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을탐방 - 몽탄면 달산리 죽전- 영춘동 마을 | ||||||||||||||||||||||||||||||
| ||||||||||||||||||||||||||||||
|
죽전은 달산1리에 속하는 마을로 화정동과 같은 행정구역에 속한다. 행정구역의 변천을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이로촌면 죽전리,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이로면 죽전리,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가서야 박곡면 달산리 죽전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뒷산인 봉정산의 봉황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은 이른바 ‘봉황새가 오동나무 가지에 깃든다’는 소위 ‘飛鳳歸巢’의 혈을 안고 있는 봉정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이 혈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山川精氣가 호남에서 으뜸이며, 富貴와 五福이 速發하여 오래오래 지속되고, 석학과 賢相이 대대로 나오는 吉地로서 사·오천년 동안 발복하는 땅”이라고 하였다. 이 산에 사는 봉황이 오동나무 열매나 기타, 다른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만을 먹기 때문에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이로 인하여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죽전’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대숲이 울창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한양 조씨의 동족마을로 예전에는 황씨들이 살았다 하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입향조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 온 한양 조씨 位(1505-1594, 자-성충, 호-丹菴)와 位世(1508-1569, 자-사충, 호-丹谷) 형제다.
마을 입구에 한양조씨 효열각이 있다. 마을 주민인 조수원이 1981년에 문중과 협의하여 세운 비각으로 고조모의 열행으로부터 아버지의 효행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효열을 기리고자 비각을 세우고 행적을 각각 비에 새겨 세운 것이다. 마을에는 봉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한 쌍의 봉이 살았다 해서 한골재가 있는가 하면 봉정산에서 봉이 날아와서 목욕을 한다 해서 용들보[龍灘]가 있다. 용들보는 화정동 앞에 있는 보인데 봉이 이곳에 와서 몸을 깨끗이 한 후 죽림에 깃든다고 한다. 죽전은 지리적으로 뛰어난 풍취와 지세를 자랑하고 있는데도 그에 걸 맞는 인물이 나지 않은 이유를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이웃 마을인 노송정에서는 명당에 묘를 쓸 때 너무 깊이 파서 기운이 새버렸기 때문으로 보았고 이곳 죽전 마을에서는 봉정산의 한 쪽이 잘려져 나갔기 때문에 인물이 크질 않는다고 한다. 마을 건너 화정동 앞으로 나 있는 길이 예전에는 해남이나 진도 목포 등지에서 한양으로 올라 갈 때 지나던 길이다. 해서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중간중간에 주막들이 있었으며 길 가에는 백일홍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밀양에서 피란 온 밀양 박씨가 정착하면서 이루게 된, 썩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동구 앞을 가로질러 배롱나무를 꽤나 많이 심었다. 여름 내내 동구 앞은 온통 새빨간 꽃 대궐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壯觀 때문에선지 마을 이름을 꽃정이라 하고 한자로는 花亭이라 적었다. 밀양박씨 집성촌이며 현재는 6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위에 1987년에 지은 밀양박씨 재실 신덕재가 있다. ▲ 법천사를 안고 봄을 기다리는 마을-달산2리 영춘동
영춘동은 달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사기점 영춘동 월영정 금곡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金谷 마을은 달산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로 쇳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기점은 한때 100여 호가 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기를 구웠다 해서 사기점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사기 조각들이 마을 주변에 많이 보이며 마을 뒤 대밭엔 당시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月迎亭은 달맞이를 하는 마을이라고 하는데 달산2리의 주된 마을이다. 골짜기가 깊어 해가 일찍 지고 달이 뜨면 제일 먼저 달빛이 머무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迎春洞은 봄맞이 하는 마을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永春洞으로도 쓰여졌다. 永春洞은 봄이 길고 여름이 짧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민들은 ‘뱅이’라고도 부르나 지명의 유래는 모르고 있다. 이 마을은 밀양손씨와 전주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전주이씨의 입향조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서 이 서(자-사성, 호-월은. 1629-1705)공이다. 공은 1689년 기사환국을 피하여 형인 이 백(자-여장, 호-석촌. 1625-1703)공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자리를 잡았다. 이 백공은 귀학리 적동 마을에 터를 잡았고 공은 달산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손씨의 입향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 손씨의 고총들이 많아 이씨들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이 마을은 빈촌이었다. 마을 앞에는 있는 농경지는 대부분 죽산 마을 한양조씨들의 소유였다. 오죽하면 이 마을 출신 여자들이 “쌀 서 말을 먹고 시집을 가면 잘 사는 집안의 여자였다‘고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것이다. 해서 딸을 낳으면 ’애기담살이‘를 보냈고 아들을 낳으면 ’머슴‘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무안군에서 가장 많은 소를 키우는 마을이 되었고 축산을 하는 주민도 20명이나 되어 무안군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앞길은 목포 해남 등 남부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해서 마을 아래인 화정에서 구릿재까지 주막만 해도 10여개가 넘게 있었다. 구릿재는 고개의 길이가 옛날 집에서 베틀로 명주를 짤 때 씨실이 되는 명주실의 꾸리를 풀어놓은 길이만큼이나 아주 긴 고개여서 ‘꾸릿재’라 부르기도 한다. 1937년 일제에 의해서 목포시민의 상수원으로 개발된 달산수원지는 신적동 동막동 마을을 없애고 건설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금곡 월영정 등 주변 마을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중 일부는 산 너머 청계면 청수동으로 가기도 했다. 승달산의 맥을 이은 이 마을 주변에는 무덤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많은 무덤들이 있다. 유명인사들의 묘만 보더라도 문태고등학교 설립자의 묘, 전에 치안본부장을 했던 손달영씨묘, 강운태장관의 모친 묘, 김용무전대법관 부친의 묘, 김정길 전 법무장관의 묘 등이 있다. 또한 같은 묘자리에 몰래 쓴 묘도 많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