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71)>
- 명량해전(1)
백의종군의 길을 가던 이순신에게 모친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을 난중일기에 가득 채울 만큼 효자인 이순신.
그는 1597년 4월 19일 자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일찍 집을 나서야겠기에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그 동안 애써 키운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수군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며칠 뒤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3도 수군 통제사로 복귀하라는 교서를 받고 곧장 남해안으로 떠났습니다. 에휴~ 우리 이순신 장군님은 사람도 좋지~ 내같으면 마~확~그냥~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합니다.
- 출병을 독촉해 이런 일을 했으니, 이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엥? 우리 장군님이 오죽하면~이런 썩을~ 이순신은 보름 동안 연안 고을들을 샅샅이 훑어 흩어진 장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았고, 군량과 무기들도 마련했으며, 병사들도 백성들도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장군님과 함께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칠천량 전투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이 휘하 함대를 이끌고 진영을 이탈함으로써 판옥선 12척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상유십이~)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3도 수군 통제사로 삼기는 했지만, 수군이 무너져서 할 수있는 일이 없다고 여겨,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복속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런 게 임금이라고~)
이에 대한 이순신의 답변이 유명합니다.
- 임진년으로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하고, 퇴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선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미천한 신하 이순신은 죽지 않았나이다. 그 유명한 상유십이(尙有十二) 미신불사(微臣不死) 입니다.
이순신은 왜적이 함대를 총 동원해 남해를 접수하려 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 12척으로 얼마 될 지 모를 엄청난 규모의 왜군을 격퇴할 특단의 방안을 강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진을 치고 왜군함대를 불러 들였습니다. 과거 한산도에 위풍당당 하게 진영을 구축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왜군은 12척에 불과한 조선 수군을 짓이겨 버림으로써 지난 날 수모를 한 번에 갚고자 했고, 이를 위해 300척의 배를 동원하였습니다.
왜군이 어란진에 도착하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것이요,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생즉사 사즉생)
또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켜도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이 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울둘목에서 적을 기다려 모조리 수장시키고야 말겠다.
명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두둥둥~~
<조선왕조실록(72)>
- 명량해전(2)
이순신의 판옥선은 1척이 더 해져 13척, 백성들의 어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후미에 배치를 하였습니다.
왜군 함대는 물살이 순방향인 때를 선택해 급격한 조류를 타고 울둘목을 일거에 통과해 벽파진에 진을친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설령 울둘목을 조선군이 막아선다 해도 빠른 조류를 타고 대규모 선단이 진격한다면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함선이 많아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수는 제한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량 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선 함대의 규모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려는 휘하 장수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 군사가 전진 하거나 행진할 때에 대장이 장수들을 부르고 지휘하던 깃발)를 올려 장수를 부르고는 다음과 같이 독전하였습니다.
-군법에 죽고 싶은가,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울둘목서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으니 이곳만 죽기로 봉쇄한다면 승산이 우리에게 있다. 나와 함께 싸워 한번이라도 패한 적이 있더냐.
조선 함대는 역방향의 물살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배를 횡으로 세우고 특수 제작한 닻을 내려 물살을 버티어 냈습니다.
드디어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여 척의 왜군 함대가 강한 순조의 물살을 타고 10-15척씩 대열을 이루어 울둘목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키 위해 명량해협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이 역방향의 물살을 당당히 견디며 배를 고정시킨 채 우뚝서 포격을 가하자 왜군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해협에 줄줄이 들어선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좋은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 수군이 왜선 선두를 함포로 두들기자 후미의 왜선이 순차적으로 추돌하였고, 이로 인해 왜선의 진영은 급격히 허물어 졌습니다.
급한 순조(조수의 흐름)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급한 순조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조선 수군이 울둘목을 가로막고 버티며 선두의 배를 집중 타격하는 방식으로 왜선과 대치하는 사이, 드디어 조류의 흐름이 왜군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왜군은 조류의 흐름이 바뀔 때까지 이곳에 발이 묶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랑 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비록 규모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함포 사격에 빠른 조류와 강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 공격, 숨 돌릴 새 없이 몰아치는 자신감에 찬 거친 공격에 일본 수군은 견딜 재간이 없었고, 마침내 왜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명량해전에서 왜선 130여 척 중 30여 척이 격침 되었고, 60여척이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으며, 최소 1,800명의 왜군이 죽었고, 조선의 전선은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1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니, 실로 세계에 유례 없는 해전 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 명랑 해전을 치른후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수 차례 적고 있습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로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계속 전쟁을 수행할 동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73)>
- 별이 지다!
정유년 2차 침략시 히데요시의 목표는 조선 땅의 절반인 4도를 확보하는 것 이었고, 히데요시는 이를 위해 조선인의 무자비한 살상을 공식적으로 지시하였 습니다. 무자비한 살상으로 조선 국왕의 항복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왜군은 한강 이남까지 갔다가 다시 남하하면서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고,
그 징표로 일본에 보낸 조선인의 코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왜군이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소식과 명나라의 2차 파병 소식이 전해져 왔고, 여기에 예상치도 않게 히데 요시가 병으로 죽기에 이르자, 왜군은 철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명의 군대도 이번에는 도망치는 왜군을 제대로 박살내자는 의지를 불살랐으나 (사기극 주범 심유경의 죽음도 고려한 것임), 울산성, 사천성, 순천 왜교성 싸움에서 조명 연합군은 모조리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명군은 다시 왜군 철수를 용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군도 명군에게 뇌물을 보내는 등 작업을 통해 안전철수를 보장 받았으며 선조도 왜군의 철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병신~끝까지 지랄을 해요~
그러나 이들에게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이는 이순신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명군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을 살려 보낼 수 없다”며 강경하게 길목을 지켰고, 결국 사천성 왜군 해선이 고니시군을 구원키 위해 출동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치고 왜군을 모조리 수장시킬 준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싸움이 벌어졌고, 조선 수군은 몇 배의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눈먼 총탄이 이순신의 가슴을 파고 들고 말았습니다. (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싸움은 대승으로 끝났으나, 승리의 환성은 이내 통곡으로 바뀌었고, 오래지 않아 그 통곡은 남도 전역을 뒤 덮었습니다.
1598년,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습니다. 일개 장수로서 완벽히 전쟁에 대비했고, 임금. 신하들과 다른 장수들이 도망가기 급급할때 함대를 끌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23회에 걸쳐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
그토록 무섭고 강력한 일본군이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두려움에 떨었고, 부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까지 진심으로 존경을 받았던 무장 이순신!
실로 큰 별이 졌습니다.(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리라 보는 관점이 많습니다) 인구 3분의1 가량이 줄고 농경지의 반이 소실되었으며, 인육을 먹는 극단의 풍조 까지 생길 정도로 측량불가의 고초를 준 왜란이 종결되었으나, 백성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선조는 대국민 사과는 커녕 논공행상에 있어서마저 후안 무치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나라를 보전한 공을 명나라에 돌리는가 하면, 자신을 호종(보호하며 따라다님)한 자에게는 엄청난 선물을 주었습니다.
반면, 조국 수호에 소중한 목숨과 가산을 바친 의병장들과 백성을 애써 무시했고, 장수들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활약상은 점점 더 빛을 발해 오늘 을사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으니,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전란으로 인구가 1/3로 줄어 인구가 500만이 되었다니, 그 중에 300여 만 명이 죽거나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안 죽이고 남자만 죽였다는 가정으로 따져 보면 남자의 5/6가 죽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전대 미문의 홀로코스트에 그 후 우리가 대비책을 세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아직도 일본을 미워하고 깔보고 우습게 보는 국민적 시각 외에는~
그러다 한일 합병으로 나라마져 집어 먹히고~
우리에게는 나쁜 일본이지만 당시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의 일본의 행위는 국제사회에서 별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밥이 된 우리가 빙신 이었지요~
아직도 실제적 힘이 없는 상태에서 위안부 문제, 갸들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외교적 전략으로 지그시 누르지 못하고 전 국민의 공분만 크게 하며 국제사회에서 볼 때는 패자의 코스프레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유엔 인권회의 의장국으로 선출 되었으니 전쟁 범죄와 여성 인권 문제로 부각시켜 그들의 파렴치함을 전세계가 손가락질 하게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들 스스로 사과하게 만드는~
그 정도는 되어야 일본이 조금 움직일뿐~
독도를 거점으로 다시금 침략 본성을 드러내는 일본보다 우리가 나은 것은 무엇일까요? 자문해 봅니다.
극일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국토도 3.8배 크고, 인구도 2.5배 많고 경제 군사력 면에서도 비교 자체가 안되고~ 마음만 먹으면 핵폭탄 몇 백개 만들 분량의 플류토늄도 보유하고, 당장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도 있고~
그저 지진으로 바닷 속으로 가라 앉기만을 천년 만년 기다려?
대책 없는 반일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극일의 비책을 강구하는 이순신 장군님은 어느 곳에 계실런가~~~
가슴이 쓰리도록 슬픕니다.
패자에게 복수심이 사라짐은
또 다른 패배의 운명을 예고할 뿐입니다!
지금 당장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300미리 방사포가 마하7의 속도로 저고도로 날아와 계룡대를 때리면 현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킬체인으로 북한을 선제공격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25분, 근데 북한 고체연료 미사일은 10~15분이면 발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수조원이 들어간 킬체인이 무력화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야가 안보대책은 커녕 밥 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국민은 뒷전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여야는 전선에서 국군이 죽어 나가는 6.25때도 부산에서 찌지고 볶는 당파 싸움을 했습니다. 미래가 아주 밝아 보이는 대한민국입니다.