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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원문보기 글쓴이: 夏谷류재균
해전년도 | 903년10) | 909~910년11) | 912~914년 |
침투로 | 여황포 |
| 삼포천 남해포 |
주둔지 | 나주성 |
| 신북모산 몽탄이동 |
병력규모 | 1,000명 | 군선70척 2,000명※ | 3,000명※ |
전투지 | 나주성 | 압해현 | 덕진포 몽탄 |
주요전과 | 10개군헌 점령 | 오월사신배나포 진도신안점령 1차덕진포해전 | 2차덕진포해전 능창생포 나주되찾음 |
조력자 | 나총례 오다련 | 영광전씨 | 숫돌 縱諜 水神 |
※주10. 903년 : 왕건은 양주(良州,현재 경남양산)성 호족 김인훈(金忍訓)이 권훤의 위협에 구원을 청하자 궁예 허락을 받고 왕건은 뱃길을 돌려 가서 구원할 정도로 해안세력끼리 형제사랑으로 서로 도와주는 사랑을 보입니다.
※주11. 910년 : 910년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부인이 되어 아들 무(혜종)이 912년 출생합니다. 왕건은 궁예가 하사한 용천검을 지니고 있었는데, 오랜 전투 탓에 칼이 몹시 무디었지만 오씨부인은 여석산 숫돌(꿈에 숫돌을 알려 주었다는 세력이 있음)에 용천검을 갈아서 왕건에게 건네주어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습니다.(향토문화전자대전)
위 표 912년에 있는 삼포천(옛 삼포강)은 신북 모산마을 위쪽 馬山 물통방죽(현 이목동 냉천저수지)에서 시작하여 용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산앞에서 만나 반남을 돌아 영암 시종면 남해포(현 마한문학공원)를 지나 영산강으로 이어지는데 영상강에서 목포 반대쪽으로 올라가면 몽탄(夢灘)이 나오고 현 몽탄대교부터 강폭이 넓어지며 몽탄대교 위를 몽탄강(夢灘江)이라 하고 현 몽탄면 당호재 위에 현 파군다리(몽탄면 청용리)가 있는 개울이 파군천(破軍川, 옛 파군강)입니다.
왕건 군대가 삼포강을 따라 모산에 와서 모산앞 마산(馬山)에 주둔했고 912년 덕진포해전에서 승리한 왕건은 일부 군사를 모산에 주둔하고 나머지 군사를 대리고 영암천을 통해 영산강 일로 앞을 지나 남해포를 지나 견훤이 있는 자미성을 포위하려고 가는 도중 시종 남해포에 잠을 자려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견훤이 왕건 작전을 미리 눈치 채고 야간 급습을 위해 반남면 자미성에 군대를 남해포 인근 야산에서 잠복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꿈에 바다용을 탄 백발노인12)이 왕건을 인도하여 남해포를 벗어났을 때 견훤군이 공격해 왔지만 빈 진영이었고 왕건은 몽탄 창용마을에 도착합니다.
※12 백발노인 : 고려사에는 백발노인을 수신(水神)이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영암해양세력으로 왕건책사 최지몽과 연결된 호족이거나 해산된 청해진 세력이라면 영암고향에 와 있는 장보고 친구이며 오른팔인 정연장군의 세력으로 흥률사상량문에 사해황제 후손이 견훤의 작전계획을 왕건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견훤은 왕건의 군사를 좁은 파군천으로 몰아넣기 위해 공격했는데 이 작전을 알고 몽탄 파군강 입구 두대산 아래와 앞쪽 산등성이에 매복하고 모산에 주둔해 있던 군대를 모산 삼포강으로 내려와 출동하고 없는 자마산성앞을 지나 남해포를 지나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파군강으로 진격하여 견훤군 후미를 공격하고 산등성이에 매복하여 공격하니 제3차 나주 해전을 승리로 마무리합니다.
<※사진설명 : 김인창박사 덕진포해전글에서 마산은 왕건군사주둔지, 자미산성은 견훤군사주둔지, 남해포는 덕진해전에서 승리하고 자미성을 공격하려고 야영한진지, 파군천은 남해포에서 철수하여 왕건군사가 매복한 곳, 박굴은 왕건군사 훈련장, 물통방죽은 말 물 먹인 곳, 여석산은 왕건군사 칼 갈던 숫돌 생산지, 행군봉은 호산전투를 위해 마산에서 자미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능선, 덕진포해전과 영암천 삼포천 파군천이 지도에는 개천으로 보이지만 당시는 군선이 들어와 전투한 큰 강임, 덕진포해전했던 현 덕진다리밑은 1960년대까지 바다물이 들어 왔음>
② -2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자료
909년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왕건과 나주에서 싸웠습니다.
왕건은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함락시킨 후에 고이도로 나아갔다가 덕진포(1차덕진포해전)에서 견훤과 싸우게 됩니다. 왕건군이 후백제군에게 화공을 감행하여 후백제군이 500명이 전사했다는 것은 2차덕진초해전과 같은 내용입니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나주를 10일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궁예가 수군을 내어 이를 방어하는 바람에 끝내 나주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이후 912년에는 덕진포(2차덕진포해전)에서 왕건과 맞붙습니다.
912년에 왕건이 다시 서남해 공략에 나섰을 때, 견훤은 후백제의 해군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급을 목베는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덕진포대전의 대승으로 나주세력과 합류한 왕건은 돌아가는 도중에 능창이 도전하여 능창을 생포합니다. 능창의 이동경로를 왕건에게 알려준 세력은 영광호족 운기장군(雲騎將軍) 전종회(田宗會)입니다.
파군천(破軍川)의 전설 『고려사』의 기사에 의거하여 기술한 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이야기는 왕건의 일방적이고도 싱거운 승리로 일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산강 하구의 무안군 몽탄면에 전해오는 파군교의 전설은 다릅니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산강변(남해포)에 진을 쳤는데 견훤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왕건은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마침 바다의 밀물이 밀려들어 강물이 범람하는지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 밤이 되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왕건이 잠시 조는 사이에 백발노인이 꿈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몽탄의 청룡리에 진을 치고 매복해 있으라. 그러면 견훤군이 뒤쫓아 올 것이니 그를 치면 장군이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잠에서 깬 왕건은 그 노인의 말대로 하여 과연 대승리를 거두었다. ‘꿈의 여울’이란 의미의 몽탄(夢灘)이란 지명과 ‘군대를 격파한 천’이라는 의미의 파군천(破軍川)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연원하게 됩니다.‘
②-3 KBS 태조왕건 드라마 내용과 전문위원글
왕건의 군사였던 태평(泰評)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니 강하게 불던 북서풍이 잦아들면서 풍향이 남동풍으로 바꾸게 됩니다. 밀리던 왕건군은 이 순간에 화공을 이용해 견훤의 수군을 공격하고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태조 왕건이 풍세(바람의 세력)를 타서 화공하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군사가 태반이고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며 이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바람을 이용한 화공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겨울철 서해상에서 주로 부는 바람은 북서풍입니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1년에 한번정도 남동풍이 붑니다.
1년에 많아야 1~2회 정도 발생하는데 어느 분이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2001년 1월 7일 이런 기압배치가 형성됐다. 이때 해전이 벌어졌던 지역인 압해도(押海島·전남 신안) 기상관측자료에 의하면 화공에 이용할 수 있는 5~8m/s 이상의 남동풍이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12시간정도 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입니다.
한국사 기록에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진도를 취하고 나주를 점령하자 배후에 위협을 느낀 견훤이 정병을 이끌고 나주를 공략하는 한편 해변포구를 차단했다”는 기록에 의하면 왕건이 나주로 가기 위해서는 영산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 견훤의 수군은 목포 북서쪽 압해도의 남쪽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기에 왕건은 견훤의 군대보다 남쪽에 있었으므로 영상강 입구로 들어가 영암 모산앞 마산에 주둔하고 덕진포에 집입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과 견훤이 충돌한 곳은 우리나라 서남해 지방입니다. 과거 서남해 지방은 9세기 장보고가 주도하던 청해진 체제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해양세력이 크게 성장했던 곳입니다.
장보고가 암살당한 이후에도 서남해 지방 일대는 해양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900년대 당시 서남해 지방의 해양세력은 섬지역을 무대로 한 “도서 해양세력”과 해안 육지를 무대로 한 “연안 해양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왕건과 견훤이 맞서 싸웠던 912년 겨울에 견훤은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전남 영암군 덕진면)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시켜 왕건이 나주세력과 협공하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견훤은 이후 많은 함대를 압해도로 이동시켰습니다. 후백제 견훤의 군사력을 본 왕건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은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오직 남동풍에 의한 화공으로만 승리가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왕건이 제사를 지내는 기간 내내 북서풍이 불었습니다. 왕건이 남동풍이 부는 것을 확신한 것처럼 화공에 쓰는 많은 기름과 불화살 화약까지 싣고 있었습니다.
7일째가 되던 때 갑자기 바람은 남동풍으로 바뀌었습니다. 왕건의 계책이 무엇인가 두려워 공세를 취하지 못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견훤군은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동풍을 타고 불화살과 화약으로 공격하는 왕건의 전함에 견훤 함대는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견훤의 전함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제갈공명의 적벽대전을 연상케 하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 전투야말로 ‘덕진포 대전’이라 불려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태평이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남동풍이 불었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배를 이용한 무역을 위주로 하던 개성을 근거지로 했던 왕건과 태평은 서해상에 나타나는 겨울철 기후와 특성을 파악하고 정확한 천기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③ 고려시대 이후의 나주
고려 성종2년(983) 지방제도의 정비 때의 나주목이 1895년 개화파 정부에 의해 전국8도를 23관찰부로 개편하기까지 913년 동안 호남의 중심지로 나주목이 존재했기에 나주를 “천년목사고을” 이라합니다.
나주목이 913년 동안 유지되어 오는 과정에서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되는 사건이 조선시대에 3번이 있었습니다.
견훤은 900년 전주로 근거지를 옮겨 후백제를 건국한 후 901년 나주를 공략하여 그의 세력권에 둡니다. 그러나 903년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군(나주) 및 10여 군현을 차지할 때 나주 호족들은 왕건에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데 후방의 든든한 거점이 됩니다.
이러한 나주인의 도움을 받은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직후인 918년 9월에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라는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나주를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특별기구를 두고 특별기구의 우두머리에 시중(영의정급)을 임명합니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도 나주는 고려시대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다만 속현으로 있었던 여황 회진 안로 복룡 반남현과 고려말 왜구로 인해 내륙으로 옮긴 영산 압해 장산현을 나주목의 일부로 편재합니다.(경국대전 吏典 外官職)
태조2년 11월에 나주 완산 광주에 고려시대에 지방의 주요 거점에 두었던 계수관을 둡니다. 계수관가 관찰사로 됨에 따라 주로 군사조직에 활용하다가 이후 진관체제로의 개편에 따라 나주진이 설치되고 나주진의 책임자인 병마첨절제사는 나주목사가 겸하게 됩니다.
※ 각시군홈페이지, 호남읍지(1895년) 참조,(--)안 지명은 현재 지명임
(왕건의 나주해전 때는 통일신라 지방행정구역이며 승주지역은 후백제말기에 견훤과 함께 왕건에게 투항해 와서 큰전투가 없었음)
③-1 나주군
연대 | 군 현 |
통일신라(景德王) (三國史記 地理志) | 757년(경덕왕16) 무주 금성군 3領縣 會津縣(다시) 철야현(봉황) 여황현(본량) 반남현 현웅현(남평) 포현현(布賢,나주시내영산포) |
903년~940년(태조23) | 나주군13) |
983년(성종2) | 장흥부(속현4개), 영광군(속군2개,속현8개) 영암군(속군2개,속현3개), 보성군(속현7개) 昇平郡(순천,속현4개), 海陽縣(光州) 진도현(속현2개) 陵城縣(화순) 耽羅縣(제주) 領郡 領縣은 1부4군4현 |
1018년(현종9) | 5개 속군 : 무안․ 담양․ 곡성․ 낙안․ 남평 11개 속현 : 철야(봉황) 회진(다시) 반남 안로 복룡 원율․ 여황 창평 장산 진원 화순으로 축소 |
③-2 영암군
연대 | 군 현 |
통일신라(景德王16) | 현 강진 진도장좌도(청해진) 보길도 추자도 삼산 옥천 화원 북평 송지 금정 시종신북 일부 |
983년(성종2) | 나주목 영군(領郡)으로 2개 속군 황원(黃原,현해남화원), 도강(道康,현강진군) 3개 속현 곤미(昆湄,현영암미암), 해남(海南,현해남현산), 죽산(竹山,현해남마산)으로 축소됨 |
③-3 영광군
연대 | 군 현 |
940년(태조23) | 나주군 영군으로 2개속군 : 장성군 압해군 6개속현 : 함농현(현무안) 모평현(현무안) 해제현(현무안) 삼계현(현장성) 염해현(현신안) 육창현(현신안) |
③-4 압해군
연대 | 군 현 |
통일신라(景德王16) | 갈도현(碣島縣) 안파현(安波縣) 염해현(鹽海縣) 장산현(長山縣) 육창현(六昌縣) 임치현(臨淄縣) |
983년(성종2) | 나주목 영군(領郡)으로 2개 속군 황원(黃原,현해남화원), 도강(道康,현강진군) 3개 속현 곤미(昆湄,현영암미암), 해남(海南,현해남현산), 죽산(竹山,현해남마산)으로 축소됨 |
※주13 나주 : 왕건이 903년 류천궁 휘 류차달 지원을 받아 나주해전에 침투할 때와 914년 나주해전을 끝내고 태봉으로 돌아갈 때 “여황포”로 들어오고 나갔습니다. 당시 후백제가 중간에 있어 왕건이 정주에서 배로 와서 여황포를 통해서 나총례가 금성 성문을 열어 주었고 다시 태봉으로 가면서 희여재에서 오씨부인(장화왕후) 마을을 보면서 행군을 멈추었고 배로 여황포에서 정주로 갑니다. 1945년 선조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류차달이 지원한 나주해전 상륙지인 여황(본량)에 휘 류차달 사우(祠宇)가있다는 것은 문화류씨의 자존심입니다.
3. 조선 1392년(태조1) 전라도 행정 조직,(--)안 지명은 현재 지명임
① 지방행정 책임자 : 행정 사법 군사
①-1 전주부
종2품 府使 | 종4품 郡守 | 종5,6품 縣監 | 계 |
전주 | 진산(금산) 금산 익산 고부 김제 | 금구(김제) 만경 임피 옥구 함열 용안 부안 정읍 태인 고산(논산)여산 | 17 |
①-2 나주목
정3품 牧使 | 정4품 郡守 | 종5,6품 縣監 | 계 |
나주 | 해진(진도) 영암 영광 | 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고창) 장성 | 12 |
①-3 남원도호부
종3품 都護府使 | 정4품 郡守 | 종5,6품 縣監 | 계 |
남원 | 순창 | 용담(남원) 구례 임실 운봉 장수 무주 진안 곡성 광양 | 11 |
①-4 장흥도호부
종3품 都護府使 | 정4품 郡守 | 종5,6품 縣監 | 계 |
장흥 담양 순천 | 무진(광주) 보성 낙안 | 고흥 능성(능주) 창평 화순 동복 옥과 진원 | 13 |
①-4 제주목
정3품 牧使 | 정4품 郡守 | 종5,6품 縣監 | 계 |
제주 |
| 정의(남제주) 대정(서귀포) | 3 |
② 육군 군사 조직
②-1 병마절도사
종2품 府使 | 비고 | 계 |
전라병마절도사 | 전라감사겸임 | 2 |
兵營절도사 | 강진병영 |
②-2 營
정3품 營將 | 비고 | 관할구역 | 계 |
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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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익산) | 여산도호부사겸임(종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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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 남원도호부사 겸임(종3품) | 순창군 장수현,운봉현,구례현,곡성현, 옥과현,창평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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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 병마첨절제사 나주목사 겸임(정3품) | 광주, 영암, 영광, 나주, 함평, 고창, 장성, 진원, 무장, 남평, 무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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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 순천도호부사 겸임(종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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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수군 군사조직
③-1 수군절도사
종2품 水使 | 비고 | 계 |
전주 | 전라감사겸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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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2 수영
정3품 | 비고 | 계 |
전라좌수사 | 여수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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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슈사 | 해남수영 |
수사는 각 도의 연해변에 위치한 진(鎭) 포(浦) 보(堡)에 소속된 전선과 주장인 첨절제사(종3품) 우후(정4품) 동첨절제사(종4품) 만호(종4품) 권관(종9품) 등을 지휘 통솔하였고 부사 목사 군수 현감도 부대를 지휘하고 전쟁에 참가합니다.
4 글을 마무리하며
①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 마을에 왕인 박사를 기념하는 현대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1976년 9월에는 왕인 박사 유적지를 전라남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하여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사당을 비롯한 유적지 정화 사업을 시작합니다.
영암군에서는 1973년 8월 왕인 박사유적지 조사단 구성하는데 조사단이 규성되기전 일본에서 왕인 후손들이 오고 구림유림들이 왕인 헌창사업을 해야겠는데 왕인은 전거(典據)가 확실하지 않은 구전 설화에 의거하고 있고 유적지가 도선에 관한 기록이나 설화와 상당 부분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어 고고학적 접근이나 새로운 역사 자료의 출현과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다던 1960년대 저의 외숙 故최문석님14)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14 최문석님 : 외숙은 일제감점기에 일본유학파로 귀국후 사회주의 운동을 하시어 초야에 묻혀 계셨지만 학문적으로는 선구자이시며 실명을 밝히는 것은 왕인유적지가 설화를 바탕으로 조성되었기에 구림분들은 조성과정이 실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왕인이나 도선국사에 대한 구전 설화를 나보다 더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보고서에 쓴 말은 보고서나 논문의 기본에 맞지 않는 일종에 개인 주장이기에 내 이야기를 듣고 교수나 어느 분이 책으로 써 놓은 자료를 찾아 참고문헌으로 제시해야하고 그 사이 사이에 내 주장을 써야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왕인 설화에 바탕을 두고 성기동 유적지 내외에 왕인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는 성천(聖泉) 탄생지 옆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지고 왕인이 공부했다고 전해 오는 책굴(冊堀)과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 책굴 앞에 있는 왕인 석인상(石人像)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뒤돌아보았다는 곳을 ‘돌정 고개’라는 이름을 짓고 상대포(上臺浦)는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곳으로 여기에 포구와 정자가 조성되었습니다.
현재는 홍살문 영월관 왕인부조 봉선대 신선태극정원 월악루 수석전시관 망우정 제명당 수신정 야외 무대 요산정 놀이터 천자문 계단 노래비 돌탑 왕인 학당 월록정 등이 추가로 조성했습니다.
해마다 벚꽃이 피는 4월초 왕인축제(2020~2021년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됨)를 합니다(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② 대동사 성역화에 왕건이 여황포(본량)를 통해서 나주성에 입성했다, 왕건과 오씨부인이 만난 희여재가 본량 옆동네이다, 왕건이 903년 천명 군사로 나주에 왔으며 이때부터 대승공이 군량과 수레를 제공했다. 대승공 선조가 흥률사에서 만난 사해황제 일원이다 등을 믿지 않고 허구라는 분을 위하여 왕인박사 유적지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왕인박사 유적지는 도선과 중복된 설화를 바탕으로 조성했기에 대동사 성역화도 왕건과 중복된 설화를 바탕으로 조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왕인은 출생지가 구림이다. 응신천황시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는 것 외에 시기나 장소 모두 구전 설화인데 그것도 도선과 겹친 내용으로 왕인박사유적지를 조성했습니다.
대승공은 고려사에 개국2등공신이다. 흥률사 상량문에 903년(805년 개창후 100년) 나주해전에 왕건에게 신군 1,000명과 수레 군량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인보다 성역화가 더 유리한데 허구라고 말하며 부정하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저의 글에 참고문헌을 제시하는데 과연 참고문헌과 대조해 보고 부정하는지 영암에 한분 광주에 한분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대화가 이어지는 조건이 어떤 사항에서 참고문헌은 책이름정도는 알고 있어야하고 학술지나 인터넷글은 글 제목은 알아야하는데 그것도 아니기에 이런 곳에 하소연하고 넘어갑니다).
③ 요즘은 책대신 휴대폰으로 책을 보기에 인터넷에 등재된 수많은 오류 투성이인 자료를 선조 문집이나 고려사나 왕조실록 같은 역사책과 대조하여 오류를 발견할 능력이 떨어지기에 글을 더 쓰고 싶어도 이제 늙고 병들어서 3~5년후면 글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제가 자료를 분석해 주면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고 해 주시면 합니다. 제가 바른 문화류씨 종사(宗史)를 여러 종원에게 알리는 것 이외 아무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