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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지난해 백석 교단이 문제 삼았던
‘도르트레히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했던 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는 엉터리 주장에 대하여!
저는 한 때 백석(합동정통) 교단 소속이었습니다. 백석에서만 저를 보호만 했어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회 목사들도 정치적이고 비겁한 자들이었고, 더구나 백석 이대위 위원장은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니 이단이다.” “성경에 입신이 없는데 입신을 얘기하는 것을 보니 이단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공평한 마음도 없이 그저 이단으로 매도하려는 악의로 가득한 자였기 때문에 저는 매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악의적으로 저를 두 해나 조사하여 매도하려 했으나, 첫 해는 이단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두 번째 해에도 이단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백석 총회장과 총무가 직접 저와의 만남에서 그것을 시인했습니다. 두 번째 해의 조사 때 질의서의 제목도 이단성 조사가 아니라 “사역논란에 대한 질의서”였습니다. 그리고 백석 이대위 위원들이 직접 이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단성 조사가 아니라 사역 논란에 대한 질의라고 조사 과정에서 거듭 분명히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전직 총회장의 정치적인 장난에 의해 백석 교단에서 제명 출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불의한 일입니다.
그것이 단초가 되어 저희가 통합의 최**으로부터 이단으로 매도되고 사실 확인을 전혀 하지 않은 일부 교단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뒤에도, 백석 이대위 위원장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한장총과 대전기독교연합회를 등에 업고 한기총에 저의 책을 판매 금지시켜달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식 이하의 요청을 하고, 저를 조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꼭 이단으로 만들어 달라고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거짓말과 명백한 사실 왜곡이 있었지만 지저분하게 그것까지 다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백석에서 두 해째 저를 조사할 때, 그들이 실제적으로 문제를 삼은 것은 제가 도르트레히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했던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 별다른 말이 아니고 “제가 존 웨슬리처럼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포스퀘어 교단의 정통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전혀 이단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알리고, 그 실상을 모르는 한기총 이대위 위원들이 그들의 주장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아래의 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참고로 이 자료는 교회사에 대해 박학다식하신 존경하는 강금성 선배님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문제의 ‘도르트레히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했던 구원론’은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성경적인 주장을 할 뿐 알미니우스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도달한 결론이 알미니안 계열의 존 웨슬리와 정확하게 일치할 뿐입니다.
참고로, 개신교식의 종교재판으로 불리는 ‘도르트레히트 총회’는 당사자들의 참석이 원천 봉쇄된 채로 이루어진 종교재판으로서, 그 당시 칼빈주의 시각에서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기인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석 이대위에서는 존 웨슬리도 이단이라는 망발을 한 것입니다.
‘성경 무오설(無誤說)’은 맞지만 ‘칼빈 무오설(無誤說)’은 맞지 않습니다. 칼빈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을 포함하여 누구의 가르침이든 성경에 비추어보아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쳐 믿어야 하며,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에서라도 성경에 일치한 것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한국교계가 칼빈주의가 아닌 모든 것은 이단으로 돌리는 신학적인 사고(思考)는 불의하고 옳지 않은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도르트레히트 회의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장본인인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한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의 역사적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는 개신교식 종교재판
아르미니우스의 뛰어난 능력과 탁월한 신앙을 인정한 국내 칼빈주의 유지들은 그를 칼빈주의 신앙의 본거지인 제네바에 유학시켰다. 거기서 그는 칼빈의 동료요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서 탁월함을 인정받으며 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사랑받는 성직자와 신학 교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이미 칼빈의 예정설이 성경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교회로부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 문제를 성경에 비추어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히려 그 자신이 의심 없이 믿어온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정에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제한 속죄론이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신학적인 확신은, 후에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로 알려진 그의 가르침의 골자이다. (지금 잘못 소개되고 있는 어떤 내용들은 그의 후계자들이 왜곡시켜 놓은 것도 있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하는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늘어나면서 당시 칼빈주의 개혁파가 주도하고 있던 화란은 일대 신학 논쟁의 와중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아르미니우스들 특별히 적대한 사람은 같은 대학의 교수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F. Gomarus)였다. 고마루스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전 즉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얼마의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관없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신다는 ‘타락 전 예정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칼빈주의자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와 인간의 타락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되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받게 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하신 선택은 예지하신 믿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며, 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했다. 그는 이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만약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사람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사람에 의하여 저항 받을 수 있도록 용납하셨다고 논증했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거듭하여 인용하면서, 이토록 확실한 성경의 논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까닭은 은혜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 때문임을 밝혔다. 그는 하나님께서 범죄까지도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타락 전 예정설이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자신들의 범죄 여부에 관계없이 예정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서 무엇보다도 반대하였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신성모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죄와 상관없이, 피조물들을 이미 예정된 멸망으로 저주받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설명하는 것은 비난의 정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신성모독을 선하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밀드레드 와인쿱, 한영태 역,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 -서울: 생명의 말씀사,1987-, 49)
알미니우스의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은 그를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이라고 무고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펠라기우스의 것(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은혜의 역사 없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적인 자력구원설을 주장했었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알미니우스는 자신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과 일치하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음을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소시누스(Socinus)파라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진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가르침을 행함에 의한 자력구원설로 규정하고 일부 교회까지 이에 포함시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역사적인 과오를 되풀이하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무고를 당한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밝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적인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를 열어주도록 국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과로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1609년 10월, 49세를 일기로 참으로 짧았지만 경건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신학적인 능력과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은 그의 비평자들에 의해서도 지금까지 인정을 받고 있다. 교회사의 대가인 필립 샤프도, “그는 유식하고 유능한 신학자였으며, 그이 생애를 쓰디 쓰게 만든 논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온유함과 그리스도인다운 정신을 드러냈다.”고 평했다.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46명의 칼빈주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논쟁을 성경적인 원칙에 의하여 해결하는 온전한 방편으로 다섯 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하는 항변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엄격한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반항변서를 제출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칼빈주의에 항의하는 항변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중에 소집된 국회에서 다루어진 두 주장을 종합하여 간략하게 대조시켜 보면 아래와 같다.”(와인쿱, 58. Schaff, 517~519)
아르미니안의 5개조 전제와 칼빈주의 5대 강령과 알미니안의 비교
<알미니안> 1.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작정하심 <조건적인 선택>
<칼빈주의> 1.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 <무조건적 선택>
<알미니안>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임.
<칼빈주의>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
<알미니안>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칼빈주의> 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알미니안> 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됨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 <저항이 가능한 은혜>
<칼빈주의> 4.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시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인 은혜>
<알미니안> 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 <조건적인 견인>
<칼빈주의>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궁극적인 견인>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두 주장이 쉽사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이 가열되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우선 열렬한 칼빈주의자로 중앙집권제를 주창하던 총독 마우리스 공(Maurice 公)은, 1618년 7월 졸지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정적(政敵)으로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며 공화제를 주창하던 지방자치주의 국가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와 다른 유력한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을 투옥하였다. 그런 다음, 서둘러 같은 해 11월 13일, 이러한 방식의 종교회의를 원치 않은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를 외면하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집한 종교회의가 도르트레히트에서 열렸다. 참석한 102명의 대표자들 가운데 18명은 칼빈주의 정부가 임명한 위원이었고, 아르미니우스파 대표의 참석은 처음부터 봉쇄되었다. 13명의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는 회의가 시작된 지 여러 주일 후에 죄인의 신분으로 소환되어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받았다. 의장이나 서기 등 모두 엄격한 칼빈주의자로 모든 결의는 일방적이었다. 교회 사가(史家) 필립 샤프의 말대로 “그리하여 아르미니우스파의 운명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에 의하여 예정된 예정론의 예정대로 된 승리였다. 6개월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논란을 계속하다가 이듬해인 1619년 5월 9일 막을 내린다.
결의된 내용은, 예정론의 범위를 그 전까지의 주장이었던 ‘타락 전의 예정’에서 ‘타락 후의 예정’으로 바꾸어, 타락 후 예정설을 채택한 것 외에는 이전의 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하고, 아르미니안의 5개항의 건의는 모두 이단의 신조로 정죄하였다. 동시에 회의 폐막 4일 후인 5월 13일, 국가를 위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투옥 중이던 아르미니안 정치 지도자 올덴 바르네벨트를 대역죄의 누명을 씌워 처형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로 해양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로티우스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을 성직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무자비한 강압적인 배경 때문에 역사가 중에는 이러한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를 칼빈주의자들이 수행한 로마 가톨릭식의 종교재판이었다고 혹평했다. (Motley, Life and Death of Barneveld, Vol. 2, 309, cited in Schaff, 515) 그리고 수준 있는 토론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능력과 배려의 고상한 질서를 배신”하고, “자유를 희생시킨 대가로 정통을 다졌고”, “협소한 신앙고백주의를 재가(裁可)한” 종교회의의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혼탁한 분위기에서 형성된 도르트레히트 신조를 지금까지 공적인 표준 신조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는 화란 밖에서는, 미국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기본정신과 성경의 원칙을 저버리고,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외면한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 결의사항을 아직까지도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개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의 지성과 정서를 몹시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신앙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