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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여름수양회 원고
이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주제: 한국적 기독교 영성의 전통과 계승
1.서론
2. 본론
가. 서구적 기독교 신학에서 바라보기
1) 보수주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2) 자유주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3) 카톨릭 신비주의 영성으로 바라보기
나. 한국적 기독교 영성으로 바라보기
3. 결론
1. 서론
동광원은 우리가 늘 접하며 잘 알고 있는 듯 생각되지만 정작 그곳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물어 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동광원 사람들이라 하면 이현필선생의 신앙을 따라서 출가 수도하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이 현재에도 남원과 광주 귀일원에서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고 그 밖에 경기도 벽제와 이곳 화순지역에도 동광원 사람들이 여러분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공동체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을까요? 남원 본원의 김금남원장님의 증언에 따르면 1947년에 남원에서 모인 성도들이 광주로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43년 이현필선생이 남원을 방문하여 오북환장로를 만나 전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현필을 따라나선 신도들이 많았는데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교계가 어수선한 상태에 있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도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했으므로 할 수 없이 지리산 골짜기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지리산 자락 서리내에서 이 선생을 따라나선 어머니들과 그 어머니를 따라 나선 소년 소녀들이 함께 생활했는데 이현필 선생은 그 소녀 소년들에게 성경공부와 신앙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성도들이 1947년 9월에 이선생님을 따라서 광주 기독청년회관으로 진출했는데 이때부터 광주에서 신앙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이현필과 그 제자들이 화순 청소골에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49년 말에 광주에서 70여명의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고아사업을 시작하자고 하여 동광원을 설립하였고 그 운영을 정인세 원장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정인세 원장은 광주 기독청년회 총무요 수피아여고 교감이었지만 이현필선생을 따라 동광원 식구가 되었습니다. 동광원이 세워지고 정인세 선생이 원장직을 맡게 된 것은 이현필 선생의 권유덕분이라고 합니다. 망설이고 있던 정선생에게 이현필선생이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을 전했는데 이 말씀을 보고는 동광원 원장직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
정인세 원장은 이 말씀을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일생동안 이 말씀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김준호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정 원장님은 그 말씀을 참 천명으로 받으시고 그대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사셨습니다. 정원장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이현필 선생님의 뜻에 따라 심부름만 했습니다. 나는 가감한 일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나는 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만 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선생님 말씀에 나는 충성을 다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했습니다.
이렇게 동광원이 시작된 것이 1950년 1월인데 이때부터 이현필을 따르는 공동체를 동광원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동광원이 운영되자마자 곧 그해 6.25가 일어나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발생했고 한때는 600여명의 고아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과 유엔에서 많은 구호물자들이 쏟아 들어왔지만 동광원 식구들은 이현필선생의 지도하에 일체 고아들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동광원 회원들은 농사와 노동으로 스스로 자립하고 자급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광주시에서는 1954년 8월에 동광원을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관한 광주일보 내용입니다.
광복후 1949년 화순출신 이현필(1913~1964)선생이 이끌던 기독교수도공동체식구들이 옛 문둥이촌 곁의 밤나무골(봉선동 132번지)과 감나무골(봉선동 1076번지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이 수도단체는 화순 도곡 출신 이현필씨가 이끌던 신앙공동체로 1950년 양림동 290번지에 문을 열었던 동광원(고아원 원장·정인세·鄭仁世·1909~1991)의 봉사자들로 일했기 때문에 흔히 동광원식구들로 통한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수용어린이수가 6백 명에 달했으나 수도단체의 특성상 육식을 자제하고 검소한 식생활을 위해 구호물자를 다른 식료품과 바꿨다는 이유로 4년만인 1954년 8월 폐쇄령이 내려지고 수용고아들은 도내 여러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이같은 조치는 동광원 종사자들이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무교회주의계열 신도들로 예배당 교회들에게 이단집단으로 몰렸을 뿐 아니라 다른 시설들의 질시를 받았던데 있었던 것 같다. <2013.8.1. 무등일보>
고기도 안 먹고, 약도 안 쓰고, 파리모기 등 해충이나 쥐도 죽이지 않는 이런 생활은 이공 이세종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현필선생이 서리내에서 신앙훈련을 시킬 때 사용했던 교재가 <우리의 거울>이란 책인데 그것은 바로 이공의 삶과 신앙을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일반 교회의 교인들과 다른 독특한 생활과 가르침 때문에 이현필 공동체는 남원에서부터 산중파 또는 금욕주의자라 해서 일반 교역자들이 좋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 본 사람들은 예수를 바로 믿는 참 길이 이 길이다 하고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을 쓴 엄두섭목사님도 처음에는 이단으로 알려진 동광원에 대해 알아보자 하다가 이현필의 신앙에 감동을 받아 직접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동광원과 이현필 신앙을 알리기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동광원 신앙의 핵심을 붙잡고자 할 때 이공의 신앙과 삶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이공 이세종과 이현필선생은 어떤 분입니까? 이분들의 삶과 신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입니까?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혹은 세계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의 신앙과 삶, 이분들이 지녔던 영성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요?
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채 100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시점에서 그 역사적 평가란 가당치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의 가르침과 그분들이 남겨준 유훈과 영적 유산이 무엇인지 자꾸 되새겨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우리의 믿음도 자라날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분들이 남겨준 믿음의 유산을 새롭게 발굴하고 지켜 나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우리의 믿음을 성찰하게 됩니다. 성찰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바른 믿음의 길을 가게 되고 연약했던 믿음이 터지고 자라나고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커지고 강해지는 만큼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 나아가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영적 충만의 삶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충만의 삶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영적 여정의 길을 통해 영생을 얻자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앞서가신 영적 스승을 길잡이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런 영적 여정을 통해 우리 삶이 믿음과 성령의 열매로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총의 빛 가운데 사셨던 그분들의 참 삶의 모습과 가치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효자는 그 부모보다 더 훌륭한 자식이 될 때라야 효자가 되고 진정한 제자는 그 스승보다 뛰어날 때 진정한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스승은 위대하신 분이라고 외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보다 못난 제자라 생각되면 부지런히 스승을 좇아가는 일에 힘쓸 뿐 다른 덕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의 영적인 참 삶의 모습은 보이는 외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과 인격이므로 그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 가운데 어려운 일입니다. 공자를 따르려던 제자 안회도 도무지 스승의 모습을 붙잡을 수가 없다고 탄식을 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 앞에서 경탄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죄인이오니 제게서 떠나가소서.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이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외쳤던 도마나 모두 예수님의 절대성 또는 신성 앞에서 알 수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이런 경외감의 체험이 없이는 진정 제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사도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모두 이런 경험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옛날 공자 당시에 있었던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섭공이란 사람이 공자의 제자인 자로에게 당신 선생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자로는 자기 선생님이 어떤 분이라 하고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물쭈물 하다가 대답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에 몰두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리를 얻어 기쁨이 충만해서 모든 세상 근심을 잊었으며,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지요.’ 당신은 왜 이렇게 말하지 그랬소? 했답니다.
논어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필자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공이 지금 우리 곁에 있어서 당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하고 여쭤본다면 아마도 공자 같은 대답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이공은 성경에 심취해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밤낮 성경을 읽었고, 성경이 깨달아지고 성령에 취하여 모든 세상사를 잊었으며 봄이 왔는지 가을이 되었는지 세월을 모르고 살았으며 살고 죽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이현필 선생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산에서 기도를 하면 눈밭에서 몸이 얼어붙어도 어는지도 모르고 밤새워 기도했고 세상을 떠날 때는 오 기쁘다, 오 기쁘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 가서 외치고 싶다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과 기도에 심취하신 분들이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벗어난 초월적 진리의 기쁨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또 공자에 관한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제자들이 우리 선생님은 성인이시라고 하자 공자는 말했습니다. 성인은 무슨 성인인가? 내가 어찌 성인이 되겠는가. 나는 다만 배우는 일에 싫어하거나 싫증내지 않으며, 가르치고 베푸는 일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을 뿐이다. 그러자 자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물리지 않으시니 지혜로우신 분이요, 가르치고 베푸는 데 게으르지 않으시니 인자하신 분입니다. 지혜와 인자하심을 겸비하신 선생님이야말로 성인이 아니십니까?
파고 파라, 깊이 파라, 말씀을 깊이 파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 하면서 말씀을 깊이 깨우칠 것을 가르쳤던 이공, 스스로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의 생명수를 얻고 말씀대로 살고자 힘썼으며 그 경험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남을 교화할 수 있는 권위와 힘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이공과 이현필 두 분의 믿음과 삶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 내면에 깃든 영,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과 성령체험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서는 쉽사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리스도는 영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성령도 영이십니다. 예수님도 영이십니다. 예수의 영이 아니면 우리가 바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행16,7) 믿음을 가진 우리도 영입니다.(고전6,17) 영이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세계가 아니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요 영에 속한 것입니다.(고후4,18) 예수님도 영이시기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 아니면 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야 설명하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전2,13)
동양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을 관이라 합니다. 관이란 보이는 세계를 보는 안목과도 다르고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으로 보는 견해와도 다르고 깊은 깨달음으로 체험의 차원이 비슷할 때 서로의 마음에 비춰보는 이심전심의 직관이요 영으로 보는 초월적 세계라 할 것입니다. 즉 성령을 따라 사셨던 이분들의 영성의 세계를 보지 않고는 그분들에 대한 평이나 소개를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영성에 대한 정의를 하기에 앞서 우리는 누구나 각 종교의 영성이 다르고 같은 종교라 하더라도 지역별로 민족별로 교파별로 각기 다른 영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즉 영성이 무엇인지 몰라도 영성에 대한 감각은 다 가질 수 있습니다.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영성은 각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하늘에 별들이 수천 억 개가 빛나지만 그 별들의 느낌은 모두가 다 다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각 영혼의 영성의 깊이와 느낌도 다 다를 것입니다. 별마다 빛의 세기가 다르고 색이 다르고 크기와 거리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별을 보는데도 어떤 눈과 망원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보이는 세계가 또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천체망원경이 없었다면 지구가 하늘에 떠서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분광기가 없었다면 우주가 움직이고 팽창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세계야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눈으로 보는가 하는 관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공과 이현필의 영성을 바라보는 관점도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서구적 시각과 동양적 시각으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적인 시각이라 해도 또한 신학적 입장에 따라 보수주의 시각과 자유주의 시각, 그리고 카톨릭 신비주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서너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양적 시각도 여러 가지로 세분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의 시각, 그중에서도 한국적 기독교 영성의 시각으로 제한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서구적 기독교 신학에서 바라보기
1) 보수주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2) 자유주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3) 카톨릭 신비주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한국적 기독교 영성으로 바라보기
이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이런 관점과 관련하여 하나의 사례를 살펴봅니다. 이공이 살던 마을이 등광리인데 이공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이 마을에 전해오는 말이 예수를 믿으려면 이공처럼 믿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자의 본보기로서 이공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이거나 아니거나 막론하고 그를 지켜본 한국 사람들이라면 생각하기를 이공처럼 예수를 믿는 것이 진짜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된 교역자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이공이 가진 재산을 노회에 헌납하고 그가 아주 신실한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다는 소문이 나자 이름난 목사를 비롯한 광주의 교역자들의 이공을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공의 마음 속 깊은 영성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이것저것 성경지식과 성경해석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미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신학적 지식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방법과 내용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배우고 들었던 성경 풀이 내용이나 신학적 사상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요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과 풀이를 어떻게 하는가 물어보고는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비춰서 정통인가 아닌가를 따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신학자요 신학대학 교수였던 정경옥박사는 달랐습니다.
공은 성경을 거진 외우다시피 잘 알았다. 무슨 말을 하던지 성경말씀을 인용하였다. 그의 성경해석에는 너무나 상징적인 것도 없지 않고 세밀한 자귀에 얽매여 대의에 어그러진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아무에게도 지도를 받지 아니하고 단독으로 받은 영감이 비범한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다.
이공은 날마다 성경을 읽고 외고 묵상하여 거의 외우고 있었으며 그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성경해석이나 성경적 지식이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 하는 성경학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성경적 지식이 많다고 해도 그것이 지식으로 그친다면 우리의 영혼과 무슨 상관이며 무든 덕과 힘이 될 것인가요. 그래서 정경옥 박사는 그를 칭하여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참된 사랑의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 소박하고 순수한 성자를 대할 때는 마음에 넘치는 감격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경옥의 눈에는 이공이 성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공을 신학 잡지에 성자라 소개했던 분이 정경옥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요 정책을 쓰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경모하는 것이다. 성경을 학문으로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신학을 이론으로 꾸미려고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영감을 누가 부인하랴. 그의 엄숙한 신앙을 누가 거역하랴. 공의 얼굴은 창백하나 눈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그의 외양은 초췌하나 영은 산 기운이 있었다.
이러한 이공에 대하여 세상이 좀처럼 알아보지 못할 것을 간파했던 정경옥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신앙은 고독이여니 성자의 길이 외로울진저.
정말 이공을 제대로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공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를 잊고 살았던 사람이니 남이 알아주느냐 아니냐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공을 알아야 되는 것도 무슨 이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공을 모르고서는 예수님도 모르고 우리 자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이공은 순전한 한국 토박이로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고자 기도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공을 모른다면 한국인의 심성을 모르고 예수님의 성심도 모르기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공을 알아본 정경옥 교수야말로 한국인의 심정을 가졌던 사람이요 한국인으로서 예수님을 만난 한국적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머나먼 이국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애썼던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광주에서 활동하였고 이현필선생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서서평선교사 유화례선교사 오웬선교사 고허번선교사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동광원과 이현필을 얼마나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광주에서 동광원이 폐쇄된 후 이현필과 그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적 힘들었던 것은 이단시 하는 교계의 냉대와 외면이었을 것입니다. 산중파 또는 금욕주의자라는 평판을 받고 이단으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현필이 파계를 하고 광주 제중병원에 입원한 것을 계기로 카딩톤 선교사와 교류를 하며 어려운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했지만 교계의 평판은 나아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현동완 총무도 세상을 떠나고 이현필선생도 세상을 떠나게 되어 동광원 식구들은 정인세원장과 김준호선생 및 오북환장로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 동광원을 바로 알리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동광원의 이단성을 파헤쳐 보겠다고 동광원과 접촉했던 엄두섭 목사였습니다. 그는 동광원과 이현필의 행적을 알아볼수록 매력을 느껴 동광원이 이단이 아니라 진짜 예수를 본받아 사는 참 신앙인들의 모임이라 느끼고 동광원과 이현필을 알리는데 모든 노력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현필의 모습에서 중세 신비가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소개했습니다. 물론 이현필이 어떤 면에서는 프란치스코보다 월등하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현필을 바라보는 시각이 카톨릭 신비주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공과 이현필 및 동광원의 신앙을 카톨릭 신비주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은둔과 독신 금욕적 수도생활을 강조하는 특성이 서구의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 특히 사막의 교부들이나 중세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서구 신비주의 영성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들도 많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설명하고 아우르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가 이공과 이현필의 모범이라면 이공과 이현필 사건이 지니는 교회사적 의의가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바람직한 관점이나 시각은 무엇일까요? 이공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 조만식선생이나 이승훈선생, 유영모선생 등 기독교 지성인들의 모습을 포함하여 이단으로 내몰렸던 김교신선생이나 이용도목사를 포함하여 모든 훌륭한 신앙인들을 서구적 신학에서 바라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한국인의 심성을 갖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영성은 우리 땅에서 새롭게 싹이 나고 꽃이 핀 한국적 기독교 영성으로서 새로운 우리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지구촌 시대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공을 중심으로 한 동광원의 영성도 한국적 기독교 영성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됩니다. 새로 난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았다가는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망친다고(마9,17)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씨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씨가 싹이 터서 자란 나무의 모습과 열매의 맛은 풍토에 따라 달라져야 됩니다. 그래야 토종 종자를 얻을 수 있고 우리 풍토에 맞는 토종을 살려야 이 땅에서 복음이 번창하고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씨를 유럽토종으로 만든 사람이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독일 풍토에 맞게 새로 유럽 토종으로 만든 사람이 루터입니다. 독일 토종이나 유럽토종을 가져다 청교도들은 또다시 미국 토종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토종을 갖다가 한국토종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미국토종이 필요 없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씨를 한국 땅에서 꽃피워 한국토종으로 키워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동양인이요 우리 한국인도 동양인이라 예수의 말씀을 바르게 깊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심성을 한국인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에 앞선 뛰어난 선지자들, 주의 길을 곧게 했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많았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노자도 한국인의 심성, 즉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좋은 땅(마13,23)으로 개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복음을 전한 선교사의 영성보다 더 높은 영성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배워서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경건을 훈련하여 예수님의 뜻대로 실천할 수 있는 영적 기반이 풍성한 민족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구적인 세 가지 관점이 모두 일리가 있고 이공과 동광원의 삶을 조명하는데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독특함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서구적인 신학을 가지고는 한국 교회의 분열과 영적 빈곤함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믿음의 나무가, 한국 토양에 어렵게 싹이 나고 자라나서 첫 열매를 맺고 있는 한국 토종의 복음 나무 열매를 소홀히 하고 서양에서 보고 들었던 기준과 모습이 조금 다르다고 다 짓밟아 없애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의 연구에서 이상의 관점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나아가야할 바람직한 방향으로서 한국적 기독교 영성을 모색하고 그 관점에서 이공과 동광원의 신앙, 나아가 한국적 기독교 영성을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2. 본론
가. 서구적 시각에서 바라보기
서서평선교사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간호과정을 마치고 선교사 훈련을 거쳐 32세에광주로 파견되어 1932년 그 나이 54세로 일생을 마치기까지 광주에서 헌신하신 분으로 청년 이현필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일생 독신으로 살면서 한복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광주에서 고아들을 보살피고 이일성경학교를 세우고 제중병원 간호사로서 간호학회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짧은 생애를 온 힘을 기울여 우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인이요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게는 담요 반 장, 밀가루 두 홉 밖에 남은 것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을 베풀며 살았던 사랑과 순결과 청빈의 화신이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현필은 제뫼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동광원과 깊은 인연을 맺은 선교사는 유화례선교사입니다. 유선교사는 6.25당시에 광주에서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해 위험에 처해 있다가 동광원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입니다. 물론 유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동광원 식구 여러 사람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유선교사 입장에서는 동광원과 이현필이 생명의 은인이지만 신앙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유선교사는 동광원의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을 돕겠다고 했지만 이현필선생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선교사는 동광원 사람들의 그런 삶과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약을 안 먹고 치료도 받지 않던 이현필이 율법적인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총과 믿음의 본을 보이고 또한 사랑하는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 안 먹던 고기도 먹고 약도 먹는 소위 파계를 했습니다. 그래서 결핵에 걸린 김준호와 함께 광주로 내려와 제중병원에 잠깐 입원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중병원 원장이던 고허번 선교사와 친하게 되었습니다. 동광원 식구들이 제중병원의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고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병이 심하고 갈 곳이 없는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폐질환자들을 돌보는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정인세 원장은 이현필선생의 뜻에 따라 귀일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귀일원의 명칭은 이현필선생이 지은 것인데 하나가 되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귀일이라야 된다는 유영모선생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광주지역에 의료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하였고 이들의 헌신적 구호활동에 동광원이 협력하였습니다. 광주지역에 온 선교사는 이처럼 주로 의료계 종사자들로서 정치적 성향에서 비교적 거리를 둔 매우 순수한 의료 선교로서 기독교 봉사였습니다. 널리 환자들을 돌보는데 헌신하는 그들의 활동과 동광원의 활동은 긴밀한 협력관계요 뜻이 일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광원 식구들의 생활 특히 이현필선생이 약을 안 먹고 치료를 더 받아야 됨에도 치료를 중단하고 영양도 충분히 섭치하지 않는 것은 의사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현필 당신이 병원에서 충분히 치료받고 건강하게 회복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큰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왜 그렇게 치료를 중단해서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매우 어리석고 고집스런 금욕주의자로 비쳐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현필 선생은 왜 약을 안 먹고 고기도 안 먹고 그렇게 사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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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밥이 귀한 줄 알고 살았지 한 번도 물이 귀한 것을 미리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밥도 물도 다 굶고 깨달아 진 것은 밥이 귀한 것이 아니라 물이 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순결의 길 초월의 길, 이현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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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 선생의 파계에 대한 김준호 선생의 설명입니다.
<보통 건강해서는 예수 믿고 선하게 계율 지키고 고기 안 먹고 약 안 먹고 그렇게 선하게 사는 것이 귀한 줄 알았지, 예수님의 은총이 귀한 걸 몰랐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보혈이, 예수님의 자비가,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의 전능이, 하나님의 사랑이 귀한 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동광원에서 약 안 쓰고 고기 안 먹는 이것이 계율이 되었구나, 그것은 율법이지 사랑 아니다. 그걸 깨달은 것이지요. 지금 내가 고집을 하고 약 안 먹고, 고기 안 먹고 살아왔는데 지금 이선생 자기가 죽지 않아요? 지금 임종을 앞두고 있잖아요? 그렇게 죽으면 그건 자기는 승리지요. 성인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 보다는 자기가 지옥가고 죄인 되고 죽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 되고 내가 죽어서 이 사람들 앞길을 열어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고아들 과부들 수많은 사람들이, 동광원 전통이 그러니까 아무런 뜻도 없이 자비심도 없이, 예수 믿는 것과 상관도 없이, 이 율법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때. 그러니까 이 법을 내가 헐어버리고 세상을 떠나야지 이대로 떠나서 내가 성인이 되고, 내가 이 전통을 지키다 죽으면 이것으로 파벌이 생길 것이다. 이거 잘못 되면 이현필 당이 되겠구나. 예수교 안에 분파가 생기듯 이현필 종파가 생겨가지고 새로운 교단이 형성된다면, 다시 말하면 교파가 새로 생길 거다, 그걸 간파한 것이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엄청나고 무자비한 전통을 세우면 되겠는가. 그래서 이선생님은 인제 계획적으로 파계를 하는 거예요. 왜? 저 청년이 이 계율을 지키다가는 약 먹으면 나을 손이 지금 고름이 들어가지고 썩어 들어가는데 이거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파계를 한 것입니다. 저는 몰랐지요. 뒤에서야 해설하신 때문이지요. 파계를 하고 저를 무작정 병원에 입원시킨 거예요. 가자, 하고 죽으러 가는 분인데 광주 따라가니까 병원에 입원시켜버려요. 그런데 병원에서 저는 입원 안 시켜줘요. 저는 벌써 폐병이 든 지가 10년이 가까웠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입원에 해당이 안 되어요. 위독하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선생님은 위독해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니까 병원에서 이 선생님을 입원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 선교사회에서는 이 선생님이 공로자니까 특대우지요.
최상 특대우, 다시 말하면 특호, 특별 입원실에 입원을 시켜요. 그리고 저는 이제 집에 가라 그래요. 그런데 선생님이 입원 안한다고 나가버려요. 그때 최흥종 목사님이라는 분, 소위 말하면 소록도나, 구라원을 세운 창설자 아니요? 자비의 아버지인데 그분이 이 선생님더러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가자.’ 그래서 그날 병원에 같이 갔어요. 그분이 선교사님 밑에 일보던 목사님 이니까 그 목사님이 새에 들어서 변호하는 거예요. 외국 선교사 카링톤 원장님더러 ‘원장님, 이 선생님 입원시키려면 김준호와 두 사람 입원시켜 줘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처럼 따라다니니까 떼어놓을 수 없소.’ 그랬어요. 그래도 선교사님은 고개를 흔들어요. 아 건강한 사람은 집에 가고 병든 사람 입원하라고. 그때 여성숙 의사가 처녀로 있었어요. 여 의사가 사정을 막 영어로 이야기해요. 아무래도 자기들도 입원실이 없거든. 입원실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특등실에 입원시키자 했지요. 그렇게 영어로 합의를 본 거 같아요. 이 선생님 명의로 제가 따라 들어갔지요. 혼자 들어가는 특등실인데 제가 따라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저를 입원시켜놓고는 선생님은 내일 나간다는 거예요. 병원에서는 이 선생님을 입원시키려고 병실을 별도로 만들어서 입원시켰는데 그 분은 제자인 나를 위해서 입원하는 방법으로 입원한 것이지요. 이제 입원은 되었으니까 자기는 나간다는 거예요. 일주일도 못되어서 그만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병원에서는 아주 성화지요.
지금도 여 의사는 후회합니다. 어째 이 선생이 의사 지시를 안 들었냐? 그때 우리 하라는 대로 했으면 안 죽는다는 거예요. 급성 후두결핵이니까 약 써버렸으면 나을 수 있었을 텐데, 약 안 먹고 퇴원해 버렸다는 거예요. 세상생각으로는 그래요. 그럼 병을 나으려고 병원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줄기찬 불복약의 계율을 파계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뿐이에요.
그분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 먹은 것도 아니에요. 고기를 안 먹어야 천국 간다는 이 비살생의 계율이 미신이 되어가지고 전혀 자비가 없거든요. 사랑이 없거든요. 사람이 죽어가도 내버려 두거든요.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그 분은 자기의 그 법률, 소위 자기 계율을 이렇게 사랑으로 융통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이지요. 사랑에는 율법을 초월한다는 거지요. 사랑에는 수도법도 초월합니다. 수도법도 사랑의 완성에서 법이 있지 사랑을 배신하기 위해서 법을 지킬 수는 없지 않아요? 그렇게 이제 어떠한 의미에서 재창조의 길을 열기 위해서 하시기 때문에 아무 뜻도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다녔다고 병원에 입원한 저와 함께 한 달 있으시다가 퇴원해버리고 치료를 포기해버렸어요. 자기치료를 포기해 버렸어요. 그때 저만 덕분에 6개월 있으니까 나았어요. 8년 동안 병들어 약을 안 먹다가 6개월 먹으니까 벌써 다 나아가요. 제가 부끄럽지만 이 치질도 결핵성이어서 고름이 나오고 손도 그랬으니까 퉁퉁 부어가지고 이렇게 곧 손이 떨어지려고 그랬거든요. 그때 여 의사가 내 팔에 기부스 해 줬어요. 그러고 치질도 고름이 잡혔던 게 나았고, 폐는 너무 깊어가지고 한 5-6년 약을 먹었을 거예요. 폐병 약은 한 5-6년 후에도 10년까지도 여기 쫒아 와서도 먹었어요. 그럼 그때 같이 입원하고 병든 사람이 100명에 90명은 다 죽었어요. 그러니까 마이신이 발견되고 몇 해 후이니까, 벌써 치료받기에 늦은 사람들이니까 거의 다 죽어버립디다요. 돈 많고 재벌들은 다 죽어 버립디다.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살았냐? 그건 바로 말하면 특은이고 기적이지요. 제가 그걸 몰라요.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느낌이 없어요. 하나님의 덕분인 것을 자기가 모르고 있습디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르는 것은 참 캄캄한 것이지요. 마음이, 그러나 이 사리를 살펴보면 다 죽었는데 살아있는 거예요. 그리고 악조건이고 번번이 환자로서는 거기가 있으면 죽을 듯 살았거든. 다리 밑에 산다든지 그렇게 하루 종일 소위 소식 했다 던지 그렇게 아주 그 조건이 나빴는데 어떻게 살아있냐? 그러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라. 그렇게 고백이 되요. 또 지금 그렇게 느껴지고요. 그런걸 보면 이 선생님이 우리를 지도했던 것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어요. 누가 들으면 오해 하지요. 뭐 그런 잔인한 선생이 있느냐? 사람이 그렇게 지조가 없이 자기 지키던 율법을 다 파계하고 죄를 짓고 제자들을 곤경에 빠치고 그렇게 교리도 없고 법률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잘못 들으면 이 선생님이 형편없이 낙제가 되어버린다고요....>
이현필선생을 치료했던 카딩톤 선교사와 여성숙 의사가 바라볼 때 이현필은 얼마나 무지한 고집쟁이로 보였을까요? 합리적인 의사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선생 자신이 먼저 건강을 회복하여 건강한 몸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선생님은 자기를 가장 밑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모든 결핵환자들이 다 약을 먹고 치료받기 전에는 자기는 더 이상 치료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꼭 같이 평등하게 바라보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자신보다 먼저 보살피는 것이 예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선생이나 김준호선생이 바라보는 눈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을 가진 의사나 선교사가 바라보는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의 시각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은 없을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길게는 200년이 되었고 미국 선교사의 방한을 기준으로 하면 약 100여년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고 그 책임이 무겁습니다. 교회가 받아들인 신학은 모두 서구적 기독교 신학, 특히 미국 개신교 신학입니다. 신학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는 방법과 틀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바깥 풍경을 볼 때 어떤 창문을 통해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또 우리가 바라보는 창문 유리의 색깔과 투명도 왜곡상태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세상과 육신에 갇혀 사는 우리는 이 틀과 시각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틀과 시각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계시에 의한 방법입니다. 즉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계시해 주시는 것인데 그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순수 직관의 영으로 성경과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그런 계시 받은 분들의 체험과 신앙의 기록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계시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다 해도 그 체험을 이 세상의 경험과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방법과 틀이 만들어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수순직관의 계시 체험과 경험은 어느 누구에게 전할 길이 없습니다. 자기의 체험을 말이나 언어문자로 전달하거나 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체험은 말이나 언어 문자를 초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전할 방법은 언어문자 이외에 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말이나 글로 표현해서 그 뜻을 전하자고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말이나 언어 문자가 속한 문화의 틀에 얽매이게 되고 왜곡과 오해의 여지를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계시 체험 또는 성령체험을 통해 진리를 보게 된 사람은 그동안의 모든 지식과 방법이 하나의 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갇혀 있던 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왜냐면 그 틀에서 벗어나 본 경험으로 자기 틀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계란으로 있을 때는 자기가 어떤 틀, 어떤 껍데기에 둘러 쌓여있는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병아리가 되어 깨어 나오면 자기가 이런 좁은 껍데기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깬다는 것은 자기의 틀을 보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뱀이 그동안 자기를 감싸고 길렀던 허물을 벗어나야 성장하게 되고 허물을 벗어나야 그동안 자기를 지켰던 허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의 틀을 벗어나본 사람이라야 자기의 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고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깬 사람이 볼 때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어떻게든 그 틀에서 벗어나 한층 더 성숙하길 바라고 마침내는 하늘로 날아가는 자유를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복음이란 바로 이런 성격이라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틀 안에 있는 것들만 자기 친구라고 생각하고 자기 틀과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 나와 다른 남이요 원수다 이단이다 그렇게 해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는 일이 세상일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신학의 틀로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겸손이 있어야 됩니다. 같은 개신교의 서구신학이라 해도 무슨 보수주의 정통주의 자유주의 하면서 서로 배척하고 싸웁니다. 개신교 교단이 지금 수백개로 나눠져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신학이 성경과 복음을 바라보는 시각과 방법이라면 그것은 사람마다 다 각기 다른 신학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생각과 뜻이 다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수십억 인구가 살고 있지만 나와 얼굴이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다 각기 다른 생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각의 세계를 세분해 보면 한 사람도 나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생각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들여다보실 때 어느 누구도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 각기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지금 이 순간에 여기 모여 있습니다. 이렇게 다르기로 하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공간에 같은 공기를 호흡하면서 한국어라는 같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 됨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공의 삶과 믿음이라는 같은 주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생각이란 이제 갓 터 나오는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말을 하는 순간, 제 속에서 생각을 터주시는 분은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진리의 성령 안에서 우리는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으로 숨을 쉬고 있는 한 식구요 한 형제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을 느끼고 한 생명을 느끼며 하나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의 은총 가운데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한 생명임을 느끼는 순간에는 일체의 분별심이 사라지고 분열과 갈등의 기운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우리를 덮고 있는 이 사랑의 기운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모두가 흩어지고 갈라지고 분열되고 찢어져서 서로 남이 되고 원수가 됩니다.
친구가 되느냐 원수가 되느냐는 한 순간에도 수천번 왔다갔다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총 가운데 머물면 모두가 사랑스런 친구가 되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면 모두가 죽여야 할 원수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느냐 사탄의 수하가 되느냐 하는 것은 순간의 문제입니다. 한 순간 생각을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천사가 되고, 한 순간 욕심이 일어나면 우리는 사탄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탄의 기운을 막아주는 것이 문화의 역할입니다. 타락한 문화가 되면 누구나 쉽게 사탄의 하수로 되기 쉽고 문화가 고양되면 그 문화 속의 개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마치 물이 썩으면 모든 물고기들이 죽어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가 타락되면 생명의 인격은 사라지고 악귀들만 들끓게 되는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내 이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틀과 안목이 내가 천사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하수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과 성경을 바라보는 틀과 안목도 문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과 복음이 야만의 문화에 들어가서 야만의 문화를 일깨우고 고양시키는 역할도 있지만 사탄의 문화가 성경과 복음을 왜곡하면 성경과 복음도 사탄의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물론 왜곡된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왜곡된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니라 거짓 복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이나 제사장들의 종교와 신앙이 바로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을 공의와 정의로 사랑하시고 해방시키는 성경의 말씀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율법이 되고 폭력과 전쟁문화의 로마 세력 앞에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 그들의 앞잡이로서 백성들을 착취하는데 앞장섰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백성들이 다만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지 그들의 사랑스런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선한 사마라이인이 아니었습니다. 강도 만난 유대 백성들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웃이 되기 위해 친구가 되셨고 친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바리새인의 눈은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이 어떤 문화를 갖느냐에 따라 이렇게 안목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위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도 역시 그가 속한 국가나 민족의 문화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고 그 문화수준이 다 같지가 않습니다.
19세기 말에 한국에 건너온 미국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미국의 문화를 가져왔습니다. 미국의 문화라는 말 속에는 미국신학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말합니다. 선교사가 속한 교단의 문화와 양식도 다 다르겠지만 크게 말하여 서구적 신학과 서양문화라고 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 거죽에 서구적 신학과 서양문화라는 당의정을 입혀서 한국에 전해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적인 것입니다. 서구신학과 서양문화라는 당의정을 입혀 전해준 복음은 우리 한국인의 마음속에 생명수로 솟아날 생명나무의 뿌리를 가진 생명수로 자라나질 못하고 우리 영혼의 갈증을 축여줄 맛있는 음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양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을 부단히 번역해서 수입하고 전달해서 소화시키느라 애쓰다 보면 다시 또 시절이 바뀌고 새로운 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반복 하다가는 우리 몸과 우리 풍토에 맞는, 우리의 살림을 키워주고 우리의 생명을 살려낼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믿음은 영영 갖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복음화의 사명도 감당할 수 없고 세계선교의 비전도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적 기독교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생각나는 대로 써보려 하고 있습니다. 본래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발표해볼까 시작했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었습니다. 지금 생각은 작은 서적을 낼 정도의 분량으로 써볼까 구상중입니다. 상식적인 수준이라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스스로 의심스럽습니다. 검토해 보시고 의견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적 기독교 영성을 위한 제안에 대하여 여러 선생님들의 기탄없는 질정과 조언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2015년 8월 22일 평산 심중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