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성(芮姓)은 정직(正直)과 양심(良心)의 가문(家門)
- 己亥譜編纂(기해보편찬)을 마무리하는 所懷(소회) -
1. 지난 일을 살피다(선찰기연先察己然)
미래로 나아가고 싶으면 먼저 지난 일을 살피라(욕지미래欲知未來 선찰기연先察己然)고 했다. 우리 성은 선대의 행적과 가르침을 거울로 삼아야 하고, 족보편찬으로 이를 깊이 있게 살필 수 있었다. 선대의 유지(遺志)를 받들고, 이를 선양(宣揚)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우리들의 삶의 지침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번 기해보(己亥譜)는 초기부터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고, 만만찮은 찬반의 견해가 있었으나 토론을 거쳐서 족보편찬 작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대의 음덕양보(陰德陽報)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이 일곱 번째 발행되는 기해보(己亥譜)는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되고, 예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했다.
그래서 3년이라는 긴 세월을 족보편찬에 몰두했다.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희비가 교차되었고, 끝없는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족보편찬의 과정을 전국의 종친들에게 소개하고,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시기를 바라며, 인내심으로 지금까지 묵묵히 견디어 주신 종친제위를 존경한다. 그간의 족보편찬 과정을 간략하게 피력(披瀝)한다.
2. 무엇을 담았는가(족보구성族譜構成)
이러한 명분을 가지고 출발한 족보편찬이었으나 많은 난관(難關)이 있었고, 족보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의 의문을 제기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명분을 합리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자도아시(自道我是)하지 않은 정신으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족보의 목차를 만들기 위하여 한겨울의 긴긴 밤을 뜨눈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새벽이 다가올 때면 어렴풋이 완성되어 가는 목차를 보면서 피로를 잊을 수 있었고, 대구종친회장인 종만 족숙(族叔)을 만나서 대보사에서 보낸 시간은 공식적인 시간보다 훨씬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은 재실, 대종회관, 묘소, 신도비 비명, 서원, 산도를 차례로 배열하여 종친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기해보 서문, 발문, 범례 상고인물록 등을 수록하여 선대 인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고 했다.
문헌록은 선대의 비문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문향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신도비, 기적비, 대전뿌리공원 예성유래비 등을 등재하여 뿌리를 찾는 일을 쉽게 되도록 했다.
재실기문 전문과 해석을 해서 선대의 재실 건립 취지를 알 수 있도록 동림재, 몽산재, 각산재 순으로 기술하였다.
문집, 유고집은 한문 원문과 해석을 해서 선조의 문향을 후대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대한민국 애국장 수상자 응복, 준기, 대회공의 공적을 게재했다.
족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찾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행렬표, 세계도는 선대를 찾는 데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자손록, 대종회장 공적, 기해보 임원록, 위토 및 임야 순으로 구성하여 선진화된 족보편찬에 모든 종친들이 노력을 해왔.
선조의 행적을 개괄해 보면, 芮姓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추구하였으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성의 근원은 깊으며,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아니한 선비정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더구나 각산재(角山齋記), 봉동서원기(鳳洞書院記), 목촌문고기(牧村文庫記), 지운용해공행적(之云庸海公行蹟), 대종회장 공적 등을 수록하여 종사(宗史)를 바로 세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해 왔다.
특기할 사항은 용희(龍熙) 종친이 검색한 시조공의 타문비문서술(他門碑文敍述) 내용과 순성면에 있는 묘역을 드론으로 찍은 사진을 수록한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용희 종친께 감사를 드리고, 종친제위께서 많은 관심과 칭찬을 보내주시기를 희망한다.
3. 올곧은 생각을 가져라(견리사의見利思義)
우리 성은 유구한 근원이 있고, 청빈낙도하는 선비정신을 실천한 것을 보면 대단하고, 불의에 물들지 않고 위국애민의 정신을 선대에서는 지켜오셨다. 이 같은 정의로운 행동만을 한 그 정신을 우리들은 이어가야 할 것이다. 아래에 선대의 주요 행적에서 더욱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
부계군 고려문하찬성사 휘 낙전공(岳溪君 高麗門下贊成事 諱 樂全公)은 시조공(始祖公)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으시고, 공은 불여악구(不與惡俱)의 정신으로 살아오셨다. 이러한 정신은 미래로 향하는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시조공은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남기셨고, 유유자적(悠悠自適), 강호한정(江湖閑情),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정신을 실천하신 그 고고한 덕향(德香)은 자손만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성부우윤 휘 승석공(漢城府右尹 諱 承錫公)은 이제염오(離諸染汚)의 정신으로 진흙탕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실천하셨다. 세상의 불합리한 환경에 물들지 않은 삶이었고, 백성위에 군림하는 왕조시대의 지난날부터 전해오는 관습인 자래구례(自來舊例)를 전면 개혁할 것을 주창하신 상소문(上疏文)을 보면 위국애민의 정신을 볼 수 있다. 또한 후손들에게 종훈(宗訓)으로 "효도는 만행의 근본"임을 가슴 깊이 새기게 했다.
현대 정치사에서는 우리 가문을 우뚝 세운 전국회의원 목촌 춘호공(牧村 春浩公)은 해현경장(解弦更張)의 정신을 견지하셨다. 삼선개헌 및 유신반대라는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으로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고, 한편 대종회장으로서 가문의 단합을 위해서 삼노인쟁년(三老人爭年)이어서는 안 됨을 역설하셨고, 종친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문중의 백년대계를 위한 환경을 조성한 그 업적은 다대하고, 정치적인 소신은 한국정치사에 오래토록 찬연(燦然)한 빛으로 남을 것이다.
현대문화사에서는 지운 휘 용해공(之云 諱 庸海公)은 이 시대의 선각자로 수도거성(水到渠成)의 정신을 실천하시었다. 이는 학문의 뿌리가 깊으면 도(道)가 굳어지고, 물이 흘러 스스로 도랑을 만든다는 정신으로 문화발전에 헌신하셨다. 민속공예분야에 독보적인 길을 개척해 오셨기에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공은 국내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그 명성이 더 알려져 있는 선지식인입니다.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는 용어를 창안하신 그 예리(銳利)한 통찰력(洞察力)은 역사가 아무리 흘러도 한국의 문화사에 영원한 등불이 될 것이다.
4. 덕행을 쌓아라(음덕양보陰德陽報)
이번 기해보를 편찬하면서 우리 문중에도 서원이 있음은 첫 번째 자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봉동서원(鳳洞書院), 율강서원(栗崗書院)이 있어 자부심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봉동서원은 현존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또한 우리가 가꾸고 빛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게 했다.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학교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대전의 봉동서원은 가문의 자랑이다. 경교당(敬敎堂), 인재(仁齋), 의재(義齋)를 두어 강론했던 그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후손은 어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율강서원은 현존하고 있어 우리 가문에서는 더욱 가꾸어 나가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하겠다. 우리 가문에 현존하는 서원이어서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는 문제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봉동정사규약(鳳洞精舍規約)을 만들어 가문이 서로 돕는 정신을 실천했다는 것은 타문에서 찾을 수 없는 선대의 위업이었다. 이해에 따라 생각을 달리 하는 소인배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연락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있는 사람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면 음덕양보(陰德陽報)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예성의 선대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자원봉사의 효시(嚆矢)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영원히 우리 가문의 영광이자 자랑으로 길이길이 보전하고 육성해야 할 것이다.
5. 나이를 다투지 말라(삼노인쟁년三老人爭年)
기해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편집인 일동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을 하였고, 사심 없는 행보로 일관해 왔다. 세 노인이 서로 나이를 다투는 어리석은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편집진은 중심을 잡고 오직 족보편찬 작업에 매진하였을 뿐이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어떠한 논쟁에도 휘말리지 않고 소신껏 일하였다.
세상은 난향백리(蘭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萬里)를 간다고 했다. 우리 선대는 덕향을 베풀었기에 그 향기가 만리까지 퍼지고 있다. "나무가 모여서 숲을 만들고, 사람이 모여서 세상이 되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삶을 이룬다."고 한 것처럼 우리 예성(芮姓)은 한 뿌리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미덕을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전국의 수단위원들의 성금 및 물품과 식사제공, 위로의 말씀에 눈물겹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분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한 기해보의 수단인원이 8,000여 명, 800여 질의 보책을 신청해 주신 종친제위와 집안마다 애로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신 수단위원에게 그간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표한다.
이제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에 남을 족보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을 했으나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선대가 물려준 도리를 지키고, 선양하려는 종친이 많아서 가문은 더욱 번창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족보발간에 광해 대종회장(光海 大宗會長), 재두 대종회 전회장(載斗 大宗會 前會長), 종만 교정분과위원장(鍾萬 校訂分科委員長), 윤희 족보편찬위원회 총무(潤熙 族譜編纂委員會 總務), 준해(峻海), 주용(周鎔) 편집위원, 수단위원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서 족보는 이제 마무리 되었다.
6. 누가 있어 이어 가나(유수능계노춘추有誰能繼魯春秋)
선고의 시를 읽으면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더구나 사십여 년 전 정사보를 편찬하셨고, 동림재(東林齋)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선고(윤송 영희潤松 永熙)가 생각이 났다. 종사를 위해서 노력하셨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고(先考)의 “누가 있어”라는 시는 “七十光陰梳白頭(칠십광음소백두) 三千個箇總難收(삼천개개총난수) 風雨西朝來正急(풍우서조래정급) 有誰能繼魯春秋(유수능계노춘추)”라고 읊으셨다. 이는 누가 있어 예의를 이어 갈 것인가라는 물음은 유훈(遺訓)으로 남겨 주셨다. 족보편찬위원장을 맡아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선고의 시를 상기하면서 마음을 다잡아서 업무에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다짐을 했다.
기해보발간의 소회를 마무리 하면서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이라는 칠보시(七步詩)를 우리 종친들에게 전하고 싶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솥 안에서 콩이 눈물 흘리네.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났건만 어찌 이리 심하게 들볶는고.”라는 이 시가 형제를 화해시킨 것이다. 우리도 서로 양보하고, 칭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인성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명심해야 하겠다.
아울러 우리 가문은 정직과 양심이라는 꽃이 자자손손 만개할 것으로 굳게 믿으며, 종친제위의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족보편찬을 마무리하면서 종친제위의 깊은 이해와 격려가 있으시기 간절히 바란다.
의흥예씨 족보편찬위원장 예재호
첫댓글 족보 편찬에 열과 성을 아끼지 않으신 예재호 편찬위원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과 함께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