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3장
=====23:1
무리가...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 산헤드린 회의가 동틀 때 시작되었으며 공회 결
정 후에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려왔기 때문에 그 때는 이른 아침을 지난 오전의 어느
시각일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A.D. 26-36년에 걸쳐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으로
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본문에서
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해 각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끌고간 자들에 대해 누가는 언급할 뿐 그들의 정체에 대해
서 구체적으로는 말하지않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마 27:1,2; 막 15: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 즉 산헤드린 대표들이 끌고 간 것으로 언급되
고 있다. 누가가 언급한 '무리'도 역시 문맥상 공회에 참석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무리' 앞에 '온'이라는 뜻의 헬라어 '하관'(* )을 사용
하여 '온 무리'(공동 번역)라고 표현한다. 또 누가는 예수를 단순히 '끌고 가다'(*
, 아고)라고 표현하는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결박하여, 끌고갔다'라고 언급한
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께서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마가 마태와는 대조적으로
간결하게 언급한 것처럼(22:63-65), 여기서도 예수의 치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피
하려는 듯한 누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23:2
고소하여...그리스도라 하더라 -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예수를 고소한 것으로
언급하는데 상황 묘사에 있어서 누가의 표현이 마태와 마가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첫
째, 누가만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즉 (1) 민심을 현혹(眩或)
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2)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며
(3) 자칭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
은 사회.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같은 음모는 이미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모의된 바이다(20:20). 고소자들이 종교적 이유를 뺀
이유는 종교 문제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 밖의 일이 되
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에게는 종교 문제가 호소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
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사회.정치적 이유는 총독으로서 빌라도에게
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법적인 제판이 가능하리라고 그들은 판단하여
사회.정치적 이유만을 강조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11-12; 막15:2-3). 그러나 누가는 고소자들에 의해 나열 될 죄목중 마지막 항목인
자칭 왕이라는 말에 대해 빌라도가 예수에게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
다. 여기서 누가의 묘사가 더 합리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
게 예수를 끌고 왔으면 이유를 먼저 밝히는 것이 당현하며 마태와 마가의 경우처럼 예
수를 끌고 오자마자 빌라도가 먼저 '네가 왕이냐?'고 묻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어
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것이 유대인들, 특
히 유대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꾸며진 일임을 더욱 선명히 부각(浮刻)시키
고 있는 셈이다.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예수에 대한 두번째 죄목인데 터무니없는 거
짓말이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해도 민중들이 무서워 못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첫번째로 제시한 죄목인 민심 교란죄는 해당
될 수 있으나(19:42-21:38의 내용은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예수가 성전을 장악하
여 혁신적인 가르침을 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20:25에서 예수는 분명히 '가이사
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로 대답하여 대적들로 하여금 책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23:3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대표들로부터 고소를 접수하고 재판
을 진행하면서 예수를 심문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있는데 고소자들이 제기한 세번째
죄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세 가지는 공히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번째 '왕이냐?'라는 문제만 확인하면 세 가지 죄
목에 대한 판결도 자연히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네 말이 옳도다 - 원문상으로 이 대답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쉬
레게이스'(* )를 마샬(I.H.Marshall)은 '그 말은 네 말이다'라고 번
역하며 KJV나 RSV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옮겼다(Thou sayest it, KJV; You have
said so, RSV). 직역하면 '네가 말한다'인데 네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가볍게 지나쳐 버리면서 무시하는 것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산헤드린의 체포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의 공
정성(公正性) 내지는 합법성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
이 생각하는 왕이라는 개념과 그들이 왕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염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하려고 질문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한 듯하다. 실로 예수는 온 우
주와 만물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나
(계 17:14) 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말하는 왕권이란 현세적 정치적 의미에만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22:67, 68에서 언급한 바처럼 대화가 될 수 없는 상대
라고 생각하여 대답을 회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는 이 말은 질문에 대한 직접
적인 대답이 아니라 질문자의 판단으로 이해하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23:4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 빌라도의 무죄 판결을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분
명하게 기록하고 잇다.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범죄자라는 증거를 찾
지 못했을 것이다. 즉 예수가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적(武力的) 힘을 갖고 반란을 일
으켰다는 증거나 조짐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
의 처신이 우유부단했다는 사실을 한층 더 뚜렷이 부각시킨다. 즉 무죄함을 알고도 대
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즉적으로 석방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였다(마
27:13-18; 막 15:4-10). 마태는 독특하게 빌라도의 판결에 그의 아내가 개입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내가 꿈에서 이 재판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재판에 개
입하지 않도록 종용했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마태는 빌라도의 무죄 판결이 합법적 공
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반명 누가는 빌라도의 판결이 지니는 객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3: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고소자들이 승복하지 않
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언급된 '더욱 굳세게'라는 헬라어 '에피스퀴오'(*
)는 '역설하다', '강해지다'(grow strang) 또는 '고집하다'(insist)의 뜻을
가진 말로서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 예수의 활동이 고소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고 있다. 이
말은 예수의 행동 반경이 유대 전체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예수의 영향력이 유대 전
역에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예수의 활동 영역은 유대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요 4:1-42)와 갈릴리, 베레아(막 10:1), 데가볼리(막 5:20), 가이사랴 빌립보(막
8:27), 이두매, 두로, 시돈(막 3:8) 등 이방 지역까지 포함하는 팔레스틴 전역이었다.
갈릴리에서부터...소동케 하나이다 - 다시 한번 예수가 민중을 선동하였다고 주장
하면서 예수의 활동 영역이 '온 유대'임을 보충하여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중앙인 예루
살렘까지 진입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된 단어인 '소동케 하나이다'는 헬
라어로 '아나세이오'(* )인데 '흔들다', '충동하다', '동요시키다',
'선동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막 15:11). 누가는 2절에서 '백성을 미혹'하였다고 표
현하여 예수가 단순히 백성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가르쳤다고 하는 반면(*
, 디아스트레포) 여기서는 그 의미가 한층 고조된 표현인 '아나세이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도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판결에 대해 불복(不服)하고
더욱 거세게 예수를 고소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임을 밝힌 것은 당시 폭력 혁명을 추구하던 헤롯당 저항 운동의 근거지인 갈릴
리와 관련지으려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를 폭력적 반란을 일으킬 선동자라는 인상을 빌
라도에게 강하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23:6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 빌라도가 고소자들의 제 고소를 듣고 나나낸 반응은 새로
운 사실을 발견한 듯한 놀라운 어투이다. 즉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로운
사건 전개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빌라도가 재판을 헤롯에게로 넘길 수 있는 구
실이 되는 것이다. 즉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 아래있기 때문에 갈릴리는 사람인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면 쉽게 자신의 난처함이 해결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안드로포스 갈릴라이오스(*
)는 촌놈이라는 뜻을 내포한 경멸적(輕蔑的) 표현
이다(I. H. Marshall). 빌라도는 갈릴리라는 말에 예수가 시골에서 올라온 별 것 아닌
청년쯤으로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예수를 대한 듯하다. 한편 6-12절의 이야기는 사
복음서 중 본서만이 나오는데, 누가는 이미 앞에서도 두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헤롯 안티파스에 관해 언급했다(3:1; 9:7-9; 13:31).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세 번에 걸친 부활에 대한 예비적 언급이 있은
다음 비로소 두 천사의 말에 의해 부활이 직접적으로 선언된다. 그런데 누가는 먼저
무덤안에 예수가 없음을 전제하고 나서 부활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덤 안에 예수가 없
음을 말하였다(16:6). 즉 마가는 부활을 강조하고 그 증거로 빈무덤을 제시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 부활의 산증거로서 빈 무덤을 강조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은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은 데 대한 여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묘사
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인들이 발견한 바대로 시체가 없다는 점을 먼저
확인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갈릴리에 계실 때...기억하라 -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갈릴이 여인들이었음을
23:55에 이어 두번째 언급하고 있는데 10절에 따르면 여인들의 수는 최소한 5명 이상
임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믿을 수 없는 돌발 사태가 아니라 이미 예견
된 일이엇음을 평소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확인했던 여인들
(23:55)을 통해서 확증하고자 한다. 여기서 '기억하다'(* , 므네스데
테)고 요청하는 애용은 9:22에서 예수 자신이 언급하셨던 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예언이다 . 마태와 마가는 빈 무덤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언급이 없는 데 비해
누가는 치밀한 설득을 통해 부활 사건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성취 측면을
확연히 드러낸다.
=====23:7
헤롯의 관할 - 헤롯은 B.C.4-A.D.39까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분
봉왕 안티파스(Antipas)를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빌
라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했으며 그가
관연 누구인지 알고자 했었다(8절; 9:7-9).
헤롯에게 보내니 - 여깃 '보내니'라는 동사가 '아니펨포'(* )라
는 것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되는데 이 단어의 뜻이 '위로'(* , 아나)라는
뜻과 '보내다'(* , 펨포)라는 뜻이 결합된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즉 '위로
올려 보내다'라는 뜻이라면 빌라도 보다 헤롯이 상부에 있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헤롯은 빌라도 총족 아래 있는 분봉왕이었다. 따라서 단어는
단순히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반대로 헤롯이 빌라도에
게 예수를 보낼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도 누가는 이 단어를 단
순히 '보내다'(send)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관에게 보냈
다는 주장은(Meyer, Farrar) 적절하지 못하다.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것은
첫째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골치아픈 문제에서 손을 떼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헤롯의 관할 사건을 자신이 처리함으로써 헤롯을 소외시키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配
廬)로 생각할 수 잇다(12절 주석 참고).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누가는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의 관할 구역이 아
닌 예루살렘에 마침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분명
하다. 즉 종교적 이유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
다.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 빌라도가 예수를 헤룻에게 보내었을 때 헤롯
의 반응은 의외로 '심히 기뻐하는'(* , 에카레 리안) 것이었다.
누가는 기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고 싶어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누가는 이같은 헤롯의 마음을 9:9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많은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죽었던 세례 요한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말하
거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믿었다는 소문 때문에
헤롯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9:7-9). 또 하나의 이유는 소문에 들은대로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을 누가는 덧붙이고 있다. 고대의 왕들
은 자신의 즐거움읊 만끽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
재주를 공연하게 했다. 헤롯 또한 이런 류의 호기심을 갖고서 예수를 마술사 내지는
특출한 재주꾼으로 취급하였던 것 같다. 그는 예수로부터 심심풀이용 오락과 유흥을
기대했을 뿐 영적인 은혜나 심오한 사상 등에 대한 진지한 소원은 전혀 결여한 상태였
다.
=====23:9
여러 말로 물으나 - 누가는 헤롯이 예수를 호의적(好意的)으로 맞이했음을 언급한
후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했음을 밝히고있다. 6절에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는 '묻
되'라고 간단히 언급한 반면 여기서는 '여러 말로 물었다'고 말한다. 이는 헤롯이 예
수를 오랬동안 보고 싶어한 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헤롯
이 무엇에 관해 질문하였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소 내용과 자기의 관심사
에 대해서 함께 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헤롯의 질문은 오랫동안 진행 되었고
고소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10절).
아무 말도 대잡지 아니하시니 - 어떤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수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마태와 마가도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가 침묵하고 있음을 강조하
고 있다(마 27:12-14; 막 15:4,5). 이 같은 예수의 침묵에 대해 사 53:7의 예언의 성
취라는 해석이나(J. Jeremias) 정직한 질문이 아닐 때에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원칙이 복음서 안에서 일관되고 있다는 주장(Hooker)도 설득력이 있다(22:67,68 주석
참조). 헤롯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수다스러운 질문의 홍수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조
용하고 위엄있는 침묵으로 맞서셨다. 아무튼 예수는 빌라도나 헤롯, 그리고 고소자들
의 언행에 대해 대답할 가치 조차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빌라도에게 '네가 말
한다'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 것도 침묵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3절
주석 참조).
=====23:10
힘써 고소하더라 -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했을 때 무리들이 더욱 격
렬(激烈)하게 고소한 묘사를(5절) 연상하게 하는 이 구절은 헤롯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예수를 헤롯에게 데려왔을 때 고소자들은 이미 이유를 말했을텐
데 또다시 '힘써'(* , 유토노스) 고소하는 것은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거세게 불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3절) 호의적인 헤롯의 심문 과
정을 고소자들이 참을 수 없어 다시 강력하게 정죄를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소
자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빌라도 법정에서는 단지 '무리'라고 언급된 데 비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들은 헤롯이 유대인들이라
는 사실과 또 빌라도의 심문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헤롯마저 그러하
자 온갖 허위 사실들을 총 동원하여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23:11
헤롯이...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 이같은 헤롯의 행위는 22:63-65에서 언급
된 희롱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8-10절의 내용과 15절에서 빌라도가 언급한 내용 즉 헤
롯이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는 헤롯이 정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고 다면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는 대상으로 삼
았을 뿐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헤롯의 태도가 8절과 달리 돌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9절에 언급된 예수의 태도에 대해 헤롯은 예수께 대해
심한 불쾌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은 예수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자
신의 질문에 대해 대답조차 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은 분봉왕이기는 하지만 권위주의적
인 통치자인 헤롯에게는 자신에 대한 무시 내지는 모독으로 생각되었을 것이 분명하
다. 둘째는 1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고소자들이 거세게 정죄하기를 촉구하였고, 특히
고소자의 신분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는 점이 헤롯에게 큰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
이 분명하다. 즉 최고의 종교 지도자인 자들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율법학자 서기
관들의 요구를 헤롯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신정국(神政國)
으로서의 전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정치와 종교의 밀착된
야합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 이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이
예수에게 무시당했다는 굴욕감과 막강한 종교 세력의 압력 때문에 예수가 죄없음에도
멸시하고 희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 헤롯은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기는 했
지만 고소자들의 요구대로 구체적 죄목을 붙여 정죄하지는 못하였다. 헤롯은 다시 빌
라도에게로 재판을 넘겨주는데 '빛난 옷'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이는 부자나 천사
들이 입는 옷임을 암시하기도 한다(행 10:30; 약 2:2,3; 계 15:6;19:8)(I. H.
Marshall). 무슨 색깔의 옷인지도 밝히지 않았는데 상황은 다르지만 요 19:2에 의하면
붉은 옷을 입혔다고 언급되는데 그렇다면 왕들이 입는 옷이라고도 볼 수 있다
(Klostermann). 그러나 단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빛나는 옷이 귀하고 위엄있는 옷이
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예수의 치욕적(恥辱的)인 희롱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
마도 가장 귀한 사람 복장을 갖추게 하여 멸시하고 희롱하는 효과를 극적으로 나타내
보이고자 한 듯 하다.
=====23:12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빌라도와 헤롯이 어떻게하여 원
수지간이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서 예수를 넘긴 '당일'(*
, 엔 아우테 테 헤메라)에는 친구가 되어 서로 협조했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13:1에서
언급한 바처럼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실에 대해 헤롯이 자기 관할에 대한 월
권으로 생각하여 빌라도를 미워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Farrar). 그렇다면 빌라도
가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준 것은(6,7절) 헤롯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하려는 빌라도의
배려로 보일 수 있으며 화해의 제스쳐라고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에게 내린 결정이 같은 내용이었다는 의미와 예수
를 서로 넘겨줌으로써 서로를 존중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마도 누가의 의도는
예수의 무죄에 대한 확증으로서 원수지간이었던 빌라도와 헤롯이 공통되게 예수에 대
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학 있는 듯하다. 그러나 누가의 의도와는 일치되기
어렵다고 보이지만 반대의 경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역설적으로 비꼬아 하는 말로
서 이해하면 이제까지는 원수로 지내던 자들이 예수에 대한 처리를 서로 미루면서 책
임을 회피(回避)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두 사람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강조
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해석 보다 설득력이 약하다.
=====23:13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 헤롯으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빌라도
는 다시 분명한 판결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동원시킨 듯 하다. 즉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이라고 표현된 일반 공직자
들 즉 관료 행정적인 지도자들(* , 아르콘) 그리고 일반 '백성'(*
, 라오스)을 불러 모으고 공식 재판을 열 채비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
들을 입회하다록 한 것은 자신의 판결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인식시
키고 판결 뒤에 올지 모르는 잡음을 없애고자 하는 빌라도의 숨은 의도인 것으로 보여
진다.
=====23:14
너희가 이 사람을...끌어왔도다 - 빌라도는 입회한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확인시키
고 있는데 고소 이유는 2절에서 고소자들이 언급한 세 가지 고소 이유 중 첫번째에 해
당하는 백성을 미혹한 죄이다. 즉 백성들을 거짓으로 속여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
이다. 여기서 독특한 것은 3절에서 빌라도가 문제시한 것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문제였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현혹시킨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왕에 대한 문제는 이미 자신이 무죄 판결을 내렸고 헤롯도 그 판결에 사실상 동의했다
는 점에서 고소자들이 제시한 다른 죄목을 다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 누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독특한 강조법 '보
라'(* , 이두)로 말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사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
크리노'는 기소 중인 죄수를 법적으로 심사한다는 의미의 법정 용어이다(고전 9:3).
빌라도는 입회인들에게 예수를 공개적으로 심문했던 사실(3절)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이 말은 4절에서 언급된 자신의 무죄판결을 다시 확인시켜줌과 아울러 이제까지의 재
판 과정을 사실대로 입회인들에게 열거하여 앞으로 있을 판결에 참고하라는 암시이다.
=====23:15
헤롯이...보내었도다 - 이 구절은 원문상 8-10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전제로하여
'너희들이 헤롯에게로 가서 예수가 죄없음을 확인하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빌라
도는 자신의 객관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예수를 선동가 내지는 모반 지도자로 선고
할 증거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판결이 초래할지도모를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헤롯을 끌어들이고 있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 빌라도의 최종 판결은 역시 무죄였는데
4절에서 내렸던 무죄 판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칭 왕이라는 문제에 대한 판결
때에는 무죄 사실을 분명히 선포한데 반해 여기서는 백성을 미혹케한 죄를 언급하면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살해를 주도하는
세력들을 의식한 타협적 자세를 제시한다.
=====23:16
때려서 놓겠노라 - 빌라도가 제시한 타협안은 채찍으로 때린 후 석방시키겠다는 것
이었다. 이같은 빌라도의 결정은 고소를 해온 대제사장과 그 일파들의 비위를 맞춰주
고 이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였다. 어쨌든 빌라도는 무려 네 차례에 걸
쳐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죄없는 자를 벌함으로
서 로마의 영광인 공정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재판관으로서의 기본적인 공정 의
식을 갖고 있었다. 한편, 네 차례의 석방 노력이란 (1) 이 고소는 종교 문제이니 유대
인들에게 해결하라고 했던 점(요 18:31; 19:6,7) (2) 이 사건을 헤롯에게로 넘기려 했
던 점(7절) (3) 유월절 특사(特赦) 대상으로 추천한 사실(막 15:6) 그리고 (4) 태형만
내리고 석방하겠노라고 제안한 점이다.
=====23:17
대분분의 많은 사본들은 17절을 생략하고 있지만 일부 사본들에서는 언급하고 있기
도 하다. 그 내용은 '절기가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절기법이 있음'을 밝히
는 것인데 이는 마 27:15과 막 15:6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필사자들이 덧붙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M. Metzger, I. H. Marshall). 그러나 누가의 문맥에서는 17
절이 생략된 채 18절과 곧바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 사실적으로 군중들의 반응
을 이해할 수 있어 자연스럽다.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석방 제안에 대한 고소자들의 반응은 격양된
아우성으로 터져 나왔다. 여기서 언급된 '무리'란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빌라도가
모이게 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발자인 대제사장 일파들인 것으로 보인다. 마 27:20과
막 15:11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권하고 충동질하여 무리들이 바라바
를 석방하라고 소리를 지른 것으로 언급된다.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놓아주소서 - 무리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에 반해 그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이어서 미리 준비된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의 충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마가의 말이(막 15:11) 설득력을
갖는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죽이라고 외치는 이같은 요구는 대제사장
들이 오랫동안 노려왔던 욕심이었다(19:47; 20:19; 22:2-6). 여기서 누가는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는 제안을 먼저 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마태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
시키기 위해 명절 때마다 최인 하나를 놓아주던 관례를 적용하고자 제안한 것으로 언
급한다(마 27:17). 죄수 석방에 대한 결정권은 로마 총족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가
먼저 제안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빌라도는 모인 무리들이 바라바와 같은
살인범을 석방하라고 외치기보다는 차라리 예수와 같은 선량한 자의 석방을 선택하리
라고 내심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유대교 지도자들
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군중 심리를 자극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내고 있다.
=====23:19
이 바라바는 -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이며 살인을 서슴지 않은 혁명가였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
대에는 독립을 위한 반란이 많았으며 반란의 지도자들은 영웅시되었다. 따라서 유대인
들의 눈에는 사랑과 인내를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바라바가
더 귀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물론 군중들은 예수게서 수많은 권능을 행하실 때에는
한껏 예수를 좇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당하신 처지가 되자
이내 예수를 배격하게 되었다.
=====23:20
예수를 놓고자 하여 -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고
무리들에게 다시 제안하고 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에 비해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하며 반대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많은 죄악성을 부각시킨다.
=====23:21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 18절에서 언급된 무리의 반응처럼 또 다시 무리들의 거
센 반발을 묘사하고 있다. '소리질러'의 원어 '에페포눈'(* )은
...에게 크게 부르짖어 외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빌라도를 향해 거세게 항의하
는 것이며 미완료 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무리들이 계속하여 소리질러 항의한 것으
로 보인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 그들의 항의가 18절에서보다 더욱 거칠어 졌음을
시사하는 이 구절은 운율을 담은 연호와 같은 형식을 취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
서'라는 구절을 두번 반복한다. 따라서 무리들의 요구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거세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처음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자하는 목표
를 향해 밀어붙이는 음모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같은 음모가 대제사장에 의한 것
임을 마가는 밝혔다(막 15;11). 한편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민 21:9; 시 22:15;
슥 12:10 등에 예언되어 있는 바 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허용된 것이었
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실제적으로 진행된 것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대적들의 손을
통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신 것이지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자들은 구세주를 살
해한 범인들 중에 속하게 된 셈이다.
=====23:22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되 - 16,20절에 이어 빌라도가 세번째로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누가는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세번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같은 누가의 강조는 빌라도를 호의적으로 묘사함으
로써 로마 정부와의 대립적 관계를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 고위직의 로마인으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에게 써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1:1-4).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사무적이 아닌 안타까운 주관적 감정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예수의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노력이 인간적인 정의감에 바탕되어 있음
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에게서 사형에 처해야 할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는데 무리
들이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빌라도 자신의 양심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임을 시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세번째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빌라도는
다시 한번 '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분명하게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티아'(* )은 죄가 될만한 근거 또는 원인을
말한다.
=====23:23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 세번째의 빌라도 선언 역시 무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
혔으며 계속해서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저토록 요구
하는 십자가 처형은 본래 카르타고에서 생겨난 처형법이었는데 로마 제국에서도 중죄
인에 대해 이 형벌을 사용한 것 같으며 본문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도 십자가 처형이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잔혹한 처형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주장은 마
침내 관철되었다. 누가는 그들의 아우성이 '이겼다'고(* , 카티스
퀴온) 표현하는데 강조점은 빌라도가 무리들의 힘에 밀렸다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
써 누가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보다는 오히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지
도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23:24,25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빌라도가 대제사장 및 그 일파들의 음모와 거센 항의와
요구에 불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여 넘겨 주었다
는 말로 예수께 대한 재판은 종결되었다. 여기서 예수를 넘겨받은 자는 예수를 죽이라
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인데 비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이 총
독의 군병으로 언급되고 있다(마 27:27; 막 15:16). 이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속에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를 위한 노력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누가에게서도 군병
이 개입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36절) 누가의 강조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했다는 점에 있다. 또 누가의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는 예수를 고소자들에게 넘
겨준 이유를 설명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마가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예
수를 넘겼다고 언급하는 반면(막 15;15) 누가는 어쩔 수 없어 예수를 내어 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를 죽음에 내어준 동기야 어떠했든지간에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과
법의 공정성을 묵살한 채 부화뇌동했던 사실은 명백한 과오요 죄악이었다 하겠다. 그
에게 있어 예수는 비록 무죄한 자였으나 민중의 폭동을 무릅쓰고라도 구할 만한 가치
는 없는 자였다.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 제판이 끝난후 예수를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가는 장
면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었던 때와 같이 '저희'가(25절) 예수를 끌고 갔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끌고갔다'이다. 36절에 '군병들'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군병들인 듯하나 누가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반면에 마가는 빌
라도의 군병임을 암시하고 있으며(막 15:16) 특히 마태는 '총독의 군병'이라고 분명하
게 밝히고 있다(마 27:27). 이와 같이 누가가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한
것은 빌라도에게 보였던 호의적 입장과 같이 로마인들이 예수의 사형집행에 깊이 관여
했다는 인상을 가급적 피하려고하는 의도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 27:27-31과
막 15:16-19에서 언급되고 있는 장면, 즉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인계받은 다음 희롱하
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앞에서 언급한
누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여 준다.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서 현재
리비아의 트리폴리(tripoli)를 말한다. 세 복음서 모두 시몬이 우연히 지나다가 이 일
을 당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구레네 사람들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있었고(행
6:9) 초기 기독교인들중에 구레네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행 2:10; 11:20) 시몬
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였던 것으로 보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누가는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는 시몬이 알렉
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는데(막 15:21) 아마도 두 자녀가 당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또 누가와 마가는 시몬이 시골로부터 오던 중이라
고 언급하며 여기서 말한 시골(* , 아그로스)는 농촌이나 들판을 의미하는
데 아마도 성 밖에서 오던 중이라는 의미로 보이며 따라서 이 사건이 벌이지고 있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 밖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 마태와 마가는 공통되게 '예수의 십자가'라는 말을 함으로
써(마 27:32; 막 15:21) 이제까지 십자가를 예수가 져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형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다는 점에서
(Plutarch) 예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군인들이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행군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는 밤새껏 심문당하고 희롱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좇게 하더라 - 이는 누가만의 표현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이 구절을 삽입하면서 참다운 제사장
을 말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2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곁을 떠난 상황에서 십
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시몬의 모습이야말로 참다운 제자이며 참다운 기독교인의
자세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눅 9:23 주석 참조).
=====23:27
백성과...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 - 예수가 가는 고난의 행렬을 말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내용으로 본서에만 나온다(27-32절). 여기서 여자들만
이 애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같이 애통하여, 울었다. 즉 본문 번역을 '백성
과 여자들의(* , 라우 카이 귀나이콘) 큰 무리
가 가슴을치며 울면서 뒤따랐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누가는 이같은 무리 속에서 특
히 여자들의 애통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누가가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1:26-56; 2:36-38; 7:36-50; 8:1-3, 43-48; 13:10-17;
24:1-10). 여자를 다른 복음서와 달리 부각시키고 있는 누가의 의도는 당시 천대받던
여자들이 제자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천대받는 자의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막 9:35-43 주석, 눅 18:16-17과
22:24-27 주석 참조). 뿐만 아니라 이는 여성의 인격적 지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누가
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 뒤따르는 무리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우는
것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31절까지 묘사되며 19:41-44에서 언급된 내용을 연상하게 한
다. 여기서는 울며 십자가 뒤를 따르는 여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있지만 많은 선지자
들이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사 1:8; 10:32;
37:22; 미 4:3; 슥 2:10; 9:9)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이 말을 하기 전 예수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라
고 말씀하셨던 바 이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애통하고 슬퍼해야만 할 일이 전제되는 것인데 예수는 구원사적 의미에서 마땅
히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임을 암
시하고 있다. 둘째는 애통해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정작 마음 아
프고 가슴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이다. 이같은 예수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언급이 19:41-44에 나오고 있다. 또 십자가상에서 기도한 내용, 즉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본문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무지
(無知)였다.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하신 단어 '보
라'(* , 이두)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날이 이르면'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관
한 언급 때 사용되는 상투어 '때가 이르리니'(17:22), '그 날에'(17:31; 21:23)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
앞에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날'이 언제인지 한정짓지 않는다. 따라서 이 '날'
을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한 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를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그 종말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 속에서 내리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날'이
복수로 언급된 사실은 한 시점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최종적 종말의 때까지 계
속되는 현재적 심판의 날들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 준다.
수태 못하는 이와...복이 있다 하리라 - 21:23에서 예수께서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수태 못하고
해산하지 않고 젖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축복 선언을 하신다. 결
과적으로 21;23에서 처럼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여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는 저주이다. 이렇게 완곡어법을 쓴 것은 계속적으로 저주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저주 선언은 다산(多産)과 많은 자녀가 축복이라
고 믿었던 당시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며 현재의 사고
방식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살아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 날에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의지하여 전혀 새롭게 변혁된
사람만이 요구되고 살아 남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실제의 한 예로서 A.D.70년에 로마
장군 디도(D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도 여자들과 아이들이 미처 도피하
지못하여 많은 화를 입었다.
=====23:30
신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 심판과 저주의 날에 저주를 받게 되는 자들이
그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산이 무너져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묘사의 강조점은 그날의 심판과 저주의 가공할 무서운 상황에 있는데 이 호소의
목적은 호 10:8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
을 가려주고 막아 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둘째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산이 무
너져 내려 자신을 덮어 죽임으로써 고통을 잊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계 6;16). 아
무튼 강조점은 심판과 저주의 무서운 고통에 있다.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28-30절까
지의 내용을 압축 요약한 것이다. 푸른 나무는 싱싱하고 힘찬 것으로서(시 1:3 참조)
무죄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늙고 힘 없는 것으로서(렘 5:14; 유
12절 참조) 거짓되고 죄악스러운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푸른 나무를 예수로, 마른
나무를 불의한 유대인으로 대비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Bengel, Meyer,
Godet, Bruce). 혹자는 푸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융성 시기로 보고 마른 나무를 예루살
렘의 쇠퇴기로 비유하여 그 멸망을 예고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Gilmour). 또한 쉥크
(Schenk)의 경우는 일반적인 죄인들과 예수를 처형하고 선지자들을 처형했던 죄많은
유대인들을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유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본절은 심판의 엄
격성과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려는데 강조점을 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23:32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여 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한다. 이
두명의 사형수는 십자가상에서 신학적으로 의미 심장한 질문과 대답을 끌어내는데 중
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다(39-43절). 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 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한다. 아울러 이는 22:37과 사 53:12에서 언
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어떤 범죄를 저
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
들은 강도였다 한다. 아마 살인과 방화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이다
(41절 참조).
=====23:33
해골이라 하는 곳 - 예수가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한 지명은 언급되지 않고 '...라 불리워지는 곳'이라는 불명확한 어투가
사용된다. 이 어투와 같이 이 장소가 어디를 말하는지 고증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Bengel, Goldet, Plummer). 다만 분명
한 점은 성문 밖이었다는 것이다(히 13:12). 부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
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 말로 '골고다'(* )
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마 27:33; 막 15:22) 누가만은 헬라어로 번역하여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니온'(*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점으로 보아 누
가는 헬라 문화권에 속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배려를 엄두에 두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누가는 예수의 양 쪽에 범법자 두명이 같이 못박
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 , 레스타이)들이 양 쪽에 못박
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좌우에 사랑하
는 제자가 아닌(막 10:37 참조)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치욕스러
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22:37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강도'라는 말 대신 다소 부드러운 표현인 '행악자'(*
, 카쿠르구스)를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십자가에 못박고 - 마침내 예수가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박히는 모습
이다. 누가는 못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마태는 못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Passover)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동시에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마 27:37; 막 15:26) 누가는 이후
에(38절) 언급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조롱하기 위해 써붙인 명패를 강조하는 반
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다소 완화시킨 듯하
다.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신다. 이 기도문은 누가만이 언급하
고 있으며 본문에 대한 진정성 시비가 문제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본은 본문
구절을 괄호 안에 넣어 언급하는 반면 대다수 사본은 본문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J. Weiss, Klostermann, Easton, Creed, Schenk).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인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본 구절을 28-31절에 언급된 내용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고전 2:8의 증언대로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베드로의 설교 내용처럼 '생명의 주'를 죽였다(행 3:15). 그러나 예수는 그
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은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소위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첫번째에 해당한다. 가상칠언의 내용을
한마디씩으로 요악해보면 (1) 용(容, 본절) (2) 낙(樂, 43절) (3) 자(子, 요 19:26)
(4) 기(棄, 마 27:46; 막 15:34) (5) 갈(渴, 요 19:28) (6) 성(成, 요 19:30) (7) 혼
(魂, 46절) 등이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갖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본다(Blinzler). 뿐만 아니라 시 22:18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 누가는 십자가 형장에 있던 사
라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
는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지니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한 것
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누가의 의도가 넌지시 드러나는데 누가는 예수
에 대한 모욕 행위의 내용과 범위를 가능한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지
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구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활동 가운
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W. Foerster).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
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기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구약의 외경 에녹서에서는 이 말이 '하늘의 인자'를 가리키며
본서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본절에서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다고 봄이 타당하
다. 즉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23:36
신 포도주를 주며 - 군병드이 예수께 신 포도주를 준 사실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
지이다. (1) 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
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를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이다. (2) 요 19:28에 나와 있듯이 예수께서 '목 마르다'(I am
thirsty, NIV)고 하신 사실을 고려하건대 목을 축이기 위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또 하나는 사형 집행자가 관례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주었다는
주장(Zahn, Farrar)도 가능하다. 이 견해는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고
하는 마태의 기록이나(마 27:34), 시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마시게끔 했
다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상의 기록 등에 의해 뒷받침 받는다. 그러나 시 69:21의 성취
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23:37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 로마 군병이 언급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적 의
미에서 예수를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 상에 붙어있는 죄
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 왕이라고 사람들을 선
동하던 사람 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capital punishment)으로부터 면죄
(amnesty)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하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
관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조롱하면서 종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자며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증명되는지 보자고 하며 희롱한 것으로 묘사한다(마
27:42-44). 아마도 마태는 유대인을 의식하여 문제 곧 종교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다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또 마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언급하여 이방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23:38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 - 이 명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요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국어로 씌어져 있었다. 즉히브리어, 로마어, 헬러아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된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
(oaradoxical)으로 예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된다. 인
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
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이다.
=====23:39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 예수의 좌우에서 못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
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
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다.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
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마태와 마
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만다(마 27:44; 막 15:32). 범
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
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하다.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
성이 규명된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
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
대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
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
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 총족으로부터 받은 재판
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3:41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하다. 왜냐
하면 자신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Bormhauser, E. Lahse),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
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
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
(out of place)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
다.
=====23:42
에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당시 대다수 유대
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
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
라어 전치사 '엔'(* )은 '...안으로'(into) 혹은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
도 무방하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
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밈네스코'(* )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
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
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다.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
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 , 파라데이소스)
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
(LXX)에서는 에덴 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 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I. H. Marshall).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
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J. Jeremias).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
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
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
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23:44
제 육세쯤 되어 - 예수의 운명에 대한 묘사에 앞서 그 시각을 언급하면서 누가는
정확한 시각을 지시하지 않고 어림잡은 시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쯤'이라는 비교 부사
'호세이'(* )를 사용하고 있다(3:23; 9:14,28; 22:41,59 비교). 반면에 마태는
'제 육시로부터'(마 27:45) 마가는 '제 육시가 되매'(막 15:33)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다. 막 15:25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시각이 제 삼시였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못에 박힌 채 세 시간을 달려 있었던 셈이 된다. 현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신 시각은 제 구시
이다.
해가 빛을 잃고 - 세 복음서 모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공통되게 기록하며
누가만이 이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이 천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구체
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장 밝은 때라고 할 수 있는 제 육시경부터 제구시까지 어
둠움이 임했던 사실로 볼 때 단순히 구름이 가려 어두워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한편
이 어두움에 관해 혹자는 가견적(可見的)으로 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으로 보는
가 하면(Luther, Calvin, Zahn), 또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한
다(Morris). 이중 전자의 견해가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세 시간에 결쳐 어두움이 깔린 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언급된 '휘장'(* ,
카나페타스마)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인 것으로 보인다(출
26:31-33).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또는 안식일과 제사 때마다 들어갔으며(출 27:21;
30:7; 레 4:7; 24:3,8),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1,2; 히
9:7). 이유는 성소에는 제사장들의 제사 도구와 예물이 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레 16:2) 지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누가는 휘장이 찢어짐을 '찢어졌다'(* ,
에스키스데)라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휘장의 '한가운데'(* , 메손)가 찢어졌다는 표현
을 사용하며 마태와 마가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언급하는데 이러한 세 복
음의 표현은 휘장이 완전히 찢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사실은 예수의 대속하심
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22). 이
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와 동일시하였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적(中保的)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이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히 3:1)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벧전 2:9). 또한 이는 위선과 형식주의로 부패해진 유
대교의 가증스로움에 대한 심판 경고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23:46
아버지여...부탁하나이다 - 운명 직전에 부르짖으신 예수의 마지막 외침이다. 누가
의 표현은 마태나 마가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 누가는 예수의 운명을 성소
의 휘장이 찢어진 뒤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죽은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27:50,51; 막 15:37,38). (2) 마태와
마가는 십자각 위에서 예수가 두번 크게 소리지른 것으로 밝히면서 첫번째는 '엘리 엘
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밝혔지만 운명 직전에는 크게 소리만 질럿다고 언급한다(마
27:46,50; 막 15:34,37). (3) 마태와 마가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듣
고 신포도주를 예수에게 준 사실과 희롱하는 장면을 언급하지만(마 27:47-49; 막
15:35,36) 누가의 경우 전혀 그러한 언급이 없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에 의
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차이는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상징적 사건을 예수의 죽음
전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속 역사를 온전히 완수(完遂)하신 후 운명하셨음을 강
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이같은 추측은 요 19:30에서 언급된 바처럼 '다 이루었
다'라고 말한 후 운명하신 사실과도 잘 어울린다. 두번째 차이는, 마태와 마가의 표현
에 나오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온전
히 의탁하시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순종하는 예수의 모습과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세번째 차이 역시 희롱당하는 수치
스런 예수의 모습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운명하시다(* , 여세프뉴센) -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만 사용된 이 단어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인데(막 15:37 주
석 참조) 마태는 독특하게 '영혼이 떠났다'(* , 아페
켄 토프뉴마)라고 언급한다.
=====23:47
백부장이...정녕 의인이었도다 - 백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
수의 의로움을 증언하는 내용으로서 앞서 41절에서 사형수가 고백했던 예수의 의로움
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사형 집행 책임자로 보이는 백부장의 이같은 고백은 이제까지
당했던 예수의 수치스러움과 고난이 정당(正當)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를 의
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된 일'(* , 토 게노메논)이
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인 사건과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
한다(44-46절). 한편 마태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 외에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려
부활하는 성도와 예수의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마 27:51-53) 이같은
일을 보고 백부장외 예수를 지키던 사람까지 함께 고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
고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과 신적 능력의 나
타남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반응이다(2;20; 5:25; 7:16; 13:13; 17:15; 18:43). 또 평
행본문 마 27:54; 막 15:3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반면 누가는 '의
인'(* , 디카이오스)이라고 말하는 데 이방인을 주로 염두에둔 누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의인'이라는 법정 용어가 이방인에게 설득력이 있
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23:48
구경하러 모인...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데 이어 누가
는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있다. '구경'에 해당하
는 헬라어 '데오리아'(* )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며 일반적으
로 극장의 쇼(show)를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무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지만, 너무도 참혹한 예수의 모습과 형
집행 과정에서 되어진 여러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
며 돌아갔던 것이다. 과연 아들이 예수께 대항하며 소리쳤던 전날의 과오(過誤)를 뉘
추치며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
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행 2:22-24).'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행 2:23)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행 2:37)하며 회개의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23: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을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아는 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
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관해서는 마태와 마가
는 몇몇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마 27:55,56; 막 15:40,41)
누가는 여기서 어떤 여인들인지 신분을 밝히지않고 있는데 이미 8:2,3에서 여자의 이
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이상 밝히지 않은 듯하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되거나 두
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멀직이 따라갔다는
말처럼 그들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붙잡힐까 하는 두려움으로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바
라 보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다소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떠나갔지만 이들만큼은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흠모했던 분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의 처형대(處刑臺)로 쫓아가고 싶었으나 로마 군인들
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어 또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허용
되지 않았을 것이다.
=====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 -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태나 마가와 달리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가
는 안식일 전 날 저문 때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금요일 마지막 시간에 가까운 시각
이라고 할 수 있다(막 15:42). 대신 누가는 장례가 끝났을 때를 '안식일이 거의 된'
(54절) 시각이라 밝히고 있다. 어쨌든 예수의 장례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치러진 것으
로 보이며 누가에 의하면 제 9시경부터 첫 시까지(현재 시간 개념으로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약 세 시간 동안인 듯하다. 누가는 요셉을 등장시키면서 유대 민중들로부
터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산헤드린의 회원이라 소개했다. 3년 동안 예수께 훈련을 받고
많은 권능을 목격했던 열 두 제자들은 거의 다 도망해 버린 상황에서 예수 살해 음모
의 주역이었던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 지내러 나타난 것 또한 의
외의 사실이다. 그는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결연히 장사를 지원하고 나섰다.
=====23: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 - 이 구절은 요셉에 대한 첫번째 언급
에서 소개된 '공회 의원'이라는 신분에 대해 해명(解明)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저희
의 결의'는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살을 말한다(22:66-71). 그리고 '행
사'(* , 프랖시스)는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성사시키게 했던 공회 의
원들의 모든 음모와 실행을 뜻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셉이 공회의원이
기는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할 때 가담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에 대한
사형 결정에 반대한 공회 의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요셉이 부자이며 예수의
제자라고만 언급하고 공회의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는데(마 27:57) 아마도 마
태는 산헤드린 전체가 이의 없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 것
으로 보인다(26:59).
아라마대(* ) - 요셉의 출신지인 듯한 이 지명은 유대 땅에
속한 곳으로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렌티스(Rentis)로 추정되며 삼상 1:1에
언급되는 사무엘의 출생지 '라마다임'(* )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 요셉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마
가의 표현과 동일하다(막 15:43). 마태는 이 말 대신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하는데
따라서 세 복음서 모두가 요셉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음을 공통되게 언급한
다. 그는 2:25,38에 언급된 시므온과 안나처럼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확신하였기에, 모든 사람이 절망과 비탄 가운데 빠져드는 순간에도 그 약속에 대
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23:52
빌라도에게...시체를 달라 하여 -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사형 집행 후 시체 처리에 관한 권한이 로마군 통독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53절에서
'내린다'(* , 카다이레오)라는 표현을 볼 때 아직 시신이 십자가 위
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상태로 묘사되었
다(막 15:44-46). 또 마가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사실에 대
해 매우 용기있는 행동임을 '당돌하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예수의 추종자
라고 밝혀진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22:50-62에서의 베드로의
부인(否認) 참조)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였다. 마가
에 따르면 발라도가 요셉의 요구에 대해 보인 첫 반능은 '벌써 주었을까?'하는 것이었
다(막 15:44). 따라서 요셉의 요구는 상식보다 빨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의 주검을 공중에 방치되도록 버려둘 수 없다는 애타는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 십자가 위에 달려있던 예수의 주검을 요셉이 직접 내려
받고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세마포로 시체를 감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
적인 시체 처리 방법이다(요 11:44; 19:40) 세마포로 싸기 전 시체를 깨끗이 씻었을
것으로 보인다(행 9:37). 한편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시체를 대개 매장하지 않은
채 버려두어 개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했다. 그러나 유대법상으로는 죽을 죄를 지어 사
형단한 죄인을 나무에 매단 후 당일에 반드시 장사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한번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매우 고
급스럽고 정결한 무덤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요셉은 이 무덤을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
을 위한 무덤으로 조성해 놓았던 것같다. 요 19:41에서는 예수를 장사 지낸 무덤이 십
자가에 못박혔던 곳에 있는 동산에 위치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의 부유층만이 가
질 수 있는 동산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23: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 예수의 장례가 매우 촉박하게 끝났
음을 시간적 묘사를 통해 언급하고 있다. 즉 안식일이 박두함으로 인해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은 시간 때
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를 현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금요일 오후 6시경이 된다.
그러나 요 19:39-42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근쯤 갖고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유대법에 따라 여유있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언급된다. 아
마도 누가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장례도 매우 긴장속에 치러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시
간의 촉박성과 장례 과정에 중요한 향료와 향품을 준비하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를 장사지낸 일에 니고데모가 협력한 사실에 대
해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몰약과 침향만 가지고 왔던 사실 및 요셉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공의회 의원이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들 두 사람이 사전에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내기 위해 서로 의논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23: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 - 장자지낸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를 확인한 증
인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를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여자들은 49절에서 언급된 인물들인 것으로 추정되며 24:5,10절에 언급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과 동일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특히 마가는 무덤을 확인했던
여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동일한 인물들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갈릴리 여
인들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의 얼굴을 잘 안다는 점에서 예수의 시체
를 잘 알고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무덤을 잘못 보았다는 말이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부활 후 빈 무덤에 대한 증언도 역시 확실한 것임을 간
접적으로 보증(保證)하게 된다. 이렇듯 예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던
까닭에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을 찾았을 때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였으며 또 예수
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24:1-7).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 갈릴리 여자들이 무덤으로부터 떠나 그들의 숙
소로 돌아가 시체에 바르지 못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해 두었다고 언급하면서 그 시각
이 안식일 전이었던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나 막 16:1에서는 안식일이 지난 뒤 향품을
샀다고 언급되고있다. 당시 상황이 매우 촉박(促迫)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가의 증
언이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거의 안식일이 다 되었다는
점(54절)과 무덤이 성 밖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향품을
산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이기 때문이다. 또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던 당시 사람들
과 특히 유월절과 무교절을 낀 안식일이었다는 점에서 안식일은 더우 엄격하게 지켜졌
을 터이므로 향품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리라고 봄이 합리적이다.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 마태, 마가, 요한 모두 안식일을 건너 뛰어 이야기
를 진행시키지만 누가는 계명을 따라 하루 쉬었음을 말함으로써 하루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같은 누가의 언급은 당시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보여주고 예수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되고 급박했던 반면 부활을 앞둔 하루의 공간이 침
묵과 적막감에 휩싸인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같은 하루는 죽음을 넘어서고
부활을 앞둔 새로운 긴장의 공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