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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년에 신라의 혜초 스님이 멀리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에 갔다. 스님의 나이 겨우 24살이었다.
그는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와서 순례를 하고 육로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에 들렀던 것이다. 그는 분명 바미얀의 대불을 보았을 것이다.
792년에 아프가니스탄의 후라산 태수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카불로 쳐들어갔다. 침략자들은 고르반드와 얀딜이스탄(반두키스탄) 등지에서 사람들이 숭배하던 우상을 빼았고 불태웠다. 반두키스탄은 바미얀 근방에 위치한 폰두키스탄 지역을 말한다.
820년에 호라산 태수로 임명된 압바스 왕조의 장군 타히르가 아프가니스탄에 타히르 왕조를 세웠다.
867년의 이란계인 사파르 왕조가 들어섰다.
870년 야쿱 빈 라이스는 마침내 시스탄에서 카불을 함락시켰고 왕도 살해하였다. 그는 그곳에 있던 금과 은으로 된 동상 50구를 녹여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보냈다. 명분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우상파괴이자 보물 약탈이었던 것이었다. 이슬람 종교의 미망은 이런 곳에서 빛이 났던 것이다.
가즈니도 야쿱 빈 라이스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가즈니의 왕도 전사하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당연히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야만 했다.
874년에는 부하라에 도웁을 둔 사만 왕조가 들어섰다.
900년부터는 이스마일 사마니가 호라산 일대를 지배하였다. 907년 11월에 이스마일이 오랜 병고에 시달리다 죽자 그의 아들인 아흐마드가 권력을 잡았다. 아흐마드는 914년 1월 12일에 암살을 당하자 그의 8살 난 아들인 나스르 2세가 권력을 잡았다.
939년 이후부터 호라산 지역은 아부 알리 창하니가 지배를 하였다. 나스르 2세가 오랫동안 권력을 잡다가 943년에 죽자 사마니드 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호라산 일대를 두고 아부 알리와 누 1세는 권력다춤을 벌였다. 그러는 와중에 아부 알리는 결국 호라산 일대의 지배를 인정받기도 했다.
누 1세는 954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압둘 말리크 1세가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압둘 말리크도 961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은 힌드 샤히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압둘 말리크가 961년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사만왕조에서 일하던 투르크계 노예 출신인 알프 티긴은 10세기 중엽에 가즈니의 태수가 되어 그곳에 세력을 구축했다.
원래 알프 티긴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도시 발흐 출신의 노예였다. 이후 벼락출세를 하여 장군이 되었고 뒤이어 권좌에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962년에는 가즈니에 가즈니 왕조가 세워졌다.
그러나 알프티긴이 975년에 죽자 잠시 혼란기가 있었다. 그러자 그의 사위인 사북 티긴이 977년에 그의 성공에 반대하는 토그한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토그한은 도망을 가고 인근 칸다하르 지역을 장악했다.
이렇게 사북 티긴은 권력을 잡아 후라산까지 차지했다. 정력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사북 티긴은 997년 8월에 내전을 진압중에 아프가니스탄 발흐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죽기전의 병상에서 아들인 이스마일 가즈니에게 왕통을 넘겼다.
그러자 중아시아 지역과 후라산 즉 호라산 지역에서의 사마니드 내전을 평정하느라 고생을 하던 이스마일의 큰 형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역 니스하푸르를 삼촌인 보르구르와 동생 누르 웃 딘 유스프에게 넘기고 왕이 된 이스마일을 타도하려고 진군을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이스마일을 물리치고 997년 말에 가즈니 왕조를 차지했다. 즉 가즈니 왕조를 완전히 확립한 인물은 사북 티긴의 큰아들인 마흐무드 가즈니였다.
마흐무드는 998년에 가즈니 왕조의 왕위에 올라 시스탄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리고 그때까지 받들던 사만 왕조를 무시한 채 명목상의 이슬람 군주인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직접 왕권을 받았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가즈니 왕조가 사만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고 결국 사만왕조를 물리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캬슈가르와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가즈니 왕조의 마흐무드는 마침내 1013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이슬람 이전 전통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카불의 힌두 샤히 왕조를 무너뜨렸다. 이로써 마흐무드는 북쪽으로 베르브,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남부, 남쪽으로는 신드, 동쪽으로는 펀잡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마흐무드는 옥수스 북쪽의 화리즘을 정복하고 거기에 살고 있던 중세 이슬람 시대의 대학자인 알 비루니를 가즈니로 끌고 왔다. 이렇게 하여 모든 시인들이 가즈니 궁전에 무려 400여명이 있었다. 마흐무드는 무식했지만 학자들을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이런 실정을 모르던 당대 최고의 서사시인 피르도시는 65세의 나이에 스스로 페르시아를 떠나 가즈니 왕국에 왔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자신을 칭송하는 서정시를 쓰는 자신이 소유하던 문인들만 우대했지 서사시를 쓰는 피르도시는 본체만체 하였다.
피르도시는 7세기 전반까지 이란 왕들의 역사를 서술한 장편 서사시 "제왕기"를 쓴 인물로 유명했다.
하여튼 마흐무드의 아프가니스탄은 명실공히 완전히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아프가니스탄의 마흐무드는 죽기전인 1030년까지 무려 17번이나 인도를 침공하여 곡물과 재물을 약탈하고 인도의 사원을 파괴하여 악명을 떨쳤다.
그의 대표적인 만행은 힌두교도의 성지인 서인도 구자라트의 소마나타 힌두교 사원을 1025년에 알고나서 그곳에 침입해서 신전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시바의 상징인 링가를 두 동강 내었다. 그 돌은 가즈니로 가져와 모스크의 계단으로 삼았다고 한다.
1030년 4월 30일에 마흐무드 가즈니가 60세의 나이로 죽자 가즈니 왕조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서쪽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융성하면서 가즈니 왕조와 자주 충돌을 하였다. 그리하여 양측은 결국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1040년 5월 23일 단다나콴 전투에서 마흐무드 가즈니의 아들인 마수드 1세가 이끄는 60마리의 전투 코끼리와 5만의 대병력은 셀주크의 강력한 2만여 군대를 맞아 3일동안의 격전끝에 전멸을 당하고 만다. 마두스는 기병 100명을 대동하고 간신히 전쟁터를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비록 일부지만 사실상 셀주크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참패를 하고 돌아온 마수드 1세는 결국 형제인 모하메드 가즈나비에게 권력을 빼았기고 만다. 권력을 잃은 마수드 1세는 쿠리 성채에서 감금되었다가 이내 살해된다.
그러자 마수드 1세의 아들인 마우두드는 발흐에서 군대를 모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가즈니로 진격하여 1041년에 결국 모하메드 가즈나비를 권좌에서 쫓아내었다. 그리고 그를 살해하였다. 마우두드는 1047년에 시스탄을 셀주크로부터 탈환하였다. 그리고 1049년에는 바미얀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다가 1050년에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마수드 2세가 권력을 잡았다. 특히 1099년 부터 가즈니 왕조는 마수드 3세가 즉위하면서 가즈니 왕조는 잠시 안정을 찾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즉 그는 1114년까지 가즈니 왕조를 다스렸다.
그의 뒤를 이어 바흐람 샤가 1118년부터 가즈니 왕조를 통치했다.
12세기 중엽에는 아프가니스탄 중부에서 새로 일어난 구르 왕조가 세력을 확장했다. 구르 왕조는 1149년에 가즈니를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때 마흐무드와 마수드 1세 그리고 이브라힘의 묘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때 가즈니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가즈니 왕조의 왕 바흐람 샤는 알라웃딘 후사인 고르에게 가즈니을 잃었다. 그래서 바흐람 샤는 수도를 펀잡지방의 라호르로 옮기게 되었다.
가즈니 왕조의 왕 바흐람 샤도 1152년까지 통치를 했다. 1160년에 무하메드 구르는 가즈니를 점령했다. 1173년부터는 무하메드 구르는 가즈니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1187년에 헤라트에 도읍을 한 구르 왕조가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그리하여 가즈나비드 왕조는 완전히 끝이 났다. 한편 새롭게 탄생한 이 구르 왕조는 12세기 말 인도에 침입하였다. 마운트 아부 근처인 카야다라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1만 5천명의 구르 왕조의 군대는 8만명의 힌두군을 맞아 무찔렀다. 그리고는 북인도를 장악했다. 이전의 인도 침입자와는 달리 구르 왕조는 인도에 침입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하려고 했다.
왕 무하메드 구르는 1206년까지 통치를 하였다. 한편 인도를 점령한 구르 왕조의 군대는 델리에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려고 했다.
즉 구르 왕인 무이즈 웃딘 소유의 투르크인 노예 출신인 장군 쿠트브 웃딘 아이바크는 아예 인도에 남아 델리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인도를 지배한 이슬람의 첫 왕조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근거지를 둔 구르 왕조는 무이즈 웃딘이 1206년에 죽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성기의 흐와리즘 샤>
구르 왕조가 쇠망해 가는 와중에 북쪽에서는 몽고의 징기스칸이 등장을 하고 있었다. 이미 중국을 정벌한 그는 다시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항하는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에는 흐와리즘샤 왕조 밖에 없었다. 흐와리즘 샤의 군주 무함마드 샤가 몽고의 침입에 대응하려고 준비를 하였다. 지역의 군주였던 그는 1215년 부터 아예 흐와리슴샤 왕조를 세웠던 것이다.
<몽고가 중앙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기 전의 각 나라 왕조의 지도>
징기스칸은 1218년 사마르칸트에 있는 마하마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마하마드 2세는 사절의 목을 베었다. 이에 분노한 징기스칸은 20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파견하였다. 대군은 시르 다르야를 넘었다.
흐와리즘 샤의 군대는 징기스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징기스칸의 군대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옥수스를 건너 아프가니스탄의 발흐를 점령하였다. 특히 1219년부터 1221년 사이에는 징기스칸의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관개시설을 완전히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초토화 시켰다.
1222년에 징기스칸 군대는 바미얀을 목전에 두었다. 바미얀 분지의 동쪽 입구에는 샤흐르 이 조하크라는 성이 있었다. 이때 징기스칸의 손자인 무투겐이 이곳을 공격하다가 그만 전사를 하고 말았다. 당시 무투겐을 몹시 사랑한 징기스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징기스칸은 딸뻘인 무투겐의 모친 앞에서 바미얀을 함락시키면 손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그곳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징기스칸이 친히 바미얀의 도성인 샤흐르 이 골골라를 공략하기 위해 바미얀 분지 동쪽의 키크락에 진을 쳤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바미얀은 무함마드 샤의 아들인 잘랄 웃딘의 세력하에 있었다.
당시 잘랄 웃딘은 가즈니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가즈니의 공주와 재혼하기 위해 그곳에 있다가 나라가 침공당하는 변을 맞이한 것이다.
이때 잘랄 웃딘 전처 소생인 랄라 하툰은 재혼하는 아버지를 복수하기 위해 징기스칸의 군대에 밀서를 보내 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난공불락의 이 바미얀 성은 함락이 되었지만 징기스칸과 결혼을 하려는 랄라 하툰은 오히려 징기스칸이 아버지를 배신한 딸이라고 하여 돌로 쳐 죽였다.
징기스칸은 공언한대로 함락한 바미얀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다 죽였다. 징기스칸은 이어서 카불과 가즈니 그리고 페샤와르를 차례로 정복하고 인더스 강 유역의 물탄까지 휩쓸고 내려갔다. 즉 징기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길을 따라 진군했던 것이다.
결국 징기스칸은 파키스탄 북부의 물탄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하던 잘랄 웃딘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포기하고 징기스칸 부대는 북쪽으로 가버렸다.
모든 것이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은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한마디로 아프가니스탄은 징기스칸의 공격으로 최대의 피해지가 된 것이다. 거의 모든 국토가 초토화 되었다. 관계시설이 파괴되어 그런대로 비옥하던 땅은 지금처럼 완전하게 척박하게 변해 버렸다.
당시의 침공으로 인해 척박해진 땅은 지금도 그대로 아프간인들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뭄만 심해지면 국토의 상당부분은 경작 불가능한 지대로 변해 버린다. 이처럼 쓸모 없고 험준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아프가니스탄은 자주 많은 침공을 받았다.
징기스칸이 떠나고 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거의 폐허였다. 발흐는 인적이 드믄 폐허지역이었고 카불은 작은 마을로 전락을 했고 가즈니도 거의 인적이 드믄 황폐 지역이 되었다. 이는 그 지역을 여행한 이븐 바투타가 그 참상을 정확히 기록을 해 놓았다.
몽고의 처참한 아프가니스탄 지배는 1397년 정복왕 티무르의 침공으로 끝이 난다. 북쪽의 중앙 아시아에서 내려온 그는 징기스칸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티무르는 아예 아프가니스탄의 발흐에서 1397년에 황제라 칭하고 점차 세력을 늘려나갔다.
정복왕의 상징적인 고향은 아프가니스탄이 된 것이다. 그리고 티무르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를 아우르고 북인도와 북쪽인 러시아 방면까지 석권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1402년 7월 20일 당시 터키를 중심으로 융성하던 최강대국 투르크의 바예지드 1세도 전설적인 앙카라 전투에서 노려한 정복 대왕 티무르의 막강한 군대에 한방에 나가떨어지고 결국 철창에 갇혀 끌려다니다가 죽었다. 한마디로 티무르 제국도 알렉산더와 징기스칸 이후 최대의 정복왕이 된 것이다. 그 근거지는 바로 아프가니스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는 사마르칸트였고 중심도시는 역시 아프가니스탄의 서부 도시 헤라트였다. 그러나 티무르가 1405년에 죽자 그의 제국은 분열이 되었다. 그럼에도 티무르 제국은 지속이 되었다. 티무르의 자손은 아프가니스탄의 도시 헤라트를 수도로 삼고 이란 문화를 보호하였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티무르의 아들인 샤 루흐가 1404년부터 재위에 올라 통치를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를 수도로 삼고 번영을 하였다. 칸다하르까지 티무르 왕국의 통치 범위에 있었다. 샤 루흐는 무려 1446년까지 통치를 했다. 이 시기를 티무르조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15세기가 이르러 실크로드는 점차 쇠퇴기에 접어든다. 지리상의 대발견으로 해상항로가 개척이 되었기 때문이고 더욱 결정적인 것은 중앙 아시아 지역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육로 교통이 차단이 되었다. 거기다가 중국이 명대에 접어들면서 무역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을 폈기 때문에 전반적인 무역업이 쇠퇴하였다.
이란의 사파비 조가 1501년부터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서부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서북부 지역의 하자라 지역은 인근 이란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이 수니파인 아프가니스탄인들과는 다르게 시아파가 되었다. 따라서 몽고족이 많이 사는 하자라 지역은 오히려 이란의 이슬람과 더욱 가까웠다.
페르가나를 잃고 떠돌아 다니던 바부르는 1504년에 카불을 차지하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1506년 티무르조가 소멸된 후 아프가니스탄은 무굴 제국과 사파비 제국으로 분열이 되었다. 무굴제국의 첫번째 군주인 바바르는 티무르와 징기스칸의 후손이었다.
<바부르:1483년 2월 14일-1530년 12월 26일>
바부르는 우즈베크 족에 의해 중앙 아시아의 페르가나 계속해서 밀려났다. 1504년에 남으로 내려와 카불에 정착했다. 그에게 거듭 실패를 안겨준 북쪽의 사마르칸드와 페르가나 일대를 포기하였다. 대신 카불에서 인도에 들어가 정복활동을 하려고 했다.
한편 바부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무굴 제국이 유지될때까지 이곳 카불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와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의 휘하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42살의 쉐르 샤 수리였다. 그는 1526년 4월부터 바부르 밑에서 봉사했다. 1526년 4월에는 델리 북쪽 파니파트 전투에서 북인도를 지배하던 로디 왕조의 술탄 이브라함을 물리치고 델리를 함락하였다.
이로써 엉뚱하게도 인도의 델리에서 왕위에 올라 인도 무굴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사랑했다. 카불의 온화하고 청량한 기후를 좋아했으며 도시 곳곳에 나무를 심고 수조를 만들어 정원 가꾸기를 즐겼다.
쉐르 샤 수리는 1528년 6월에 바부르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1529년 5월 6일에 가르라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 온 뒤 병이 들었다. 그는 유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묻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1530년 48살의 나이로 죽자 그는 야무라 강 근처의 당시 무굴제국의 수도인 아그라에 묻혔다.
그의 뒤를 이어 23살의 아들 후마운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그리고 북인도 지역의 왕이 되었다.
한편 1534년에 쉐르 샤 수리는 키울 강에서 북인도 서쪽의 벵갈의 왕을 격파하였다. 그리고는 벵갈을 침입하였다. 그리고 비하르와 벵갈의 왕이 되었다.
1537년 10월에 쉐르 샤 수리 즉 쉐르 칸은 다시 벵갈을 침입하여 가우르 지역을 포위하였다. 이에 12월에 후마운은 아프칸 병사들의 힘을 믿고 쉐르 칸을 견제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1539년 후마인은 벵갈지역으로 진군하였다. 그렇게 하여 쉐르 칸과 후마인의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즉 1539년 쉐르 칸과 그의 군대는 차우사 전투에서 후바운과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1540년에 쉐르 칸은 역시 칸나우지 전투에서 후마운을 다시한번 물리치고 델리와 아그라를 54세의 나이에 점령하였다.
<후마운을 물리친 델리와 아그라의 왕 쉐르 칸>
아그라를 점령한 쉐르 칸은 예전에 모셨던 9년전에 죽은 왕 즉 작고한 바부르의 시체는 아들이 아닌 쉐르 칸에 의해서 그가 바라던대로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정원에 묻혔다. 이는 사원의 묘당에 묻히는 관례를 깬 것이었다.
쉐르 칸은 1545년 5월에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1555년 후마인은 델리를 점령하여 다시 델리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후마인은 1556년 2월 22일에 48세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아크바르가 14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말 그대로 위대한 아크바르 왕>
1556년 11월 5일 아크바르의 무굴 군대는 델리 북쪽에서 50마일 떨어진 곳인 파니파트에서 결전을 벌인다. 상대는 압도적인 군세를 유지하고 있는 사령관 헤무가 이끄는 대군이었다. 이 대군은 1500마리의 무장한 코끼리 부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싸움은 백중지세였다. 그러나 행운의 화살이 사령관 헤무의 눈을 관통하자 전투는 역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헤무는 어린 15살의 왕 아크바르 앞에 끌려와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다.
아크바르는 코끼리 부대를 이용하여 인근 지역을 정벌하는데 활용하였다. 망코트 포위에 이 무장 코끼리부대를 사용하여 시칸다르를 굴복시켰다. 항복한 시칸다르는 아크바르가 제공해준 저택에서 2년을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시칸다르의 형제인 아딜 샤는 벵갈 전투에서 아크바르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뒤이어 아크바르는 1562년 북인도의 말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572년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1574년에는 서인도의 벵갈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16세기에 들어 실크로드가 완전히 막을 내리자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 아시아의 더욱 고단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아프가니스탄을 놓고 양측의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는 사파비 조가 1501년부터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서부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동부를 지배하던 무굴제국과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581년 아크바르 왕은 마침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였다. 그는 이어 1586년에는 카쉬미르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만든 왕이 바로 아크바르였다.
1605년 10월 12일에 아크바르 왕이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누루딘 살림 자항기르가 37살의 나이로 무굴제국의 왕이 되었다.
1612년 5월 10일에 21살의 왕자인 샤 자한은 3번째 아내로 뭄타스 마할을 맞이했다. 그녀의 나이는 20살이었다.
무굴제국과 사파비 조는 칸다하르를 놓고 각축을 벌이면서 갈등을 이어나갔다. 양측은 서로 대립하면서 북쪽의 우즈베크 족과 공동을 대치를 하는 형국이었다. 즉 북쪽의 우즈베크 족의 준동도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굴제국은 남하하는 우즈베크 족을 바다흐샨에서 몰아내었고 사파비 조는 헤라트에서 역시 남하하는 우즈베크 족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후 약 200년간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인도를 지배하는 무굴 왕조에 의해 영토가 오랫동안 분할 영유되었다.
1627년 10월 28일 무굴제국의 살림 왕이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샤 자한이 등극을 하였다.
<1628년에 무굴제국의 왕이 된 샤 자한>
<샤 자한의 3번째 아내 뭄타스 마할>
샤 자한은 사랑하는 아내 뭄타스 마할이 39살의 나이로 1631년 6월 17일에 죽자 그 이듬해 부터 제국의 수도인 아그라에 타지마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타지마할의 궁터에 묻힌 상태였다.
<1648년에 완성이 되었다는 아내를 위한 사후 궁전 타지마할>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건설했지만 불행은 뒤이어 찾아왔다. 1653년에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를 페르시아에 잃었기 때문이었다.
샤 자한은 1657년부터 병에 걸렸다. 고령이었고 병이 났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왕자들 사이에 왕권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658년부터는 샤 자한은 사실상 퇴위를 한 상태였다.
그의 뒤를 이어 40살의 왕자 오랑젭이 왕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형제간의 왕권 다툼이 격화되자 바부르 때부터 갈등을 빚던 북쪽의 우즈베크족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666년 1월 22일 타지마할을 건설한 유명한 무굴제국의 왕 샤 자한은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제 명실공히 오랑젭이 단독 왕이 된 것이었다.
<장수한 왕 오랑젭은 바미얀의 대불을 대포로 훼손하였다.>
샤 자한의 아들인 오랑젭 때부터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에 거주하는 파슈툰족의 소요도 만만치 않았다. 오랑젭의 악명은 바미얀의 대불을 훼손한 것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당시 부대는 대포를 이용하는 포병대가 있었다. 카불에도 유명한 포병장교가 있었다. 그는 영국인이었다. 바로 존 힉스와 주디스 힉스의 아들 토머스 힉스였다. 토머스 힉스는 당시 카불을 통치하는 무굴의 지사 밑에서 일을 했다.
토머스 힉스는 1666년 10월 11월에 세상을 떠나 카불의 묘지에 묻혔다. 한편 무굴제국은 1658년부터 1675년까지 계속된 파슈툰족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결국 무굴제국은 인도 경영에 힘을 쏟은 나머지 북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포기하고 만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1707년 3월 3일 무굴제국의 왕 오랭젭이 90살의 나이로 죽었다. 한편 오랑젭이 죽으면서 무굴 제국은 사실상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1709년 4월 21일 그루지아의 왕이면서 페르시아 전역과 인근 지역을 관장하고 있던 구루진 칸은 반란을 진압차 칸다하르로 갔다가 칸다하르 근처에서 미르바이스 칸 호탁의 피로연 초대를 받고 갔다가 그곳에서 미르바이스 칸 호탁에게 살해당하였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1709년 10월 구루진 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새로운 왕이 된 36살의 카이호스로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격을 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군대의 공격을 받고 10월 27일에 그의 3만의 군대와 함께 전멸을 당했다. 왕도 전사를 하고 겨우 그의 군대는 700명만 탈출을 하여 그 비보를 본국에 전할 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한쪽 면을 장악하고 있던 이란의 사파비 또한 1711년에는 칸다하르에서 반란을 접하고 헤라트에서 또다른 유사한 반란에 직면하여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출신 왕 미르바이스 칸 호탁이 1715년에 죽었다. 이즈음 아프가니스탄 파슈툰족의 양대 파 가운데 하나인 길자이계 파슈툰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파비 왕조의 수도인 이스파한을 위협했다.
1719년 칸다하르의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통치자인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가 사파비 조가 약해진 틈을 타 페르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하였는데 케르만과 야즈드를 넘어 1722년에 이스파한을 점거하였다.
마흐무드 호타키의 이스파한 점거로 페르시아의 왕 후사인은 이에 굴복하고 1722년에 권좌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즉 아프간족으로 분유되는 마흐무트 호타키는 놀랍게도 이란에 침입하여 사파비 왕조를 타도하였다.
그러나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는 28살의 나이에 그의 사촌에게 암살을 당했다. 결국 그의 사촌 아슈라프는 1725년에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727년에 놀랍게도 오토만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황제로부터 페르시아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는 반대로 아슈라프는 오스만 술탄을 황제로 인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이란의 사파비 조는 나디르 샤의 지도아래 1729년 10월에 아슈라프를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이로써 사파비의 왕권을 다시 확립한 것이다. 한편 아슈라프는 후퇴를 하다가 발로크 부족의 한사람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나디르 샤는 다시 역공을 취해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파비 조의 나디르 샤는 1732년에 헤라트로 진군을 했다.
1738년에는 51세의 정복왕 나디르 샤는 마침내 칸다하르로 진군하였고 그곳을 파괴했다. 카불도 점령을 하였다. 더우기 1739년에는 하호르와 델리로 진군했다. 이로써 투르크계의 왕 나디르 샤는 이란에서 아프간족을 몰아내었으며 오히려 역으로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하고 델리까지 진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성기의 나디르 샤>
나디르 샤의 5만 5천명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델리로 향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군대는 무굴제국의 왕 무하마드 샤가 이끄는 15만 대군이었다. 델리의 북쪽 카르넬에서 1739년 2월 24일 카르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나디르 샤가 이끄는 정예 군대는 숫자만 많은 시민군까지 포함된 무굴제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코끼리 부대까지 포함된 인도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그는 순식간에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 샤를 인질로 잡아 델리로 진군했다. 그러자 델리는 쉽게 함락이 되었다.
그러나 화가 난 델리의 3만여 시민군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나디르의 페르시아 군대는 잔인하게 수많은 사람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래서 그는 학살극의 원흉으로 지목이 되었지만 반란 진압차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패전한 왕은 나디르 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보물을 다 내어놓을테니 살려달라고 했다. 나디르 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왕위를 지켜주는 대신 인도 전역에서 긁어 모은 엄청난 보물을 챙기게 되었다.
결국 1739년 5월 나디르 샤는 델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엄청난 양의 보물을 코끼리 부대와 낙타 부대 그리고 말에 싣고 델리를 출발했다. 그는 무굴 황제가 쓰던 옥좌를 비롯한 정말 많은 전리품을 페르시아로 가지고 갔다.
인도인으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보물에 마음씨가 좋아진 나디르 샤는 철수하면서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보물을 안겨준 무굴제국의 왕 무하마드 샤에게 델리를 다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버렸다.
천하의 보물을 다 얻어 귀환길에 오르던 호기로운 나디르 샤는 바미얀에 들러 대포로 엄청난 크기의 대불을 맞히려고 하였으나 실패를 하였다. 이때에도 대불은 점령군들의 제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도에서 챙겨온 보물이 너무 많아 이란에서는 3년동안 세금징수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인도에서의
이런 만행을 저지르려고 하는 나디르 샤에 대한 암살 기도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은 1741년에 암살기도가 발각이 되어 고위 관리인 암살자는 눈을 빼는 형벌을 받아 장님이 되었다.
1743년에 나디르 샤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오토만 제국을 공격하였다. 공격 첫해에 지중해 연안의 도시 무스캇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오토만 제국을 향해 힘겨운 승리를 하던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 근처 나자프를 챙기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1746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나디르 샤는 여기에 만족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분규가 있는 동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나디르샤는 호라산 근처 파타바드에서 쿠르드 족 반란을 진압하려다가 1747년 6월 19일 밤에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60살이었다.
이때 그의 호위병이었던 압달리계 파슈툰 전사들이 새로운 모색을 하였다.
즉 압달리는 길자이와 더불어 랖슈툰족의 양대파를 이루는 종족이었으나 나디르 샤가 피살되자 이들은 페르시아를 빠져나와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칸다하르에 모여 그들 가운데 젊은 장교인 아흐마드 한을 왕으로 추대했다.
아흐마드 한은 "두르 이 다우란(이 시대의 진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결국 나디르 샤의 부하인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부족인 두라니족의 지도자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가 그 해에 칸다하르에서 25살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아흐마드샤 두라니라 칭하였다. 아래는 그의 모습이다.
아흐마드 샤는 1748년 가즈니와 카불 그리고 페샤와르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나 무굴제국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다시 칸다하르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로써 남부의 칸다하르는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칸다하르의 모습은 아래와 같았다.
<칸다하르의 1848년의 모습. 제임스 라트레이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귀중한 그림을 통해 당시 칸다하르의 모습을 가장 비슷하게 유추할 수가 있다>
아흐마드 샤는 1748년 무굴의 지배자와 다시 한번 협상을 해야만 했다. 그 결과 인더스 강 서안을 무굴제국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이에 아흐마드 샤는 서부지역인 헤라트와 마슈하드를 노리면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인 투르코만과 우즈베크 그리고 하자라와 타지크를 차지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카슈미르를 차지했다.
이렇게 하여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탄생을 하였다. 1750년에 아흐마드 샤는 소원대로 헤라트를 탈환하고 아프가니스탄 북쪽도 평정을 하였다. 아흐마드 샤는 다시 남쪽으로 눈을 돌려 대군을 마련하여 남쪽의 전투에 대비를 하였다. 당시 남쪽은 마라타의 군대가 크게 군비를 증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전개가 되었다. 그리하여 먼저 진격을 한 10만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군대는 1761년 1월 14일에는 다시 인도의 북쪽 파니파트에서 대치를 하게 되었고 곧바로 전투에 들어갔다.
당시 융성하는 남쪽의 마라타 군대 25만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사다쉬브라우 바우였다. 그러나 직접 왕이 이끄는 아프가니스탄의 군대는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마라타의 군대는 역시 숫자는 많았지만 정예화 되지 않는 비정규군이 많았다. 이런 군세는 숫자에 비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숫자만 믿고 싸운 마라타의 유명한 사령관 사다쉬브라우 바우는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