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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22) 2024. 1. 21
계속되는 느헤미야의 개혁
느헤미야13:1-9
느헤미야가 행한 일 가운데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고(1~7장),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신앙을 개혁하는 일이었습니다(8~11장).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모두 완성한 후, 드디어 감격에 찬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12장).
성벽 위에 올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여 하나님의 전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큰 제사’를 드리면서 모두가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가 함께 기뻐하니, 그날 예루살렘에서 환호성을 외치며 기뻐하는 소리가 아주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이방인 분리>
그런데 그 봉헌식 날, 중요한 말씀 하나가 선포되었습니다.
13:1~2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모세의 율법 책이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모이는 자리,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큰 잘못을 했길래 그 두 민족만을 콕 집어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까요?
여기서 잠깐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압과 암몬은 시발점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딸들을 통해 낳은 아들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롯의 가족은 탈출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게 되자 롯의 두 딸이 대를 잇게 하려고, 아버지 롯을 술 취하게 하고 동침하여 낳은 아들을 낳습니다. 큰딸이 낳은 아들의 이름이 모압이고, 작은딸이 낳은 아들은 벤암미고,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19:30-38).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과 암몬은 혈족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모압과 암몬 땅은 빼앗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신2:9, 19).
또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훗날 모압 여자 룻이 유다 지파 사람 보아스와 결혼하고, 오벳을 낳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암몬 땅을 지나게 될 때, 자신들이 지날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고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돈을 받고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압과 암몬은 사사건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모압 왕 발락은 복술가 발람에게 돈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사주하였습니다.
또,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머무는 동안 모압 여자들의 유혹을 받아 우상숭배(바알브올)에 참여했고, 여자들과 음행(淫行)했습니다(민25:1~3).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전염병이 생겨, 24,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괘씸하게 여기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모압과 암몬을 여호와의 총회에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신23:3-6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그렇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혈육 관계에 있으면서도,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 인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태도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아주면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잠시라도 쉬다 가시라”고 영접해 주었더라면, 아니 이스라엘의 요구대로 길만 터 주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남자만 60만 명이었으니 그들을 선대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형제의 민족이니 손해 보더라도 그리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 민족으로 절대 손해나지 않게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엡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은혜를 베풉니다.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이 두 민족과는 내내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사사 시대, 모압의 왕 에글론이 유대인들을 정복해서 지배하지만 왼손잡이 사사 에훗에 의해 에글론이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내내 티격태격하며 살게 됩니다. 암몬은 유다를 치는 아시리아 연합군에 참가하였습니다(왕하24:2, 대하20:1).
그러다가 모압과 암몬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이사야15:1, 예레미야48:42, 에스겔).
겔25:2-3 “인자야 네 얼굴을 암몬 족속에게 돌리고 그들에게 예언하라/ 3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 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4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넘겨주리니 그들이 네 가운데에 진을 치며 네 가운데에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열매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겔25:6~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7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패망하게 하여 멸하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때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모압도 마찬가지입니다(겔25:8. 렘48:26-27. 29. 42).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주된 죄목이 무엇입니까? 형제의 나라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조롱한 죄입니다. 아마도 평상시 유대 민족을 얼마나 미워했으면 그런 반응이 나왔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동방 사람에게 넘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이클 프렐(작가) -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교인들에게 “현재 미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분은 손을 들어보라”고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무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다음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연세 많으신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아, 있기야 있었지. 그런데 다 죽었어~.” 예외가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긍휼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쉽다면, 하나님이 굳이 말씀하셨겠습니까? 어려우니까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 하는 자만을 선대 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6: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선대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 어떤 전제 조건도 붙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백성들>
그 결과까지 느헤미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 총회에서 이방인을 분리하여 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총회에서 이방 사람들을 가려내어 축출하는 일은 과연 옳은 일인가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주목해보세요. 하나님의 계획은 먼저 한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여 거룩하게 구별한 후에, 그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같은 매개자(중보자)의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다른 이방 사람들과 구별시켜 하나님의 백성다운 면모를 갖춰야 했습니다(출19장 – 제사장 나라).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에 따라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신앙이 없는 이방 사람들과의 교제를 엄히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독선적인 배척이 아니라 선민의 타락과 세속화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이르러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서 분명히 나타나 보이듯,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까지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전 인류를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셨습니다.
롬10:11~12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예수님이 진정한 의미의 참 제사장이 되셨고, 예수님은 우리 제자(성도)들에게 ‘제사장의 사명’을 남겨 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구주로 영접한 신앙 공동체에서는 인종이나 신분에 따른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가(느1:1~13: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마칠 때까지의 내용입니다.
이후 13:4이하의 내용은 훗날(10여 년) 있었던 일을 기록하여 붙인 부록입니다.
<페르시아에 다녀온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약 12년간 이스라엘 총독으로 일했습니다. 느2:1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총독이 되었는데, 오늘 본문 13:6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32년에(주전 433년경),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이 있는 곳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6~7절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을 알현하러 갔다가, 다시 허락을 받고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딸린 방들을 관리하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성전에 딸린 여러 방 중에서 널찍한 방 하나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5절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본래 그 방은 성전의 창고로, 그 용도가 다양했습니다, 곡식 예물과 분향 재료와 각종 성전 기구들, 레위인들과 찬양대원들과 성전 문지기들에게 주려고 십일조로 거두어들인 곡식들과 새 포도주와 기름 등을 보관하고, 또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헌물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방을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암몬 사람 도비야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 준 것입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 그자가 누구인가요? 느헤미야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쌓을 때,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더불어 그 일을 조롱하고 경멸하면서 아주 극렬하게 훼방한 인물이 아니던가요?
더군다나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반드시 분리해야만 하는 ‘암몬 사람’입니다.
성전의 방에 거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제사장이나 레위인 뿐입니다. 그런데 이방 사람 중에서도 ‘암몬 사람’인 도비야에게 거룩한 성전의 방을 내준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4절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당시 암몬 사람 도비야는 예루살렘의 유지들과 폭넓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친분을 이용하여 성전의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와 널찍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6:18~19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도비야가 여호와를 가까이서 섬기려고 그곳에 왔겠습니까?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틈을 타(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올 줄 몰랐던 듯), 그는 자신의 친족들을 동원하고, 뇌물을 동원하여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구워삶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통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큰 방을 차지하고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행위는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그은 ‘삯꾼’ 종교지도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거룩한 직임을 사적 부를 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단지 이단 사설을 가르쳐야 ‘거짓 선지자’가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이 된다면 신앙 양심 다 팔아 버리고(성직 매매),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며 교회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도 ‘삯꾼’이요,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은 직분과 직임은 오직 개인의 이익이 아닌 생명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분은 오직 섬김의 직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직분과 삶의 성육신화).
<분노하는 느헤미야 - 성전 청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합니다.
8~9절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느헤미야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올라, 도비야가 사용하던 방에서 그가 쓰던 살림살이를 모조리 끄집어내어 방 밖으로 마구 내던졌습니다. 그런 뒤, 그 방의 본래 용도대로 성전의 각종 기구들과 곡식 제물과 분향 재료들을 다시 그 방에 옮겨 보관토록 지시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행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하나님의 대적에 의해 더럽혀진 데 대한 거룩한 의분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성전을 방문했다가 ‘성전을 정화’하신 내용과 비슷합니다.
마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맺는 말씀 – 개혁은 계속되어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죄악의 본성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한여름 잡초 자라듯 우리 심령 안에 있는 타락의 본성은 정말 끈질깁니다. 찰거머리 같고 진드기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보고 자신의 심령을 단정하게 하지 않으면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종교개혁’은 옛날 한 번 일어난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흘러야 합니다. 구르는 돌에 이끼 끼지 않습니다.
과수원에서 실속 있는 열매를 얻기 위하여 양분을 빼앗아 가는 가지들을 과감하게 절단하듯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열매를 맺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죄 된 요소를 잘라내야 합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거룩한 몸부림을 기억하고,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도록 늘 돌아보고, 또 우리 사도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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