약 30분이 지날 즈음 우리 버스는 가파른 언덕을 힘이 드는 듯 신음을 토하며 올랐습니다. 그런데 산 언덕 위에는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산속의 분지라고나 할까? 광활한 평야 그 전체가 꽃밭이었습니다. Am 12시, 우리는 작은 언덕에 버스를 정차 시킨 후 모두가 꽃밭에 뛰어들었습니다.
♣ 이곳은 해발 3,400m의 라라야 언덕입니다. 눈 앞에는 안데스 산맥줄기의 하나인 4,300m 이상이라는 고산에 하얀눈꽃이 보였습니다. 더 멀리 공제선상에는 구름과 조화를 이루는 La Veronica 설산(▲ 5,750m)과 Nev Salkantay 설산(▲ 6,271m)이 절경이었고, 그 아래 펼쳐진 광활한 대지의 야생화 꽃밭은 흡사 알프스 산을 연상 시키는 듯 한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 초가을 따사로운 햇볕 아래 이 야생화는 사계절 내내 핀다고 합니다. 워낙 넓은 초원지대이기에 감당할 수 있는 넓이 만큼만 영농장으로 활용하고 나머지는 그냥 야생화가 자라도록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페루의 수도 리마와 인근의 해안지대는 모래사막이었지만, 이곳 쿠스코 지역 인근은 높은 산과 나무 숲 그리고 광활한 들판이 모두 푸르기만 한. 바로 페루의 곡창지대인 것 같았습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등의 모든 농작물 대다수의 원산지가 바로 남미의 이곳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우린 이 아름다운 야생화 꽃밭에서 갖은 포즈를 다 취해가며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멋진 기념사진을 수없이 찍었습니다. 잠시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D-8(3월 20일 월요일) 오전의 이야기는 여기서 총총 맺습니다.
- 오늘 오전의 일기 끝~! -
곧 이어 2편에서는 '알파카 털에 천연물감을 입혀 옷을 만드는 가내공장 견학'을 비롯하여 이틀전에 떠났던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재입성하여 다시 찾아본 시내의 잉카 유적지에 대한 견학 내용을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알파카 털에 나무잎과 과일액을 이용해 천연 염색을 하는 가내공장의 전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